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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부활 신앙(눅24:28-35) 2014.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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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04-20 19:15 조회 19,717 댓글 0
 
나의 부활 신앙(눅24:28-35) 2014. 4. 20
부활주일
 
 
부활 신앙은 기독교인의 믿음의 바탕이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와 같다. 이 땅에는 여러 가지 종교가 있다. 불교, 힌두교, 이슬람, 심지어는 유교도 종교인양 취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종교들은 인간에 의한 것일 뿐이다. 종교라기보다는 일종의 도덕이며 윤리의 강조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2)라고 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요1:4) 생명은 죽음이 이길 수 없는 것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방의 사도가 된 바울은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5-58)고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처럼 귀한 것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은 남녀노유 빈부귀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누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야 한다. 그래야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거듭나고 중생하고 구원 받고 대속 받은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은 헛것이다. 또 우리가 믿는 믿음도 헛것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거짓 증인이 되고 말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 없다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될 것이요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이다.(고전15:20-22)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이 자연의 신비이듯이 죽음을 삼키고 이기는 부활은 하나님 안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신비이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전15:53-54)고 하였다. 이는 이사야 25장 8절의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인용한 말씀이다. 그렇다. 부활은 사망을 삼키고 이기는 능력이다.
 
슬픔과 염려와 근심과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과 무서움과 질병과 가난과 실패와 낙담과 우울감이 폭포처럼 홍수처럼 엄습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생하게 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이 세상에는 언제라도 슬픔이 있다. 평생을 슬픔을 보지 않고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 갈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부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처럼 예수 믿으면 슬픈 마음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91장 1절 찬송대로이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예수 이름 믿으면 영원토록 변함없는 기쁜 마음 얻으리
예수의 이름은 세상의 소망이요 예수의 이름은 천국의 기쁨일세.”
 
우리가 부르는 복음 성가 “살아 계신 주”의 후렴 가사는 부활절 때만 부르고 일 년 내 내 잊고 사는 그런 찬양이 아니다.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 하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오후에 있었던 장면이다. 글로바라 이름 하는 예수의 제자와 또 다른 한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이십 오 리 쯤 되는 엠마오로 내려가면서 예수께 대하여 일어난 일을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그 때에 부활 예수께서 저들 곁에서 가까이 동행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이신 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저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그 때 두 사람은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섰다. 그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이가 예수께 책망하듯이 퉁명하게 말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시오,” 그 말을 들은 예수께서 시치밀르 떼시며 말을 받으셨다. “무슨 일이요.” 그 때에 기다렸다는 듯이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 말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능력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주어 사형 선고를 받게 했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을 구속해 주실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3일째 됐는데 우리 중 몇몇 여인들이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들이 아침 일찍 무덤에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천사들이 예수께서 살아 계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으로 가 보았더니 그 여인들이 말한 대로 그분을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우리말 성경, 눅24:19-24)
 
그 때에 예수께서 저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24:25-26) 그리고는 엠마오에 도착하기 까지 긴긴 시간을 모세의 글과 선지자들의 글을 차근차근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며 가던 중에 이미 엠마오 마을 가까이 까지 도착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그 마을을 지나 다른 마을을 향하여 더 가시려는 듯한 인상을 보이셨다. 그 때에 두 제자들은 예수님을 강권하여 좀 더 머무시길 원하며 집 안으로 모셔 들이고 함께 음식을 먹는 식탁에 둘러앉게 되었다. 그 저녁에 그 엠마오의 식탁에서 저들 두 제자는 변화를 체험하고 은혜를 받고 그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보게 되었다.
 
