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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그 이름 예수 임마누엘(마1:18-25) 2016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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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6-12-18 22:39 조회 19,816 댓글 0
 
그 이름 예수 임마누엘(마1:18-25)         2016. 12. 18



봄에는 상추와 고추와 가지와 호박을 심고 가을에는 김장 배추와 김장용 무를 심어 가꾸던 고양시 밭으로 고속도로가 뚫리게 되었다. 서울지방국토관리청에서 새롭게 계획한 서울 문산 간 고속도로가 그 밭을 포함하여 지나가게 되었다. 그 밭의 원 소유주인 윤병한 권사(김숙희 집사)는 늘 그 밭을 팔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말하고는 하였다. 열흘 전 그 값이 결정되었다. 윤병한 권사는 5억 5천 만 원 상당의 땅 값을 모조리 하나님께 바쳤다. 앞으로 양도소득세 자신 신고가 끝나면 좀 더 하나님께 바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충남 부여 정미소 집의 팔남매 가운데서 자라나면서 교육열이 높았던 부모님은 형제자매들을 초등학교 시절부터 서울로, 대전으로 유학하게 하였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하나님을 믿고 사는 법을 배웠다. 인생이 간단하지 않았다. 결혼하고 딸 하나를 낳고 살아가면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는 원예학을 전공하였다. 공부, 유학, 학위, 귀국 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새롭게 시작해 보려 한 “원예 사업”이 발전하였다. 그리고 그 소득을 하나님 앞에 이렇게 감사로 표현한 것이다. 사도행전 4장에 밭을 팔아서 예루살렘 초대 교회 앞에,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던 바나바가 생각나게 하는 그이다. 주님이 계속해서 그의 사업과 재물 관리에 복을 주시고 더 큰 헌신도 가능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우리 모두 주어진 은사와 재주와 역량을 총동원해서 하나님의 복음 전파에 매진하다가 주님 앞에 가는 선교의 사람, 전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있는 것으로 주께 헌신하는 것이다. 시간, 재물, 재능, 건강, 지식, 경험을 주께 드려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사명이다. 헨리 아펜젤러의 딸 엘리스 아펜젤러는 55살 때인 1940년 일제에 의해서 추방되는 선교사 명단에 포함되었다. 그 당시 그녀는 이화여자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1940년 11월 2일 일기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 250명의 선교사들이 추방되었다. 그 명단에 나도 포함되었다. 한국을 떠나려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지만 머지않아 다시 우리가 사랑하는 이 곳 고향에 돌아와서 선교 사업을 계속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 이런 이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오늘 날 우리나라가 이만큼의 복음의 땅이 된 것이다. 

이 세상의 사물에는 이름이 있다. 새와 물고기를 비롯한 동물과 식물과 지하의 광물질에도 이름이 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모든 짐승의 이름을 지어 부르도록 하셨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지어 주신 이름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지만 하나님께도 불리어지는 이름이 있으시다. 창세기 4장 26절에 보면 아담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시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 아들 이름을 “셋”이라고 지었다. 셋이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에노스”라고 이름 지었는데 그 때부터 사람들은 비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 보내시려고 명령하셨다. 바로 왕의 압제 가운데 있는 동족을 구출하여 출애굽하라는 명령을 하셨다. 그 때에 모세가 하나님께 질문하였다. “너를 우리에게 보낸 하나님의 이름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그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말씀해 주셨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3:14) 한자로 하면 “自存者”이고 영어로 하면 “I  AM WHO I AM.”이다. 

