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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2:1-12) 2014.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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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04-06 06:40 조회 19,858 댓글 0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2:1-12) 2014. 4. 6
 
 
 
예수님 당시에나 오늘 날이나 쉽게 치료되지 않는 질병 중의 하나가 중풍병이다. 이곳에도 둘레길 산행을 위해서 등산복을 입고 걷는 주민들 중에서 한 창 젊은 분인데 중풍으로 걷는 보행이 불편하고 한 쪽 몸이 기울고 손과 팔의 동작이 불편한 분을 간혹 볼 때 마음이 심히 아프다.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다르게 제 1장부터 예수께서 각색 병자를 고치시는 치유 기적으로부터 말씀을 기록해 주고 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의 회당에 들어가셨다가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소리 지르는 것을 보셨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1:24)고 말하자 예수께서 그를 꾸짖으셨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그 때에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다. 이를 지켜 본 많은 사람들이 다 놀라며 서로 말했다.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막1: 27) 귀신을 내어 쫓아 불쌍한 사람을 고치신 이 소문이 온 갈릴리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회당에서 나오신 예수는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에 들어 가셨다. 그런데 그 집에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다. 아마도 남편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아 집을 비우고 늘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중에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고생으로 하자 베드로의 아내가 친정어머니를 모셔다가 간병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형편을 알게 된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니 열병이 떠나가고 예수와 그의 제자 일행들을 섬길 정도로 건강을 회복하였다. 마가복음 1장 32절에 보면, 해가 지고 저물어 갈 즈음에 갈릴리 근동에 예수의 소문을 들은 이들이 모든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 왔다. 온 동네 사람들이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 문 앞에 모여와서 둘러섰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예수사랑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리면 병이 잘 낫는다더라.” 이런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 아마 우리 교회가 금방 부흥하고 금방 차고 넘치게 될 것이다. 우리 중에 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고침 받고 치유 받고 간증하는 그런 은혜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해가 기울어 가는 그 날 저녁 시간에 예수께서는 예수를 찾아 온 수많은 각색 병자들을 고치시고 많은 귀신 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 내셔서 깨끗하게 해 주셨다. 그리고는 그 다음 날도 새벽 일찍이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다. 이미 다음 날 아침에도 예수님을 찾아 나선 이들이 많았다. 시몬 베드로와 그와 함께 하는 자들이 이 사실을 예수께 알리자 예수께서는 온 갈릴리의 여러 마을과 여러 회당을 일일이 찾아다니시면서 전도하시고 귀신들을 내어 좇으셨다. 그 때에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찾아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였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그 나병 환자를 불쌍히 여기시며 손을 내밀에 그에게 대셨다. 남들은 나병 환자를 만나면 멀리하려 하고 경계하는데 오히려 예수는 가까이 가셔서 그의 나병으로 고생하는 몸에 손을 대셨다. 그리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그에게서 나병이 떠나가고 깨끗하여 졌다. 남들에게 소문 내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으나 이 소문은 사방으로 펴져 나갔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모여 들었다. 여러 날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 가셨다. 예수께서 어느 집에 들어 가 계시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 마다 수 많은 사람들에게 각색 병을 고치시는 분으로 소문이 퍼져 나갔다. 그 날도 벌써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계신 곳까지 몰려들었던지 문 앞에 까지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예수께서는 그의 곁에 몰려 든 무리들에게 ‘도’道를 말씀하고 계셨다. 이는 “천국 즉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밝히 설명하여 주는 진리 전달의 복된 소식”이란 뜻이다. 이는 헬라 말로는 로고스logos 혹은 레고lego 라는 단어 인데 ‘셈하다, 말씀하다, 설명하다’라는 뜻이다. 이는 마가복음 4장 11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란 표현과도 통하는 말씀이다.
 
