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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본 받는 자(엡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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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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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6-01-03 16:26 조회 25,148 댓글 0
 
                    하나님을 본 받는 자(엡5:1-14)           2016. 1. 3

‘부전자전’(父傳子傳), ‘모전여전’(母傳女傳)이란 말이 있다. 이는 동서양이 마찬가지이다. “like father like son”, “like mother like daughter.”란 말은 서양에도 있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도 있다. 영어로는 “It runs in the blood.”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성도가 하나님을 믿으며 살면 성품 속에 하나님을 본 받는 믿음이 자리 잡게 되어 있다. 본문 1절은 “너희는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라”고 교훈하였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성결,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하심,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대하여 본 받으라고 하였다.

성도는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본 받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다.

독일의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à Kempis, 1380-1471)의 <그리스도를 본 받아>라는 책에 보면 114가지 주제의 묵상을 전해 준다. 그는 92년을 살면서 “청빈, 성결, 순종”의 삶을 날마다 강조하였다. 일을 하여 일정한 소득으로 남을 섬기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의 책 내용 중에 제일 첫 번째 묵상의 제목이 “그리스도를 본 받아”이다. 그 책에서 토마스 아켐피스가 가장 먼저 인용한 성경 구절이 요한복음 8장 12절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살아가는 증거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온갖 어둠의 욕망을 다스리고 그 탐욕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은혜의 광명한 빛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본 받는다 혹은 그리스도를 본 받는 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본 받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의 말씀을 본 받는 증거는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이다. 교만하지 않은 겸손, 악하지 않은 선함과 착함, 자고(自高) 하지 않는 겸허한 참회생활, 하나님의 은총을 날마다 사모하고 주님의 사랑의 마음을 닮아 살아가고 파하는 사랑의 실천이 곧 하나님을 본 받는 자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일 외의 그 모든 것들은 우상 숭배이며 헛되고 헛된 일들이다. 토마스 아켐피스도 그의 책에서 “명예를 찾아 헤매거나 육체적인 욕망의 종처럼 속박되어 살며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애 쓰는 모든 것이 헛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오래 사는 장수만 추구하며 선한 생활에 대하여 일말의 관심조차 가지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이 또한 얼마나 헛된 일이겠습니까? 잠깐 있다가 사라지고 말 것만을 사랑하다가 영원한 기쁨이 있는 그 곳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헛된 일이겠습니까?”하고 도전하였다.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한 내용 중에서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라”는 강조는 무슨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가.

사랑을 실천하는 성결한 생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내어 주신 일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알면 알수록 그 사랑을 닮아 실천하게 되어 있다. 성도는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바를 깨달아 알고 믿는 자들이다. 예수는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버리셨다. 예수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셨다. 예수는 단번 희생제물로 돌아 가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라면 그 삶이 구체적으로 달라야 한다. 성숙한 성도의 삶으로 변화된 생활을 하게 된다. 아기가 엄마와 아빠의 생활 습관을 배우고 닮아가며 자라나듯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라면 점점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가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전11:1)고 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전4:16)고도 말했다.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빌3:17)고도 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이 예수님을 본 받고, 하나님 아버지를 본 받으려는 신앙의 지표가 분명한 나날을 경건하게 살아간 성숙한 영의 사람이었다.

