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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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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님(요 20:19-23) 2015.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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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5-04-08 07:46 조회 18,346 댓글 0
 
부활하신 예수님(요 20:19-23)           2015. 4. 5
 
 
하와이 열방대학의 창시자요 예수전도단 운동을 시작한 로렌 커닝햄은 그의 책, <열방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책>에서 스위스 이야기를 한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인 1530년대의 스위스의 제네바는 유럽의 여러 나라, 여러 도시들 가운데 가장 악취가 심한 곳 중의 하나였다. 무너져 내린 성벽, 쌓여져 가는 쓰레기, 처리되지 않은 길거리의 인분과 토사물과 포도주 찌꺼기 등의 냄새가 뒤 엉키고 파리 떼가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곁에 걸어 다니는 사람의 손길로부터 내 소지품을 단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었다. 당시의 제네바는 그 후에도 꽤나 오래도록 범죄자, 정치 난민, 용병, 간첩, 창녀, 빈민들로 넘쳐 났다. 당시 대개의 유럽 도시들이 그러하였지만 스위스의 제네바는 그 중에 으뜸이었다. 그렇던 그 곳이 오늘 날은 세계 최고의 도시로 변모하였다. 어떻게 그렇게 변할 수 있었을까. 국제, 외교, 금융, 인도주의 단체, 국제기구의 본부들이 줄줄이 밀집해 있고 전 세계 최고 상류층의 자녀들이 가서 공부하고 싶어 하는 국제적인 교육 도시로 변모해 있다. 어떻게 지난 300년이 넘도록 전쟁이 없는 나라의 그런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
 
로렌 커닝햄은 그 대답을 잔 칼뱅이라는 한 사람에게서 찾고 있다. 그렇다. 제네바의 변화는 잔 칼뱅(John Calvin)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잔 칼뱅은 다른 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의 확신 가운데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강조를 하면서 살았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회개와 회심을 강조하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설교하고는 하였다. 그는 마을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체계적으로 가르쳤고 설교를 통해서 개혁과 변화를 촉구하였다. 잔 칼뱅의 기도는 응답되었고 주변 사람들에게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저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일에 힘썼고 주변 사람들에게 성경 말씀을 전하였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그런 도시, 그런 나라를 세우고 싶어하였다. 잔 칼뱅은 개인의 책임과 직업이 곧 예배의 연장이라고 가르쳤다. 그 이전에는 교회는 거룩한 곳이고 세상은 세속적이라고 구분하였었다. 그래서 주일이면 교회의 예배에 와서 영적인 목욕을 하여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잔 칼뱅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깨끗하게 만들어 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선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일심히 성실하게 일하는 모든 직업은 거룩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예배는 주일에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중의 날마다의 생활 중에 성실하게 일하면서 살아가면 그것 또한 주님께 드리는 예배의 연장이라고 강조하였다. 골로새서 3장 23절의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는 교훈을 생활 속에 따르려고 하였다.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그 분의 주권 아래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저들은 하나님 중심의 가정을 소중히 여길 것도 강조하였다. 주일 예배가 끝나고 나면 잔 칼뱅의 설교가 소책자로 제작되어 유럽 전역으로 보급되었다. 그의 설교는 듣는 이들과 읽히는 이들에게 모두 영향을 미쳤다. 당시에 제네바의 남자들은 가장으로서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정직하지 않았고 무책임하고 술과 놀음을 즐겼다. 가정은 무질서하고 가난하고 부도덕했다. 그러하던 때에 잔 칼뱅을 비롯한 종교 개혁가들은 “가정을 소중히 돌보세요, 술 취하지 마세요, 열심히 일하세요, 가족들에게 경제적인 책임을 지세요, 십일조 생활을 철저히 하세요, 장래를 위해 저축을 하며 사세요”하고 가르쳤다. 나중에 시의회는 잔 칼뱅과 종교 개혁가들의 이 같은 가르침을 시의 정책으로 받아 들였다. 독일의 경제학자 막스 베버는 <개신교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란 그의 책에서 "유럽 여려 나라의 번영은 제네바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결정적인 원인은 잔 칼뱅이 전한 성경 말씀의 가르침 때문이다”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해마다 오늘처럼 절기를 따라 부활주일을 맞이한다. 바라기는 모든 예배자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부활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님을 만나서 변화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 교회 주변 지역은 오늘 날 가장 많은 인구가 밀집하여 살아가는 곳이 되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곳은 그리 많은 사람이 살지 않던 서울의 변두리 지역이었다. 북한산 자락의 계곡을 따라 형성된 전원 마을이었다. 그러나 도시화되면서 오늘 날과 같은 고층 아파트가 밀집한 신도시가 되었다. 앞으로 세월이 지나면서 이 곳이 기독교인의 복음화 율이 대단히 높은 지역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지역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그런 곳이 되기를 소망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교회의 탄생의 시작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십일 간 계시다가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이 임하므로 그 성령을 받은 120여 성도들이 기독교 탄생의 주역이 되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요한복음 20장은 예수님의 부활 장면이 다른 복음서 보다 더 자세하게 전해져 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운 시간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도착하였을 때에 예수님을 장례지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새 무덤의 문을 막아 두었던 큰 돌이 옮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굳게 닫혀져 있어야 할 돌문이 옮겨져 있었다. 인봉되고 로마의 병사들에 의해서 지켜지던 무덤인데 무덤 돌이 옮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이 숨어 있는 곳을 알고 있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는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 하겠다”고 전하였다.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인 요한이 달려가서 무덤을 확인하였다. 빈 무덤에는 세마포가 놓여 있었고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다른 곳에 쌌던 그 대로 놓여 있었다. 도착은 요한이 먼저 하였으나 정작 무덤 안에까지 들어가서 확인하기는 베드로가 먼저였고 요한은 나중에야 들어가서 보고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얼마동안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속을 들여 다 보았다. 그 때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체를 뉘웠던 그 곳에 한 천사는 머리맡에 그리고 다른 한 천사는 발편에 앉아 있었다. 그 때에 천사가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의 시체를 옮겨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내가 알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뒤에 와서 서 계셨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그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것을 모르고 있었다. 예수님이 먼저 말을 거셨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그 때 마리아는 그가 혹시 동산을 지키는 동산지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알려 주세요. 그러면 내가 예수님의 시체를 모셔 가겠어요.”하고 요청하였다. 그 때에 예수님이 “마리아야”하고 부르시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음성인 것을 알아듣고 깜짝 놀라서 뒤 돌아 보면서 “랍오니여”하고 예수님을 반갑게 불렀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붙잡고 싶었으나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을 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리고는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내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 간다”(요20:17)고 전하라고 하셨다. 막달라 마리아는 서둘러 제자들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아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고 전하고 예수님께서 해 주신 말씀을 자세하게 전하였다. 예수님이 부활 하신 그 날 저녁 시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두려움 가운데 숨어 있는 곳을 찾아 가셨다. 문을 안으로 다다 걸고 있던 그 곳에 나타나신 것이다. 그리고 해 주신 말씀이 본문이다.
 

