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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관계(엡6:1-9) 2016.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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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6-01-25 22:50 조회 20,462 댓글 0
 
 관계(엡6:1-9)                      2016. 1. 24


사람은 끊임없이 그 누군가와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간다.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이미 엄마라는 존재와의 혈연적인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간다는 것은 계속하여 누군가와 새롭게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는 잠을 자는 시간, 꿈속에서라도 누군가와 그 어떤 관계를 맺고, 관계의 문제 속에서 꿈을 꾸기도 한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살던 에덴동산은 완전한 동산이었다. 그 곳은 하나님이 그 동산을 거니시는 곳이었다. 아담은 그런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행복한 동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말았다.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의 시작은 아담의 아내인 하와에게서 벌어졌다. 아담과 하와가 살던 에덴동산은 전쟁도 없고 테러도 없고 기근도 없고 질병도 없고 그 어떤 자연 재해도 없고 죄도 없던 곳이었다. 그런 에덴동산에 죄를 불러들인 하아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말았다.

찾아 읽는 본문이라면 가정의 달, 어린이 주일 혹은 어버이 주일쯤에 펼쳐서 읽게 되는 본문을 이 시간에 대하고 있다. 본문은 ‘관계’를 주제로 한 내용이다. 앞부분에서는 자녀와 부모 그리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하여 말씀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종과 상전의 관계와 상전과 종의 관계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실로 인간은 가정 안에서든 직장에서든, 사회의 그 어느 곳에서든지 이처럼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려면 이처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고 확보하고 발전 시켜 나가야만 한다. 본문은 기계에 윤활유가 필요하듯이 관계의 윤활유와 같은 요소들을 강조한다.


순종과 공경.
첫 교훈은 자녀의 입장에서 부모를 대하는 태도를 말씀하였다. 주 안에서 살아가는 자녀라면 자신의 부모가 어떤 여건에 있든지 부모에게 순종하야야 한다. 나를 낳아 준 부모 혹은 나를 길러 준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여야만 한다. 이것은 옳고 마땅한 길이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이다. 달리 표현하면 이것이 부모 자녀의 윤리이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은 동서고금에 어디나 있고 언제나 있었다.  성경에도 가득 차 있는 교훈이다. 에베소서 6장의 본문도 제목을 붙인다면 ‘성경적인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말씀하는 것이다. 단지 본문은 계속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강조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다.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하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라.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알아라.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않느냐.

자녀의 입장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라는 것은 인간의 기본 윤리다. 그렇지 않나.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말씀하는 것이 삼강(三綱)인 것처럼 말이다. 오륜도 마찬가지다. 오륜은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의 다섯 가지 덕목을 말한다. 오륜은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을 말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무엇을 말하나. 인관 관계를 어떻게 가져야 하는가를 교훈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본문은 아들딸의 입장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관계를 순종으로 하고 공경함으로 하여야 한다는 강조이다. 요즘은 아들딸을 낳아서 버리거나 인터넷으로 물건처럼 사고파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아기를 낳아서 버리는 경우야 예전에도 있었다지만 요즘은 몰래 인터넷으로 갓 태어난 아기를 사고팔기도 하고 누군가에게서 건네받아 키우거나 팔아 버리기도 한다. 

부모가 어린이를 학대하거나 살해하는 경우가 있어서 지난 연말 연초에 언론을 도배하듯 한 끔찍한 사고 사건들이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런 세상에서 자녀들에게 일방적으로 “네 부모에게 순종하여라, 네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여라.”라고 가르치면 아마도 반항심만 더 커질 것이다. 