우리가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고,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옷, 살 공간을 마련해 주고, 병든 자를 도와주고, 옥에 갇힌 자를 찾아 가 위로하는 도움의 손길을 펼쳐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그것이 사랑의 실천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반드시 필요하되 더 시급하고 분명한 사실은 그 상대방이 어떤 여건에서 살아가든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영접하는 그런 신앙에 까지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선물하신 사랑은 부분적인 사랑이나 작은 사랑이 아니라 큰 사랑이요 온전한 사랑이다. 아들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신 대속의 사랑이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하신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는 말의 의미는 “모든 죄의 값을 다 해결하였다.”는 대속(代贖)의 선언이다. 나라에도 부채가 있고 도시마다 부채가 있고 지자체마다 부채가 있다. 개인에게, 가정에도 부채가 있다. 물론 부채 없이 지하실에 금고 가득히 현찰을 수 십 억, 수 백 억 쌓아 놓고 사는 부자도 더러 있기는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2011년에 도박업으로 1000억 가까이 돈을 벌고 시골의 마늘 밭에 200억쯤의 5만 원 권 돈 다발을 비닐 봉투에 둘둘 말아서 밭이랑마다 숨겨 둔 사건도 있었다. 불의하게 엄청나게 벌었는데 그 많은 돈을 다 어떻게 처치하지 못해서 그 돈 때문에 불행해 지는 인생들의 이야기 말이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국민 부채는 1200조가 넘는다고 한다. 개인이든 가족이든 도시든 국가이든 부채로부터 자유 해 진다면 얼마나 홀 가분 하겠나. 경제 기획원의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 중에 350만 명가량이 개인당 1억 이상의 빚을 지고 있는 다중채무자라고 한다. 다중 채무란 금융 기관의 이곳저곳에 이중, 삼중으로 채무를 진 상태를 말한다.
그 빚이란 것이 얼마나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나.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그 죄 사함의 은총은 부채 몇 푼 해결하는 정도의 규모와 비교할 수 없는 원초적인 은총이며 영원한 죄 사함의 은혜를 말씀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의 많은 분량은 반복해서 죄 사함을 받은 성도의 사랑의 실천을 강조한 내용들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유월절 마지막 밤의 교훈 등은 모두가 다 사랑의 실천을 강조한 내용들이 아닌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 주신 후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생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5)고 교훈하셨다. 사랑의 본을 보여 주셨다고 하셨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말씀을 하신 후에도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고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사랑을 실천 하신 그 사랑을 본 받아 행하며 살아가라는 강조가 아닌가.
우리는 베드로 성당을 총 감독하여 진두지휘하여 지은 교황이나 바울 대 성당을 건축한 교황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 토마스 아켐 피스, 평화를 위한 기도로 잘 알려진 성 프란치스코 등의 이름을 기억한다. 우리나라의 역사에도 누가 어느 시대에 교단장이었느냐 총회장이었느냐 연합회장이었느냐를 별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나 손양원, 주기철, 응칠 안중근, 도산 안창호, 이준, 백범 김구, 고당 조만식, 남강 이승훈, 월남 이상재 등을 기억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당대에 누가 만석지기였느냐? 누가 백간 집에 살았느냐? 누가 비단 옷을 입고 살았느냐? 누가 인물이 좋았느냐? 누가 예뻤느냐? 누가 임금의 총애를 받았느냐? 누가 왕에게 귓속말을 할 정도의 관계였느냐? “누가 금광 개발권을 갖고 있었느냐?”를 별로 거론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제 새벽 본문 말씀이었던 시편 62편 말씀의 다윗의 고백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께 구원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인생의 반석과 요새로 삼고 사는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포악을 의지하며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 불의한 탈취물에 마음을 두고 재물이 늘어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며 사는 인생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느냐”는 말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도 사랑하신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고 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부르셔서 사명을 주시고 저들을 통하여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선한 뜻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신다.

어느 두 신사가 나룻배를 타고 건너가는 중에 서로 논쟁을 시작하였다. 한 신사는 ‘믿음’이 제일이라고 주장했다. 맞은편의 다른 신사는 ‘행함’이 최고라고 우겼다. 한참을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배 양편의 노를 열심히 짓고 있던 사공이 손님인 두 신사의 의견에 끼어들었다. “제 의견을 좀 말해도 되겠습니까.” 그러라고 하자 그는 “이 한 쪽의 노 이름은 ‘믿음’입니다. 반대편의 노 이름은 ‘행함’입니다. 그러나 각기 한 쪽 노만 지어가지고는 배가 제자리에서 뱅뱅 돌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배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믿음’과 ‘행함’의 양편 노를 동시에 지어야 배가 쑥쑥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는 법이 아닙니까.”하고 말하자 서로 자기주장이 최고라고 우기던 두 신사가 그만 조용해지고 말았다.
나를 위해서 희생 제물이 되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을 깨달아 알고 믿는 성도라면 향기로운 제물이요 희생제물로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과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선교 명령과 사랑의 실천을 향한 명령을 실천하는 나날을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성도라면 어찌 세상의 타락한 유혹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 예수님의 나를 사랑하여 이룩하신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나면 어찌 육체의 방탕한 생활에서 벗어나 신자다운 삶을 살아가지 않겠는가.

