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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부활 예수의 분부(요20:19-29) 2014.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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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04-27 22:18 조회 17,887 댓글 0
 
부활 예수의 분부(요20:19-29) 2014. 4. 27
 
 
사람들은 누구나가 평화를 원하고 목 말라한다. 이는 개인이든, 가정이든, 어느 기업이든, 어느 공동체이든, 한 나라나 민족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평화가 떠난 삶이란 아무리 넓은 땅을 차지하고 살아도 불안하고, 아무로 높은 성곽을 쌓은 성 안에 머물러도 초조할 뿐이다. 마음에 불안이 찾아 들고 평화가 떠나고 평강이 사라지고 나면 창고에 아무리 은과 금이 가득하여도 불안하고 두렵고 초조하기는 마찬가지다. 평화가 떠나고 나면 아무리 편한 침대에 눕고 아무리 산해진미를 차려 놓은 식탁 앞에 앉아도 소용이 없다.
 
여러 해 전에 중국 북경에서 한 시간 반 정도 시내를 벗어난 전원 적인 분위기의 시골 마을 한 귀퉁이에서 양계장 폐사 공간을 비밀리에 확보하고 그 곳에서 지하 신학교를 운영하는 선교 현장에서 여러 날 동한 강의를 하고 귀국하는 주말의 오후 시간에 공항으로 이동하기 전에 북경 시내의 자금성을 둘러보았다. 자금성(紫禁城, Zǐjìnchéng 쯔진청)은 베이징의 중심에 있는 명과 청 왕조의 궁궐이다. 자금성의 규모는 궁궐로는 세계 최대의 규모이다. 1421년 영락제가 처음 거주하기 시작해 1924년 선통제가 여기서 쫓겨날 때까지 5백 년 동안 명·청 두 왕조 24명의 황제가 이곳에서 중국을 통치했다. 동서로 760m, 남북으로 960m, 72만 m²의 넓이에 높이 11m, 사방 4km의 담 사이에 4개의 큰 출입구가 뚫려 있다. 800채의 건물과 일명 9999개의 방이 배치되어 있다. 실제로는 8886칸이라고 한다. 1987년 "명·청 시대의 궁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천안문은 황성 내성의 남문이다. 자금성의 주위에는 방어용 연못인 해자(垓字)와 성벽들로 둘러싸여 있다. 해자의 너비는 52m이며 깊이는 6m에 이른다. 해자에는 동서남북으로 해자를 가로지르는 4개의 다리가 있다.
 
원나라가 패망한 뒤 대도를 점령한 명의 홍무제는 대도성을 허물고 수도를 남경으로 정한 뒤 원의 궁전을 모방해 남경의 궁전을 건축했다. 힘들여 지어놨건만 이 궁전은 홍무제 사후 영락제가 조카 건문제를 몰아낸 정난의 변이 벌어졌을 때 불타버리고 말았다.
 
1406년(영락 4) 영락제는 자신이 연왕 시절 중심지로 삼은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남경의 궁전을 모방해 북경에 궁전을 짓도록 해 1420년(영락 18)에 완공한 궁궐이 자금성이다. 14년 동안 10만 명이 넘는 장인들과 1백만 명 이상의 노동력을 아낌없이 갈아 넣어서 건설했는데, 여기에 소요된 자재는 중국 운남성 지역의 밀림에서 벌채한 남목(楠木) 수십만 그루와 쑤저우 등지에서 생산한 각종 유리기와 2억 개 등이었고, 기와를 만드는 도토는 안휘성 태평에서, 채화의 연료는 서남부의 각성에서 징발했으며, 기단부와 조각에 사용될 한백옥은 50km 바깥의 채석장에서 운반했는데 그 중 가장 무거운 돌은 200t에 육박했다. 이런 돌은 보통 마차로 운반하는 게 불가능해 채석장에서부터 자금성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우물을 판 다음 겨울에 그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뿌려 빙판을 만든 다음에야 겨우 운반할 수 있었다.
 