 
주님을 강권하여 함께 하려는 믿음의 동행(同行).
공부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잘한다. 에디슨의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이다” 라는 말처럼 신앙생활에도 열심히 요구된다. 1879년 10월 22일은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이 진공관 전구를 발명하여 미국 특허청에 발명 특허 출원을 하였다. 그련 결과를 이루기까지 수 없는 실험과 실패를 거듭한 열매였다. 첫 작품은 탄화된 목화실 조각을 전구 안에 넣고 불을 밝혔는데 촛불 30배 밝기의 환한 빛이 15시간이나 주변의 어둠을 환하게 밝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 다음 해에는 목화 실 대신에 탄화한 대나무 필라멘트를 사용해서 1,500시간 동안 불을 밝힐 수 있는 진공 전구를 발명하였다. 25년 후인 190년에 에디슨 연구소의 고문이었던 존 엠블로즈 플래밍이 그 동안의 에디슨의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진공 전구 속에서 직류가 교류로 변환되는 정류 작용을 응용해서 인류 최초로 진공관을 발명하였다. 그 이후 50년 가까이 진공관의 원리를 이용한 열이온 효과와 정류 작용에 기초해서 무선 통신, 라디오, TV와 제 1세대의 디지털 컴퓨터 시대의 문을 열어 왔다. 그 후 오늘 날의 IT 기술 산업의 발전을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의 비약적인 발전을 계속해 가고 있지 않나.
 
인류 역사에 노력이 없이 저절로 된 일이 있는가. 정경화, 정명화, 정명훈 저들 남매들이 어쩌다가 저렇게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겠는가. 저들의 어머니는 국밥집을 경영하면서 열심히 자녀들에게 피아노를 접하도록 하였고 나중 6. 25 피난길에는 부산까지도 전쟁 통에 피아노를 끌고 싣고 다니면서 꾸준하게 피아노 배울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하였다고 한다. 류태형의 <한국인의 열정으로 세계를 지휘하라>는 책은 세계적인 지휘자로 인정받는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일대기를 심층 분석하고 있다. 이 세상에 음악, 미술, 체육, 문학, 의학 연구, 과학 발전 등등 그 어떤 분야의 그 무엇이든지 열정이 없이 성취된 일이 있는가.
 
해는 저물어 가고 하루 먼 길을 함께 걸어온 두 제자는 그가 누구이신지도 제대로 몰랐지만 주님을 강권하는 엠마오에서 묵어가시기를 간청하였다. 그 적극적이고 열심 있는 태도가 부활 예수님을 제대로 경험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왕 예수 믿는 것 예수님을 강권하는 그런 믿음 생활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은혜를 받아도 그만 못 받아도 그만이 아니라 믿음을 얻기 위하여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그런 믿음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도 “구하는 이가 구할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교회를 오래 다녀도 마음이 냉랭하고 별다른 은혜 체험도 없고 싱숭생숭한 상태에 있다면 이번 부활절을 시작으로 예수님을 강권하는 그런 믿음을 키워 가보라. 마가복음 5장 21절 이하에 보면 어느 날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 저편으로 배를 타시고 가셨는데 이미 어떻게 많은 무리들이 알고 그에게로 호숫가에 몰려들었다. 그 때에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께 와서 발아래 엎드려서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셔서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해 주세요.”하고 간곡하게 간청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 회당장을 따라 그의 병든 딸이 있는 곳으로 가고 계셨다. 그 때에 열두 해 동안이나 부인의 하혈병인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이 예수의 뒤로 다가 가서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다. 그 여인은 그 동안 많은 의사들에게 괴로움을 당하였다. 가진 재산도 다 허비하였다. 좋다는 병원을 다 찾아 다녔고 용하다는 의사들도 다 만나 보았다. 좋다는 약은 약대로 안 써 본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 동안 그 모든 일들이 아무 효험도 없었고 병은 더 중해졌다. 마가복음 5장 26절에 그런 설명이 자세하게 나온다. 그런 그 여인이 예수 소문을 들은 것이다. 