방탕했던 어거스틴을 성자 어거스틴으로 변화 시킨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의 힘이 아닌가.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1-14)
사랑의 하나님, 그 하나님의 사랑의 힘은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를 귀신으로부터 자유케 치유해 주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열두 해 혈루병 여인을 고쳐 주셨다. 38년 된 병자라도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하셨다. 앞을 못 보던 이들을 보게 해 주셨다. 말하지 못하던 이들을 말하게 해 주셨다.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셨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덧 입고 나면 인생은 변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은총을 입은 자들이라면 어찌 음행과 더러움과 탐욕과 우상 숭배와 어둠의 일에 빠져 살아 갈 수가 있을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라면 어찌 하나님을 본받는 자로 변화되지 않을까.

빛의 자녀다운 감사 생활.

세상은 어둠의 영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빛이시다. 빛은 그 어떤 어둠이라도 이긴다. 성도들의 삶이란 과거에는 어둠이었으나 이제는, 지금은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들답게 행하며 살아가야 한다. 9절에 빛의 열매는 세 가지라고 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란 하나님의 속성이며 이 세상의 도덕적인 속성이기도 하자. 착함이란 도덕적인 선을 말한다. 의로움이란 악에서 떠난 정직하고 성실한 삶의 모습이다. 진실함이란 거짓과 음모와 술수와 간계와 거짓과 위선과 허위와 가증함이 없는 마음의 상태이며 영적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본 받아 살아가고자 하는 성도라면 마땅히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각종 범죄 사건의 뿌리가 무엇인가. 어둠이다. 어둠을 짝하며 살아가면 에베소서 4장 31절의 그런 악한 독소들이 자리 잡고 만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라고 했다. 가정집의 생활 쓰레기도 대단하지만 병원의 쓰레기 처리장은 그 심각성이 더 하다. 별의 별 상상을 초월하는 각종 쓰레기들이 넘쳐 난다. 그것을 위생적으로 잘 처리하는 일은 환자 한 사람을 치료 하는 일 이상으로 중요한 병원 운영 원칙 중의 하나일 것이다. 병원 쓰레기장에는 일일이 거론하기조차 버거운 별의 별 쓰레기들이 넘쳐 날 것이다. 그것을 처리하는 분류 원칙과 처리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찌 되겠는가. 아마도 그 중에 많은 것들은 불로 태워 없애는 것들일 것이다. 불이 무엇인가. 불은 소멸하는 힘이 있다. 이 세상의 그 모든 것들은 불 앞에서 모두 다 재가 되고 만다.