이렇듯 명나라의 모든 물자와 노동력이 총동원되어 1420년(영락 18) 12월 완성된 자금성은 1421년(영락 19) 정월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했고 영락제는 황실 가족과 수많은 환관, 궁녀들을 거느리고 새로 지은 궁궐에 들어갔다. 그런데 완공 후 불과 반년도 지나지 않은 같은 해 5월에 벼락이 쳐서 자금성의 중심인 세 개의 대전(大殿)을 포함한 상당수의 전각들이 모두 다 불타버렸다. 가뜩이나 천도에 말이 많은 상황에서 힘들여 지은 궁전이 1년도 넘기지 못하고 벼락을 맞자 황제가 하늘의 뜻을 거슬렀다며 민심이 흉흉해졌고 급기야 다시 남경으로 환도하자는 주장까지 제기되어 조정이 소란스러워지자 영락제는 남경 천도론을 주장한 신하 한 사람을 죽이고서야 겨우 여론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후 영락제가 몽골을 정벌하러 나갔다가 원정지에서 죽자 북경에 왕의 시신이 돌아왔을 때도 그의 관은 잿더미가 된 자금성에 안치되었다가 능묘에 매장되었다. 중건이 마무리된 시점은 20년 가까이 지난 정통제 때인 1440년(정통 5)이었다. 그리고 1459년(천순 3)에는 자금성 서쪽에 황실원림인 서원(西苑)을 새로 영건했는데 이곳은 오늘날 중난하이(中南海)로 불리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요인들의 관저 구역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동안 잠잠하다가 120여년 뒤인 1557년(가정 36)에 다시 화재가 발생해 3대전을 포함한 주요 전각들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이때 발생한 화재로 황후의 거처인 곤녕궁에도 불이 옮겨 붙었는데, 안에 있는 황후를 구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청을 물리치고 왕이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해 황후가 타죽게 만든 사람이 가정제이다.
 
그 자금성 내에 임금의 침소가 공개 되어 있다. 목제침대에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침소의 머리맡에 기쁠 희(喜)자를 두 자를 합하여 -喜喜- 큰 글씨로 써 붙여 놓은 것을 보았다. 왕과 왕비에게 기쁨이 있으라는 기원일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기쁠 희자를 부적처럼 지갑에 써 넣고 다니고, 액자로 써서 벽에 걸어 놓고, 침대 머리에 써 붙여 놓으면 기쁨이 유지되고 보존되는가.
 
인간에게 평강, 평화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인간칠정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인간이란 단 한 사람도 없다. “칠정이란 기뻐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심을 드러내는 인간의 일곱 가지 감정”을 말한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서너 식구가 함께 살아가는 소가족 사회에서도 가족들의 하루 출입에만도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수 없는 세상을 살아간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시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에 예수께서 몇 차례 반복하여 말씀하신 그가 고난을 당하실 것이고 십자가에 죽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을 귀 기울여 마음에 담고 지냈던 제자가 사실 없었다. 베드로조차도 “주님이 죽으시면 안됩니다. 그런 날이 온다면 제가 대신 죽을 것입니다.” 그렇게 호언장담하던 베드로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주를 부인했고 배반했고 저주까지 하고 위기의 현자에서 피하고 숨고 비겁하게 행동했던 그가 아닌가.
 
그런 제자들 곁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신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끝으로 예수께서는 붙잡히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이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인하여 그 주변의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삶의 격변기를 겪어야 했는가. 불안에 떨고 두려움에 숨고 자기도 그 어떤 피해를 받을까 두려워 하며 이리 피하고 저리 숨고 하던 제자들이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외롭고 고독하게 붙잡혀 온 갖 고난을 다 당하시고 죽으셨던 예수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예수의 빈 무덤을 찾아 갔던 막달라 마리아의 출입에 관한 내용이 요한복음 20장의 1절부터 18절까지의 긴 내용 가운데 소개 되어 있다. 사실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부활 신앙은 없었다. 그녀는 예수의 시체를 찾고 있었다. 심지어는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조차도 예수께 요청하였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예수이신지조차 분별하지 못하고 그가 동산지기 쯤으로 착각하고 요청한 것이다. 요한복음 20장 15절에 보면,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시자 “주여 당신이 옮겼든지 어디 두었든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며 내가 가져 가리이다.”하고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었다.
 