그 때에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를 찾아 왔다. 그러나 그 집에 문 밖에까지 너무나 사람이 많아서 예수 가까이 까지 그 중풍병자를 보여 드릴 수가 없었다. 그 네 사람들은 그 중풍병자를 데리고 다시 돌아가지 않고 그 집의 지붕을 뚫어서 중풍병자를 침상 째로 달아 내렸다. 그 장면을 상상하여 보라. 예수께서는 집 안에 계시고 예수를 만나게 하려고 중풍병자를 지붕을 뚫은 구멍으로 침상 째로 달아 내리는 그 장면 말이다. 이 정도의 열심이면 그 어느 누가 감동 받지 않겠는가. 본문을 좀 더 자세히 묵상하자.
 
 
그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
그 수많은 사람들은 중풍병자를 들것 째로 지붕의 구멍을 뚫어 내리는 네 사람의 그 열심 있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길 원하신다. 지난 한 주간을 어떻게 살았는가. 믿음으로 살았는가 아니면 의심과 불신과 회의에 젖어 살았는가.
 
마가복음 4장 35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해가 저물어 가는 시간에 갈릴리 호수를 건너서 저 편으로 가는 배를 타셨다. 많은 무리를 떠나서 호수를 건너가시는 예수께서 타신 그 배 곁에 여러 척의 다른 배들도 함께 가고 있었다. 갈릴리The lake of Galiree 호수는 둘레가 53킬로미터나 된다. 동서의 길이가 평균 10킬로미터이고 남북의 길이가 21킬로미터이고 물의 깊이가 평균 43미터인 대단히 큰 호수이다. 디베랴The lake Tiberias 혹은 게네사렛The lake of Gennesaret 호수라고도 이름 하는 이곳은 그래서 호수 혹은 바다라고도 부르고는 하였다. 그 바다와 같이 큰 호수에 겨울이나 봄철에 골란 고원지대의 절벽을 중심으로 기후의 이상이 생기면서 동풍이 불면 갈릴리 호수의 파도가 거세진다. 그런데 예수께서 함께 다시고 호수를 건너던 바로 그 때에 큰 광풍이 불었다. 심한 물결은 배에 부딪쳐 들와 왔고 배 안에까지 물이 가득하게 되었다. 그 즈음에 예수께서는 얼마나 고단하셨던지 배의 고물을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일어나 돌보지 아니하십니까” 그 정도의 형편에서도 예수님이 잠이 들어 있을 정도였으면 예수님의 일과가 얼마나 고단하셨는지 상상함직하다. 그 때에 예수께서 깨어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셨다. 그리고 풍랑이 심하게 일고 있는 갈릴리 호수를 향하여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리하시자 바람과 파도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아주 잔잔해 졌다. 거기 마가복음 4장 39절에 보면 갈릴리 호수를 ‘바다’라고 하였다. 그처럼 갈릴리는 큰 호수였다. 예수께서는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4:40) 그 때 제자들은 서로 심히 두려워하면서 말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요즘 무엇 때문에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시는가. 당신의 인생사에 부는 큰 광풍이 무엇인가. 당신 주변에 부는 바람과 치는 파도가 어떠한가.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 현장에 예수께서도 함께 계시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풍랑 중에 고물을 베고 주무시고 계셨고 단지 제자들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며 “우리가 죽게 되었으니 우리를 좀 돌보아 달라”고 예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들은 예수의 제자들처럼 어려운 일 만나면 어렵고 힘 든 일 만나면 힘이 들고 괴로운 일 당하면 괴롭고 답답하면 답답하고 아프면 아프고 슬프면 슬프고 실패하면 두렵고 병들면 그 병 앞에서 나약해 지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분량이다. 그러나 본문의 중풍병자를 메고 온 이 네 사람의 믿음은 달랐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형편이 못되니까 그냥 되돌아 간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방법을 찾았고 지붕이라도 뚫고 예수님 계신 곳에 중풍 병자를 끈으로 매어 달아 내리는 일이라도 감행 할 정도의 적극적인 기질을 가진 이들이었다.
 
예수께서는 저들의 그러한 행동을 믿음 있는 행동으로 귀하게 보신 것이다. 믿음은 기적을 보게 하는 시작이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다. 지금의 나의 모습은 지난 날 크고 작은 믿음과 불신의 사이에서 씨름하며 살아온 작품이다. 누구나 지금 나의 모습 속에는 믿음과 의심의 두 강 줄기가 같이 흐르고 있다. 그러므로 의심의 강줄기는 메마르고 믿음의 강줄기는 넘쳐흐르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살아가자.
 
