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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사랑이신 예수님(요13:1-11) 2015.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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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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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5-02-22 07:20 조회 21,466 댓글 0
 
사랑이신 예수님(요13:1-11)             2015. 2. 22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는 구라파 예술사의 중요한 장식 예술품 5만여 점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 프랑스장식예술박물관이다. 언론에 보니까 그 곳의 소중한 생활 용품과 가구와 주방 용품, 식탁의 각종 화려한 그릇들과 다기 세트 등 다양한 볼거리들이 지난해 12월 중순부터 올 3월 말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다자인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시간이 되면 한 번 가보고 싶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안도 공간은 같은 공간이지만 그 공간의 창문, 벽지, 가구, 가전제품, 벽에 걸린 장식이나 미술품, 의자, 소파, 식탁, 주방 용품, 바닥재, 카펫의 색상, 꽃꽂이, 화장식의 용품과 설비를 비롯하여 응접실의 책꽂이에 꽂힌 책의 종류와 화분 하나에 이르기까지 누가 사는 공간이며 그 공간의 꾸밈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같은 면적의 공간이라도 느낌과 분위기와 숨결이 전혀 달라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 마음 속에 무엇이 자리잡느냐, 누가 내 마음을 다스리느냐에 따라서 내 속에 내가 열 번 백번 변할 수 있고 바뀔 수 있다. 집안이나 사무실의 실내를 리모델링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들어오시고, 예수님이 모셔 들여지고 나면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아름답게 지으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내 마음을 그냥 썰렁한 공간으로 방치하길 원하시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은 당장 내 마음에 주인으로 그 분을 모셔 들이기만 하면 최고 최상의 아름답고 화려한 궁전으로 내 마음을 꾸며 가길 원하신다. 주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셔서 내 마음을 주관하시도록 환영하기만 한다면 주님은 당장 곰팡이나 난 분노의 벽지를 뜯어내고 은혜의 대리석으로 마감해 주신다. 상처투성이의 칙칙한 초상화를 떼어 내시고 화사하고 아름다운 풍경화를 바꾸어 걸어 주신다. 삐거덕 거리는 마루 바닥을 들어내시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대리석 바닥에 화려하고 품위 있는 페르시아 산 카페트를 깔아 주신다. 번민하고 고민하고 뒤척이던 낡은 기억의 침대를 들어내시고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평온한 잠자리로 바꾸어 주신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 중에 마귀가 집을 비우고 나갔다가 다시 와서 보니 여전히 그 집이 비어 있기에 다른 일곱 마귀를 더 데리고 와서 그 집에 거하게 되었다면 그 집의 형편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으시지 않았나. 그 집이 곧 나의 마음속이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어느 날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맞은편의 거라사인 지방을 지나시다가 군대 귀신 들린 자의 귀신을 내어 쫓았을 때에 무덤 사이에서 지내며 사납게 행동하던 그에게서 그 귀신이 나가서 돼지 떼에게 들어가니 이천 마리의 돼지 떼에게 들어갔다. 이 일로 2000마리의 돼지 떼가 비탈로 내 달아 바다에 빠져 몰사한 사건이 있다. 이 일로 그 주인공은 깨끗함을 받았다. 이 일로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다 도망하였다. 읍내와 마을 사람들이 이 비탈의 바닷가에 몰려 와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놀라워했다. 