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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화(禍)를 피하는 신앙생활(마23:13-22) 2016. 3. 6 사순절 제 4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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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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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6-03-09 08:55 조회 19,884 댓글 0
 
화(禍)를 피하는 신앙생활(마23:13-22)         2016. 3. 6  사순절 제 4주
       


에던 동산 안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수많은 나무들 중에서 ‘생명나무’도 있었다. 창세기 3장 22절에 보면 그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영생할 수 있는 나무였다. 그런데 인간은 ‘생명나무’를 선택하지 않고 ‘먹지 말라’고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선택하고 말았다. 그 선택의 자유는 이미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셨던 자유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자기 선택의 결과이다. 어떤 고난, 어떤 역경, 어떤 시련 앞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인간 앞에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두시고 스스로 선택하길 원하셨다. 여기서 말씀하는 생명과 복은 일시적이고 한시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복을 주셨다. 그런데 인간 스스로가 뱀, 즉 사탄의 꼬임에 빠져서 사망과 저주를 택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기대는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선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오 네 장수시니”(신30:19-20)라고 하셨다. 

세상에는 복과 화가 뒤엉켜 있다. 마태복음 23장에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신앙적인 잘못에 대하여 책망하신 내용이 서두에 나온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 받지 말라”(마23:3)고 말씀하셨다. 이 얼마나 무서운 책망의 말씀인가. 당시에 자타가 인정하며 유대 사회의 스승 역할을 한다고 자부하던 자들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아니었나. 그러나 예수께서는 저들의 영적 타락과 변질을 지적하신 것이다. 저들의 가르치는 내용은 본 받되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라는 경고이시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화 있을 진저’라고 시작되는 일곱 가지 화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본문이다. 내일새벽 까지 본문을 나누어 묵상할 것이다. 그 앞부분을 본문으로 묵상하자.

우리가 아는 대로 마태복음 5장이 여덟 가지 복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 ‘팔복’(八福)장이라면 마태복음 23장은 그에 반대되는 ‘칠화’(七禍)장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일 날 복에 대하여 말해야지 왜 하필이면 화에 대하여 말하느냐고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순절 새벽마다 마태복음의 말씀을 일정하게 연이어 묵상하는 중에 오늘 분량으로 본문을 대하게 되었다. 그래서 제목을 “화를 피하는 신앙생활”이라고 정한 것이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본문의 화를 피하고 복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를 살펴보자. 

복음의 말씀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영적으로 축복의 말씀이지만 반대로 사단의 궤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저주와 심판의 내용으로 비추어 질 것이다. 

복음서 중의 복음서인 마태복음의 내용을 1장부터 22장까지 자자구구 묵상하며 그 교훈을 깨달아 왔다. 이와 같은 예수의 천국 비유와 수많은 교훈의 말씀과 기사와 이적을 체험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임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스스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예수를 영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반대하였다. 22장 15절에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하고 획책하였다. 그래서는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고 질문하였다. 그 때 예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대답으로 저들의 궤계와 음모를 지혜롭게 피하셨다. 

22장 23절에는 부활을 믿지도 않는 사두개인들이 나서서 예수께 질문하였다. “사람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아내에게 시 동생들이 들어가서 대를 잇는 것이 모세의 법인데 어떤 남자가 자식 없이 죽자 그의 일곱 형제들이 차례대로 큰 형수에게 들어갔는데 나중에 천국에 가면 그 큰 형수는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이냐” 이런 해괴한 질문을 해서 예수를 곤란에 빠트리게 해 보려고 달려들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고 오해하고 있구나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 간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대답하셨다. 

22장 34절 이하에는 바리새인 율법사가 나서서 예수를 시험하려고 질문하였다. “선생님 율법 중에 어느 것이 크니이까” 예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는 명쾌한 대답을 해 주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여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한 점을 인용하면서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확증해 주셨다. 

그리고 이어진 말씀이 본문의 7가지 화를 피하라는 경고의 말씀이시다.

천국 문을 닫는 교만과 악.
예수께서는 이 땅에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 놓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셨다. 그 후 예수의 첫 말씀 선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가 아니었나. 예수는 가는 곳마다 각색 병자들을 고치셨다.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 그리고 입을 열어 반복해서 천국을 비유로 전파하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천국을 전파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선지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마태복음에만도 34번이나 ‘천국’을 반복하여 강조하셨다. 마태복음에서는 단 4번만 ‘천국’대신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합하면 무려 38번이다.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는 ‘천국’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하였다. 마태복음 12장 28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조롱하기를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리라”고 비난하는데 대한 대답으로 말씀하신 교훈이다.