세상이 점점 악해져 가고, 점점 타락이 심해져 가고 있다. 부모의 타락과 변질이 심각하다. 그러나 성경은 여전히 부모에 대한 순종과 공경을 교훈한다. 이런 강조가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1-2절의 말씀을 권위 있게 하는 힘은 ‘주 안에서’와 ‘계명’이라는 단어 이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를 주 안에서 키워야 한다. 그럴 때에 자녀에게 공경 받는 부모가 될 수 있다. 자녀들을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의 말씀 안에서 키울 때에 장차 그 자녀로부터 공경 받는 부모가 될 것이 아닌가. 첫 계명이 무엇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 중의 인간관계의 첫 계명인 제 오 계명을 말씀하지 않나. 계명을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고 실천한다면 부모 자식 간이든, 사회생활의 그 어떤 인간관계이든 잘못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계명대로 사는데 부모를 버리겠는가.
계명대로 사는데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거짓 증거하고 남의 것 탐내며 살겠는가. 그 출발은 첫 단추를 잘 뀌어야 옷을 제대로 입을 수 있듯이 첫 계명으로부터 차근차근 계명의 울타리 안에서 가정과 가족의 관계와 이웃과의 인간관계를 형성해 나갈 때에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약속의 열매를 누리지 않겠는가.

이는 반대로 하면 부모의 입장에서 아들딸을 학대하고 방치하고 함부로 되는대로 마구 대했다면 어떻게 그 아들딸로 인하여 무슨 공경을 받겠으며 무슨 상급을 누리고 나눌 수 있겠는가.

이것은 지금 우리의 환경이 가난하냐 부하냐 혹은 건강하냐 병약하냐 여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상황이나 형편이나 여건 그 이상의 모든 것을 뛰어 넘는 초월적인 문제가 아닌가. 그러므로 근본적으로는 ‘주 안에서’, ‘약속 있는 첫 계명 안에서’라는 대 명제가 중요하다. 

창세기의 요셉이나 다니엘서의 주인공인 다니엘을 보라. 에스더서의 주인공인 에스더를 보라. 저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요셉은 17살에 형들에게 미움 받고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신세였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었다. 요셉은 어머니 라헬 돌아가시고, 아버지 야곱이 배려해 주시는 편애에 가까운 수준의 채색 옷을 더 이상 입어 볼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노예가 되고 말았다. 그런 그는 17살 이전에 경험한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베들레헴 길가에서 동생 베냐민을 낳아 놓고 돌아가신 어머니 라헬에 대한 추억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자신이 어렸을 적에 엄마 아빠가 해 주신 이야기와 교훈들과 하나님의 말씀들을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그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노예생활의 먹구름 가운데서도 언제나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 그가 나중에 연세 많은 아버지 야곱과 70명의 가족들을 책임지는 넉넉한 용서와 관용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일 뿐만 아니라 가나안에서 굶어 죽지 않으려고 애굽으로 찾아 내려간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형수와 조카들 70명의 생활을 책임지는 넉넉한 용서의 사람, 큰 사람으로 우뚝 서 있었다. 요셉의 마음에는 ‘주 안에서 그리고 약속 있는 첫 계명 안에서’ 매사를 대하는 성숙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었다. 요셉이 이 땅에서도 잘 되고 110년 장수한 축복은 우연한 결과가 아니었다.

이는 청년기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다니엘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부모 일찍 돌아가시고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의 도움의 손길 가운데 자라난 에스더가 이방 나라의 임금인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의 왕비로 간택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만의 궤계로 인하여 몰살당할 위기 앞에서 밤낮 삼일 금식을 선포하며 “죽으면 죽으리이다”하는 정면 돌파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의 손길을 의지하고 온 동족들에게 먹지고 마시지도 않는 금식 기도의 자리로 초청한 에스더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에스더는 ‘주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았고, 계명의 말씀 안에서 세상을 바라다 볼 줄 아는 믿음의 딸이 아니었나.

