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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주의 손이 함께 하시는 교회(시100:1-5, 행11:19-26) 2016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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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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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6-12-02 11:41 조회 18,940 댓글 0
 
주의 손이 함께 하시는 교회(시100:1-5, 행11:19-26)   
2016. 11. 27
교회 설립 제 7주년 기념주일
추수감사주일


감사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이다. 아무리 애완견을 사랑해 주고 위해 주어도 개가 주인에게 감사를 표현하지는 못한다. 자기를 사랑해주고 위해주는 사람을 좋아 하는 표현정도는 할 것이다. 가끔씩 충견(忠犬)에 대한 일화가 전해지긴 하지만 말이다. 감사는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표현 중의 하나이다. 특히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감사를 표하는 것은 숭고한 것이다. 예배가 곧 감사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감사드리는 마음가짐이 없이 드리는 예배는 헛된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가 없는 예배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찬송, 기도, 헌금, 사역을 비롯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도 그렇다. 섬기고 나누고 돌보고 베푸는 모든 것의 바탕은 감사이다. 신앙생활의 모든 것의 바탕은 감사신앙이어야 한다. 시편 100편에 고백한 대로 그렇다. 

감사하는 자가 즐거운 찬송을 부르게 된다.
감사하는 자라야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길 수 있다. 
감사하는 자라야 하나님을 멀리 하지 않고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다. 
감사하는 자는 매사에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체험적으로 깨달게 된다.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앙을 고백하게 된다. 
감사하는 성도라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이다.
여호와는 선하시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영원하시다.
여호와의 성실하심은 영원 무궁히 대대에 미칠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하는 감사의 찬양과 경배가 절로 우러러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추수감사절 신앙이다. 유대인들은 유월절과 초실절과 초막절을 지켰다. 우리민족의 추석명절처럼 유대인들은 초막절을 성대하게 지켰다. 초막절이 되면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지니라.”(레23:40)고 하셨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여드레 동안 계속하여 즐거워하는 절기를 지키라고 하셨다. 첫 날과 여덟째 날에만 안식하고 날마다 즐거워하며 이레 동안 초막에 거하며 초막절을 지키되 매년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여호와께서 내려 주신 복을 돌아보아 생각하며 즐거워하며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와 감람나무에 열매가 없고 밭에 먹을 것이 없고 외양간이 텅텅 비어 있어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8)는 신앙이 감사신앙이다. 잘 될 때, 잘 나갈 때, 성공하고 출세하고 떵떵거릴 때 하는 감사는 잘못하며 교만이고 허세일 수 있다. 언제나 감사하고 전천후로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십일조 신앙, 주일 헌금 신앙, 선교 헌금 신앙 모두 다 중요하지만 ‘감사 신앙’과 ‘절기 신앙’이 곧 그 사람의 신앙의 척도와 같은 것이다. 이번에도 아들들과 며느리의 신앙생활을 확인하였다. “너희들 십일조 생활 잘하니” 하고 묻었다. 큰 아들 하는 말이 “네! 매달 통장에서 자동이체 방법으로 십일조를 꼬박 꼬박 잘 드리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신앙생활은 주님께 드리는 생활이다. 비둘기와 양과 염소와 송아지와 곡물을 드리는 소제와 포도주를 전제 등 계속하여 하나님 앞에 소산을 구별하여 드렸다. 죄의 용서를 구하는 피의 제사를 드리고 전병 굳는 향기가 성전에 가득한 향기 나는 제사를 드리고 포도주를 제물에 쏟아 부어 드리는 헌신의 제사를 드렸다. 이처럼 아벨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과 수많은 제사장들과 선지자들로 이어지는 제사의 중심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 바쳐 드리는 감사 제사가 그 바탕이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도시를 가든지 화려한 대리석 예배당, 스테인드글라스, 파이프 오르간이 울려 퍼지는 그 시대의 정성을 다하여 건축한 시대 예술의 정상의 표현이 배어 있는 예배당들을 대하게 된다. 그 당시에 최선의 예배당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믿음으로 살아온 신앙 선배들의 흔적이 배어 있다. 

