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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속회와 교회(엡4:25-32) 2015.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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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5-12-31 17:57 조회 20,940 댓글 0
 


                        속회와 교회(엡4:25-32)             2015. 12. 27




아무리 산업이 발전하고 최첨단 공학이 발전하더라도 사라지지 않을 직업 중의 하나가 벽돌공이다. 벽돌을 쌓는 작업은 로봇이 나서서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천장이든 만장이든 한 장 한 장 손으로 쌓는 수고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벽돌 한 장 한 장이 소중하듯이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 각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모퉁이돌이며 머릿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성도의 연합이 속회 활동이며 교회 생활이다. 성도는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영적 신비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른 아이 청년 노인 누구나 한 사람 한 사람 각각 모두 다 소중하다.


이번 2015년 대학입학 수능시험을 치룬 학생들은 재수, 삼수생 외에 고3학생들만도 461,622명이다. 그 학생들은 쌍둥이들을 포함해서 어느 가정에서이든 한 생명 한 생명 정성을 다하여 낳아 양육한 자녀들이다. 물론 그들 중에서 부모를 일찍이 잃은 고아들이 있을지라도 마찬가지이다. 그 누군가의 사랑이 담긴 정성스러운 손길 가운데서 유아기와 유치, 유 초등, 청소년기를 맞게 된 것이다. 


한 생명에게 있어서 가정이 소중하듯이, 교회는 속회가 소중하다. 속회를 통해서 어른 아이 모두 성도간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소속감이 점점 두터워지게 된다. 


우리 감리교의 시작도 처음부터 오늘 날과 같은 세계 감리교도가 7000만 명이 넘는 거대한 교단이 된 것은 아니다. 요한 웨슬리(1703-1791) 목사는 영국 런던에서 북쪽으로 3-4시간 거리인 엡옷에서 목회하는 목사의 아들로 11살 때 런던 차터하우스 학교에 유학하고 17살 때에는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매일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엄숙한 소명에로의 부름’등 경건한 서적을 읽으면서 학문에 심취했다. 동시에 신앙과 경건의 훈련을 철저히 쌓으면서 행복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22살 때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23살 때에 옥스포드대학교 Lincoln대학의 조교수가 되었다. 26살 때에는 동생 찰스 웨슬리가 조직한 ‘경건한 친우회’(Holy Club)리더가 되었다. 기도와 성경공부 및 영적인 경건의 훈련을 규칙적으로 하는 ‘성경벌레’, ‘규칙장이’ (Methodist)라고 불리어지는 경건한 모음을 이끌었다. 감옥과 고아원 심방, 빈민구제 사업 등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감리회(Methodist)란 법칙주의자 곧 규칙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뜻이다. 오늘 날의 속회에 해당하는 이 모임이 점점 커진 것이 오늘 날 감리교회의 시작이다. 감리교회는 이처럼 'Holy Club'(신성구락부)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속회는 감리교회의 생명이다. 오늘 날 구역예배, 순, 셀, 목장 등등 이름이 다양하지만 그 시작은 감리교회의 속회 운영 원리에서 파생된 것이다.


즉, 교회의 가장 작은 조직인 속회가 매우 중요한 조직이란 강조이다. 개인에게 있어서 가족과 가정이 소중하듯이 성도들의 연합인 교회에서는 속회가 중요하다. 


속회가 부흥하는 교회들 중에는 주일 낮 예배 인원보다 속회 참석자의 수가 훨씬 많은 교회도 있다. 교회생활에 적응하기 이전에 속회를 통하여 성도들 간에 무르익은 사랑을 경험하고 피를 나눈 형제자매들 보다 더욱 끈끈한 관계로 발전해 가는 것이다. 


물론 속도원들 간에 너무 그 관계가 친밀해서 절대 다른 속회로 재편되는 것을 꺼려하거나 제 삼의 그 어느 누군가가 새 가족으로 늘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과잉 친교도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또 그 반대로 어느 누구와는 속회에서 만날 수 없다는 편협한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 


속회는 “만나서, 사귀고, 나누고,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사랑으로 돌보고, 은혜 받고 복음의 능력을 힘입어서 전도의 활력을 갖는 공동체”로 계속하여 발전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계속되는 에베소서의 말씀 묵상은 마침 우리들에게 어떤 속회 생활 어떤 교회 생활을 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지체가 된 진실한 이웃.