예수님의 소문이 점점 퍼져 나갔고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하며 점점 예수님께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은 단지 나를 소유하시는 것으로 만족해하지 아니하시고 최상의 여건으로 내 인생의 집을 개조하고 장식하고 꾸며 나가길 원하신다. 비싼 비용 같은 것은 하나님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넉넉하게 채우시고 공급하시는 풍성하신 은혜의 공급자이시기 때문이다. 목수이신 예수님은 집안의 일부를 바꾸거나 고치거나 가구나 가전제품 몇 가지를 새롭게 들여 놓는 것으로 만족해하지 않으시고 내 인생의 건물 전체를 모조리 다 허물어 버리고 새 집을 짓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되면 무척 당황스럽기는 하겠으나 얼마간 그 불편과 고통을 참고 견디고 나면 재개발한 신도시가 아름답고 재개발 지역의 주택들이 번듯해지는 것처럼 내 인생에 나 자신도 놀랄 만큼의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나를 완전히 새 집으로 만드시고, 가시덩굴과 엉겅퀴를 모두 제거해 버리고 새 밭으로 기경해서 새 땅인 옥토로 만들기를 원하신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설계와 계획은 너무나도 분명하시다.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대하실 때에 어물 쩡하게 대하시는 법이 없으시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의 동반자나 새롭게 가족이 될 그 누군가를 만나고 사귀고 결정할 때에 아무렇게나 경솔하게 판단하고 결정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은 단지 삼년 동안 하나님의 아들로서 활동하신 기간에 아담 이후에 오래도록 해결되지 못하던 죄와 사망의 문제를 십자가의 권세로 해결하시고 그를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 죄 사함과 영생을 선물로 허락해 주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신 동안에 사역하신 각종 사역들 즉,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각색 병자들을 치료 하시고, 귀신을 내어 쫓고, 죽은 자를 살려내시고, 배가 고픈 무리들을 배부르게 하시고, 바람과 파도라도 잔잔하게 하시던 그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한 힘은‘사랑’이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분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 만족해하시는 주님이 아니시라 완전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내 심장과 혈관, 모세 혈관 안에까지 예수님의 구속하신 대속의 피가 흘러서 완전한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신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자에게는 그런 구원의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그 모든 이 땅에서의 사역을 그처럼 가능하게 하였던 원천은 하나님으로부터 끝이 없이 공급 받으시는 ‘사랑’의 힘이셨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듯이 예수님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본문이 주는 교훈을 보라.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
요한복음 13장 1절에는“예수께서.....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이 세상 만민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되 특별히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여기서 말씀하신 ‘자기 사람’들이란 제자들을 말씀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인생들을 사랑하시고 그를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을 사랑하시되 특별이 그의 곁에서 늘 함께 지내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한복음 13장 1절은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언급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셔서 하나님 아버지 곁으로 돌아갈 때가 이른 줄 아셨다. 예수님은 임종을 준비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의 순간이 다가 오는 것을 아셨다. 그러나 그런 역사적인 순간에 제자들 중의 하나였던 가롯 유다의 마음에는 마귀가 예수님을 팔아 버리려는 악한 생각을 집어넣은 상태였다.
 