고린도 전서 3장에 보면 불의 공력 앞에 불타지 않고 남아 있는 믿음이어야 한다고 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불에 타지 않는 공적을 가진 믿음의 사람, 성령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 위에 터를 세운 성도의 빛이 나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누구든지 그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장로였던 의사 장기려(1911-1995) 박사가 그런 사랑을 실천하며 빛의 자녀답게 평생을 살다가 1995년 성탄절 날 새벽에 84살을 살다가 고요한 모습으로 주님의 품에 안긴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나. 그는 “가난한 사람도 치료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내 소명이다”는 생활 철학을 가지고 수 많은 환자들을 가족처럼 섬기다가 하나님 앞으로 갔다. 그는 바보였다. 시장에서 상인들이 부르는 값보다 더 비싼 값을 주고 물건을 사기 일쑤였다. 사람들이 “그러니 바보 소릴 듣는다”고 하자 이렇게 응수했다. “바가지 씌운 값을 깎지 않고 더 올려 주면 그 사람도 겁이 나서 그러진 않겠지!” 이런 것이 ‘바보 의사’ 장기려 박사의 일화다. 그는 바보처럼 돈을 몰랐다. 6·25전쟁이 터져 부산으로 피난 온 박사는 복음병원을 세워 본격적인 인술을 실천했다. 원장인 그의 월급은 언제나 적자였다. 번번이 급여를 가불해 환자들의 수술비를 대신 내줬기 때문이다. 심지어 치료비가 없는 환자에게 밤중에 뒷문을 열어놓을 테니 몰래 도망치라고 했다. 헐벗은 환자에게 내복을 사주고, 영양이 부족한 환자에겐 ‘닭 두 마리 값’을 처방했다. 박사는 북에 남은 아내를 그리며 독신으로 살았다. 남들이 재혼을 권유하면 “내 반쪽은 북쪽에 있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는 ‘울밑에선 봉선화야’를 틈틈이 불렀다. 아내가 가르쳐준 그의 사부곡(思婦曲)이었다. 홀로 잠자리에 든 박사는 꿈속에서 자주 아내를 만나곤 했다. 잠결에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듣고 아내인 줄 착각해 문을 열고 나간 적도 있었다. 그런 박사에게 꿈속의 아내를 실제 만날 기회가 찾아왔다.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던 정부가 박사에게 특별상봉을 주선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산가족들과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며 끝내 뿌리쳤다. 그러고는 “나는 아내의 사진이라도 한 장 갖고 있으니까”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한평생 사랑과 봉사의 길을 걸은 박사도 크게 화를 내는 일이 있었다. 그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예감한 제자들이 찾아와 스승의 흉상을 만들겠다는 의견을 냈다. “내 흉상을 만드는 놈은 지옥에나 떨어져라!” 스승의 일갈에 제자들은 놀라 주저앉고, 함께 온 사진사는 방밖으로 뛰쳐나갔다. 세상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박사는 천하에 둘도 없는 바보였다. 병원장과 서울대 교수를 지냈지만 조그마한 집 한 채 없었다. 정년퇴임 후에 머문 집은 부산 복음병원의 옥탑방이었다. 그가 남긴 재산은 1,000만원이 든 예금통장이 전부였다. 그 돈마저 자신의 육신을 돌봐준 간병인에게 모두 주었다. 그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며칠 전에 남몰래 늘 돌보던 환자에게 찾아가서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못 올 것 같아 미리 왔네!” 이 말을 유언처럼 남긴 채 20년 전 성탄절 새벽에 주님의 품에 안겼다.(배연국 논설 의원의 글 증에서 인용)