천국은 순종하는 자에게 임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1장에는 포도원 주인인 아버지와 두 아들에 대한 교훈의 말씀이 나온다.(마21:28-32) 어느 날 포도 수확할 날이 되어서 두 아들들에게 포도 따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큰 아들은 “아버지 가겠나이다”하고 대답만 하고 정작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싫소이다.”하고 일하기를 거역하였으니 뉘우치고 아버지의 포도원에 가서 열심히 땀을 흘리며 포도를 땄다. 이 교훈의 말씀 후에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고 질문하셨다. 이와 같은 교훈의 말씀은 어느 날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시비 할 때에 교훈하신 말씀이시다. 예수는 저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고 반문하시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서 교훈해 주신 말씀이 포도원 주인인 아버지와 두 아들에 관한 교훈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 교훈 후에 예수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듣기 힘든 말씀을 감히 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21:31)

본문 13절에서는 ‘천국 문’(天國 門)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하는 악과 교만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그렇게 목소리를 높여서 전파하신 천국의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는 자들이라고 꾸짖으셨다.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여야 하는 이유와 사명은 천국 문이 닫히지 전에 이 땅의 사단에게 붙잡혀 있는 자들을 사단의 결박으로부터 풀려지게 해서 천국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 전파의 사명이다. 그런데 예수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천국 문을 닫는 자들이었다. 예수의 복음 전파와 예수의 진리 해석을 못 마땅해 하고 왜곡하는 악을 자행하는 자들이었다. 

하나님을 잘 믿던 신실한 믿음의 기독교 작가였던 톨스토이는 “천국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다.”고 했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고 살아가는 내 마음 속에 이미 천국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칼릴 지브란은 “지옥에 대한 두려움은 그 자체가 지옥이고 천국에 대한 열망은 그 자체가 천국이다.”라고 말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대하는 것 자체가 지옥이었다. 그래서는 예수를 없애 버리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별의 별 음모를 다 꾸몄다.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를 올무에 빠지게 해서 없애 버리려고 했다.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게 한 장본인들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다. 

마태복음 23장 29절에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라고 책망하셨다. 그렇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오래도록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박해 왔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대를 이어 마지막 선지자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조차 죽이려고 했다. 어떻게 해서 예수를 죽여 예수의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울까하고 음모를 꾸미던 자들이었다. 그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마음에 천국이 있겠는가. 저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부터 ‘천국의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훼방하는 죄를 범한 자들이었다. 

농사가 끝나면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한다. 알곡은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밭 한 귀퉁이 불태워 버린다. 이런 성경의 말씀을 어려서 많이 보았다. 시골에서 농사가 끝나고 추수하고 나면 타작마당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그 날로 구분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잘 알고 행하는 것 같았으나 정작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모르고 핍박하고 죽으려 함으로 천국 문을 닫는 악행을 계속한 자들이 되고 말았다.

그런 바리새인들 중에도 천국과 영생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자들이 없지 않았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바리새인 주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를 찾아 와서 질문하였다. 그는 유대인의 지도자였다. 산헤드린 공회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그 유명한 성경 구절이 요한복음 3장 16절이다.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救援)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그를 믿는 자는 심판(審判)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그 정죄(定罪)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진리(眞理)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이 세상에는 천국 문을 닫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천국 문을 막아서고, 천국 문을 닫고, 자기도 들어가려 하지 않고 남들도 못 들어가게 하는 악을 악인지도 모르며 이 세상의 물질세계만 바라보며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교인을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하는 악.
15절의 ‘교인’이란 ‘프로셀뤼토스’인데 ‘오는 자’란 뜻이다. 즉 ‘이방인의 개종자’를 말한다.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를 모르던 이방인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예수를 영접하였다. 그런데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며 열방 중에서 한 사람의 교인을 얻은 것이 귀한데 그만 그 한 사람의 교인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너희들보다 배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한다’고 책망하신 것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책망과 경고의 말씀인가. 예수께서는 이제 장차 다가오는 십자가의 죽음을 각오하시고 이런 말씀들을 차근차근 하신 것이다.

