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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사람 다윗(시26:1-12) 2015.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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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5-10-07 16:37 조회 23,338 댓글 0
 
기도의 사람 다윗(시26:1-12)            2015. 10. 4
 
 
 
다윗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지칭이 많지만 그 중에 하나는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다윗은 목동이요 시편의 절반을 쓴 시인이요 성경의 기록자이다. 악귀를 내어 쫓는 영성 있는 음악가로 임금 사울 곁에서 수금(竪琴, harp)을 타던 자요 용맹한 군사요 전략가요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는” 행정가였다. 그는 나중에 왕이 된 자요 선지자인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령 받은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 보면 “그는 선지자라”(행2:30)고 다윗을 선지자라고 하였다.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왕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 다윗이 전쟁 중에 낮잠을 청하고 왕궁의 옥상을 거닐다가 범죄하였다.(삼하 11장) 전쟁의 일선에 나간 부하 장군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였다. 그 범죄 장면에 보면 다윗이 기도하였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 기도의 사람 다윗이 기도하지 않았을 때에 범죄하고 말았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영적 행위인데 진정으로 기도하며 살아가는  기도의 사람이라면 어찌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는 악한 행실에 빠지겠는가.
 
기도는 믿음의 사람을 지키는 힘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를 통하여 지혜를 얻고 ,용기를 얻고, 새 힘을 얻고, 위로를 얻고, 담력을 얻고, 생애 활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사람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이 ‘신전의식’(神前意識) 즉 ‘코람 데오’(Coram Deo)신앙은 믿음의 사람들로 하여금 기도의 힘을 더욱 겸손히 의지하게 만드는 믿음의 원천이다.
 
다윗의 생애는 베들레헴의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있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막내아들인 다윗을 포함하여 여덟 아들을 낳았다. 여덟 아들들은 하나님이 이새에게 주신 선물들이었다. 이새는 룻기에서 대하는 보아스의 손자이다. 보아스가 룻을 통하여 오벳을 낳고 오벳이 이새를 낳았다. 그러하니 다윗은 보아스의 증손자요 가나안 점령 군대 중에서 그 이름을 떨친 정탐꾼 중의 한 사람이었던 역사적인 인물 ‘살몬’의 고손자이다. 왜 성경은 다윗의 선조들의 이름을 이처럼 자세하고 기록하는 것일까.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 다윗은 그처럼 하나님이 쓰시는 소중한 인물로 태어났고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철저하게 여호와 중심의 성장기를 보내었다. 어떻게 알 수 있나. 다윗이 어렸을 적에 전쟁이 났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에 쳐들어 온 것이다. 당시의 임금은 사울이었다. 사울왕 자신이 전쟁에 능한 용사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직접 전쟁의 일선에 나서지 않았다. 첫째 엘리압, 둘째 아비나답, 셋째인 삼마 이들 다윗의 형들이 다 같이 전쟁에 불려 나간 상태였다. 아무리 아들들이 여럿이라지만 아버지 이새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였겠는가. 블레셋이 쳐들어 온 전쟁터에 세 아들이나 참전한 상태이니 말이다. 징병되어 나 간지 여러 날이 지나고 전쟁의 소식은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이기는지 지는지 궁금해 하던 아버지 이새는 막내아들인 다윗을 전쟁터에 심부름 보냈다. 전쟁 중인데 전방에 면회를 보낸 셈이다. 그 전쟁터의 일선에 심부름을 나갔던 소년 다윗이 적장 골리앗을 물매 돌 한 개로 때려눕히면서 일약 소년 다윗은 이스라엘 전국에 알려진 유명인사가 되었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마을마다 이스라엘 여인들이 나서서 노래하며 춤을 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였다. 그런데 그 노래 가사가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말았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삼상18:7)
 
다윗의 인기는 이처럼 높았다. 이런 일로 인해서 임금 사울은 심기가 불편해졌고 화가 치밀었다. 그 다음 날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임해서 사울은 집안에서 종일 정신없이 떠들어 댔다.
 
그 전쟁터에서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물매 돌 한 개로 때려눕히기 직전의 다윗의 고백을 보면 다윗이 베들레헴 시골에서 자라나면서 평소에 얼마나 하나님 중심 신앙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나를 짐작하게 한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하17:45)
 
다윗은 어린 나이, 소년 때부터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신앙을 갖고 있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신앙 말이다.
 