25절에 보면 그런 교훈을 담고 있다. 성도들 간의 인간관계란 거짓되면 안 된다. 각각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진실한 인간관계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는 권면은 당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 안에 거짓이 들어 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는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지음 받은 연합을 의미한다. 에베소서 4장 16절의 “연결되고 결합되어”라는 말씀처럼 서로 서로 몸 안에서 한 지체가 되어야 한다. 성도의 관계는 진실해야 한다. 앞에서 다르고 뒤에서 다르면 안 된다. 쓰레기를 버리듯이 거짓을 버려야 한다. 거짓을 버리고 참된 대화를 해야 한다. 참된 대화를 한다는 말은 참된 인간관계를 가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성도들은 야바위꾼처럼 행동하면 안 된다. ‘야바위꾼’의 뜻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교묘한 속임수로 남의 돈을 따먹거나 남을 속이는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였다. 시장 한 가운데, 혹은 기차역의 광장 한 귀퉁이에서 야바위꾼들이 활동한다.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에 ‘성심 교회’(사크레 쾨르 성당)라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예배당이 있다. 365일 날마다 기도가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 거룩한 기도 동산에 오르는 길목에도 시장 어귀에 ‘야바위꾼’들이 세계의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면서 호객행위를 하는 것을 보았다. 


속회와 교회는 진실한 사람들이 모여서 참된 말을 하는 곳이어야 한다. ‘참된 것을 말하라’는 것은 진리를 주제로 대화하는 진실한 성도의 공동체로 서로의 관계를 이어가라는 교훈이 아닌가. 야바위꾼과 같은 이들에 의해서 속회나 교회를 어지럽힘을 당해서는 안 된다. 


북한 산 입구 가는 쪽에 우리 교역자들이 가끔씩 가는 식당이 있다. 그 여 주인은 예수 믿는 이가 아니다. 그러나 그 주인은 우리가 누군지를 안다. 그리 쉽게 예수를 영접할 분위기가 아니다. 그 이는 여기 저기 용하다는 곳을 찾아다니며 사주도 보고 했는데 인천에 어느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 가서 사주를 보고 있는데 그 무당에게 개척 교회 목사가 찾아 왔더란다. 그 목사의 질문은 “나는 목사인데 왜 이렇게 교회가 부흥이 안 되는지 그 원인을 가르쳐 달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찾아다니는 수준의 목사이니 목회가 되겠나. 


세상은 간단하지 않다. 별의 별 사람들이 다 많다. 서로의 사이에 거짓이 끼어들면 아무리 좋았던 인간관계도 금이 가고 깨어지고 만다. 인간관계의 바탕은 신용이다. 서로를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언제나 서로 ‘참된 것’을 주제로 진실한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상대방을 속이거나 미혹하면 스스로 불행해지고 만다. 이단과 사이비의 특징이 무엇인가. 속이는 것이다. 미혹해서 상대방을 불행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옛날 시골 마을 이발소의 큰 거울의 아래 부분에 ‘신용본위’라고 쓴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면도칼을 가죽 띠에 ‘쓰윽 쓰윽’ 갈아가지고 이발소 의자를 뒤로 눕히고 얼굴에 비누 거품을 잔뜩 바르고 손님을 면도하는 이발사가 ‘신용 본위’라는 큰 글씨 앞에서 일하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당신의 눈을 감기고 뒤로 들어 눕게 하고 면도칼을 얼굴과 목에 들여 댈 지라도 나를 믿으라.”는 묵언의 암시와 같았다.


진실한 성도들의 거룩한 연합을 갖는 그런 속회, 그런 교회로 섬겨 가자.



침착한 감정 처리.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27)고 했다. 31절에서 다시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약1:19)고 하였다. 26절에 ‘분’이란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앞의 ‘분’은 ‘화나게 하고 노엽게 하는 것’의 분이고 뒤의 ‘분’은 “여러 날 계속되는 지속적인 분”을 말한다. 살다 보면 분 낼 일이 전혀 없을 수는 없으나 그 분을 마음에 품어서 죄가 되게 까지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다. 분노의 감정을 제대로 처리하고 못하고 지내면 결국은 마귀가 그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게 되어서 “미움과 오해와 보복심”등을 일으켜 사태를 점점 심각하게 몰아가고 만다. 


이는 가족들 간에도 마찬가지이고 교회 안에서 곁에서 자주 대하는 속도원들 간에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면을 잘 발전시켜 나가야지 상대방의 감정이 상하게 하는데 까지 이르게 되면 결국은 어떤 일이 사람을 잃게 하는 불행의 원인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교회와 속회 안에서, 교사들 간에, 성가대원들 간에, 음악 사역자들 간에, 주방 봉사자들 간에, 주차장에서, 곳곳에서 아주 사소한 일에 감정 처리가 안 되면 그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각해 질 수 있다. 