혹시 우리의 모습이 그러하지 않나. 이미 우리 주께서 이천 년 전에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치도 예수님의 시체를 찾던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정도의 모습으로 예수를 대하고 역사를 대하며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며 여전한 슬픔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는 아니한가.
 
그 때에 예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셨다. ‘마리아야’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기의 이름을 부르시는 깨달은 막달라 마리아가 ‘랍오니’ 하고 불렀다. 반가워서 ‘선생님’ 하고 부른 것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20:17) 그 때에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이 숨어 있던 곳을 찾아 가서 예수를 만났다고 소식을 전하였다. 부활절이 지난지 일주일이 되었다. 오늘 다시 부활하신 예수께 대하여 묵상하길 원하는 것은 우리 가운데 예수께서 진정 부활 예수로 함께 하셔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는 죽은 예수, 무덤 속의 예수가 아니시다. 부활하신 예수시다. 죄와 어둠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날 저녁에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숨어서 문을 안으로 다다 걸고 불안해하고 있던 그 현장에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해 주신 세 가지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한다. “부활 예수의 분부!” 부활하신 예수께서 열 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Peace be with you." 부활 예수의 첫 분부는 평강의 선포였다. 이 땅은 처처에 모든 인류가 평강을 목말라 하고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처럼 보복과 심판과 판단과 원한과 갈등과 반복과 대립이 판을 치는 세상에 예수께서 선포하신 첫 말씀은 평강의 선언이셨다. 예수께서는 ‘샬롬’이란 유대인의 인사법으로 인사하신 것이다. 우리는 늘 만나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곤 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인사의 내용이 여러 가지를 함축하는 의미의 마음을 담은 인사법인 것처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샬롬’이란 특별한 인사요 문안이 아닐 수 없다. 전쟁과 테러와 사고와 사건과 질병과 각양 재앙이 엄습하는 세상살이 중에서 ‘안녕’ 혹은 ‘평강’을 묻는 ‘샬롬’이란 인사는 얼마나 적절한가.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신다.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는 선언이며 축복이며 약속이며 보증이며 보호와 동행하심의 선언이 아닌가. 우리가 공기 없이 살수 없듯이 주 없이 살수 없다. 주님의 평강 없이는 이 불안한 세상을 마음 편하게 살수가 없다.
 
292장 찬송 ‘주 없이 살수 없네’라는 찬송의 고백 그대로이다. 이 찬송의 작시자인 프랜시스 하버갈(Frances R. Havergall, 1836-1879)은 여성이다.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 윌리엄 하버갈의 대를 이어 하나님을 잘 섬기며 주옥 같은 찬송시를 썼다. 그녀는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이 능통했고 작곡도 잘 했다. 4살부터 글을 읽고 7살때부터 찬송 시를 쓰기 시작할 정도로 영특한 어린이로 성장하였다. 그의 찬송시 중에 우리 찬송가에만도 9편이나 실려 있다. 찬송의 가사를 보아라. “주 없이 살 수 없네 죄인의 구주여, 주 없이 살수 없네 나 혼자 못 서리, 주 없이 살 수 없네 내 주는 아신다, 주 없이 살 수 없네 세월이 흐리고...” 이렇게 시작되는 매 구절 구절 마다 절절한 신앙의 고백이 묻어 나는 얼마나 은혜로운 찬송인지 모른다.
 
그녀는 213장 “나의 생명 드리니”, 311장 “내 너를 위하여”, 375장 “영광을 받으실 만유의 주여”, 495장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 487장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와 같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거의 모든 찬송들이 그의 묵상과 신앙의 고백에 의해 쓰여진 찬송시 인 것을 생각하면 부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는 선언의 의미가 가슴 뭉클하게 다가오지 않는가. 왜 예수께서 평강을 선포하실 수 있는 것인가.
 