그러나 다윗의 생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왕이 되기 이전에는 사울 왕의 시기와 경계가 극심하였다. 언제나 살기등등하던 사울 왕의 칼과 창을 피하여 광야와 동굴로 피신하며 지내야 했다. 그런 다윗이 나중에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는 사람이었다.(삼상18:12, 14)
 
다윗은 왕이 된 후에도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소화해 내야 했다.(삼하 15장) 겨우 예루살렘의 왕궁으로 환궁하기는 했지만 세바가 반역을 일으켜 다시 한 번 왕위 유지에 위기를 겪어야만 했다.(삼하 20장)
 
시편 26편의 ‘다윗의 기도’는 정확하게 언제 무슨 일을 겪으면서 이런 기도를 드렸는지에 대한 배경 설명이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다윗이 겪어야 했던 사울 왕의 시기와 증오, 아들 압살롬의 반역과 세바의 반역 사건과 같은 역사적인 격동기를 겪은 후에 어느 날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시편 26편 4절 이하에 10절까지의 기도 내용 중에는 사회를 고발하는 내용이 나온다. “허망한 사람, 간사한 사람, 행악하는 사람, 악한 자, 죄인, 살인자, 사악한 사람, 뇌물을 탐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것이 다윗 당시에 세상의 풍속도였다. 그런 세상 중에서 목동으로, 전쟁의 일선에 나섰던 소년으로, 왕의 악사(樂士)로, 임금 사울의 사위로, 광야와 동굴로 피하고 숨는 야인 인생으로, 그리고 십 수 년 긴긴 광야 인생을 거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후에도 다윗의 마음을 지키는 힘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였다.
 
다윗은 하나님을 떠난 자기 자신을 상상할 수 없었다. 마치 물을 떠나서 목숨을 유지하는 물고기의 운명을 연상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다윗의 기도 내용을 살펴보면 다윗 자신의 신앙관과 인생관을 만나 볼 수 있다.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함.
다윗은 세상을 막 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항상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고 순전한 삶을 가꾸며 살아 간 인생이었다. 1절의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라는 고백은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하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어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 있겠는가. 다윗이 고백하는 이 말은 여호와 앞에서 나름대로 신앙 양심을 따라서 신실하게 살아 왔음을 고백하며 여호와의 판단을 구하는 기도를 드린 것이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생활에 그의 마음이 흔들려 본 적이 없었다.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라는  1절의 이 표현을 <우리말 성경>에서는 “내가 여호와를 믿었으니 내가 미끄러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렇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각 사람이 과연 여호와를 믿으며 살아가는 성도라면 무슨 일을 만날지라도 미끄러지면 안 된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무슨 일을 만날 지라도 그 마음이 흔들리면 안 된다. 그 마음이 환경으로 인하여, 주변 사람들로 인하여 미끄러지면 안 된다는 말이다. “결코 나는 변치 않으리”라는 복음 성가가 있지 않나.
 
“결코 나는 변치 않으리 결코 나는 변치 않으리
물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난 변치 않으리
예수 내 생명 변치 않으리 예수 내 생명 변치 않으리
물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난 변치 않으리”
이런 견고한 믿음과 신앙 관리자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아서 잘 못된 인생이 있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인생으로 살아서 후회되는 결과를 본 인생이 누구인가.
 
우리는 신앙의 고백을 담아서 “주님을 의지합니다.”라는 복음 성가를 부른다.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을 의지합니다
내 삶의 위로와 참 평안 주시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 할렐루야 오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오 할렐루야 오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합니다
 
역사에 흔적을 남긴 믿음의 사람들은 한 결 같이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들이었다. 다윗 자신이 그러하지 않나. 다윗이 다윗 될 수 있었던 것은 언제 칼과 창과 화살이 날아와서 자신의 심장을 관통할지 모르는 불안한 위기의 날들을 지내면서도 항상 그의 마음 중심에는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는 흔들리지 않는 분명한 믿음과 확신이 있었다.
 