사랑의 시작은‘마음’이다. 사람이 주변의 그 어떤 사람과 마음이 서로 통하기 시작하면 사랑의 관계로, 신뢰의 관계로, 의지하는 관계로,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관계로 발전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친구 사이이든, 연인 사이이든, 결혼을 하고 백년가약을 하는 부부 사이이든, 그 어떤 가족의 관계나 그 어떤 사회생활의 만남이나 다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러므로 마음이 중요하다.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말이나 행동보다 마음이 먼저다. 마음이 무엇인가. 생각, 사상, 뜻, 의지, 의도, 계획 등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표현이 ‘마음’이란 것이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저녁을 잡수시던 그 밤에 이미 가롯 유다의 마음을 마귀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는 가롯 유다의 생각 속에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의 의미보다는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팔아 버릴까하는 궁리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랑이 식으면 마귀가 끓게 되어 있다. 차든지 덥든지 아니하고 미지근하면 세균 번식이 쉬운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하고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오를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식고, 목회자들과 주변의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으면 마귀가 작용한다. 반대로 하면 마귀가 작용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사랑이 식어 버릴 수도 있다.

신앙생활이란 주님을 향한 이 사랑의 마음이 식지 않도록 유지하는 생활이다.  헬라어로 ‘에이스 텔로스’(eis telos)라는 이 ‘끝까지’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그 첫째는 ‘완전히’라는 의미이다. 또 하나의 의미는 ‘죽기 까지’라는 뜻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까지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랑을 실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미국에 과거에 결혼에 실패한 한 여자가 있었다.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데리고 두 번째 결혼을 했지만 역시 그 결혼 생활도 원만하지 못하였다. 자주 새 남편에게 구타를 당하고 많은 고생을 하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또 다시 이혼을 하게 되었다. 세 번째 남자와 결혼을 했으나 역시 그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 못했다. 결혼을 할 때마다 첫 남편에게서 태어난 이 아들이 마치 큰 혹과도 같이 여겨졌다. 아들이 아주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만 느껴졌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계속해서 의붓아버지를 두 번 세 번 바꾸어 대해야 하는 그런 처지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나는 왜 세상에 태어났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그런 고통을 느끼며 새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서운 부부싸움을 보면서  잠을 청하는 밤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세 남자에게 배신당한 이 어머니는 아들에게 자주 말했다. “아들아 사람을 쉽게 믿지 말아라. 사람을 함부로 사랑하지 말아라. 세상에 사랑은 없다.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 가짜요 헛 것이다. 아무 것도 그 누구도 믿을 것이 못 된다”어머니의 이런 반복되는 탄식에 아들의 뇌리에 바위에 새긴 글씨처럼 새겨지게 되었다. 급기야 이 아이는 매사에 공격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고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큰 사고를 쳐서 퇴학을 당하였다. 자원하여 미국 군대에 입대하였지만 큰 사고를 내고 불명예제대를 당하고 말았다. 어쩌다 결혼을 했지만 아내의 사랑을 받아줄 줄도 몰랐고 아내를 사랑하는 법도 잘 몰랐다. 그는 자주 부부싸움을 격하게 하며 지냈고 인생의 절망감을 느끼고는 하였다. 어느 날 그가 나가는 직장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손에는 저격용 소총이 들려 있었다. 1963년 11월22일, 존 에프 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 대통령이 그 건물 앞을 지나갈 때에 그를 향하여 총을 쏘았다. 텍사스 달라스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리하비 오스왈드라는 그 청년이 현장에서 대통령 살인범으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물론 그 후에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 암살 배후에 대하여 별의 별 의문이 적지 않은 역사의 의혹 사건으로 세월이 흘러가고 있지만 말이다. 밥슨이라는 사회학자는“가정의 비극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을 불러 왔다. 이 사건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전혀 사랑을 받지 못한 한 아들이 저지른 역사적인 비극이었다”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다. 사랑을 먹어야 산다. 사람이 아무리 화려하고 비싸고 좋은 옷을 입어도 사랑을 받고 살지 못하면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 수 없는 법이다. 이처럼 사랑이 병들면 모든 것이 병드는 것이다. 사랑이 식으면 모든 것이 불행해 지는 것이다. 사랑이 왜곡되면 나만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그 모든 인간관계가 불행해 지는 것이다.
요한복음 12장에 등장하는 나사로나 마르다나 마리아는 삼 남매가 모두 다 예수님을 끔찍이 사랑하고 존경하고 섬기고 따르고 귀히 여기던 이들이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친구로 대하셨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할 음식을 장만하되 인색하게 조금 장만한 것이 아니라 풍성하고 귀하고 값지고 맛있고 좋은 것으로 잘 준비하여 잔치하였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300데나리온 값어치의 일 년을 일하고 벌어서 모아야 살 만한 가치가 나가는 지극히 비싸고 순전한 나드 향유 옥합을 깨트려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그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을 정도로 섬겨 드렸다. 나사로, 마르다도 그러하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마음을 담아 사랑으로 섬긴 믿음의 여인이었다. 나사로의 가정,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정은 부모님 없이 살았으나 예수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던 거듭난 믿음의 가정이었다.
 

끝까지 섬기신 예수님의 사랑.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은 섬김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섬길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결여된 섬김은 가증한 것이요 위선이 되고 만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서로를 섬기고, 상대방을 섬기게 되어 있다. 그 대상이 가족이든지 그 어떤 이웃이든지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어떤 조건이나 이유 없이 섬길 수 있게 된다. “내가 이 사람을 이 만큼 섬기면 상대방도 때가 되면 나를 이 만큼 섬겨 줄 것이다.” 이런 계산적인 마음을 갖고 누군가를 섬긴다면 그 섬김은 이미 순수한 섬김이 못된다.
 