1991년 어느 날 뉴욕 부르클린 시내의 추운 겨울 한 쓰레기 더미 속에서 14살 된 소녀가 딸을 낳았다. 흑인인 그녀는 아기의 이름을 카디자 윌리엄스(Khadijah Williams)라고 지었다. 카디자의 엄마는 핏 덩이 아기를 품에 안고 뉴욕의 거리를 오가며 구걸하였다. 무료급식소를 기웃거리고 쓰레기통에서 남들이 먹다가 버린 피자 조각과 햄버거 조각들과 프렌치프라이 한 움큼씩으로 굶주림을 해결하며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았다. 카디자는 그런 환경을 운명처럼 여기며 한 살 두 살 길거리에서 엄마 품에서 잠을 청하며 나이를 먹어 갔다. 저들 모녀는 지붕이 있는 공간에서 잠을 자 본 적은 며칠 되지 않았다. 대부분 차가운 길바닥과 냄새나는 뒷골목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다. 집 주소는 언제나 뉴욕 어느 동네의 식당 뒷골목 이었다. 그러나 카디자 윌리엄스는 자라나면서 공부하기를 좋아하였다. 카디자는 노숙자들이 모여 사는 텐트촌에서 살면서도 필사적으로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초중고등과정 12년을 다니는 동안 자그마치 12곳의 학교를 옮겨 다녀야 했다. 그러나 카디자는 포기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한 달에 5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 뉴욕의 모든 신문을 날마다 정독하였다. 뉴욕 거리의 길바닥은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넓은 공부방이었다. 그녀에게 꿈이 분명해졌다. 대학에 들어가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꿈을 품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녀에게 “너 같은 노숙자 주제에 대학은 꿈도 꾸지 말라." 고 비웃고 핀잔을 주고는 했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노숙자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항상 머리를 단정하게 했고 옷도 언제나 최대한 깨끗하게 입었다. 어느 공공 화장실에든 찾아 들어가서 몸을 깨끗하게 씻고 얼굴을 다듬고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11학년이 되었을 때에는 어머니께 더 이상 학교는 옮기지 않겠다고 부탁했다. 대학에 가려면 그녀에 대해 잘 아는 선생님의 추천서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새벽 4시에 일어나 학교에 갔고 밤 11시가 되어서야 노숙자 쉼터의 엄마 곁으로 돌아가고는 하였다. 평균 4.0에 가까운 학점을 매 학기마다 유지했다. 토론 동아리에 열심히 참여하고 육상 팀으로도 활동하였다. 다양한 학교 활동에도 부지런히 참여했다. 모든 곳이 그녀에겐 배움의 장소였다. 그녀는 모든 배움에 언제나 목말라 했다. 그녀의 근황이 점점 소문나기 시작했고 사방의 복지 단체에서 장학금이 답지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성공을 기대하고 주목하는 사회단체가 늘기 시작했다. 그녀 주변의 선생님들과 어른들이 카디자에게 응원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카디자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길거리에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열심을 다했다. 드디어 때가 왔다. 브라운 대학, 컬럼비아 대학, 암허스트 대학 등 미 전역의 20여개 명문 대학에서 입학 허가서가 날아들기 시작하였다. 하버드 대학의 입학 인터뷰 면접 담당이었던 쥴리 힐든은 “카디자를 합격시키지 않는다면 우리 학교는 제2의 미셸 오바마를 놓치는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는 내용의 기사를 싣기 시작하였다. 노숙자의 딸로 자라난 카디자 윌리엄스는 지난 2013년에 하버드 대학교를 4년 장학생으로 졸업하였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전 제 자신이 똑똑하다는 것에 언제나 자신감을 가졌어요. 남들이 '노숙자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도 돼.'라고 말하는 걸 너무나도 싫어했어요. 전 가난이 결코 변명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어요. 제 이름은 카디자 윌리엄스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은 저를 노숙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저는 공부가 좋았습니다." 