네델란드의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화가 빈센트 반 고호(Vincent w. Van Gogh, 1853-1891)는 진지하고 내성적이고 아이 답지 않은 의젓한 모습으로 자라났다. 그의 가족들의 삶은 하나님 중심이었고 미술을 사랑하였다. 그는 20대 초반 청년기에 감리교의 학교에서 견습 교사로도 지냈다. 24살에는 암스테르담에서 신학교에 다니기도 하였다. 이년 후에는 벨기에의 가난한 광산촌에 들아 가서 설교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는 가난하여 목탄화를 그리며 가난한 광부들에게 복음을 전하고는 하였다. 그는 그림 ‘해바라기, 노란 집, 자화상, 별 달밤, 감자 먹는 사람들, 까마귀가 나는 밀밭...’ 등등 900여점의 그림과 1100여점의 습작들을 남겼다. 이는 모두 후대의 영원한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물감 살 돈도 마련하기 어려워서 틈만 나면 동생에게 ”돈 좀 보내 달라“고 하였다. 그런 그는 언제나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며 지냈다. 연약한 면도 많았지만 그의 그림 세계는 어느 누구의 추종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이 세상에서 38년 밖에 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남긴 그림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25년이 지난 오늘날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오늘 날 그는 그렇게 유명하지만 정작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단 한 작품 밖에는 팔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 <마차와 기차가 있는 풍경> 같은 작품은 1000억을 호가하는데 그의 작품 몇 점이 한국인의 손에 있다는 소문도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간 사람들의 작사, 작곡과 노래를 비롯한 음악, 미술, 조각, 건축, 소설, 시 등을 보라. 하나님 의지하고 살았던 베토벤, 브람스, 헨델, 차이코프스키, 하이든, 비발디,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음악 세계를 보라. 하나님 의지하고 살았던 레오나르도 다빈치, 렘브란트, 로뎅,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밀레 같은 미술가와 조각가들을 보라. 하나님 의지하고 살았던 세익스피어, 괴테, 톨스토이, 펄벅, 도스토에프스키 등을 보라.
 
<전쟁과 평화>, <부활>, <안나 카레니나> 같은 소설로 알려진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는 <하나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는 책에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돕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개개인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과 선포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독교 신앙은 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이었다. 그는 소설가이며 복음 전파자였다. 톨스토이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며칠 전인 1910년 11월 1일에 자신의 딸 사샤에게 이런 편지를 써서 보냈다.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시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뿐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존재한다..."(God is the limitless All of which man realises himself to be a limited part. The truth exists only in God…”)고 말했다.  또한 그는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가난한 사람과 죄인들이라도 모두 사랑하며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복음서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믿고 이해하는 삶을 살았다. 실제로 그의 단편소설인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도 있다>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그의 평소의 신앙을 소설의 바탕에 두고 쓴 것이다. 그는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는 마태복음 25장 40절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살았다.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에게는 다른 은혜가 임하게 마련이다.
 

주의 진리 가운데서 행함.
다윗은 진지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2-3절을 우리말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
 
“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해 내 마음과 내 생각을 알아보소서. 주의 사랑이 항상 내 앞에 있기에 내가 한 결 같이 주의 진리를 따라 살아갑니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이 자신을 살펴 주시고, 살펴보시고,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이 시험하여 주시길 간구하였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의 넉넉하신 사랑을 몸으로 체감하며 살아갔다.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는 “주의 사랑이 항상 내 앞에 있기에”라는 고백이다. 다윗은 우여곡절도 많았고 대적자도 끊임이 없었다. 다윗은 항상 죽음의 위협과 위기 앞에 노출된 불안정한 나날을 살아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마음에 는 “주의 사랑이 항상 내 앞에 있기에”라는 신실한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꽉 차 있었다.
 
그래서 다윗은 항상 주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담대함과 진지함이 있었다. 신앙  생활이 무엇인가. 진리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진리 편에 서는 것이 아닌가.
 
우리 교회의 탄생과 지난 5년 반이 힘에 겨웠고 고난이 적지 않았지만 우리를 우묵한 웅덩이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 고백은 무엇이었나. 진리의 편에 서야 한다는 신앙이 아니었나. 인본적인 불의와 손잡고 타협하였다면 안일의 가마솥에서 미지근한 물을 즐기며 헤엄치는 가운데 서서히 삶아져 가는 개구리처럼 하루하루 그렇게 지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출애굽이 없었다면 광야의 연단도 가나안의 새로운 경험도 전개되지 않았을 것 아닌가. 6. 25 전쟁과 공산 정권을 피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한 이들이 남산 앞자락 필동 언덕에 가마니를 깔고 예배하는 열심을 갖지 않았다면 오늘 날의 영락교회 같은 세계적인 교회가 탄생할 수 있었겠나. 죽기를 각오하고 대서양을 건너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나섰던 청교도의 신앙이 없었다면 오늘 날의 미국 같은 나라가 인류 역사에 건설 될 수 있었겠나.
 