예수님 당시에는 어느 누가 내 집에 방문하면 그 손님을 위하여 집안의 하인 즉 종들 중에서도 가장 천한 종이 손님의 발에서 신발인 샌들을 벗기고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손님의 땀내 나고 흙먼지 가득한 발을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정성스럽게 닦어 주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저녁을 잡수시다가 말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 주신 것이다. 그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항변하였다. “주여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그 때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相關)이 없느니라.”고 대답하셨다. 여기‘상관’이란 단어가 매우 의미심장한 단어 사용이셨다. ‘상관’이란 헬라어‘메로스’(melos)라는 단어는 “유산을 상속하거나 약속된 땅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가 되는 구원의 완성과 종말론적 의미가 담겨 있는 약속의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듯이 십자가의 피로 죄 씻음을 받은 성도들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의 기업을 누리는‘상관’이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계속하여 엉뚱한 요구를 하였다. 발만 씻어 주실 것이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달라고 하였다. 그 때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요13:10)고 대답해 주셨다. 여기서 이미 목욕한 자라는 주님의 표현은 이미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거듭나고 죄 사함 받고 천국의 자녀가 된 자를 말씀하는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죄의 문제 즉 아담으로부터 이어지는 원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용서 받고 죄 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매일의 삶 속에서 범한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뉘우치고 죄의 반복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자녀다운 생각과 판단과 언행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소중한 것이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 주시면서 저들 제자들이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제자로 영생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기대하셨다. 그래서 정성스럽게 저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이다. 그런데 그 열 둘 중의 한 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나 있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누구나를 아시는 예수님은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는 말씀으로 장차 제자 중의 하나인 가롯 유다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주님의 그런 비장한 말씀을 듣고도 회개 하지 않았다.
 
그렇다. 우리가 이웃의 영혼을 섬기고, 이웃의 삶을 섬기는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저들의 필요를 채우고 발을 씻겨 주는 차원이 아니라 저들이 온전히 구원을 받는데 이르기 까지 섬겨야만 한다.
 
예수님의 섬김은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다 쏟아 섬겨 주신 사랑이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섬긴 제자가 아니었다. 요한복음 12장 6절에 보면 요한복음의 기록자인 사도 요한은, “그는 도둑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고발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성도의 섬김은 그 어떤 누구를 섬기든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섬김이어야만 한다.
 
여러 해 전에 <하프 타임>이란 책을 써서 한국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밥 버포드는 우리가 생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에 치러야 만 하는 문제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그 첫째는, 당신은 예수와 함께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무엇을 했는가?
둘째는,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원들을 어떻게 사용하다가 왔는가?
 
그렇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백성이 되는 길을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예수님처럼 무엇인가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신 적이 여러 번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말씀이 본문에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 주신 후에 교훈하신 말씀이시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本)을 보였노라.”
 
(요13:14-15) 그렇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천국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물로 세례 받고 불로 세례 받고 성령 세례를 받은 성도의 증거는 걸음걸이가 거룩해 보이거나 목소리가 거룩해 보이거나 화음에 맞추어서 악보를 잘 보면서 찬양을 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와서 계신 예수님이 원하시는 섬김의 삶을 사랑의 마음을 갖고 지속적으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그것이다.
 
인생의 멍에를 메는 것은 힘들고 고단하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께 인생의 멍에를 메는 법을 배우고 나면 결코 그 인생의 멍에는 어려운 멍에만은 아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8-30)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경제적으로 힘겹고, 건강도 안 좋고, 인생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고달플지라도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나 자신이라고 하면 스스로에게 예수님께서 초청하신 말씀의 권위와 권세를 갖고 선포하여야 한다. “아! 내 인생은 쉼이 있고, 내 인생의 멍에는 쉽고, 내 인생의 짐은 가볍고, 내 인생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 안에서 즐겁다.”고 큰 소리로 고백하고 선언하고 선포하며 기도하며 그렇게 믿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한국 교회 130년의 역사 가운데 목회자를 언급하든 그 어떤 신자의 삶을 언급하든 “그가 부자였느냐, 성공하였느냐, 출세하였었느냐, 많이 배웠느냐, 인물이 어떻게 생겼었느냐, 그가 어떤 집에 살았느냐” 뭐 그런 것을 역사가 묻고 평가하는 것 보았는가.
 