우리나라에 만도 얼마나 많은 기독교를 빙자한 사이비와 이단 세력이 판을 치나. 저들은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인양 교인을 미혹해서 자신들의 사악한 교리 안으로 끌어 들인다. 그 나중은 멸망이다. ‘형제님 자매님 사랑합니다.’ 하면서 접근하지만 자신도 구원 받지 못하고 남도 멸망하게 하는 지옥의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이다.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악은 아합 왕 때의 바알과 아세라 우상과 같은 우상 숭배자들이었던 이방에서 개종한 이들을 유대교의 교만한 형식주의의 올무에 빠지게 하고 말았다. 당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나름대로 전도하였다. 그러나 저들은 복음을 모른 채 이방인들을 개종시켜 교인 삼아 놓고 유대교의 교리와 율법을 세분화한 파당과 이념에 사로잡히게 해서 결국은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악을 행하던 자’들이었다.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가 무엇인가. 복음을 모르는 세상사람, 복음을 핍박하던 이들, 복음이라면 이를 득득 갈던 이들, 타 종교인, 무속인, 미신을 믿던 이들, 무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개종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복음을 영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기독교 TV만 켜면 수천 명, 수 만 명씩 모이는 교회의 예배 장면이 나오니까 세상에 ‘교인 한 사람을 얻기’가 누워서 떡 먹기처럼 쉬운 것으로 착각하면 되나. 그런데 어렵게 전도해서 교인 한 사람을 얻었는데 그 교인이 ‘배나 더 지옥의 자식’이 되고 만다면 이 얼마나 큰 불행인가. 교인이 누구인가. 진리와 복음을 모르던 자가 진리와 복음을 믿게 하는 상태가 아닌가. 

이 교회를 떠나서 저 교회로 가고, 저 교회를 떠나서 이 교회를 다니는 것이야 뭐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어렵게 개종하여 복음을 받아들인 개종자가 복음을 등지고 변절자가 되어 떠나가 버린 다면 이는 얼마나 큰 불행이며 악인가 말이다. 
교회의 높은 첨탑과 예배당 안의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 가운데 어렵게 얻은 교인 한 사람을 배나 더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하는 어리석음에 빠진다면 어찌 화를 피할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는 유산 받아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다가 유산 다 잃어버리고 거지가 되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의 비유,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 집 안에서 잃어버린 드라크마 하나를 찾기 위해서 집안을 청소하여 찾아내는 비유 등을 통해서 ‘한 영혼’의 가치를 교훈해 주시지 않았나. 죄인 한 사람이 주께로 돌아오면 천국에서 잔치한다고 하시지 않았나. 예수께서는 한 영혼의 가치를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다. 

한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고, 복중의 생명으로부터 영아 유아 유치 유초등 중고등 청년 장년 노년 그 누구이든지 한명의 교인을 소중하게 여기는 교회학교, 속회, 그런 사역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곁에 있는 분에게 인사하자 

“당신은 주님 안에서 매우 소중한 교인입니다.”

여기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라는 이 말씀이 가슴에 뭉클하게 와서 닿지 않나. 개척교회를 시작해 보니까 더욱 그렇다. 우리 모두 “교인  한 사람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그런 영혼 구원 운동에 앞장 서는 성령 충만한 교인이 되자.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죽음과 예수 부활의 복음을 믿고 담대하게 증거하여야 한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다. 나만 겨우 믿는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전파하여야 한다. 천한 만민이 예수께로 돌아오기까지 이 복음을 전파하여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 한 영혼, 한 영혼, 한 교인, 한 교인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우리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만나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도마, 사도 바울, 바나바, 디모데, 디도, 아굴라, 브리스길라, 아볼로 저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다 한 영혼, 한 교인에서 출발하여 기독교 2000년의 역사적인 인물이 된 것이다. 이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인 이모, 막달라 마리아, 나사로의 누이 동생들인 마르다와 마리아 모두 다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하고 귀한 한 교인이 아닌가. 

가롯 유다나 아니나아와 삽비라 부부도 한 영혼, 한 교인이었다. 구약으로 하면 아간, 사울 왕도 교인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자기 교만, 자기 고집대로 살다가 불행한 인생, 하나님이 후회하시는 인생이 되고 말았다. 저들의 영혼이 불쌍하지 않나.  그러므로 교인 하나가 소중한 것이다. 실족 시키면 안 된다. 지옥의 자식으로 잃어버리면 안 된다. 


