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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위로부터 난 지혜(약3:13-18) 2015.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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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5-09-23 22:10 조회 19,135 댓글 0
 
위로부터 난 지혜(약3:13-18)           2015. 9. 20


2015. 9. 19(토) 논산 훈련소 교회에서 3416명의 훈련병 세례식이 있었다. 우리 교회에서 군대에 간 김준섭 청년을 만나 세례 하였다. 감동의 시간이었다.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라면 선한 행실을 하여야만 한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은 두 부류이다. 그 첫째 부류는 땅 위의 것과 정욕의 것과 귀신의 것에 붙잡혀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리고 다른 한 부류는 위로부터 난 지혜를 덧입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우리는 가끔 씩 아니 아주 자주 사회 각계각층의 저명인사들 중에서 “설마 그 사람이 정말로 그랬을까”하는 충격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사회적으로 어렵게 주어진 1%의 고위직에서 부끄럽게 물러나는 이들을 대할 때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범죄의 결과로 감옥에 가거나 사회적으로 매장되어 버리는 경우를 본다. 왜 그런 것일까. 겉으로 주어져 있는 신분으로 하면 어느 대학을 나왔다느니, 전공이 무엇이라느니, 무슨 시험에 합격했다느니, 사회적으로 어떤 지위에 올랐다느니, 연봉이 얼마라느니, 어떤 집에서 산다느니 뭐 이런 것들은 그 사람의 껍데기와 같은 것들이지 그 사람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력서에 화력하게 빼곡하게 써 내려가는 그 모든 것들도 어찌 보면 그것이 그 사람 자체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 것들은 그 사람의 허상일 뿐이다. 그 인간 자체의 실상은 그런 외양적인 것과 상관이 없다. 그 속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 하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인 기준가 잣대로 재어 보어야 하고 성경적인 저울로 달아 보아야 한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바벨론의 벨사살 왕이 귀족 일천 명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벌인 장면이 나온다. 벨사살은 느브갓네살 왕의 아들로 아버지 왕의 대를 이어 왕이 되었다. 천명의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왕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흥이 깊어 가자 명령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 온 금 그릇과 은그릇을 가져 오라.”고 하였다. 모두가 술에 취하고 흥이 깊어 가자 저들은 한 결 같이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였다. 그 때에 왕궁의 연회장 벽에 사람의 손가락 들이 나타나서 촛대 맞은편의 석회벽에 글자를 쓰기 시작하였다. 왕이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갑자기 왕의 안색이 굳어지고 생각이 번민하고 왕의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였다. 왕의 두 무릎이 부딪힐 정도로 두려움이 엄습하였다. 왕은 술에 취한 채로 크게 소리 질렀다. “어느 누구든지 저 벽에 쓰인 글씨의 뜻을 해석하는 자는 자주색 옷을 입게 하고 목에 금 사슬을 걸어 주고 나라의 셋째 통치자의 지위에 앉히겠다.”고 하였다. 나라 안에 온갖 술객, ,술사, 점쟁이가 다 불려 나왔으나 벽의 그 글씨를 해석하지 못하였다. 그 때에 왕비가 그 연회장에 들어 와서 다니엘을 초청하여 그 글씨의 뜻을 설명 받기를 제안하였다. 연회 에 불려 나온 다니엘은 왕 벨사살이 듣기에 좋은 해석을 한 것이 아니라 벽에 쓰인 글씨의 뜻을 사실대로 해석하여 주었다. 그 글씨의 뜻을 해석하기 이전에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벨사살의 선친 느브갓네살도 못마땅하게 여기셨을 뿐만 아니라 대를 이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높이며 예루살렘 성전의 그릇에다 술을 부어 마셔 대는 만용을 책망하였다. 그리고 벽의 글씨인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쓰인 글씨를 해석하였다.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는 뜻이라고 하였다.  벨사살 왕은 그 날 밤으로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게 하고 금 사슬을 목에 걸게 하여 주었다. 그리고 전국에 조서를 내려서 다니엘을 국가의 세 번째 통치자로 임명한다고 공포하였다. 