우리 각 사람에게도 이름이 있고 그 이름에 뜻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이름이 주어졌다. 본문에 그의 두 이름이 소개되어 있다. 그 하나는 “예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임마누엘”이시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자이심이라.”는 의미이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이름처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구세주로 오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로 함께 동거하시고 동행하신다. 강림절 찬송 중의 하나인 104장 찬송의 가사에는 “곧 오소서 임마누엘...곧 오시리라 임마누엘”이란 찬송가사가 반복되고 후렴으로 이어진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성탄절은 이 땅에 보내 주시리라고 예언하셨던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하신 것을 경배하는 절기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성탄에 관한 마태복음의 말씀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갖는 의미와 교훈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길 원한다. 마태복음 1장의 1절에서 17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이다. 본문은 그 구체적인 내용이다. 어떻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가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마태복음에는 사람의 이름이 참으로 많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 예수의 이름이 네 번,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세 번,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한 번 등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자 헤롯은 베들레헴 근동의 두 살 미만의 남자 아이들을 색출하여 죽였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아내 마리아와 태어난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급하게 피신하였다. 하마터면 예수도 태어나자마자 죽음 당할 뻔한 위급한 상황이었다. 본문은 요셉과 정혼하고 결혼을 기다리던 나사렛의 동정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된 내용을 소개한다. 이천 년전에 유대 사회에서 ‘약혼’이란 오늘 날 우리 문화에서의 ‘약혼’ 그 이상이다. 그 당시의 약혼이란 결혼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 결혼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약혼 상태에서 남편될 자가 죽으면 그 아내 될 신부는 평생 과부가 된다. 약혼 상태에서 아내가 부정한 일을 저지르면 돌로 쳐 죽였다. 그러므로 약혼이란 곧 결혼과 같은 의미였다. 약혼한 상태인데 20절에 보면 주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고 마리아를 요셉의 아내라고 표현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당시에는 ‘약혼’하면 아직 동침하지만 않았을 뿐 이미 남편과 아내였던 것이다. 해롯은 예수를 죽이려 하였으나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태어날 아기 예수를 보호하였다. 스스로는 마음에 번민과 갈들이 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주의 사자 즉 천사가 나타나서 요셉에게 꿈에 분명하게 말하였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여 신중한 사람이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였다는 소식을 알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서 말하였다. 


성령으로 잉태되신 그리스도.
마리아의 태에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된 일은 사람의 계획이 아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예정하신 일이요 성령으로 된 일이었다. 18절에 보면,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다. 20절에 천사는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한 일이 “성령으로 된 것이라”는 점을 다시 또 강조하였다. 성령은 마리아와 요셉에게 예수 잉태의 사건은 “성령으로 된 것”임을 분명하게 하였다. “성령으로”라는 말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으로 된 일이란 말이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신화에는 신이 인간이 되는 신인현현(神人顯現)에 대한 신화가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마리아의 태에 잉태되고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는 일은 성육신의 신비를 말씀하는 중요한 내용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리아의 태에 잉태되고 탄생하는 이 신비를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에게 잉태된 일은 ‘성령으로’인하여 된 일이다. 아브라함은 나이 백세에 아내 사라를 통하여 이삭을 낳았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제사장 사가랴는 아내 엘리사벳과 더불어 나이 많은 상태에서 아들 요한을 낳았다. 이 모두 기적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통하여, 사가랴는 아내 엘리사벳을 통하여 아들을 낳은 것이다. 그러면 예수의 탄생은 무엇이 다른가. 마리아가 약혼하고 남편인 요셉과 결혼하여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다. 18절과 20절의 예수 잉태 사건의 설명에 포함된 강조는 ‘성령으로’라는 말씀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강조이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다. 영어로는 “The Great Event"라고 한다. 

성경에는 위대한 사건의 기록이 많다. 모세 시대에 홍해를 육지처럼 건넌 출애굽 사건은 위대한 사건이다. 모세 시대 놋 뱀 사건도 위대한 사건이다. 여호수아 시대에 요단강을 홍해처럼 건넌 사건도 위대한 사건이다.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을 싸우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돌아서 무너지게 된 것도 위대한 사건이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에 돌아 간 백성들이 스룹바벨 성전을 지은 것도 위대한 사건이다. 느헤미야 시대에 그가 앞장서서 예루살렘 성벽 공사를 52일 만에 마친 것도 위대한 사건이다. 