개인이든 가정사이든 어떤 공동체, 어떤 기업, 어떤 국가적인 일이든,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제적인 그 무엇이든 믿음에 바탕 해야 한다. 장사를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이나 사업을 새롭게 시작하는 이들이 나는 어차피 잘 안될 일을 시작하고 있다. 그런 생각과 그런 믿음으로 시작한다면 잘 될 일도 안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잘 되리라는 믿음, 고침 받으리라는 믿음, 나으리라는 믿음, 회복되리라는 믿음, 번성하고 창대하고 왕성해 지고 담을 넘는 가지 인생, 그런 가정, 그런 가문, 그런 범사가 되리라는 희망이 넘치는 믿음을 갖고 하는 일과 대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여기 이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은 그 환자의 가족이든, 형제들이든 혹은 일당을 받고 그를 들것에 메고 온 사람들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3절에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왔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아마도 중풍병자의 부모거나 남편이거나 아내거나 그 누구일 것이다. 성경은 그 중풍병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가 몇 살 쯤 되었는지 그런 내용을 전혀 소개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예수께로 모시고 가지고 할 때에 이미 그런 대화를 충분히 하였을 것이다. “이번에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가족이 중풍병에서 고침을 받을 것이다. 깨끗이 나을 것이다. 반드시 치료 될 것이다.” 그런 부픈 기대를 갖고 네 사람에게 메어다 달라고 부탁하였을 것이 분명하지 않나. 그러하다 보니 그 네 사람들도 이 중풍병자를 예수께 보여 드리기만 하면 반드시 나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들것째로 매달아 내릴 결심을 하지 않았겠나.
 
지금 아니 요즘 무슨 일로 괴로워하고 답답해하고 우울해 하고 힘 겨워하고 불안해 하고 초조해 하고 두려워하는가. 병인가. 경제적인 것인가. 아니면 마음 속에 그 어떤 불안 그 어떤 초조 그 어떤 우울한 기도 제목인가. 예수 만나야 한다. 예수께 문제를 보여 드려야 한다. 예수께서 직접 보셔야 한다. 예수께서 직접 설명을 들으셔야만 한다. 예수님이 대답이다. 예수님 만나면 해결 되지 않을 문제란 없다. 예수님은 천만가지 문제의 정답이시고 해답이시다. 예수님만이 치료자이시고 해결자이시고 상담가이시고 안내자이시고 도움이 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찾아오고 예수님께로 찾아 와야 한다. 하나님께로 걱정과 근심과 염려와 기도 제목을 가지고 와야 한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시편 18편에 보면 그 시작하는 표제어의 설명에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로 노래하였다’는 설명이 나온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시18:1-3)라고 하였다.
 
우리가 이를 복음성가로 곡을 붙여 부르지 않나.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한 번 다 같이 힘차게 부르자.
 
 
죄 사함을 선포하신 예수.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의 보편적인 생각은 병은 죄와 관련이 없지 않다고 여겼다. 더군다나 중풍병에 대한 생각이 그러하였다. 중풍병은 “뇌의 어떤 부분에 혈액 공급량이 줄어들거나 뇌내출혈이 일어나 생기는 병으로서 몸의 한쪽이나 양쪽 모두가 마비되며, 말을 못하거나 음식을 먹기도 힘들어지는 등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병”이다. 예수께서 그 중풍병자에게 대하여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시자 그 곳에 있던 어떤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신성모독’神性冒瀆하는 말을 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유대인들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죄 사함을 말씀하시자 당황하기도 하였고 못마땅하게도 여긴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스스로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권세가 동일하게 자신 속에 있음을 모든 무리 앞에 선포하신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요한복음 10장 30절에 보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선언을 하셨다. 수전절이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때는 겨울이었다. 성전의 솔로몬 행각에 유대인의 무리들이 모여서 예수를 둘러쌌다. 저들은 예수께 대하여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느냐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하라”하고 예수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지를 밝히라고 재촉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다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5-29)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말씀이셨다. 이때에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서 예수를 쳐 죽이려고 하였다.
 