하나님은 그 날 밤으로 갈대아의 왕 벨사살의 목숨을 거두어 가셨다. 결국 나라의 주권은 메대 사람 다리오 왕에게 넘어 가고 말았다. 다니엘은 새로운 왕국 메대의 다리오 왕의 곁에서도 그의 총애를 받게되었다.

본문 말씀을 공동번역성경으로 다시 읽으면, 

13. 여러분 가운데 지혜롭고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답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주도록 하십시오. 
14. 여러분은 마음속에 고약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을 품고 있으니 공연히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15. 이런 지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며 동물적이며 악마적인 것입니다. 
16.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이 있는 곳에는 분란과 온갖 더러운 행실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17. 그러나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는 첫째 순결하고 다음은 평화롭고 점잖고 고분고분하고 자비와 착한 행실로 가득 차 있으며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18.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평화를 심어서 정의의 열매를 거두어들입니다. 

이다. 야고보가 말씀하는 ‘위로부터 난 지혜’는 무엇인가. 17절에 보면 여덟 가지를 교훈한다.

성결(聖潔).
성결 혹은 순결이란 하나님의 말씀의 속성이며 곧 하나님 자신의 속성을 대변하는 말씀이다. 인간은 결코 성결하지 못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인간이 ‘성결’한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길은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세상에서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를 덧입을 때에 성결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음을 권고하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시12:6)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은처럼 순결한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또한 은처럼 순결한 것이다. 성도의 삶은 은처럼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공급 받을 때에 내 속에 있는 죄와 악이 씻김을 받고 성결한 영을 지닌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기에 죄를 멀리하시고 죄를 미워하신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성결한 영으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길 원하시자 세례 요한은 거부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하고 말씀하시자 세례 요한이 허락하고 예수께 세례를 행하였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예수 위에 임하였다. 그리고 그 때에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그렇다.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들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결한 아들이셨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구주로 영접할 때에 우리 각 사람의 마음속에서 죄와 악이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결의 영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은혜는 일회적인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다. 계속하여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유지되어야 한다.

요즘은 유리 건물이 많다. 사무실 빌딩의 출입문도 유리문으로 되어 있다. 문틀까지도 유리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유리문을 깨끗하게 관리하기 위해서는 손의 지문 자국하나라고 남지 않고 바람에 날리는 먼지 하나라도 쌓이지 않도록 아침저녁으로 닦고 문질러서 관리하는 것을 본다. 

우리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매 순간마다 성결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을 지켜 가야 한다. 성결한 삶이 무엇인가. 본문에서 거론하는 시기, 다툼, 자랑, 거짓, 혼란함과 모든 악을 제거하여야만 한다. 

420장 찬송가는 성결한 삶을 주제로 지어진 찬송가이다. “너 성결키 위해”라는 제목의 찬송가 말이다. 성도가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결한 삶을 추구하는 것인가를 교훈한다.

1. 너 성결키 위해 늘 기도하며 너 주안에 있어 늘 성경보고 
온 형제들 함께 늘 사귀면서 일하기전 마다 너 기도하라 
2. 너 성결키 위해 네 머리 숙여 저 은밀히 계신 네 주께 빌라 
주 사귀어 살면 주 닮으리니 널 보는 이 마다 주 생각하리
3. 너 성결키 위해 주 따라가고 일 다급하여도 당황치 말고 
참 즐거울 때나 또 슬플 때나 너 주님만 믿고 늘 따라가라 
4. 너 성결키 위해 늘 안심하며 네 소원을 주께 다 맡기어라 
너 성령을 받아 주 섬겨 살면 저 천국에 가서 더 잘 섬기리