물질에 대한 탐욕.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물질의 탐욕을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면 섬길수록 세상 물질의 욕심이 작아져야 한다. 예수의 세 번째 경고는 16절에 나온다. 예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눈 먼 인도자여”라고 심하게 말씀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없어서는 안 될 자타가 공인하는 대단한 유대주의자들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너희는 눈 먼 인도자들이다.”라고 쏘아 붙이셨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맹인들이여”(마23:17, 19)라고 반복하여 공격하셨다. 

예수께서 이렇게 심하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신명기 6장 13절의 말씀을 먼저 알아야 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고 하였다. 맹세란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가 아니라면 함부로 맹세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피조물로 맹세해도 좋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이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유대교인들에게 함부로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일 없거니와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는 식으로 가르쳤다. 

여기 ‘금’이란 것이 무엇인가. 그 때나 오늘 날이나 사람들은 이 금을 얻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지 않나. 그 때나 오늘 날이나 돈 많은 부자들은 돈을 물 쓰듯 쓰지 않나. 백화점의 물건도 비싸야 더 잘 팔리지 않나. 옷, 시계, 보석, 액세서리 가방, 구두 그 무엇이든지 명품의 값은 비싸면 비쌀수록 더 잘 팔리지 않나. 

금을 쫓아 살다가 잘 된 인생이 있는가. 우리가 아는 대로 캐나다나 미국을 찾은 북미주의 초기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는 청교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 그런 저들의 신앙 고백 위에 발전한 캐나다나 미국과 남아메리카의 황금을 찾아 나섰던 이들의 오늘 날이 비교가 되지 않나. 

금이란 돈을 상징하지 않나. 영국의 대 문호 세익스피어는 “사람은 일단 황금의 목적물이 되어 버리면 지금까지 좋았던 성품도 점점 나쁜 방향으로 가라앉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고려시대의 명장 최영 장군은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고 했다지 않나. 돈을 추구한 가문이 오래도록 잘 되는 경우란 거의 없다. 성경은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22:1)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19-21),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고 교훈하였다.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바리새인들의 타락이 그러하였다. 유대교가 세상적인 출세와 명예와 탐욕과 권력의 자기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의 동전 궤를 엎으시고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뒤 엎으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시고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라고 책망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금, 제물, 제단, 성전, 하나님의 보좌’ 등을 차근차근 비교하시면서 오직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만 할 수 있는 것임을 천명하셨다. 그런데 당시 바리새인들은 유대교인들을 어리석은 길로 인도하여 백성들의 하나님 신앙을 점점 병들게 하였다. 바리새인들 지도자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자기들의 배만 채울 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심지어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조차 아니라고 부인하며 “천국 문”을 닫고 오직 백성들이 성전 안에서 금을 가지고 와서 금으로 맹세하도록 함으로서 유대교를 황금 앞에 타락한 모습으로 전락시키고 말던 시대 상황을 책망하신 것이다.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오는 백성들에게 ‘금으로 맹세할 것’을 유도하여 눈 먼 인도자의 죄를 범하였다.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로 맹세하게 하여 물질의 종, 물질의 노예가 되게 하고 말았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탐심에 눈이 먼 타락상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보이는 물질로 맹세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하여 맹세할 줄 아는 신앙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촉구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성도된 우리들은 금이나 제물이나 제단이나 성전으로 맹세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성도된 우리는 22절의 말씀처럼 “하늘로 맹세하는 자”의 성숙한 신앙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하늘로 맹세한다는 말씀은 사도행전 7장 55절에 스데반 집사가 죽음 앞에서 보았던 그런 하늘이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5-56) 그 앞에 보면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려 이를 갈고 있는데 스데반은 달랐다. 이것이 하늘로 맹세한 자, 스데반의 삶의 마지막 모습이 아닌가.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고 말씀하였다. 그렇다.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주목하며 그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자”는 결코 이 세상에서 화 있는 자로 살지 않고 복 있은 성도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고백록>을 쓴 성 어거스틴, <그리스도를 본 받아>를 쓴 토마스 아켐피스, < 천로역정>을 쓴 잔 번연, “나 같은 죄인 살리신”같은 찬송가의 가사를 쓴 잔 뉴톤, <실락원>과 <복락원>같은 대 서사시를 쓴 영국의 잔 밀턴과 같은 인물들은 한 결 같이 하늘로 맹세한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지 않았나. 