첫째, 예수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사죄(赦罪)의 평강을 주신다.
인간은 죄의 문제 때문에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는 것이다. 아담의 아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후에 불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동생을 죽인 후에 숨을 수 있는 곳은 이 땅 그 어디에도 없었다. 죄를 범하면 그 죄가 인간을 결박하기 때문에 견딜 수 없게 된다. 아담과 하와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다. 그 아름다운 하나님의 완전히 창조의 동산인 에덴동산에서 뱀의 유혹에 넘어가고 마니까 불안하고 무섭고 두렵고 떨려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리고 동산 나무 숲 사이로 숨지 않았다. 인간을 죄의 결박과 불안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해방하고 죄 용서 받은 참 자유자로 살아가게 하는 힘은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께로 돌아가는 길 밖에는 없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내용이 무엇인가. “오늘 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그렇다. 본문에도 마지막 부분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 중의 한 가지가 이것이 아닌가.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23)
 
둘째, 예수님은 우리를 두려움으로부터 평안케 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렇다. 인간은 두려움 그 자체의 두려움의 감옥에 갇혀 살고는 한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재산 관리에 대한 두려움, 세상 지위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의 엄습한다. 19절에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날 저녁에 열 한 제자들이 한 곳에 두려워하여 모여 있었다고 했다. 이처럼 두려움의 감정은 누구에게는 있다. 앞서 소개한 자금성에는 자금성의 주위에는 해자와 성벽들로 둘러싸여 있다. 해자의 너비는 52m이며 깊이는 6m에 이른다. 해자에는 동서남북으로 해자를 가로지르는 4개의 다리가 있다. 해자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파 놓은 연못을 말한다. 52미터 넓이에 6미터 깊이의 연못을 성 주변에 동서남북으로 파서 적의 침략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두려워서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 슬퍼하느냐>란 찬송 가사에 보면 “무얼 두려워하느냐”고 묻으며 찬송하지 않는가.
 
왜 슬퍼하느냐 왜 걱정하느냐
무얼 두려워하느냐 아무 염려 말아라
큰 어려움에도 큰 아픔있어도
이젠 아무 걱정하지마 내가 널 붙들어주리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지키리라
실망치말고 나를 보아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셋째, 예수님은 빼앗기지 않을 영원한 평강을 주신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선언한 그대로이다.“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 이런 영원히 승리하는 평강을 소유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I am sending you. 이는 부르셔서 사명자를 파송하시는 주님의 선언이시다. 비겁하게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던 현장에서 모두 다 사라지고 숨어 버렸던 제자들인데 저들을 찾아 가신 예수께서 저들을 향한 장래의 기대를 여전히 버리지 않으시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성경의 역사는 이처럼 보냄을 받은 종들의 섬김과 응답의 역사였다. 노아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도 기드온도 사무엘도 다윗도 이사야도 예레미야도 엘리야와 엘리사도 다 마찬가지가 아니었나. 예수께서 열 한 제자에게 찾아 오셔서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는 선언을 하시는 것은 나중에 성령 받고 열방을 항하여 나아갈 순교자들의 선교 역사를 선포하시는 위대한 시작이 아니었나.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세계 열방에 나가서 복음 전파하는 일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주변에 일상생활 중에 만나는 나의 가족과 이웃을 대할 때 주님이 나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자로 부르신 것을 거룩한 부담으로 느끼며 복음 전파의 기회에 쓰임 받는 나 자신이 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난주에 서울 연회가 있었다. 우리가 후원하는 네팔의 임근화 선교사가 선고 보고 하였다. 그는 청년 시절 가방 하나 달랑 어깨에 메고 “하나님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한 곳인 네팔에 가서 단 한명의 어린 아이 영혼이라도 복음으로 섬기며 살고 싶습니다.” 그런 기도의 마음을 갖고 지도에서 처음 찾아 본 나라 네팔에서 가서 25년 여간 사역하는 중에 이제는 300여 교회 3만여 명의 기독교인이 그의 선교 영향권 아래서 복음을 받아 들였다. 네팔연합감리교단이 창설되고 초대 감독에 임명 되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웃시야 임금이 죽던 해에 청년 이사야가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그는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다.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셨다.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다. 천사인 스랍들이 여섯 날개가 있었다. 두 날개는 얼굴을 가리었고 두 날개로는 자기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나는 신비한 환상을 보았다. 천사들의 찬송소리도 분명하게 들렸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그 순간에 성전의 문 지방의 터가 진동하였다. 성전에 연기가 충만하였다. 그 때에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말했다. 그 때에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빨갛게 불 붙는 숯을 손에 가지고 이사야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불 붙는 숯을 이사야의 입에 대었다. 그리고 천사가 말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다 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다. 네 죄가 사하여졌다.” 그리고 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Whom shall I send? And who will go for us?) 그 때에 이사야가 응답하였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Here am I. Send me!)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가서 백성들에게 이렇게 선포하라고 선포할 내용까지 말씀해 주셨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영국 에딘버 시의 프린스 거리에 있는 한 예술품 상접에 어떤 신사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장면을 그린 성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 때 한 어린 아이가 그 곁에 서서 작품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선생님 이 그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장면이에요. 예수님은 좋은 분이셨는데 저렇게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웠어요. 그리고 창으로 옆구리도 찔렀어요. 저 십자가 아래 울고 있는 여인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어머니 마리아와 같은 분들이에요. 그런데 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어요. 그리고 무덤에 장사되었어요.” 한참을 어린 아이의 설명을 들으며 성화를 감상하던 그 신사는 상점을 빠져 나가 길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 어린아이가 다시 그 신사를 뒤를 쫓아가서 바지 자락을 붙잡으며 말하였다. “그런데 선생님 제가 한 가지 설명을 빠트렸어요. 그 분은 다시 살아 나셨어요. 삼일 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셨어요. 그분은 우리들을 죄로부터 건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세요.”라고 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며 예수의 부활을 설명하여 주었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봄, 여름, 가을 그리고 올해도 한 해가 다 가고 성탄의 절기인 연말이 다가오고 송년의 계절이 오기까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부활 예수의 평강의 소식과 죄 사함의 소식을 널리 널리 전파하는 사명의 사람으로 살아가자.
 