제인 애덤스(Jane Addams, 1860-1935)의 아버지는 미국 일리노이 주의 부유한 상원 의원을 지냈다. 그녀는 링컨 대통령 당시 미국 남북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 해인 1860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았다. 결국은 평생을 안짱다리로 힘겹게 걸어야 했고 곱사등이었다. <헐 하우스에서 20년>이란 그녀의 자서전에 보면 병약하고 남들로부터 외면 받던 그녀가 추종자들로부터는 “성녀 제인”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정부로부터는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으로 낙인 찍혔다. 미국 여성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제인 애덤스는 자신의 삶을 책에서 회상하였다. 책은 그녀가 1889년, 시카고에 세운 빈민 복지 기관인 헐 하우스(Hull House)에서 20년 동안 벌였던 사업과 분투의 시간을 증언한다. 그녀는 일하는 부모들을 위한 일일 보육원으로 출발해서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교육하는 야간 학교로 키워낸 것이 ‘헐 하우스’이다. 이후 그녀는 자연스레 아동 노동 폐지, 노동 시간 법제화, 청소년 관련 법률 개혁 등 현실적 변화에 매진하였다. 국경을 초월한 평화주의적 행보는 미국 내 급진주의자를 탄압하는 정부의 정책을 반대하는 활동 등으로 정부와 정면충돌하게 되었고 반역자로 매도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녀의 아버지는 링컨 대통령의 친구였다. 그러나 건강의 문제로 학교를 그만 두고 2년 동안 유럽 여행을 하는 동안에 그녀는 영국의 빈민가와 저들을 돌보고 섬기는 봉사자들과 사회 복지 기관인 “토인비 홀”을 본 뒤로 미국에 돌아가서 복지 사업에 정열을 쏟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병약하고 볼 품 없는 외모를 가졌으나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으며 자라났다. 그런 힘은 그의 자존감을 안정되게 해 주었고 평생을 꼿꼿하게 약한 자, 없는 자, 병든 자, 핍박 받는 자, 버려진 자들의 친구가 되어 살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빈민촌을 찾을 기회가 많았던 그녀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자연스레 키우게 됐다. 이것은 훗날 남녀평등을 위해서 살며, 여성도 참정권을 갖도록 하는데 크게 공헌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인 애덤스는 노동 후에 임금을 착취당하는 도시 빈민층의 끝이 보이지 않게 가난한 당시의 현실을 몹시 마음 아파하였다. 그리고 “내가 빈민굴에 온 것은 내 의지가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그들의 입장 개선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도와야 할까를 고민하고 실천하였다. 그들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과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그녀는 어린 아이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것을 금지하는 ‘아동 노동 금지’ 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런 그녀의 평생의 공로가 인정되어 71살이던 1931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버려진 아이들을 위하여 탁아소를 세우고, 가출 소녀들의 생활공간을 마련해 주고, 공부할 기회를 놓친 아이들을 불러 모아 공부를 가르쳤다. 그녀는 그 당시 미국 내 200여 만 명의 아동 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백악관 안에 아동의회를 창설하였다. 그녀는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사랑의 빛이 환하게 빛나는 밝은 세상, 살기 좋은 세상,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평등과 평화와 정의와 기쁨과 행복이 있는 세상을 가꾸어 가려고 평생을 헌신하였다. 

어둠을 떠난 빛의 자녀라면 어찌 그 입의 말이 더럽고 추하겠는가. 성도라면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누추한 말, 어리석은 말, 희롱하는 말, 헛된 말, 속이는 말”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반면에 범사에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 빛의 자녀다운 모습이다. 어둠의 일은 열매가 없다. 그런 어둠의 일에 참여하는 자들을 도리어 책망할 수 있어야 한다. 7절에서는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다. 11절에는 그런 이들의 어둠의 일에 참여 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했다. “책망하라”는 뜻은 “드러내어 망신을 주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라”는 내용이다. 어둠의 일이 드러나서 부끄러움을 당하고 망신을 당하면 사람이 좀 달라지지 않겠나. 12절에 보면 그 어둠의 일들 중에는 “은밀히 행하는 것”들이 있어서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고 했다. 인간이 어둠의 일에 빠져 죄를 짓기 시작하면 이처럼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일들을 반복하여 죄 짓는다고 지적하였다.

하나님을 본 받는 자로 살아간다면 어찌 그런 부끄러운 어둠의 일에 빠져 살겠는가. 생명 주신 것 감사하고, 가정 주신 것, 가족 주신 것, 건강 주신 것, 일터 주신 것, 교회를 중심으로 성도의 사귐 가운데 믿음을 갖게 해 주신 것 감사하면서 감사의 말을 하고, 감사를 실천하며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빛의 자녀다운 열매가 반드시 있어야만 할 것이다. 
  