더군다나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욱 더 예절 있게 서로를 대하며 서로의 감정이 상하거나 분이 일어나서 죄를 짓는데 까지 이르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분노의 감정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며 인간관계는 심각하게 악화되고 만다. 사이가 나빠지면 유엔이 나사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1965년에 지금의 미얀마인 당시 버마 출신 유엔 사무총장이던 우 탄트(U Thant, 1909-1974)는 75명의 세계적인 석학과 19개국의 정치인이 모인 자리에서 ‘갈등 해결과 세계 평화’를 주제로 이런 질문과 함께 발제를 시작하였다.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합니까? 기술이 없습니까? 지식이 없습니까? 왜 평화를 위한 우리의 이상과 소망이 아직도 먼 장래의 일이고, 여전히 폭풍과 혼란의 골짜기를 지나야 합니까?”


교회의 어느 부서에서이든, 특히 속회 안에서 서로를 함부로 대하거나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경솔한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서로의 사이가 나빠지지 않도록 예절 있는 대인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만 한다. 



경제적인 선행.

에덴에서 떠나게 된 인간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살아야만 했다. 이것은 죄를 범한 인간이 겪는 형벌일 수도 있지만 인류의 문명을 발전 시켜 온 노동의 힘일 수도 있다. 이 세상에 수고하고 애쓰지 않고 발전하거나 잘 된 일이 있는가. 도둑질이란 단순히 남의 물건을 절도하는 차원이 아니다. 물론 십계명 중에서 8번째 계명이 “도둑질 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 ‘도둑질’을 금하는 내용 중에는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득을 취하는 경제 활동을 포함한다. 또한 자신은 나태하고 게으르게 살면서 남이 땀 흘려 수고하고 애써서 이룩하여 이룩한 부를 허비 하는 행위도 도둑질에 속한다. 이는 에베소 교회의 구성원들 중에서 회개하기 이전의 세상 생활 중에 그런 모습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혹은 여전히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그런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경제관을 가진 이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울 사도는 단순히 도둑질을 금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자기 손으로 직접 생산적인 일을 하고 선한 일을 하라고 가르친다.  선한 일을 해서 벌어들인 소득으로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경제 활동으로 까지 자신의 삶을 발전 시켜 나가라고 권면하고 있다. “수고하여”라는 말은 “고단할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수고하고 힘쓰는” 자신과 그의 곁에 있던 선교 일행들에 대하여 언급한 적도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납세·국방·교육·근로·재산권 행사·환경보전의 의무”를 6가지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그 중 “근로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 교육의 의무”를 4대 의무라 한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열심히 주어진 분야에서 그것이 정신노동이든 육체노동이든 근로 활동을 성실히 하고 세금도 정직하게 내고 국방의 의무를 회피하지 말고 각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까지 학문이든 기술이든 공부하고 실력을 연마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일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국가 발전에 기여 하는 훌륭한 국민의 모습이 아닌가.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다. 선한 경제 활동을 열심히 하고 교인된 의무도 성실하게 하여 한다. 그런데 말라기에 보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하지 못하였다. 


말라기 1장의 서두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말씀하시자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하고 대답하는 무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 있었다. 하나님이 몹시 화가 나셨다. 너희처럼 저는 것, 병든 것을 총독에게 드려 보아라 “총독이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말1:8)고까지 말씀하셨다. 


말라기 3장 8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며 살아 온 당시의 모습을 책망하셨다. “너희는 너의 것을 도둑질 하도고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 하였으므로 저주를 받았느니라”(말3:9)고 하였다. 이 말씀을 반대로 이해하면 우리 생활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저주스러운 문제와 기도 제목들을 해결하는 해법은 ‘십일조와 헌물’신앙을 회복하는 길이다. 


예수사랑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어른 아이,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온전한 십일조 신앙과 헌물 신앙으로 살아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몫인 십일조를 도둑질 하지 말고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의 집 창고에 들여서 하나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하셨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메뚜기를 금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메뚜기가 우리 산업의 소산을 미리 먹어 치우지 못하도록 막아 주시겠다고 하셨다.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는 일이 없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라는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는 가정, 일터, 직장, 상업의 현장, 사업의 터전, 무역하고 산업을 발전시키며 출입하는 우리의 삶의 모든 환경을 일컫는 말씀이 아닌가. 하나님의 자녀들의 하나님 앞에서 십일조 신앙과 헌물 신앙으로 지내며 받는 하나님으로 부터의 복을 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하리라고 그런 축복의 날을 예언하여 주셨다. 


우리 교회는 전 성도의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 신앙으로 부흥하고 성장해 가는 교회가 되길 소원한다. 이와 같은 말씀의 간증자들이 넘쳐나는 교회와 속회가 되길 소원한다. 도둑질하지 말고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하였다. 다가   오는 새해에도 선한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수고하여 벌어들이는 소득으로 가정의 안정을 이루고 십일조를 도둑질하지 않는 온전한 십일조 신앙의 간증이 풍성한 교회와 속회로 섬겨 가자. 



선하고 은혜로운 말.