1609년에 네델란드의 탐험 회사에 고용된 영국인 허드슨 씨가 중국 탐험에 나섰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이  맨해튼이란 섬이다. 그래서 뉴저지와 맨해튼 사이의 강 이름을 허드슨 강이라고 지은 것이다. 물론 거슬러 올라가면 1492년에 탐험가 컬럼버스가 미국 대륙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1626년에 네델란드의 서인도 회사는 뉴네델란드라는 이름으로 맨해튼 지역에 사람을 보내서 살기 시작하였다. 당시 그 곳의 원주민 수는 200여명이었다. 총독으로 임명된 페테르 미뉴잇이 24달러를 주고 인디안 원주민들에게서 맨해튼 섬을 사 들였다. 그리고 주변에 성곽을 쌓고 뉴암스테르담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1664년 영국은 총 한 방 쏘지 않고 네델란드로부터 맨해튼을 빼앗았다. 그리고 당시의 영국 왕 찰스 2세의 동생 요크 경의 이름을 따서 뉴요크라고 이름 지어 부르기 시작하여 오늘 날 뉴욕(New York)이 된 것이다. 영국으로부터 미국이 독립되기 전까지는 1790년까지 뉴욕이 미국의 수도였다. 오늘 날의 맨해튼은 경제, 금융, 의학, 대학, 음악, 미술 등 모든 분야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네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이 곳으로 신 분당선이 지나게 되고 송추 길을 중심으로 통일 시대가 다가오면 상상을 초월하는 북방 시대를 향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할 것이다. 이 곳에 “새로운 꿈의 공동체”로 자리 잡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의 진리 안에 행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나중은 복음의 창대한 전진 기지가 반드시 될 것이다.
 
날마다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수염도 깍지 못하고 광야와 동굴에 은거하며 그를 추종하는 400여 무리들과 함께 들판을 헤매던 도피자였던 다윗이 예루살렘에 자리 잡은 이스라엘 역사의 빛나는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요 시편 73편을 기록하는 성경 기록자가 될 줄을 그 어느 누가 알았겠나.
 
경제학에서는 “72의 법칙”(Rule of 72)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이는 "자산이 두 배로 불어 나는데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를 계산하는 일종의 경제학 공식이다. 이 “72의 법칙”은 단리가 아닌 복리가 적용되는 계산법으로 복리는 이자에 이자가 붙는다.
 
미국의 월 스트리트가 있는 뉴욕 시의 맨해튼 섬에 초기 이민자들이 정착하기 위해 도착했을 때 이들은 인디언과의 협상을 통해 이 섬을 몽땅 사드렸다. 그런데 섬 전체를 사들인 데에 지불한 대가는 고작 24달러어치의 장신구와 구슬 몇 개 뿐이었다. 얼핏 들으면 인디언을 얕잡아 보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월가의 영웅으로 불리는 피터 린치(Peter Lynch, 1944-)는 색다른 계산을 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맨해튼 섬의 시가는 1999년 기준 1,000억 달러에도 못 미친다. 그러나 만약 인디언들이 섬을 팔고 받은 장신구와 구슬을 돈으로 바꿔 연 8%짜리 채권에 복리로 투자했다면 그 돈은 자그마치 30조 달러를 넘어선다는 계산이다.
 
진리 편에 선 자의 나중은 다르다. 10월 마지막 주일은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 기념 주일이다. 마틴 루터는 교황청의 시녀로 살지 않고 진리를 진리라고 선포하고 항거하였던 개혁자였다. 그의 곁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종교개혁 찬송인 586장 4절에 보면,
 
“악이 비록 성하여도 진리 더욱 강하다
진리 따라 살아 갈 때 어려움도 당하리
우리 가는 그 앞길에 어둔 장막 덮쳐도
하나님이 함께 계셔 항상 지켜 주시리.”
 
이런 고백적인 찬송을 우리는 함께 부르고는 한다. 그렇다. 이것이 진리 안에 행하는 신앙인의 모습이 아닌가. 다윗이 고백하는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며”라는 고백은 하나님의 은혜로 죄와 악에 빠지지 않고 살아 올 수 있었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고백하는 기도이다. 다윗은 허망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나 악한 자들과 함께 앉지 않았다. 다윗은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 않았다. 다윗은 악을 행하는 행악자들의 집회를 미워하였다. 다윗은 사악하고 뇌물을 향하여 눈길을 옮기는 자들을 멀리하며 살았다. 다윗의 마음 중심에는 항상 주의 사랑을 받는 자 답게 한 결 같이 주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려는 의지와 결단과 신앙의 고백이 그를 지켜 갔다. 동양에서 말하는 군자(君子)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에 행동하는 그 행동이 곧 그 사람”인 것을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예기>(禮記)곡례 편에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선한 행동에 힘쓰면서 게으르지 않은 사람을 군자라고 한다"라고 풀이하였다.
 