평강을 선포하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은 평강을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손과 창에 찔렸던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기쁨이 넘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 가운데 문을 꽉 닫아걸고 있던 제자들인데 지금 이렇게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숨어 있었다는 그 두려움이란 유대사회로부터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교자로 낙인찍히고 유대인의 공민권을 박탈 당할까봐 두려워하는 그런 두려움이다.
 
이 기쁨이 어떤 기쁨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영원한 생명의 주인으로 다시 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다시 만난 기쁨이 아닌가. 요한복음 16장 20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그렇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슬픔과 애통함과 눈물과 한숨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는 그런 회복의 기쁨을 향하여 나아가는 생활이어야 한다.
 
지금 여기서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평강의 선포는 평소와 다른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이전에 교훈하시던 평강의 선포가 가슴에 와서 닿지 않던 막연한 말씀이었다면 지금의 이 말씀은 그 동안 예수님께서 반복하여 해 오시던 평강에 관한 말씀을 입증하는 말씀이시다. 기독교는 평강의 종교다. 문을 굳게 닫아 건 방 안에 갑자기 나타나신 예수님은 부활체의 신비한 모습으로 여기도 나타나시고 저기도 나타나실 수 있는 그런 분이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비함이 들어나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 주님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평강을 선포하고 인사하신 것이다. 그렇다. 여기 ‘샬롬’이라고 인사하신 이 인사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별의 별 우여 곡절 가운데에서 완전한 대답을 얻게 하는 인사가 바로 이 인사인 것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강과 다른 평강이다.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평강은 예수님을 떠나 사는 인생들이 세상에서 찾는 그런 평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평강이요 영원한 평강인 것이다.
 
키가 90㎝에 지나지 않는 선천성 장애인이 이를 극복하고 중학교 특수교사 임용고시에 당당히 합격하여 교사의 꿈을 이뤘다. 지난 3월에 국립 창원대학교의 특수교육과를 졸업한 이정훈(26)씨가 연골무형성증 때문에 키가 크지 않는 선천성 장애를 딛고 2015년 중등 특수교사 임용고시에 합격했다. 이씨는 서울에서 일반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 검정고시, 특수고등학교를 거쳐 2008년 국립 창원대에 입학했다. 작은 키 때문에 많은 시선을 받아야 했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적극적으로 대학생활을 했다. 이 씨는 고교 때부터 결심한 특수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특수교육학을 전공하였고 졸업 전인 4학년 때 경기지역 중등 특수임용고시 1, 2차 시험을 한 번에 합격했다. 이 씨는 지난 날 초에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특수학교인 경은중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자신이 열등감을 극복하며 성장해 왔듯이 자신처럼 열등감 가운데서 자라나는 제자들에게 힘과 용기와 꿈을 심어 주는 교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안타까운 것은 아들이 올해 교사 발령 받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의 어머니가 지난해 말에 세상을 떠나신 점이었다.
 