요한복음 14장 9절에서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Anyone who has seen me has seen the Father. How can you say, `Show us the Father'?)는 말씀으로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제자 빌립의 요구에 대하여 명쾌한 대답을 해 주신 적이 있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연합한 한분이시며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사야 9장 6절과 7절에서 예언된 메시아 예언의 내용처럼 예수님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신 하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구세주이시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권능이 있으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죄 사함을 선포하신 것은 예수 안에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권세가 내재되어 있으시다는 사실을 공언하신 것이다. 빌립보서 2장 6절 말씀에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사하시는 권세자이시다. 우리가 부르는 보혈 찬송의 한결 같은 가사가 무엇인가. 예수는 죄 사하는 구주이시다.
 
250장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를 보라.
 
1.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 받기를 원하네
내 죄를 씻으신 주 이름 찬송합시다.
 
2. 죄악을 속하여 주신 주 내 속에 들어와 계시네
십자가 앞에서 주 이름 찬송 합시다
 
3. 주 앞에 흐르는 생명수 날 씻어 정하게 하시네
내 기쁨 정성을 다하여 찬송 합시다
 
4. 내 주께 회개한 양심은 생명수 가운데 젖었네
흠없고 순전한 주 이름 찬송 합시다
 
[후렴] 찬송 합시다 찬송 합시다 내 죄를 씻으신 주 이름 찬송 합시다
 
 
그 후에 이어지는 ‘회개와 용서’에 관한 찬송가를 보면 거의 모든 가사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죄 씻음을 받고 죄에서 자유함을 받고 죄에서 구원 받은 것을 찬송하는 찬송들로 넘쳐 난다. 그렇다.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예수 믿어 무슨 복을 받고 무슨 응답을 받고 무슨 기도 제목이 해결되고 그런 것도 좋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일어나 자리를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예수.
사람이 건강할 때는 덜 하지만 몸에 병이 찾아오고 연약해 지고 몸이 허약해지면 자칫 마음도 약해지기 쉽다. 그러므로 주님은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환자에게 죄 사함을 먼저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마음과 같은 나의 마음의 우울과 낙담과 답답함과 절망과 포기와 의심과 불안하고 초조하고 괴롭고 힘들고 속이 상하고 슬퍼지는 모든 죄와 악한 감정의 감옥에서 벗어나길 원하신다. 그리고 새 힘을 얻고 강건해지고 활력을 얻고 일상생활을 다 감당할만한 그런 건강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크게 두 가지 선언을 해 주셨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예수님의 치유 선언은 단계적이고 구체적이다. 죄 사함을 먼저 선포하신 후에 중풍병으로 드러누워 있는 네 사람이 들어 메어다 놓은 그 누워 있던 자리에서 벌떡 기운을 차리고 일어날 뿐만 아니라 그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벌떡 일어나서 자기가 누워 왔던 침상을 들고 걸어 나갔다. 이를 지켜 본 많은 사람들이 다 놀라워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지금 무엇 때문에 누워 있는가. 건강의 이상인가. 마음의 우울인가. 무엇이 속이 상하여 요즘 불안과 괴로움과 답답함과 미움과 시기와 불만과 증오심과 절망의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상에 누어서 괴로워하고 있는가. 오늘 교회에는 왔지만 혹시 나의 심정이 그러하지 않나. 침상에 누워있는 중풍병자와 같은 마음은 아닌가.
 
예수님은 그런 나를 향하여 지금 말씀하신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왜 예수께서는 그에게 먼저 집으로 가라고 하셨을까. 그 동안은 가족들 중의 그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면 먹는 일, 마시는 일, 얼굴과 손과 몸을 씻는 일, 양치질 하는 일, 화장실에도 마음대로 갈수 없으니 뒤를 해결하는 일 등등 모든 크고 작은 일상생활을 그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한 순간도 스스로 해결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처지였다. 숨만 쉴 뿐, 눈만 깜빡 깜빡 할 뿐 늘 그랬다. 그런 그가 몇 년 만이지는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으나 지금 예수와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메어다 준 그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서 스스로 그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장면인가.
 