진리를 알면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자가 될 수 있는 법이다. 수도원 원장이 신입 수도원생에게 문제를 내고 외출하였다. 수도원 마당에 큰 원을 하나 그려 놓았다. 원장이 돌아 왔을 때에 그 수도원 생이 원 안에 있으면 다음 날 하루 금식이고 원 밖에 있으면 수도원에서 짐을 싸 가지고 수도원을 나가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종일 기도하던 신입 수도원 생은 마당을 쓰는 빗자루로 원장이 마당에 그려 놓은 그 원을 깨끗하게 쓸어 버렸다. 저녁에 돌아 온 수도원의 원장은 그 젊은 신입 수도원 생을 칭찬하여 주었다. 진리 안에 행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달아 아는 것이 진리가 아니가. 그리고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곧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 아닌가.
 
오늘의 성찬도 그런 성찬이 되길 바란다. 예수의 살과 피를 받되 진리를 깨달아 알고 믿는 자다운 신앙으로 성찬에 참여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님.
다윗은 주의 집 즉 성막을 사랑하였다. 왜일까. 성막 안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모셔져 있었다. 본문 6절에서 말하는 ‘제단’ 즉 ‘Alter'란 오늘 날의 교회로 말하면 말씀이 선포되는 강단을 말한다. 제단상이 있고 성경 말씀이 펼쳐 있고 어떤 교회는 성령의 임재를 상징하는 촛불도 밝힌다. 이 곳을 ’alter' 즉 ‘제단’이라고 한다. 다윗은 죄를 멀리하고 죄에서 손을 씻고 주의 제단 중심의 삶을 살기를 늘 소원하였다.
 
손을 씻는다는 말은 제사장이 제사 전에 제사 준비를 위하여 손을 씻는 행위를 말한다. 출애굽기 30장 17절 이하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온다. 성막과 성막 뜰의 번제단 사이에 한 곁에 물두멍이 있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 물두멍의 물로 손과 발을 씻고 나서 제사를 집례하도록 명령하셨다. 준행하지 않으면 죽음을 면하지 못하리라고 경고하셨다.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죄를 멀리하고 악을 떠나서 정결하고 거룩하고 성결한 몸과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다윗은 마음과 생각이 허망한 자와 간사한 자와 살인자와 행악자와 악인들이 득실대는 세상 중에서 언제나 항상 하나님의 성막에서 제사를 준비하는 제사장의 마음과 같은 그런 심정을 갖고 살아가기를 소원하였다. <우리말 성경>으로 읽으면 다윗의 기도하는 심정이 더욱 실감나게 전달된다. 다 같이 한 번 기도하는 다윗의 심정으로 성경을 읽자.
 
“오 여호와여, 내가 결백함을 보이려고 손을 씻으며 주의 제단을 두루 돌겠습니다. 감사의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며 주가 하신 놀라운 일들을 모두 말하겠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사시는 집, 주의 영광이 계시는 곳을 내가 사랑합니다.
죄인들과 함께 내 영혼을, 피 묻은 사람들과 함께 내 생명을 거둬 가지 마소서.
그들의 손에 악한 계략이 있고 그 오른손에 가득한 뇌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진실하게 살 것이니 나를 구원하시고 불쌍히 여기소서.
내 발이 평탄한 곳에 서 있으니 사람들 가운데서 내가 여호와를 찬양할 것입니다.”(시26:6-12, 우리말 성경)
 
11절과 12절은 기도하는 다윗의 겸허하고 겸손하고 진지한 마음이 절절이 묻어난다. “그러나 나는 진실하게 살 것이니 나를 구원하시고 불쌍히 여기소서. 내 발이 평탄한 곳에 서 있으니 사람들 가운데서 내가 여호와를 찬양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예배자, 이와 같은 기도의 사람의 삶을 살아가자. 다윗은 항상 여호와의 성막, 여호와의 제단에 두루 다니기를 즐겨하고 기뻐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저 하였다. 다윗의 마음에는 감사가 있었고 날마다 그의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로 가득하였다. 8절은 그런 다윗의 신앙을 엿 보게 하는 고백이 담긴 기도가 아닌가.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다윗의 마음은 자신의 죄를 속량하시고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을 송축하는 창송의 마음과 기도로 가득하였다. 다윗의 발걸음은 여호와 안에서 평탄한 데 서서 살아가기를 소원하였다.
 
아름다운 계절 가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충만함과 이끄심을 받으며 다윗처럼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겸허한 믿음의 길을 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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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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