지난 주일에도 맨해튼에서 11시 주일 예배는 노만 빈센트 필 목사님이 평생 목회하셨던 ‘Marble Church"에서 예배드렸다. 저녁 6시에는 다섯 가족이 다 같이 만나서 팀 켈러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Redeemer Church"에서 예배드렸다. 마블 처치는 맨해튼 29가에 얼마나 웅장하고 아름답고 고색창연하고 풍성한 예배를 드리는지 모른다. 성가대가 예배당 상층의 뒷면에서 찬송한다. 예배당 뒷면에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다. 노만 빈센트 필 목사님이 기차타고 선교 여정 중에 맞은편에 중년 부부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부인이 계속 작은 소리로 툴툴 거리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의자가 푹신하지 않고 딱딱하다. 시트가 지저분하다. 승무원이 불친절하다.” 민망하고 어색해진 남편이 노만 빈센트 필 목사에게 자신들을 소개하였다. “저는 변호사이고 제 아내는 제조업을 하고 있습니다.” “아 네 부인께서 무슨 제조업을 하시나요.” “네 평생 불평 제조업을 하고 있습니다.” 불평도 습관이다. 사람은 습관이 변해야 한다. 사무엘 스마일스는 “생각이 바뀌면 말이 바뀌고 말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생의 운명이 바뀐다.”고 했다. 감사하는 생각을 할 줄 알아야 그 인생이 말, 행동, 습관, 삶이 바뀌는 법이다. 

교회는 그 시대의 신앙의 중심이다. 본문은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  당할 그 때에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와 헬라의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에서 복음을 전하고 주의 말씀을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을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온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 이 말씀은 그 시대의 복음 전파의 역사의 기록이다. 욥바에 선교 여정 중이던 베드로를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가 사람 셋을 보내서 초청하였다. 그리고 베드로의 말씀 부흥회를 열었다. 성령이 그 말씀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였다. 백부장 고넬료와 그의 일가친척들과 친구들은 주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먼저 성령 받고 나서 물로 세례를 받은 이들이 되었다. 욥바와 가이사랴를 방문하고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돌아가서 간증하였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돌아가자 할레파 유대인들이 베드로를 비난하였다. 무할례자의 집에 가서 함께 먹고 저들과 함께 어울린 것을 문제 삼았다. 그 때에 베드로는 욥바에서 정오에 기도하던 중에 보았던 보자기에 담겨 내려온 각종 짐승을 잡아 먹으라고 하신 영적 체험을 자세하게 전하였다.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성령의 역사는 경계가 없이 번져 가고 있었다. 하나님은 사도들과 흩어진 성도들을 통해서 복음의 불길이 헬라 지역의 사방팔방으로 번져 가게 하셨다. 19절의 “그 때에”라는 말씀은 그런 시대 상황을 축약한 표현이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환난을 피해 흩어진 성도들이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 등의 헬라 지역의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초창기에는 저들이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그런데 그 중에 몇 사람들이 안디옥에서 헬라 사람들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하기에 이르렀다. 20절에 “주 예수를 전파하니”라는 말씀은 굉장한 사건이다. 유대인들은 오래도록 모세의 율법을 믿고 모세의 율법의 범주 안에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믿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이들이 이제는 “주 예수를 전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굉장한 사건이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복음을 들은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서 주 예수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구브로가 어디인가. 지중해에 있는 섬이다. 오늘 날은 ‘사이프러스’라고 이름하는 터어키 앞 바다에 있는 섬이다. 그 섬 출신 사람들 중에 예수 믿는 이들이 생겼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바나바가 구브로 출신의 레위 사람이라고 했다. 오늘 본문에 그 ‘바나바’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구레네 사람이란 오늘 날로 하면 아프리카 사람들이다. 그들 중에도 예수 믿는 이들이 생겼다. 당시에 안디옥은 로마,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그 당시 인구가 50만 정도였으니까 대단히 큰 도시였다. 그 안디옥에 구브로 섬 출신, 구레네 아프리카 출신의 사람들 중에서 예수 믿는 이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성령이 역사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오는 회개의 역사가 계속하여 일어났다. 

당시에 안디옥에 예수를 믿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부흥에 대하여 누가는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누가식의 특이한 표현이다. 주의 손이란 하나님의 능력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주의 손이 함께 하시는 교회’라고 정하였다.

주의 손이란 하나님의 능력을 말씀하는 것이다. 물론 구약에서는 그런 식의 표현이 여러 번 나온다. 가령 요단강을 건너 길갈에 12돌의 기념비를 세운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출4:24) 그렇다. 여호와의 손은 강하신 손이다. 여호와의 손에는 능력이 많으시다. 이 세상 어떤 권력자의 손, 어떤 부호의 손, 어떤 장수의 손과 비교할 수 없는 천배, 만 배, 억만 배 강하신 손이 여호와의 손이며 여호와의 능력이시다. 

어제 지방 목회자 결혼식을 축하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느 목사님이 대만 선교 다녀온 경험을 이야기하였다. 내외간에 숙소에서 마주 앉아 아침말씀 묵상을 하고 있었다. 사모님은 침대에 걸터앉고 목사님은 원탁을 앞에 높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갑자가 지진이 느껴졌다. 사모님이 앉아 있던 침대가 그네가 흔들리는 것처럼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이런 때는 방을 벗어나서 건물 밖으로 피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당황하며 기도하는데 이미 지진이 멈추었다. “목사님과 사모님이 아침 큐티를 하시고 계신 시간이라서 하나님이 적당히 흔들다가 멈추셨나 보네요.”하고 말했더니 “아 맞아요 하나님이 참아 주신 것 같아요.”라고 대화가 이어졌다. 