오늘, 지금 예수께서 내게 말씀하신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남들은 예수께 대하여 하나님을 모독했다 하며 못 마땅해 하고 있는 동안에 예수께서는 이 불쌍한 중풍병자를 깨끗하게 고쳐 주시고 그가 스스로 자기 자리를 정리하여 들고 제 집으로 돌아 갈 정도의 힘을 공급해 주셨다.
 
우리 주님, 우리 예수님은 나에게 있어서 그런 분이시다. 오늘도, 지금도 예수께서는 나에게 말씀하신다. 죄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스스로 소외되고 우울해 하고 심각해하고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신을 끄집어 당겨 자석처럼 드러누워만 지내게 했던 증거물인 그 자리를 들고 떳떳하고 힘 있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다.
 
“일어나라, 네 상을 가져라, 집으로 가라.” 이 같은 주님의 이 명령은 그대로 다 응했고 이 불쌍했던 중풍병자가 벌떡 일어나 그렇게 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 놀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우리 모두 다 이 좋은 계절, 부활의 새벽이 다가 오는 이 사순절기에 그런 새 은혜를 받고 새 응답을 받고 새 축복을 받고 새 힘을 공급 받자. 그리고 주어진 건강, 주어진 새 기회, 주어진 축복의 여건을 안고 세상 죄악에 다시 빠지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자.
 
가이드 포스트(2014년 4월호)에 ‘사명’이란 찬양을 작사 작곡한 이권희 P. D에 대한 특집 기사가 실렸다.
 
“주님이 홀로 가신 그 길 나도 따라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 가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 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 주오.”
 
하는 찬양 말이다. 이권희 P. D는 22년 전인 1992년도에 그는 잘 나가는 20대 초반의 ‘헤비메탈’이란 록그룹의 멤버였다. MBC 록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받은 멤버였다. 큰 액수를 제안 받고 MBC와 계약도 마친 상태였다. 당시에 유명하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백밴드로도 활동할 정도의 출중한 실력을 갖춘 팀이었다. 그런 그가 군대를 다녀 온 후에 집안이 IMF 때 기울고 부모님은 지방으로 내려가고 자신은 추운 겨울, 서울 변두리에서 가난과 씨름하며 춥고 수도도 없는 냉방에서 방 안에 있는 물이 얼 정도의 환경에 버려진 아이 같은 날들을 지낸 적이 있었다. 잘 나가던 세상 보컬 팀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경험한 때였다. 그 때에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그 기간의 고난의 영성이 고스란히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은혜로 그의 고백과 찬양 속에 배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가난한자, 고아, 홀로 남편 없이 힘겹게 살아가는 여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던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지금은 복음성가인 CCM의 중심에 서는 인물이 되었다. 그가 가장 은혜로 붙드는 말씀은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11절까지라고 했다. 그는 고백한다.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의 마음을 발견했어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복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보게 되었어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 말입니다.”
 
사순절기가 지나가고 있다. 다음 주일은 예수께서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신 종려 주일이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평화의 영원한 왕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이 나의 마음에, 나의 가정에, 나의 가족들의 마음에, 우리 교회에 찾아 와 주시기를 열망하자. 우리 민족 가운데, 북한, 그리고 이 땅의 압제 받고 불쌍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찾아 와 주시기를 기도하자. 중풍병자와 같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죄악에 붙잡혀서 꼼짝달싹 못하는 모든 백성들 가운데 찾아 와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하자. 그리고 나를 향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그리고 이제부터 중풍병자의 땀내 나는 침상과 같고 누더기와 같은 지난날의 죄악의 결박을 훌훌 털어 버리고 힘 있게 주님의 은혜 가운데 새로운 삶을 살아가자.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사명’이란 찬양을 힘차게 부르며 지칠 줄 모르는 사명자의 삶을 살아가자.
 
예수께서 지금 나에게 말씀하신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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