화평(和平)
성도가 하늘로부터 난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맞다면 지혜로운 사람답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주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화평한 인간관계를 추구하는 성도라면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겸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에이레네’ 즉 화평한 관계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물론 세상적이거나 정욕적이거나 마귀적인 것과 화평해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화평하고 가족과도 화평하고 이웃과도 화평하여야 한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라고 하였다. 예수님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상과 불화하여야 한다. 이를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고 하셨다. 믿지 않는 가족 간에 영적 불화가 일어나서 하나님의 영과 세상의 영 사이에 불화와 갈등이 깊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 영적 불화 후에 찾아오는 복음의 승리를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출발이다. 그래야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8)는 예수의 교훈을 제대로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화평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화평할 수 있겠는가. ‘벨리알’이란 히브리말로 “‘부도덕하고’, ‘가치 없는 자’, ‘건달’, ‘야비한 자’, ‘사악한 자’라는 뜻이 있다. 그렇다. 화평을 위로부터 덧입는 지혜로운 성도라면 사악한 마귀의 편에 서지 말고 그리스도의 편, 예수의 편, 성령의 편에 서야 한다. 예수는 둘로 하나를 이루신 화평의 주인공이시다. 예수는 막힌 담을 허셔서 하나 되게 하시는 화평의 영이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2:14) 뿐만 아니라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5-16)고 하였다. 그러므로 화평을 이룬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널리 전하세 모두 찬양하며 주의 사랑을 전하세  모두 함께 예수님 사랑을 세상에 널리 알리세”

이런 찬양을 입으로만 부르지 말고 가슴으로 부르고 마음으로 부르고 영으로 부르는 진심으로 서로가 주님 안에서 하나 되는 화평을 이루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관용(寬容)
관용 즉 너그러운 마음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이시다. 길이길이 오래 도록 참으시며 용서하시고 회개하고 변화되어 하나님의 자녀다운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곧 관용의 마음이시다. 나의 마음을 뒤 집어 놓는 상대방의 도전적인 자극이나 논쟁 앞에 거친 논쟁으로 대항하지 않고 꾹 참고 화를 다스리는 마음이 관용이다. 예수는 십자가 좌편의 강도가 조롱하는 조롱의 말을 다 들으시고 너그러움으로 관용으로 대하셨다. 예수께서 붙잡히시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새벽 시간에 칼을 꺼내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 버린 베드로의 혈기에 대하여도 “그것 까지 참으라”고 관용 즉 너그러운 마음에 대하여 교훈하셨다. 

사도 바울도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고 하였다. 고린도후서 10장 1절에 보면 성도들을 대하는 사도 바울 자신의 마음을 소개하면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라는 말씀으로 ‘관용’하는 마음가짐을 강조하였다. 디모데 전서 3장 3절에 보면 교회 지도자의 자질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라고 하였다. 

관용은 성숙한 신앙 인격을 가진 성도의 모습이다.


양순(良順)
양순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고 순종하여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유페이데스’라는 이 단어는 성경에 이 곳에만 단 한번 소개 된 말씀이다. 공동 번역 성경에 보면 하나님 앞에서 고분고분한 상태라고 번역해 놓았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가 말을 길 들이는 솜씨를 가진 조련사에 의해서 주인에서 순종하는 훈련된 준마로 변한 상태를 양순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양순해 지기 위해서는 그 가슴 속에 십자가 보혈의 복음이 영접되어야 한다. 나의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 안에 매 순간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셔서 나를 다스려 주셔야 한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셔야만 한다. 내 안에 사단 마귀가 떠나가고 성령께서 오셔서 나를 주장하셔야만 한다. 나를 주장하고 나를 이끌고 나를 다스리는 것이 내 자아가 아니라 주님이셔야 한다. 그런 상태가 양순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양순한 삶을 위해서는 매 순간마다 크고 작은 결정과 판단과 대화와 모든 일들 앞에서 하나님께 여쭙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주님과 동행하려는 기도와 간구와 말씀묵상과 말씀 적용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성경, 십자가, 폼 크린싱 크림, 샴푸, 쵸코렛 바, 몽쉘 통통, 캔 콜라, 기독교 서적 한권” 포켓 용 성경책을 앞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십자가를 목에 걸어 주었다. 그 성경에 야전잠바 주머니에서 꺼내져서 읽히고 연구되고 암송되고 묵상되고 적용되는 말씀의 사람이 되고, 십자가를 목에 걸고, 군번줄에 걸고 기도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말씀의 군대가 되어야 한다. 얼굴 닦는 것도 좋고 입에 달고 혀에 맛있는 것 먹는 것도 좋지만 오늘 날 젊은이들과 노인 어린이 할 것 없이 그 누구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어야 한다. 