바울은 선교 여정 중에 우연히 만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나중에 이런 편지를 썼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딤전4:12). 그렇다. 그 어떤 누구라도 나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들딸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든지 이 세상에 나의 생명이 주어진 그 자체만으로도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미혼모를 통하여 태어나났든지, 유복자로 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르고 태어나 컸든지, 전쟁 중에 태어났든지,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든지, 무능력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든지 그 환경만을 문제 삼고 문제의 쓰레기 더미에 주저앉아 있으면 않된다. 하나님의 뜻은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약속이 있는 첫 계명 안에서 어머니 아버지에게 공경하라고 하였다. 그래야 한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받을 복을 위한 것이다.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약속하셨다.


교훈과 훈계로 양육.
부모의 입장에서 내가 못 배우고 못 가지고 못 출세하고 못 성공하였어도 아들딸에게 가르칠 것은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삶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아들딸에게 좋은 것 못 먹이고 좋은 옷 못 입힐지언정 자녀들을 노엽게 키워서는 안 된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키울 수 있어야 한다. 원어민 교사에게 영어 배우고 중국어 배우는 것도 좋고 비싼 과외도 좋지만 주의 교훈과 훈계로 아들딸을 양육할 줄 아는 아버지의 권위, 어머니의 위엄을 지켜 나가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아는 기독교 지도자를 키워 낼 수 있다. 세상에는 하나님 몰라도 명문 대학 나오고 성공 하고 출세하는 이들 많다. 교회 한 번도 안 다니고 예수 이름 한 번도 안 부르고 살아도 떵떵거리고 사는 이들 많다. 그런 이들 부러워하면 안 된다. 하나님을 믿는 부모라면, 예수님을 만난 부모라면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할 줄 알아야 한다.” 그냥 막연하게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는 정도로 키워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주의 교훈과 훈계로” 엄격하게 때를 따라서 양육할 수 있어야 한다. ‘양육’이 무엇인가. 방목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너희들이 다 알아서 해라 하고 내어 버려두면 안 된다는 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미도 좋지만 절제된 미학의 가치를 깨우쳐야 한다. 

미국의 관계 전문가로서 40권 이상의 책을 쓴 게리 스몰리(Gary Smalley) 박사의 책 중에 <관계 DNA>(The DNA of Relationship)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아들딸들에게 하나님의 DNA,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DNA, 성령의 DNA, 사랑과 믿음과 소망과 평화와 은혜의 DNA가 강물처럼 넘쳐흐르도록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게르 스몰리 박사는 “거절, 판단, 분리, 고독, 실패, 무능력, 오해, 조롱, 경멸, 결점, 열등감, 무가치, 평가 절하, 포기, 무의미, 무시, 방치, 정죄, 불필요, 위험, 미움, 불신, 절망, 불행” 이런 24가지의 독소를 뽑아내고 그 대신에 “용납, 은혜, 연결, 우정, 성공, 자기 결정, 이해, 사랑, 존중, 능력, 존경, 가치, 명예, 헌신, 의미, 관심, 후원, 인정, 필요, 안전, 애정, 신뢰, 소망, 기쁨”의  전혀 차원이 다른 24가지의 DNA들이 내 마음 속에서 춤을 추게 하라고 하였다. 

아들딸들에게 좋은 유모차, 좋은 이유식, 좋은 간식, 좋은 과자, 좋은 옷, 좋은 운동화, 좋은 모자, 좋은 가방, 좋은 책상, 좋은 것, 좋은 것 이렇게 환경적인 좋은 것만 강조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무형의 좋은 것에 비중을 두고 교훈하고 훈계하고 양육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 보이지 않는 무형의 영적 자원이 장차 시대적인 하나님의 아들딸들을 키워 내는 영양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각 분야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 좋다. 그래야 한다. 그러나 주의 말씀 안에서, 성경 말씀 안에서,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의 말씀 안에서, 주의 교훈과 훈계 안에서 자라나고 성장해야만 한다. 
최근에 성 매매에 관련된 남성들의 66,000여명의 신상을 기록한 리스트가 세상에 공개 되었다. 내로라하는 사회적인 신분을 가진 이들의 직업과 저들이 타고 성 매매 업소를 드나드는 고급 차량들의 차종과 색깔까지 일일이 기록한 내용들이었다. 심지어는 상대한 남성들의 외모와 성격과 특징까지 써 넣은 꼼꼼한 기록이 세상에 공개 되었다. 저들은 스스로의 사회적인 신분과 지위를 속이고 가족을 속이고 사회적인 인간관계를 속이고 지내온 이들이다. 