그녀는 그 수많은 무리들 사이를 헤치고 예수께로 다가가서 뒤에서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 그 당시 그녀의 생각은 “내가 예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막5:28)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예수의 옷자락을 뒤에서 만지는 그 순간에 제 몸에서 혈루 근원이 낳고 치료되는 것을 깨달았다. 예수의 옷자락을 잡는 그 순간에 그녀의 병이 깨끗이 나은 것이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456장의 후렴을 보라.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주가 널 지키며 인도하시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질병, 가난, 실패, 좌절, 절망, 염려, 근심, 걱정, 불안, 초조, 두려움의 늪에서 딛고 일어나서 무리를 헤치고 예수께로 다가가서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강권 할 때에 치유가 임하고 회복이 일어나고 평안과 은총과 축복과 기적이 임하게 될 것이다. 예수와 함께 할 때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본문에 보면 29절부터 31절 사이에 ‘함께’라는 표현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 “함께 머물다 가세요. 날이 저물고 있잖아요.” 예수께서 강권하는 저들의 말을 들으시고 엠마오의 한 집에 들어가셔서 함께 음식을 잡수시기 전에 떡을 가지시고 떼어 축복하는 기도를 해 주셨다. 저들이 간절히 원할 때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권력자와 함께 하고 재벌과 함께 하고 세상의 그 어떤 실력자와 함께 하는 것도 좋지만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할 때에 인생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주 앞에서 눈이 밝아지는 은혜(恩惠).
사람은 육신의 눈도 밝아야 하지만 영의 눈이 뜨여야 한다. 이외수 씨는 <절대강자>라는 책에서 육안, 뇌안, 심안, 영안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하면 육신의 눈, 지식의 눈, 영의 눈이 골고루 다 밝아져야 육과 혼과 영이 골고루 광명한 은혜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3절에서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다. 육의 눈이 밝으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수 있지 않나. 봄여름 가을 겨울과 낮의 해와 밤의 달과 별들의 아름다움과 하늘과 땅과 산과 강과 바다와 꽃과 새와 각종 짐승들과 동물들과 물고기와 아름다운 열매들과 이 세상의 형형 색색의 각양 아름다움을 언제라도 즐길 수 있다. 이처럼 혼의 눈이 뜨이면 지식의 세계가 보이고 미학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음악, 미술, 문학, 역사, 철학을 비롯한 각양 심오한 인간의 지식 세계가 깨달아지고 눈이 열리기 시작한다. 이처럼 영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16절에는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가 누구이신지 알아보지 못하던 저들이 예수께서 축복하는 기도를 해 주시고 눈이 뜨이자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이다. 망원경을 이용하면 천체의 신비가 보이고 현미경을 사용하면 육안으로 보이지 않던 신비하고 세밀한 세계가 보이듯이 예수께서 우리의 영의 눈을 열어 주시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갖 영의 세계가 환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야 신앙생활이 신이 나고 재미있고 기쁘고 감사하고 즐겁고 행복해 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라는 찬양이 절로 나오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 합니까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 합니까
세상의 어떤 것도 비길 수 없네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 합니까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 합니까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 합니까
날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 합니까”
“난 예수가 좋다오”라는 작사자 불명의 찬양도 우리에게 얼마나 익숙한가.
많은 사람들/참된 진리를 모른 채/주님 곁을 떠나 가지만/내가 만난 주님은 참사랑이었고/진리였고 소망이었소/난 예수가 좋다오/난 예수가 좋다오/주를 사랑한다던 베드로 고백처럼/난 예수를 사랑한다오
 