“평화를 구하는 기도”의 명 기도를 후대에 남긴 성 프란치스코, 체코슬로바키아의 순교자 얀 후스, 1517년 종교개혁자로 쓰임 받은 마틴 루터, 독일 교회와 스위스를 중심으로 종교 개혁 신앙의 바탕을 이룩한 <기독교 강요>의 저자인 잔 칼뱅,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 자선남비로 유명한 구세군의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를 보라. 이 땅에 와서 선교에 열정을 쏟았던 아펜젤러, 언더우드, 알렌이 왜 소중한가. 주기철, 손양원, 안창호, 조만식, 이승훈, 이상재 저들의 삶이 왜 소중한가. 

아프리카 선교의 리빙스턴, 인도 선교의 윌리엄 케리, 중국내지 선교의 아버지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 우리나라에 27살에 아내 손잡고 와서 복음 전하다가 44살에 서해 앞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헨리 아펜젤러가 귀하지 않나.  

순교하는 것으로 에콰도르 선교의 길을 열어 놓은 짐 엘리옷과 그의 네 친구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필립 제임스 엘리옷(Philip James Elliot, 1927-1956.1.8.)는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났다. 미국의 명문 기독교 대학인 휘튼 대학 졸업했다. 대학 시절 언변이 유창했고 글도 잘 쓰는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는 뛰어난 지도력을 가졌고 대학 레슬링 챔피언이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던 그는 헌신된 크리스천으로 이런 질문을 자주 하였다. "왜 어떤 사람은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두 번씩 들어야 하는 것일까?" 선교 열정은 한 젊은 여성 엘리자벳(Elisabeth)을 감동시켰다. 함께 에쿠아도르로 가서 활동하며, 쿠이토에서 결혼했다.(1953.10.8.) God always gives His best to those who leave the choice with Him. 이들 부부는 세상의 명예와 권세와 영화를 꿈꾸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선교에 대한 열정과 꿈을 계속 지녔다. 드디어 호전적인 아우카 족 선교를 위해서 다른 4명의 젊은 동료 선교사와 함께 도착하였다. 그러나 도착 얼마 후 아우카 족이 던진 창과 도끼에 무참히 죽고 말았다. 미국의 유명 잡지 Life에서는 이 사건을 10페이지 분량으로 보도 하였다.(1956년 1월 8일) 그런 의미에서 엘리엇의 순교는 인간적인 슬픔의 날이요, 선교의 불이 꺼지는 듯한 절망의 날이었다. 저들의 무모한 죽음은 선교지에 복음 한 마디도 전하지 못하고  죽음을 맡고 말았다. 그가 남인 유품 중에는 평소에 늘 쓰던 일기와 메모가 있었다.

“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what he cannot lose.”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미국 사회는 이 문제로 발칵 뒤집혔고, 한 기자는 그의 아내 엘리자벳을 위로하였다.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 참으로 비극입니다." 그런데 그의 부인은 "비극이라니요. 남편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그 곳에 갔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드리기 위하여 그 땅에 갔습니다. 남편의 희생은 분명 그곳에서 하나님의 생명 역사를 이루는데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간호사 교육을 받은 후 엘리자벳은 남편이 순교한지 3년 후에 어린 딸 발레리(Valerie)와 함께 1959년에 에콰도르의 아우카 족에게로 찾아갔다. 그 딸은 아빠가 순교 당할 때에 태어난 지 10개월짜리 젖 먹이였다. 여자를 해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한 아카 족들은 부인을 해치진 않았다. 헌신적인 선교 사역에 감동한 추장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길래 이렇게 우리를 위해서 애쓰십니까”, “5년 전에 당신들이 죽인 그 남자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여기에 오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을 위한 선교에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였다. 남편을 죽인 아우카 족의 청년은 나중에 목사가 되어 함께 사역했다. 엘리자베스가 만나 본 아우카 부족은 남자 어른이 8명에 불과한 56명의 작은 부족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미국으로 돌아 온 후에 1961년 《The Savage, My Kinsman》이란 책을 펴냈고 평생을 복음 전파에 매진하다가 지난해인 2015년 6월 15일에 88살 나이에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영혼 구원은 이 땅의 황금을 모두 합친 것보다 값진 일이다. 

남은 4가지는 내일 새벽에 나누자.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린 악.
-겉과 속이 다른 탐욕과 방탕.
-외식과 형식에 치우친 거짓과 위선.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죄. 

화를 피하여 복된 하나님의 사람, 복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순절의 고백 속에 부활의 새벽을 기다리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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