미국의 존 비비어(John Bevere)의 <관계>(The Bait of Satan)라는 책이 있다. 그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메신저’는 세계 216개 국가의 채널에서 방송될 정도의 이 시대 세계적인 기독교 저술가이고 설교가이다. 아내와 함께 창설하여 운영하는 “메신저 인터내셔널”이라는 국제전도 기구에서 부부가 왕성하게 활동하는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쓰시는 탁월한 부부이다.
 
그 <관계>라는 책에 보면 ‘여는 글’에서 덫에 대한 예화를 다룬다. 야생 동물을 잡기 위하여 덫을 놓으려면 두 가지 원칙을 잘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 첫째는 잘 안 보이는 곳이어야 하고 또 하나는 잡으려는 야생동물이 좋아 하는 좋은 미끼를 사용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 사탄과 마귀는 이 세상의 곳곳에 미끼 좋은 것을 이용해서 사방에 덫을 설치해 놓고 인생들을 타락의 덫으로 잡으려 하고 있다. 그는 사탄이 즐겨 사용하는 미끼는 ‘실족하게 하는 시험’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 ‘실족하게 하는 시험’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미끼가 덫 안에 설치되어 있는 그 상태로는 우리 인간에게 해가 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일단 그 미끼에 가까이 다가갔다가 덫에 걸리는 날에는 팔 다리가 덫에 걸려서 꼼짝 없이 붙들리고 도망갈 수 없는 불행한 수렁에 빠지고 만다.  사람은 사탄이 덫에다가 걸어 놓은 미끼를 맛있다고 여기고 먹는 날에는 그 미끼가 우리 뱃속에 들어가서 소화 해 낼 수 없는 화를 부른다.  존 비비어는 그 실족하게 하는 미끼를 삼키고 나면 “상처, 분노, 분개, 질투, 적의, 분쟁, 비통, 증오, 복수, 무례함, 비난, 모욕, 분열, 이탈, 배신, 타락과 같은 깨어진 인간관계의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고 했다. <관계>라고 우리 말 책의 제목을 정했지만 그 책의 영어 제목은 “사탄의 미끼”(The Bait of Satan)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는 마치도 휴전선 안의 지뢰밭처럼 사방에 덫과 미끼가 널려 있다. 부모들은 아들딸들에게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주의 교훈과 훈계 안에서 양육되도록 깊고 세심한 관심과 배려를 해 주어야만 한다. 전문가가 되고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 다 좋지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영적으로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있고 유혹과 미혹을 피하며 살아 갈 수 있는 능력 있고 지혜로운 하나님의 아들딸로 자라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그런 부모, 그런 자녀의 모습으로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성실하고 기쁜 마음과 착한 행실.
종은 상전에게 대하여 두려워하고 떨리는 마음 즉 경외심을 갖고 성실한 마음가짐으로 대하며 순종하여야 한다고 했다.(respect and fear, and with sincerity of heart.) 5절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보면 “남의 종이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의를 다하여 자기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어쩌다가 저런 인간의 종이 되었단 말인가.”하고 불만과 원망과 불순종으로 일관하지 말고 주어진 환경에서 성의를 다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매사를 대하라는 말이다. 요셉이 애굽에 끌려 간 노예였지만 늘 그랬지 않나. 결국 그의 결백한 태도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중한 모습이 여 주인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나중에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러나 그 곳에서 임금 바로의 꿈을 해석할 만한 자로 불려 나가지 않았나. 그리고 그날로 임금 앞에서 바로 왕을 감동시키는 꿈의 해석자로 인정받고 애굽의 총리 직에 임명 받지 않았나.