‘더러운 말’이란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해를 끼치는 무가치한 말을 일컫는다. ‘사프로스’라는 원 뜻은 ‘썩게 하다. 썩히다.’라는 의미이다. 우리나라는 과거에 얼마나 못된 욕을 많이 하였나.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의 영향은 말이 순화되고 축복의 말, 은혜로운 말, 너그러운 말, 덕담과 격려하고 용서하고 용납하고 수용하는 말과 희망적인 소망의 말과 사랑과 신뢰의 말을 통해서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세상이 평화로워지지 않았나. 거짓말이나 더러운 말을 하지 말고 덕을 세우는 말, 선한 말, 은혜로운 말을 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도 복되고 남에게도 축복이 흐르게 된다. 사람은 말의 집에서 사는 것이다. 누에나 벌레들은 자기 입의 실로 집을 짓고 살지만 사람은 입의 말로 집을 짓고 사는 것이다. 같은 평수의 아파트라고 그 집 식구들의 말이 그 집의 분위기다. 


흥부네 집과 놀부네 집은 다르지 않나. 바울 사도는 5장 4절에서도 또 다시 강조하였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하는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교회의 속회가 그런 속도원의 연합이 되게 하자. 교회의 구석구석의 봉사 현장에서 그런 감사의 말, 덕스러운 말, 선한 말, 은혜로운 말하기 운동에 앞 장 서자.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 사도 바울은 두기고가 그의 곁에 그런 성숙한 언어생활을 하는 칭찬 받을 만한 일꾼인 것을 자세하게 기록해 주었다. “두기고는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골4:7) 데살로니가 전서 2장 5절에서는 사도 바울의 일행들은 언제라도 아첨하는 말을 한 적이 없었노라고 증언하고 있다. ‘아첨하는 말’이 무엇인가. 성도들은 그런 아첨하는 말, 사탕발림하는 말로 서로의 관계를 병들게 해서는 안 되겠다. 바울은 디도에게 편지 하면서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딛2:8)고 권면하였다. 우리 모두 이런  성숙한 속회와 교회로 세워 가자. 



하나님의 성령 중심.

이제까지의 그 모든 내용들을 보자기처럼 감싸는 교훈의 말씀이 30절에 나온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성령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라는 권면이 아닌가. 성도는 사탄의 꼬임에 빠지면 안 된다. 매 순간 마다 하나님 중심, 예수 중심, 성령 중심,  성경 말씀 중심, 교회 중심, 목회자 중심, 건전한 성도 중심의 삶을 잘 지켜 나가야 한다. 양은 혼자 따로 떨어져서 지내면 곰이나 사자나 이리의 먹잇감이 되고 만다. 세상은 우는 사자가 달려 들 듯이 영적전쟁터와 같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며 영적으로 전신갑주 무장하고 항상 하나님의 성령 중심의 삶을 지켜가야 한다.  성령 중심의 삶이란 “구원(救援)의 날까지 인(印)치심을 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버릴 것과 취할 것. 

우리나라가 언제부터인가 쓰레기 분리수거를 철저히 하는 나라가 되었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잘 하는 일인가. 한 여름에 일주일 정도만 도심의 쓰레기를 치워 가지 못하게 되면 온 도시가 쓰레기장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쓰레기기 썩는 악취가 진동하고 파리 떼와 쥐 떼가 우글거리게 될 것이다. 신앙생활도 쓰레기 분리수거처럼 영적 분리수거가 원활해야 한다. 31절에서 강조한 대로 “성도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려야 한다.”


반면에 서로 서로 친절과 긍휼과 용서를 실천하며 생활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하였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라”고 하였다. 잠언에 보면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19:11)고 했다. 이사야 55장 7절에서는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께서 용서하는 생활,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생활을 실천할 것을 비유로 교훈하셨다. 어느 날 베드로가 주께 물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그 때 예수 께서는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천국은 용서가 있는 곳이라고 비유로 설명해 주셨다.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100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자기 빚을 갚으라고 붙들고 목을 잡고 흔든다면 그런 일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느냐고 하셨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비유는 1조 정도 탕감 받은 자가 1,000만원 빚 못 갚은 자의 멱살을 잡아 흔들며 내 돈 내놓으라고 말하며 감옥에 가둔다면 그에게 1조의 빚을 탕감해 준 이가 그 장면을 보면 과연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셨다. 예수는 이 비유 후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3, 35)는 말씀으로 교훈해 주셨다. 아마도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친절하게 대하라, 긍휼히 여기라, 서로 용서하라는 강조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이와 같은 비유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교훈한 말씀일 것이다 


그런 속회와 그런 교회로 섬겨 가자, 서로  친절하고,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긍휼한 마음을 갖고, 서로 용서하며 지내는 그런 천국의 모형,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거룩한 공동체, 새로운 꿈의 공동체로 섬겨 나가자. 맞이할 새해에 주님의 풍성한 은혜가 강처럼 넘쳐흐르기를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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