/무서운 짐진자 다 내게로 오라/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이 길만이 생명의 길/참 복된 길이라/난 예수가 좋다오/난 예수가 좋다오/주를 사랑한다던 베드로 고백처럼/난 예수를 사랑한다오
 
/그대가 만일 참된 행복을 찾거든/예수님을 만나보세요/그분으로 인하여/참 평안을 얻으면 나와 같이 고백할거요/난 예수가 좋다오/난 예수가 좋다오/주를 사랑한다던 베드로 고백처럼/난 예수를 사랑한다오
 
믿음의 조상들인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이 모든 이들과 엘리야 엘리사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사야 예레미야 모두 다 학개 스가랴 말리기에 이르기까지 저들은 다 같이 하나님 안에서 눈이 밝아져서 영의 세계를 바라보던 이들이다.
 
가롯 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 사도 바울, 누가, 디모데, 브리스길라 아굴라, 디도를 비롯한 사도 바울 곁의 그 뛰어났던 동역자들 모두가 영의 눈이 뜨여서 주의 은혜를 사모하던 이들이 아닌가.
 
엘리야의 몸 종은 못 보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알았고 보았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일곱 번씩 계속하여 기도하던 엘리야는 영의 눈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본 것이다. 엘리야는 손바닥만한 구름만 보고도 삼년 육 개 월 만에 보내시는 하나님의 큰 비인 것을 알았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열정(熱情).
부활의 복음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그 마음에 열정이 생기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 어느 누구나 부활 예수 만나고 나면 그 부활 복음을 전하고 파서 견딜 수가 없게 된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도마, 마태 등 가롯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와 나중에 그 자리에 채워진 맛디아에 이르기 까지 사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은 성령을 충만하게 받고 열방에 나가서 순교자의 길을 걸으며 예수 부활의 복음을 세계 처처에 전파하였다. 역사는 마음이 뜨거운 사람들에 의하여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역사학자 헤겔은 “역사란 열정있는 사람들의 작품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시고 나사렛에서 자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사역하시다가 붙잡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그 부활의 복음이 지난 이천 년 동안 유럽과 북미주와 남미와 호주와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비롯한 6대주의 처처에 전파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마음이 뜨거워진 복음의 사람들의 덕분이었다. 오늘 날도 하나님은 마음이 뜨거워져서 주님의 복음 전파에 매진할 전도자들을 찾으신다.
 
매 맞아도 감옥에 갇혀도 순교의 순간이 와도 사자의 성난 입과 불과 칼과 창 앞에서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던 부활 신앙의 증인들의 열정이 오늘 날 세계 열방의 기독교 복음을 전파해 온 힘이다.
 
힘이 있는가, 재물이 있는가, 건강이 있는가, 지식이 있는가, 거기에 복음의 불이 붙고 마음이 뜨거워 져서 한 시대 부활 복음 전파에 공헌하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자.
 
이 땅에 56,000여개의 교회들과 수많은 기독교 대학과 기독교 초중고등학교들과 기독교 병원과 기독교 복지 시설들의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오늘 날은 담을 넘는 가지가 되어 창대하지 않나. 지난주에도 몇 분 목사님들과 의논 할 일이 있어서 차를 함께 타도 이동하면서 신촌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 앞을 지나면서 이야기 나누었다. 그 아카시아 동산 언덕 자락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찬 대학의 빌딩 숲 가장 앞 길 언덕 자락에 하늘을 가리듯이 거대한 빌딩으로 세워진 연세대세브란스 병원을 보라. 세브란스 한 사람의 미지의 나라, 전쟁과 가난과 고아와 과부가 넘쳐 나던 비극의 나라에 보내준 사랑의 씨앗이 오늘 날 과 같은 거대한 겨자나무가 되게 한 것이다.
 
남극은 지구상에 남아 있는 가장 마지막의 미개척의 땅이다. 그 곳에는 펭균과 물개와 극한대의 여건에서 생존하는 지의류 식물들과 그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새들 말고는 인간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땅이다. 평균 기온이 영하 89도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 다음으로 큰 땅이다. 그러나 남극은 평균 1600미터 두께의 거대한 얼음으로 뒤 덮혀 있다. 지금은 적게는 동절기에 1,000명에서 많게는 하절기에 4,000명 정도의 각국에서 파견된 연구원들이 일정한 기간씩 머물 뿐이다. 국제 협약에 의하여 광물 채굴 금지 조역이 체결되어 있고 생태 환경 보존 원칙을 철저히 지켜 나가야 하다. 그런 동토의 땅에 이미 1775년에 영국의 제임스 쿡이란 탐험가가 그 곳을 탐험하고 남극권을 지난 적이 있다. 남극 탐험의 신화적인 열정가는 영국의 어니스트 새클턴Ernest Shackleton(1874-1922)이다. 그는 100년 전인 1914년부터 이년 동안 최초의 남극 대륙 횡단을 시도하였다. 배가 난파된 상황에서 634일 만에 섀클턴 자신을 포함한 28명의 대원을 모두 다 구조해서 '위대한 실패'로 기록을 남긴 장본인이다. 그는 네 번째 남극 텀험 길에 나섰다가 48살 때에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역사는 지난 1,000년 동안에 가장 위대한 탐험가 10명을 꼽는 중에 5위에 거론되는 위대한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가 직접 쓴 자서전 외에 그에 관한 책은 인터넷 아마존 서점에 290여 종이 넘는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6번째로 남극 탐험에 참여하고 있는 나라가 되었다.
 
 
마음 뜨거워 진 엠마오의 두 제자가 저녁을 먹다 말고 예루살렘으로 그 밤에 다시 되 돌아가서 숨어 있던 열 한 제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예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한 것이다. 복음은 전할 때 의미가 있다. 기쁜 소식은 전할 때 그 기쁨이 배가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8-20)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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