하나님은 살아 계신 아버지이시다. 인간은 심은 대로 거둔다. 악을 심으면 악을 거두고 선을 심으면 선을 거둔다.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둔다. 성실함과 성의를 다하는 마음으로 심으면 그 나중이 복되게 된다.  

다윗은 블레셋의 장수인 골리앗을 물맷돌로 때려눕힌 후에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인 사울 왕의 사위가 되었다. 그러나 사울 왕은 나중에는 사위인 다윗을 별로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점점 미워했고 경쟁 상대 삼았고 죽이려고 했다. 3,000명의 무장한 군대를 풀어서 들판에서 지내는 다윗을 수색해서 잡아 없애라고 명령하였다.  다윗은 죽음의 위기를 수도 없이 넘긴 백전 불굴의 용사였다. 사실은 다윗이 유능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이 그를 위기의 순간마다 지켜 주셨다.

오히려 다윗은 사울 임금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자신의 칼로 해쳐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마음가짐을 갖고 살았다. 사울은 언제라도 다윗을 죽여 없애려고 하였으나 다윗은 자신의 주인이며 나라의 주인인 사울 왕 앞에서 언제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졌다. 다윗은 언제나 성실한 마음이었고 언제나 성의를 다하여 자신에게 밀려오는 고난의 날들을 소화해 나갔다. 사울 왕의 아들인 왕자 요나단은 그런 다윗의 진심을 잘 알고 이해하였다. 처남 매부 관계였던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관계는 남달랐다. 

종과 상전의 관계, 상전과 종의 관계에 대하여 교훈하는 본문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하라.
눈가림만 하지 말라. 
척 하지 말라. 
마음으로 하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
기쁜 마음으로 섬기라.
주께 하듯 하라.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무슨 일을 행하든지 선을 행하라. 
종은 종대로 자유자는 자유자대로 주께로부터 받은 대로 그리하라.
상전들도 종들에게 그리하라.
종에게 위협을 그치라.
하나님은 모든 이들의 상전이시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 

이와 같은 말씀의 기초 위에서 인간관계를 가져 나간다면 잘 못될 사람이 그 누가 있겠나. 공무원이든, 군인이든,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이든 교수이든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의 선생님이든 혹은 학생이든 스승이든 그 관계의 바탕이 어떠하여야 할까. 종업원과 경영주, 정부의 관리와 국민, 농민이든 어민이든 산업체의 근로자이든, 그 어떤 단순직종의 노동자이든 서로 간에 그 바탕에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과 성실한 마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에게 하듯 하지만 말고 누구에게든지 매사에 주께 하듯 하라고 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태도로 하라고 하였다. 그래야 한다. 주께 하듯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 억지로 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섬겨야 한다. 어느 누구이든지 내 위에는 하나님이 상전으로 계시다는 겸손한 마음가짐이 있어야만 한다. 

다윗은 사울의 아래에 있을 때에도 언제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성실한 마음가짐을 잃지 않았다. 다윗은 신중한 사람이었다. 다윗의 자신의 범사와 판단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하기를 소원하였다. 사울 왕이 그렇게 다윗을 못마땅해 하고 죽이려 하고 배척할 때에도 다윗은 자신을 일찍이 구별하여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장래의 왕으로 기름 부으신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애쓰고 겸손하려 하였다. 