요한 계시록 10장에 보면 일곱 번째 천사에 대한 장면이 나온다. 그 힘센 천사는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 왔다. 그 머리 위에는 무지개가 있었다. 그 얼굴은 해 같이 빛났다. 그 발은 불기둥 같았다. 그 손에는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있었다.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 있었다. 천사의 목소리가 사자가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것 같았다. 천사가 말할 때에 일곱 우레 소리처럼 들렸다. 그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천사가 말하였다. “네가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달리라.” 천사의 말씀에 순종하여 두루마리를 갖다 먹었다. 그 두루마리의 맛이 입에는 꿀 같이 달았으나 먹고 난 후에 배에서는 쓴 맛이었다. 사도 요한은 이처럼 순종의 사람이요 양순한 사도였다. 

양은 목자의 인도하심 앞에 고분고분하여야 한다. 그래야 양 자신에게 유익하다. 곰과 사자와 이리와 늑대와 같은 맹수가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선한 목자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고분고분한 양과 같은 삶을 살아갈 때에 그 자신에게 유익이 있고 축복이 있을 것이다. 

에서는 언약의 조상 아브라함의 손자였지만 장자의 권한을 동생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넘길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살아가지 못한 상징적인 인물이 되고 말았다. 말라기 1장 2-3절과 로마서 9장 13절에 보면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말씀이 반복하여 나오고 또 다시 인용되었다. 히브리서 12장 16절은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나 양순한 마음이 떠나고 말면 삼손이나 사울 왕이나 가롯 유다처럼 되고 만다. 거창하게 시작하였다가 나중이 잘못된 사사 삼손, 왕으로 부름을 받을 때에 짐 보따리에라도 숨을 정도로 부끄러움을 타고 겸손한 상태에서 출발했던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다. 그런 그가 나중에는 몹시도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리고 그를 왕 삼으신 것을 하나님이 후회하실 정도의 악하고 거만하고 불순종하는 왕으로 변질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양순한 마음이 떠났기 때문이다. 남북 분열 왕국 시대의 39명의 왕들 중에서 적지 않은 왕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절대 권력을 누리며 해와 달과 별들을 섬기고 금, 은, 놋, 돌, 나무로 깎아 만든 우상에게 절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려 하지 않았다. 예수의 제자 중의 가롯 유다고 그랬다. 가롯 유다는 예수의 제자로서의 부르심을 경홀히 여긴 채 마귀에게 사로잡혀 불행한 인생을 끝내고 말았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양순하여야 한다. 양순함으로 하늘로부터 난 지혜이다. 