세상에는 힘들고 어렵고 답답하고 마음 무겁고 괴롭고 고통스럽고 마음이 먹먹한 일들이 참으로 많지만  부활 하신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는 말씀을 가슴 깊이 진심으로 받아들일 때에 환경과 신체 조건과 여건과 상황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성도다운 평강과 믿음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두 번 반복하신 평강의 선언은 위로요 용기요 소망이요 격려와 약속이시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이런 평강 말이다.
 
 
제자들을 사명자로 파송하신 예수님.
기독교는 사명의 종교다. 그냥 나 한 사람 겨우 예수님 믿고 축복 받아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그런 정도를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아쉬움이 많지 않나. 그러므로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요 신자요 제자라면 나를 향하신 주님의 분부를 사명으로 깨달아 알고 믿고 따르며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만 할 것이다. 사명이 무엇인가.
 
요나서의 요나는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고도 제 맘대로 제 갈 길로 가려고 하였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셨다. 니느웨는 당시에 앗수르의 수도이다. 니느웨는 큰 성읍이었다. 오늘 날로 하면 서울이나 북경이나 동경과 같은 큰 도시였다. 그런데 그 니느웨 성에 악독이 가득하였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하신다.” 이렇게 외쳐야 했건만 요나는 도망가고 말았다. 욥바 항구에 가서 보니 마침 다시스로 떠나는 배가 있었다. 요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향하는 배의 삯을 주고 그 배에 올랐다. 하나님은 요나가 탄 그 배를 큰 풍랑을 일게 하셔서 그 항해 길을 순탄하지 않게 막으셨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다. 선장이 나서서 선객들에게 제비뽑기를 하였다. 배의 맨 밑창에 내려 가서 잠을 청하며 가던 요나가 그 제비에 뽑혔고 바다에 던지게 되었다. 풍랑이 점점 심해져 가는 때에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자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졌다.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그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는 물고기 뱃 속에서 삼일 간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은 요나의 물고기 뱃 속에서의 회개 기도를 들으시고 삼일 만에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육지에 토해 내게 하셨다. 정신을 차린 요나는 하나님의 두 번째 명령하시는 니느웨 성민들을 향한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가서 전하기 시작하였다. 니느웨 성민들은 임금으로부터 온 백성들과 소와 양에 이르기 까지 짐승들이라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고 않고 금식하며 회개하기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니느웨의 왕과 백성들이 악에서 떠나 회개하는 것을 보시고 심판하려는 생각을 바꾸시고 저들을 구원하셨다.
 
오늘 날을 살아가는 나의 사명은 무엇인가. 가족 구성원 간에 나의 사명은 무엇인가. 교회 구성원으로서 나의 사명은 무엇인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사명은 무엇인가. 성경 신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의 한결 같은 특징이 무엇인가. 저들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과 분부하신 사명에 올바르게 응답하며 살아간 사명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시내의  어딘가에 나무가 베어 나가고 삭막하게 남아 속이 썪어 가는 그 곳에 해바라기를 심어 활짝 꽃이 피게 한 손길이 있다. 달동네의 수 십 개의 높은 계단 저 아래 저 꼭대기의 한 귀퉁이에 바구니를 설치하고 동네의 노인들을 위하여 지팡이 몇 개를 담아 놓은 착한 손길이 있다.
 
사명이 무엇인가. 영국의 자랑인 대 문호 세익스피어가 어느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한 흑인 여성이 툴툴 거리면서 식당 바닥을 청소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세익스피어는 문인답게 이렇게 충고하였다. “자매님은 아름다운 지구의 한 귀퉁이를 더 아름답게 하려고 청소하고 있다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할 수는 없을까요.”라고 말이다.
 