그러나  그 어떤 위대한 사건도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잉태하게 하신 것을 대신할 만한 위대한 사건이란 없다. 그래서 동정녀 마리아가 잉태한 ‘수태 고지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다. 

인류 역사에 지동설의 발견, 아메리카의 발견, 전기의 발명, 전화기의 발명, 자동차, 비행기, 잠수함, 우주선, 컴퓨터와 나노 기술과 IT 기술의 발전 등이 모두 다 위대한 사건일 수 있다. 인공 지능의 발견과 최첨단 의술과 의료 장비의 발명 등도 위대한 사건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사건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성령으로 잉태 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사건”이다.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마태복음 1장 1절과 17절과  18절은 반복하여 세 번이나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란 메시아를 일컷는 말이다. 히브리어의 ‘메시아’란 헬라어로 ‘그리스도’이시다. 그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종”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기름 부음을 받아 성별되게 하셨다. 그렇다. 예수는 왕이시며 제사장이시며 선지자로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이시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예수.
하나님은 마리아의 태에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마리아의 남편 된 요셉에게 꿈에 현몽하여 말씀해 주셨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마1:1) 동서고금에 자녀의 이름을 짓는 명명권(命名權)은 아버지에게 주어진 권한이었다. 창세기 4장 25절에 보면 아담이 셋째 아들을 낳아서 ‘셋’이라고 이름 지을 때에도 그 이름을 하와가 지은 것이 아니다. 아담이 지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요셉의 꿈에 현몽하셔서 장차 마리아를 통하여 태어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어주시는 사건은 하나님이 예수의 아버지이심은 확언하는 친부권(親父權)의 행사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요셉에게 인간의 몸을 입고 마리아의 태에서 태어 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양육할 양부(養父)의 권한을 위임하는 거룩하고 장엄한 순간인 것이다. 

왜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한 것인가. 그 이름의 뜻의 무엇인가. 예수란 구약 시대의 이름으로 하면 ‘여호수아’이다. 그 의미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이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은 시편 130편 8절의 인용처럼 하나님이 예비하신 이름이시다.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라고 했다. 그렇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죄를 속한다. 속량(贖良), 대속(代贖), 구속(救贖), 구원(救援)의 의미를 담고 있다. “속량”이란 “몸값을 받고 종을 풀어 놓아 자유하게 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활동하실 때에 예수의 제자들을 포함한 무리들은 예수를 왕 삼고 싶어 하였다. 예수를 정치적인 왕, 질병을 치료하시는 의원 정도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정치적은 구원, 질병에서의 구원, 가난에서의 구원, 압제로부터의 해방인 구원 정도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었다. 예수는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본문 21절의 “자기 백성”이란 누구일까. 유대인만을 말할까. 아브라함의 후손만을 말할까. 아니다. 마태복음 8장 5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만난 백부장으로부터 자기 부하를 중풍병에서 구해 달라는 요청을 받으셨다.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그의 중풍병 걸린 종을 고쳐 주셨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을 것이라”(마8:11)고 말씀해 주셨다. 그렇다. 아브라함의 후손만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요청하는 믿음의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주로 오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다. 

예수는 스스로 자신이 이 땅에 보냄 받은 대속물이라고 소개 하였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그의 동족 히브리인들을 430년 간 갇혀 지내던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출애굽시켜 주셨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수아를 앞장 세우셔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다. 한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를 믿는 자들마다 죄에서 구원 받는 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