목회자로 하면 주기철, 길선주, 김익두, 최봉석, 손양원, 신석구, 이용도, 이성봉 목사 등을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기독교인들로 하면 고당 조만식, 월남 이상재, 남강 이승훈, 백범 김구, 우남 이승만, 도산 안창호 선생이나 서재필, 안중근 열사, 이준 열사, 유관순 열사나 독립 운동가였던 김규식 등을 기억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저들은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고, 국운이 기울어 갈 때와 일본에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던 일제 식민지 시대 때에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백성들을 섬기는 삶이 달랐기 때문이 아닌가.
 
때가 되면 주인이 올 것이다. 그리고 떠날 때에 맡겼던 달란트에 대하여 물으실 것이다. 다섯 달란트로 열, 두 달란트로 네 달란트를 만든 청지기들은 칭찬을 받지 않았나. 갑절을 남겼다는 말은 무엇인가. 남다르게 성실하게 열심히 부지런히 살아 온 것이 아닌가. 주님은 마지막 날에 물으실 것이다. 얼마나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남들을 섬기며 살아 왔는가를 물으실 것이다. 한 달란트 받아서 땅에 묻어 두는 그런 식의 인생을 산 자들을 책망하실 것이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런 칭찬과 인정을 받는 날을 위하여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본 받아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피하여 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만난 강도 만난 자를 돌보고 싸매고 짐승에 태워 사관에 묵게 하며 치료하고 그 여관 주인에게 부탁하며 돌아 올 때에 필요한 치료비를 책임지겠다고 말하던 그 마음, 그런 섬김의 마음과 태도로 누군가를 섬기며 살아야 하지 않겠나.
 
의사요 국회의원이요 원주 제일감리교회의 교인이었던 문창모(1907-2002) 장로와 같은 이들은 예수님의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던 분이 아닌가. 문창모 장로는 평북 선천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영성학교, 오산 학교, 배재학교, 세브란스 의전에서 공부하고 이비인후과 의사가 되었다. 영성학교 때 선생님이 “너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똑똑하게 잘 자라고 있으니 예수님만 잘 믿으면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칭찬하며 전도하는 말을 듣고 평생 교회를 잘 다니기 시작하였다. 21살 때인 배재 학교 다닐 때인 1926년에 6. 10 만세 사건에 가담했다가 붙잡혀서 3개월 동안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을 때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의학 공부 마치고 셔우드 홀 선교사의 주선으로 해주 구세병원에서 의사 활동을 시작했다. 해주 남본정 교회에 잘 다니며 장로가 되었다. 새벽 기도를 꼭 드리고 아침 6시부터 환자를 받았다. 해방 다음 해에는 세브란스 병원 원장이 되었다. 6. 25 전쟁 중에도 피난 갈 생각을 하지 않고 환자만 열심히 돌본 일화는 유명하다. 전쟁 후에 대한결핵협회를 구성하고 크리스마스 씰을 판매하여 결핵 퇴치와 그 기금 마련 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1957년 미국과 캐나다 선교 기금으로 설립된 원주 기독병원의 초대 원장을 맡아 의사 일을 하면서 원주에 정착하게 되었다. 55살 때인 1964년에 원주 문 이비인후과를 개원한 후로 95살에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까지 날마다 새벽 기도하며 아침 6시면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했다. 돈 없는 환자는 무료로 진료하고 오히려 환자가 돌아갈 때 차비까지 건네주었다. 매주 토요일에는 가난한 농촌의 농민들을 찾아다니며 순회 진료를 하였다. 그는 86살에 최고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에 서울까지 오가며 의정 활동과 환자 진료를 병행하였다. 그런 중에도 국회 의정 활동 시간에 한 번도 결석한 적이 없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천리마 꼬리에 붙은 쉬 파리는 천리마 덕분에 천리도 갈 수 있듯이 나는 하나님께 꼭 매어 달려서 95년을 한결 같은 은혜 안에 달려 왔다.”고 고백하였다. 그가 섬기던 원주제일감리교회에 전해 오는 일화가 있다. “좋습니다. 합시다.  냅시다.” 이런 긍정적인 신앙의 일꾼이 있으므로 오늘 날 한국 교회가 세계적으로 엄청난 선교를 하는 선교 한국이 되어 온 것 아닌가.
 