주님의 기쁨을 구하는 생활.
하나님을 믿는 생활은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생활이어야 한다. 내 기쁨, 내 만족, 내 안위, 내 욕망을 채우는 것은 주님을 믿는 신자의 모습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의 기쁨,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바를 추구하다 보면 그 안에서 여러 가지 기쁨을 누리게 된다. 10절은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했다. 내 생각, 내 결정, 내 말, 내 주장, 내 행동, 내 습관, 내 취미, 내 씀씀이, 내 사재기, 내 사치, 내 낭비, 내 허례허식, 내 탐욕, 내 계획, 내 설계에만 사로 잡혀 살아가면 어찌 주님이 기뻐하시겠나. 내가 “내 안에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그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로마서 12장 2절의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씀을 염두에 두고 실천하며 살아야만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고 말씀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라는 복음 성가가 있다.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겸손히 내 마음 드립니다 나의 모든 것 받으소서
 나의 맘 깨끗게 씻어 주사 주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이런 찬양의 가사의 고백이 우리 각 사람의 진실한 고백과 변화로 이어 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창세기 5장의 에녹은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생을 살았다. 에녹은 65살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아마도 에녹이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그 때 즈음에 믿음이 좋아지는 무슨 사건, 무슨 계기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에녹은 969년을 살았던 아들 무드셀라를 낳은 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으로 살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로 그를 데려 가시는 영광의 주인공이 되었다.
창세기 6장에 등장하는 노아는 당대에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인생들과 달리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생을 살았다.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고 의인이요 완전한 자의 신앙을 갖고 늘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노아는 자신이 어떻게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를 알던 지혜의 사람이요 믿음의 의인이었다.

이는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의 믿음이 다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기뻐하신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고 하였다. 동서고금에 자기 자신 하나 잘 먹고 잘 입고 잘 쓰고 잘 사는 것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신 인생이 있는가. 나 자신이 한 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에 빚 진 자 되어 어떤 삶을 살아갈까를 고민하면서 받기 보다는 주는 자의 삶을 살아 온 인생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인생들이 아니었다.

다니엘은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 놓고 정한 시간마다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그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마찬가지였다.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으면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거운 풀무 불에 던져 넣겠다는 협박과 위협 앞에서도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며 꼿꼿하고 담대하게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 갔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신앙으로 동족들과 함께 삼일 간 금식을 선포하고 결국은 하만의 음모 앞에 무너지지 않고 동족 히브리 민족을 고스란히 건지는 시대적인 여성이 되었다.

복음 전파하다가 붙잡혀 끌려나간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담대하였다. 바울은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26:29)고 항변했다. 이 정도의 믿음이면 하나님이 기뻐하고 예수께서 기뻐하지 않으셨겠나.

미국 캘리포니아에는 왼팔 없는 3살 된 어린 딸과 자동차 엔진 사이에 숨어 있다가 부상을 당하여 오른 쪽 앞 다리를 잃고 수술을 받은 후에 겨우 살아난 고양이가 친구처럼 지내는 장면의 시진과 기사가 새해 인터넷 신문에 실렸다.
중국의 95살 된 노인이 10대 시절에 사고를 당하여 전신마비 상태에서 46년 째 연명 해오는 올해 65살 된 아들을 먹이고 닦이고 돌보는 장면도 새해의 인터넷 신문에 실렸다. 그의 아들은 19살 때에 그의 가족들이 집을 짓는 현장을 돕다가 척추에 부상을 당하고 중증 장애인이 되었다. 어머니가 20년 전에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부모가 함께 돌보았으나 지금은 20년 째 오늘 날 95세가 된 아버지 혼자 병든 아들을 거둔다. 날마다 아들을 위해서 요리도 하고 청소와 빨래도 하고 아들의 건강이 좋아 질 기적의 날을 바라며 병든 아들의 손발을 주물러 준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강화도 시골 중학교 때 교훈이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 자연 사랑”이었다. 이런 마음가짐과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닐까.

밝아 온 새해 2016년! 가정과 세상과 교회 안에서 나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들 앞에서 스스로를 시험해 나가는 나날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고 했다. ‘시험하라’는 말은 ‘분별하다, 입증하다, 증명하다’는 뜻이다. 올 해도 각 사람이 자신의 믿음을 가지고 스스로를 시험해 보아서 파도 위를 걸을 수 있는지, 파도와 바람 속에 빠져 들어 가고 마는지를 시험하여 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칭찬 받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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