긍휼(矜恤)full of mercy
하나님은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롬9:15)고 하셨다. 긍휼이란 막연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상대방의 불쌍하고 안타까운 모습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예수님의 천국 비유가 나온다. 아버지에게 일찍이 유산을 달라고 해서 타국에 간 아들이 있었다. 허랑방탕하고 주색잡기를 즐기며 그 많던 유산을 다 날리고 거지가 되었다. 남의 나라에서 돼지우리에 누워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돼지나 먹는 쥐엄 열매조차도 주는 사람이 없어 먹을 수 없었다. 헐벗고 굶주린 이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 갈 결심을 하였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품꾼들도 지금 내 신세보다는 더 나은데...”하고 후회하고 뉘우치고 있었다. 저만치 고향 마을에 그의 모습이 나타나자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갔다. 목을 얼싸 안고 입 맞추고 반겨 주었다. 송아지를 잡고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새 신을 신기고 동네 사람을 불러서 잔치하였다. 여기 아버지의 마음은 긍휼의 마음이다. 그러나 집 나갔다가 돌아온 동생을 대하는 그의 형은 달랐다. 아버지는 큰 아들의 마음을 설득해 보려고 하였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15:32) 이와 같은 아버지의 마음이 긍휼의 마음이다. 

선(善)한 열매full of good fruit
가을은 열매로 말하는 계절이다. 봄에 아무리 복숭아 꽃, 살구 꽃, 사과, 배, 감, 대추, 포도의 꽃이 무성하게 피었었어도 여름을 지내고 가을을 맞으면서 그 과수 나무에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과수나무의 사명을 다 한 것이 아니지 않나.

예수께서 마지막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들어 가셨다가 그 날 저녁에 성 밖의 베다니 마을로 가셨다. 다음 날 길을 가시던 예수께서 시장하셔서 저 만치 바라다 보이는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구하셨으나 열매가 없음으로 저주하여 말라 버렸다. 다음 날 무화가 나무가 말라 버린 것을 보고 제자 베드로가 물었다. “주님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의 대답은 간단하였다. "하나님을 믿으라.”(눅11:22)

주님은 열매를 구하신다.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가시나무나 엉겅퀴 인생이 아니라 감람나무와 포도나무와 같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악은 악을 낳는다. 가정교육, 유아 교육, 자녀 교육이 왜 중요한가. 잘 못 키워 내면, 잘 못 자라나면 자신만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가정과 사회와 국가의 해악이 되고 만다. 하나님 안에 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사는 성도는 성령 안에서 선한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인생이 되어야만 한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8) 그렇다. 주 안에서 의의 열매, 평강의 열매, 사랑의 열매, 희락의 열매, 선한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선한 나무 인생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편견(偏見)이 없음
여기서 편견이란 사람을 외모로 보고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야고보서 2장 앞부분의 교훈이 그런 것 아닌가. 사람은 사람을 외모로 본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지만 사람은 자꾸만 외모를 보려고 한다. 그러므로 조심하고 주의하여야 한다.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며 실수에 빠질 수 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 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2:1-4) 

거짓이 없음
하나님은 진실한 사람을 찾으신다. 거짓이 없는 삶을 가꾸어 가야 한다. 거짓은 거짓을 낳는다. 악은 악을 낳는 법이다. 야고보가 이런 편지를 쓴 이유는 당시에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 편견과 편벽에 사로잡히고 거짓말하고 시기하고 다투고 진리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있음을 알고 이런 편지를 써서 권면한 것이다. 

진실하게 신실하게 주님 안에서 남을 겉으로 판단하고, 외모로 판단하려 하지 말과 원만하고 좋은 인간관계를 가꾸어 가면서 서로 간에 진실하고 돈독한 성도의 사랑과 우정을 쌓아 가는 거룩한 공동체, 복된 천국인의 삶을 더불어 살아가는 그런 가정, 그런 교회, 그런 사회생활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조선에 온 지 8개월 만에 25살에 급성 맹장염을 치료 받지 못해서 숨진 선교사 루비 캔드릭(Lubye R. Kendrick,1883-1908)이 “내게 천개의 심장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모두 조선에 바치겠습니다.”(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이런 마음가짐을 가진 성도들이 십, 백, 천, 만 일어나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는 그런 거룩한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에 미국에 도착된 그녀의 편지를 받아 든 미국 텍사스 웹옷 청년회원들 중에서 20명이 선교사로 자원하여 헌신하였고 그 중에 몇은 이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였다. 선한 열매를 맺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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