평생 피난지였던 부산에 머물면서 재혼하지 않고 북한에 두고 온 아내와 다섯 남매를 그리워하며 수많은 불쌍한 환자들을 가족처럼 돌보고 섬겼던 장기려(1909-1995) 박사 또한 그러하지 않나. 유일하게 손잡고 남하한 둘째 아들은 서울의대 해부학부 교수를 지낸 장가용 박사다. 그는 이미 해방 이후에 평양 산정현 교회의 한상동 목사님 곁에서 주님을 잘 섬기던 장로로 평생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며 살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그는 피난지인 부산에서 1959년에 한국 최초로 간 대량 절제 수술에 성공한 의학자요 외과 의사요 예수님의 심장을 갖고 남들을 섬겼던 참 그리스도인이었다.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장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장기려는 일제 시대때 지금 서울 대의 전신은 당시 경성제국대학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29세에 박사 학위를 받은 수재였다. 그는 의대 입학시험을 볼 때 하나님께 이런 서원을 했다고 한다. “하나님, 이 학교에 입학시켜 주시면 한평생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몸을 바치겠습니다.” 졸업 후 그 당시 가장 뛰어난 수술 실력을 소유한 백병원의 설립자인 백인제(白麟濟, 1898~ ?)박사 밑에서 수련을 쌓고 그가 평소에 서원 기도드린 대로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위하여 무료 진료소인 부산 복음 병원을 개설하여 영세민 의료구호 사업에 전 생애를 바쳤다. 그는 두 벌 옷을 갖고 사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길 만큼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며 평생을 살았다. 경기도 마석에 있는 모란 공원의 그의 묘지 앞 묘비에는 이런 글이 새겨있다.
 
“모든 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겨 놓지 않은 선량한 부산 시민, 의사, 크리스천. 이곳 모란공원에 잠들다.”
 

끝까지 깨닫도록 교훈하신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의미심장한 교훈의 말씀을 해 주셨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You do not realize now what I am doing, but later you will understand.)
 
(요13:7) 그렇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것이 다 그렇다. 그때에는 깨닫지 못해서 그냥 그렇게 철모르고 내 정욕과 의지가 다인 줄로 착각하고 지냈던 날들이 지금 깨닫고 보면 얼마나 부끄럽고 민망하고 죄송하고 부족했던가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들이었는지 모른다. 복음서의 기록자의 영광스러운 경험을 했던 제자 요한은 예수님이 하신 그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하신 말씀들 가운데서 이 말씀을 또박 또박 기록해 놓았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이 말씀에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에서 ‘내가’와 ‘네가’라는 상대적인 일인칭과 이인칭이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이라는 현재의 시간과 ‘이 후에는’이라는 나중의 시간이 또한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 또한 앞에서 ‘알지 못하나’ 뒤에서 ‘알리라’는 말씀도 분명하게 대조가 된다. 
 
우리도 다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은혜 받아야 하고, 성령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져야 하는 것이다. 그냥 무턱대고 ‘주여 주여’ 한다고 신앙이 자라나는 것이 아니다. 회개하고, 은혜 받고,  불 받고, 성령 받고 나면 그렇지 못했을 때에 세상적으로 시간 쓰고, 세상적으로 돈 쓰고, 세상적으로 주색잡기를 즐기고, 세상적으로 좋은 것이 영원히 좋고 언제나 좋고 다 좋은 것인 양 그것이 좋아서 온갖 세상 낙을 다 찾아 쫓아다니며 그 세상 낙이 좋다고 떠들고 다니던 그 모든 과거의 내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고 초라하고 후회가 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특별히 베드로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하신 이 말씀을 베드로도  결국은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가 버리지 않았나. 그런 그가 갈릴리에 찾아 오신 부활 예수님이 그 해변 가에서 숯불을 지피시고 떡과 생선을 구워서 아침을 함께 잡수시면서 베드로의 마음을 움직이시지 않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분부하셨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되었다. 그 성령을 받고 나니까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하신 이 말씀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의 참 뜻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이는 베드로도 마찬가지이고 요한복음을 기록한 제자인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가 아니었겠나. 올해도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온전하게 회복하고 주님 안에서 오직 주님만 섬기는 참 사랑의 화신으로 살아가기를 결단하는 우리 각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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