 
성령을 받으라.
Receive the Holy Spirit. 그렇다. 예수께서 분부하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성령 받아야한다. 그래야 마음 뜨거워진 열정을 갖고 식지 않는 정열의 사람으로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승천을 지켜 본 제자들이 예수님의 분부대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중에 바람과 같은 성령, 불과 같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그리고 각기 방언하며 열방에 나가서 만방에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요 순교자의 삶을 살아갔다. 의심 많던 도마도 인도와 스리랑카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이런 고백에까지 이른 도마는 인도에서 순교되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제자 도마가 인도에 가기를 주저하자 예수께서 그를 감동하셔서 인도의 군다포르 왕실의 궁전을 짓는 목수로 임명 받게 하셨다. 사도 도마는 그곳에서 왕궁 건축 기금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다 써버리는 바람에 왕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었다. 그러나 도마는 기적적으로 탈출했고 왕도 나중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심했다고 전해진다. 도마 사도가 건축가요 목수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인도의 사방에 복음을 전하였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는 12사도의 석상이 모셔져 있는데 도마 사도는 목수들이 사용하는 ‘ㄱ자’를 들고 있는 형상이다. 예수처럼 목수요 건축가요 복음 전파자였던 사도 도마를 상징화한 것이다. 인도 서남부 케랄라 주에는 말라바르 전례를 사용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을 '도마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이유는 자기들 교회의 기원이 도마 사도에게서부터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도마 사도는 군다포르 왕에게서 탈출한 후 말라바르 지방으로 내려와서 7개의 교회를 세웠고 서기 72년 7월 3일 마드라스 시 북쪽에 있는 밀라포레 근처에서 순교 당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땅에 아직 적지 않은 슬픔이 남아 있지만 우리는 다시 부활 신앙을 갖고 일어나야 한다. 평강을 선포하시며 성령 충만한 사명자로 나를 사용하기 원하시는 주님의 파송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한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으라” 이 같은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분부하신 말씀의 권면을 가슴에 품고 사명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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