거창하고 대단한 일도 좋지만 내 주변의 작은 일에 충성할 때에 더 큰 일도 감당하도록 맡겨 주시는 은혜의 사람, 사명의 사람이 되게 될 것이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 23) 이 말씀은 다섯, 두 달란트 받아서 열 달란트와 네 달란트를 만든 두 종에게 똑 같이 축복해 주고 칭찬해 준 주인의 칭찬이다. 부활 예수님을 믿는 신자다운 사명을 스스로 발견하고 찾아서 잘 감당해 나가는 충성된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분부하신 사명을 죽기까지 잘 감당한 효자 예수님이셨다.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은 평생토록 성령 안에서 사역하셨다. 예수님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금식하셨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쫒으셨다.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갈릴리 주변을 다니시며 모든 사역을 감당하셨다. 예수님은 “너희 하늘 아버지께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고 하셨다. 그렇다. 성령은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며 원하는 이에게 기름을 붓듯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이 세상의 아버지들 중에서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주거나 알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아비란 없다. 이 세상의 아버지는 악한 아버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할 것이다.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을 모독하거나 성령을 훼방하면 안된다. 성도는 성령을 인격적으로 모셔 드리고 성령으로 인한 깨달음과 가르침에 순종하여야만 한다. 성도가 세상 권세자들로 인하여 핍박을 받고 환란을 겪을 지라도 성령을 의지하면 성령께서는 마땅히 할 말을 그 때 그 때마다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다.(눅12:12)
 
부활하신 후에도 확인해 주신 말씀 중의 하나가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이셨다. 그 말씀을 하시기 전에 ‘숨을 내 쉬며’ 말씀하셨다. 이는 창세기에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실 때의 장면과 흡사하다. 신학자들은 그래서 이 장면을 “제 2의 창조사건”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에스겔 37장에 마른 뼈에게 대언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에스겔을 향하신 명령이 생기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명령이라면 이 장면은 영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사명자로 쓰임 받아야 할 제자들이 인간적인 지혜나 입의 말의 능력이 아닌 성령의 힘에 의하여 사역하여야만 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사건인 것이다.
 
부활하시자마자 말씀하신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은 장차 오순절 다락방 기도를 계속하던 120성도들에게 임하게 하실 성령을 미리 말씀하신 말씀이시기도 하고 23절에서 말씀하신 죄의 용서에 관한 성령을 말씀하신 말씀이시기도 하다. 예수님은 이 땅에 다녀가셨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때가 되면 승천하신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비롯하여 예수님의 부활 복음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골고루 약속하신 것이 바로 성령을 받으라는 선언이시다. 성도들은 반드시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야만 한다. 그래야 성도다운 성도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하웅원 선교사가 섬기는 스리랑카는 인도양의 섬나라이다. 1948년에 독립될 때까지 포루투갈, 네델란드와 영국에 의해서 450년 동안이나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이다. 루비 사파이어와 같은 보석과 각조 향신료와 마시는 천연차가 유명하고 고무 생산이 세계적인 나라이다. 인구 2,100만 명 정도가 사는 그 스리랑카의 수도인 콜롬보 같은 도시에는 만 명 이상의 성도가 모이는 교회가 있다. 성령은 세계의 처처마다에서 역사하신다. 스리랑카는 석가모니의 이빨을 보관한 사찰이 있다고 해서 불치사(tooth of Buddha)라고 이름 붙인 곳이 있을 정도로 불교 인구가 전체의 70%에 가까운 불교 국가이다. 힌두교와 이슬람을 합치면 기독교 인구가 적다. 그런데도 처처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과 함께 죄의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3)는 말씀을 해 주신 것이다.
 
우리가 알고 믿는 바로는 죄를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 아버지만의 고유하신 권한이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하셨을 때에 조차도 동족 유대인들은 못 마땅하게 여겼다.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들것에 메어다가 예수님이 계신 집의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린 적이 있다. 예수님은 그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시며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시자 그가 일어나 자기를 메어 온 들것을 들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데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 장면을 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 때 사람들 중에는 속으로 수군거리면서 예수님께 대하여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2:7)고 생각하였다.
본문 말씀에 오해가 없어야 한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때에도 죄 사함의 회개를 하여야 할 것을 선포하였을 뿐이다. 그렇다. 그 때나 오늘 날이나 마찬가지이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죄 사함이 선물로 임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에게도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나.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
 
그렇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하지 않음으로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이 심판을 받아 그들의 죄 가운데서 죽는다면 복음을 전파하지 아니한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였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16)라고 하였다. 요한일서 1:8-10절에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도와 교회는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누구든지 회개하면 죄 사함을 받는다고 큰 소리로 선포하여야만 한다. 회개하는 자에게는 죄의 용서가 임하고 회개 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죄에 대한 심판과 형벌과 저주가 임하기 때문이다. 불 뱀에 물린 자들에게 장대 꼭대기의 놋 뱀을 바라다보면 살리라고 말했고 그 말을 믿고 놋 뱀을 쳐다 본 자들은 살았다.
 
부활 예수님 안에서 날마다 평안하고 사명감에 불타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죄 사함을 선포하며 살아가는 나날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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