신앙생활, 교회 생활, 은혜 생활이 짐이 된다고 여기나. 
아프라카에 수심은 깊지 않은데 강폭이 넓고 너무나 물살이 세고 급해서 도저히 건너기 어려운 강이 있었다. 원주민들은 그 강을 건널 때마다 무거운 돌을 잔등에 짊어지고 강을 건너고는 하였다. 잔등에 짊어진 무거운 돌의 무게 때문에 쏜살같이 급하게 급류로 흐르는 강물에 떠내려가지 않을 수 있었다. 잔등에 돌덩이를 짊어지는 것은 힘들고 무겁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 돌의 무게 때문에 누구나 언제나 안전하게 강물을 건널 수 있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죄의 강물 건너 영원한 안식과 평화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 몫의 구원의 멍에를 예수 안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메고 주를 따르자. 영원한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 하나는 ‘임마누엘’이다. ‘임’이란 영어로 ‘with’ 즉 '함께'이다. ‘마누’는 영어로 ‘us’즉 ‘우리’이다. ‘엘’은 ‘God’ 즉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이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God With Us)이라는 뜻이다. 

예수의 탄생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된 일이 아니다. 22절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다.” 예수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신 예언의 말씀의 성취이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자주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그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복음서를 기록하는 구약에 근거한 신학의 완성이며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가령 마태복음 2장 15절에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바”라고 했다. 헤롯 임금이 죽기까지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와 남편 요셉이 애굽에 피난 가서 머문 것은 선지자 호세아의 호세아서 11장 1절 말씀의 성취임을 분명하게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마태복음 2장 17절에 보면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예언의 성취로 베들레헴 지경의 두 살 미만 남자 아기들의 죽음을 해석하였다. 이는 예레미야 31장 15절의 예언의 말씀에 근거한다. 예수는 나중에 애굽에서 올라와서 나사렛에서 자라났다. 마태는 2장 23절에서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이사야 11장 1절 말씀에 예언된 선지자의 말씀의 성취인 것을 꼭 집어 강조하였다. 3장 3절, 4장 14절에 계속하여 이런 내용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선지자를 통한 예언의 성취로 오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란 말이다. 그러면 왜 예수의 이름이 임마누엘이신가. 

예수는 그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에게 영원히 함께 하시는 화목제물(和睦祭物)이시다. 요한 1서 4장 10절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했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속량하셔서 하나님과 불화했던 우리를 하나님과 영원히 화목한 자녀의 권세를 누리도록 성도 가운데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이시다.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대로 “영원히 우리 가운데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보증”이시다. 마태복음의 끝인 28장 20절을 보라. “임마누엘”의 선언이 아닌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I am with you always, to the very end of the age.)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 강한자 약한자 능력있는자 부족한 자 우수한자 언제나 도움이 필요한 자 모두에게 주님이 함께 하신다. <아이큐 50 내 동생>이란 책은 이탈리아에서 7개월 베스트셀러였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었다. 형 자카모 마차리올이 다섯 살 어린 동생과 지내는 이야기다. 동생 조반니는 다운증후군 증세를 갖고 태어났다. 한쪽 네 번째 발가락은 새끼발가락과 하나로 붙어 있다. 늘 입을 벌리고 혀를 내어민다. 늘 혀가 입 밖으로 나와 있다. 올해 12살이다. 아빠와 엄마는 그렇게 태어난 동생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정말 특별한 아이가 왔어. 앞으로 우리는 이 아이의 시간에 맞춰 살아야 해." 당시 다섯 살이었던 형 자코모는 이 말을 듣고 "그게 좋은 거냐"고 물었다. 부모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럼, 엄청나게 좋은 소식이지!" 그러나 형은 동생으로 인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지냈다. 그러나 어느 날 어느 순간부터 동생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때부터 삶이 행복해 지기 시작했다. 동생의 일상을 담은 5분짜리 영상도 찍었다. 그 마지막 자막은 이렇게 끝난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당신만의 눈으로 남들을 보지 마세요”
(Inside all the people there is a unique world. 
Don't look at the others only with your eyes).

임마누엘 신앙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함께 더불어 영원히 같이 사는 생활 거기에 천국이 시작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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