세월이 지날수록 사울왕의 광기는 점점 병적으로 심각해져만 갔다. 놉이라는 성읍의 제사장들이 피신 중인 다윗을 위하여 은신처를 제공하고 식량과 과거에 블레셋의 골리앗의 목을 쳤던 그 골리앗의 칼을 다윗에게 내어 준 사실들이 사울 왕에게 알려 졌다. 놉 성읍의 제사장들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서 쫓겨나 피신 중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단지 왕의 명을 따라서 어디론가 이동 중이라고 여겼을 뿐이었다. 놉의 제사장들은 다윗을 보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였다. 후에 이와 같은 일들이 사울 왕에게 알려졌다. 격분한 사울 왕은 죄 없는 놉 성읍의 제사장 85명을 죽였다. 뿐만 아니라 놉 성읍의 모든 남자와 여자, 아이들과 젖 먹이 소와 나귀와 양들까지 다 죽였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아멜렉에 행해야 할 일을 순종하지 않고 아무 죄도 없는 놉 성읍의 제사장과 모든 성민들과 짐승들까지 모조리 다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울 왕은 집단살인자였다. 하나님께서 어찌 그런 악한 사울에게서 성신을 거두지 않으셨겠는가. 

그 때 즈음에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숨어 지낸다는 소문이 사울 왕에게 들렸다. 사울 왕은 3000명의 무장된 정예군을 이끌고 다윗을 죽이겠다고 추격전에 나섰다. 이스라엘의 임금이 블레셋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미워하고 증오하는 다윗을 죽이겠다고 그런 출입에 앞장서고 있었다. 다윗을 찾아서 광야를 헤매던 임금 사울은 지쳐서 어느 동굴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사울 왕은 겉 옷 한 자락을 벗어 놓고 누워 쉬고 있었다. 다윗은 그 동굴 속에 들어가서 쉬고 있는 사울 왕의 벗어 놓은 옷자락 한 귀퉁이를 살그머니 잘라 가지고 동굴을 빠져 나갔다. 얼마 후에 사울 왕이 그 동굴 밖에 나서자 다윗은  땅에 엎드려서 예의를 갖추고 사울 왕에게 소리쳤다. “내 아버지여 보소서” 소리치는 다윗의 손에는 잘라낸 왕 사울의 옷자락이 들려 있었다. 다윗은 형편없는 미친 것 같은 사울 왕을 여전히 ‘내 아버지’라고 불렀다. 다윗은 착잡한 심정으로 외쳤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사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삼상24:11)

사울은 무너져 가고 있었고 다윗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점점 세워져 가고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임금 사울을 해할 기회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악신에 부림을 받던 사울 왕은 세 왕자와 함께 블레셋의 전쟁 터에 나갔다가 불레셋 군대가 쏘는 화살에 맞고 중상을 입었다. 결국 사울 왕은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스스로의 목숨을 자기의 칼로 마무리 하고 말았다. 이 비통한 소식을 나중에 전해들은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았다. 다윗은 그렇게도 자기를 죽이려던 사울 왕이었지만 사울과 세 왕자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였다. 사무엘 하 1장에는 다윗이 슬퍼한 사울 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슬픔의 조가가 실려 있다. 
다윗은 평생을 성실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을 대하듯이 사울 왕을 대하였다. 그런 다윗의 진심을 하나님도 아셨다. 본문의 5절부터 9절까지의 교훈을 눈 여겨 보라. 될 사람은 남을 섬기는 남의 아래 있을 때에부터 그 마음가짐이 다르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 잎부터 다른 법이다.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아버지 이새의 양떼를 치던 어린 시절부터 달랐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점점 강해져 가게 하셨고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해 주셨다. 사무엘 하 5장 10절에 보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다윗이 점점 강성해져 가기 까지 다윗은 십 수 년 동안을 들판과 동굴에서 야생 동물처럼 지내며 끝이 보이지 않는 착잡하고 고단한 긴 세월을 지내며 “하나님의 뜻”을 묻고 행하여야만 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저절로 우연히 이루어지는 좋은 결과란 없는 법이다. 지금 누구 아래서 상전을 섬겨야 하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실하고 기쁜 마음을 매사를 감당하여야 한다. 아니 지금 누군가에게 지도력을 발휘해야 하는 자리에 있나. 위협으로 하거나 협박으로 하지 말고 선하게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생의 그 나중을 반드시 점점 복되고 좋게 하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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