올해도 여기까지 살아 왔다. 벌써 11월도 마지막 주일이다. 삼일만 지나면 올해의 마지막 달력만 걸려 있게 된다. 12월도 그렇게 지날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감사하지 않나. 지금 내 건강, 지금 나의 환경, 지금 우리 가정, 우리 가족, 우리가 섬기는 교회, 우리가 속한 나라 대한민국을 바라 볼 때 감사하지 않나. 지금 온 나라가 가마솥 끓듯이 부글거리고 있지만 이런 날들도 지나가지 않겠나. 언제는 안 그랬나. 

이 나라를 다스릴 왕이 누구신가. 누가 우리의 왕이 되어야 하나. 누가 우리의 통치자가 되어야 하나. 누가 우리를 다스리고 이 민족을 다스리고 이 시대 역사를 다스려 가야 하나. 동서고금에 백성들을 실망 시키지 않았던 군왕과 관원들이 있는가. 시편 2편을 보라.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라고 주님이 묻고 계시지 않나.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라고 하셨다. 그렇다.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은 만왕의 왕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지 않는다.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은 영원한 평강의 왕 메시아 그리스도를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탄 마귀가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려고 한다. 그래서 세상의 군왕과 관원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려 한다. 그러나 지내면서 역사를 주목해 보라.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신다.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시2:4) 하나님이 웃으시고 하나님이 비웃으시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불의가 없다. 영원히 숨길 수 있는 불의란 없다. 하나님은 철장으로 질그릇을 부수시듯이 역사를 판단하시고 공의로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은 권능의 손이시다. 영원히 숨길 수 있는 불의란 없다. 

엘리 제사장 때에 블레셋이 이스라엘에 쳐들어 왔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아 갔다. 자기 진영의 아스돗에 있는 우상인 다곤 신전에 들여 놓았다.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다곤 신상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려져 있었다. 다시 세워 두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다시 보니 이번에는 다곤 신상이 엎드러져서 몸뚱이 만 남고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문지방에 나뒹굴고 있었다. 사무엘 상 5장 6절에 보면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들을 치셨다. 그러자 아스돗 사람들에게 독한 종기와 재앙이 그 곳을 쳐서 망하게 되었다. 아스돗 사람들이 당황하여 겁을 먹고 말했다. “여호와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그래서 여호와의 법궤가 다시 이스라엘 진영으로 되돌려 지게 되었다. 

열왕기상 8장에 보면 솔로몬의 때에 다윗이 소원하던 예루살렘 성전을 완성하였다. 완공된 성전 안에 여호와의 법궤를 모셔 옮겼다. 그 후에 솔로몬이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손으로 이루셨도다.”(왕상8:15)고 찬양하였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사59:1)고 하나님의 권능과 판단을 찬송하였다.

그러므로 주의 손, 여호와의 손이란 여호와의 권능, 여호와의 힘을 말씀하는 것이다. 지난 칠년 동안을 한 결 같이 함께 하신 주의 손길이 앞날에도 영원히 늘 함께 하실 줄로 믿는다. 주의 손이 함께 하시는 교회란 어떤 교회인가.

좋은 소문이 나는 교회.
안디옥 교회는 주의 손이 함께 하시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 왔다. 안디옥교회의 부흥의 소문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그 곳에 보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 머무는 동안에 교회는 점점 부흥되어 갔다. 큰 무리가 주께 다하여졌다. 오늘 날 우리 교회도 그런 교회가 되어 갈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바나바가 되어야 한다. 내가 구브로 사람, 내가 구레네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경을 자세히 보라. 20절에 보면 몇 사람의 구브로 사람과 구레네 사람들이 안디옥에서 주 예수를 전파하기 시작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오는 부흥이 일어났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부흥의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보냄을 받았다. 그러면서 큰 무리가 주께 더하는 부흥이 시작되었다. 우리교회도 영유아부, 유치부, 교회학교, 청소년부, 청년부, 장년 속회 등등 구석구석마다 구브로 사람, 구레네 사람 그리고 바나바가 함께 한 안디옥 교회의 큰 부흥처럼 그런 부흥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는 교회.
교회는 서로의 은혜를 보는 곳이다. 세상은 서로를 물고 찢지만 교회는 달라야 한다. 안디옥 교회에 도착한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수많은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만나 보면서 저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다. 그렇다. 믿음의 사람들은 서로 서로 그러해야 한다. 서로의 단점이나 부족한 점이나 약점만 들추어내면 가정이라도 무너지고 가족이라고 불행하지고 말 것이다. 부부라도 금이 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간에 서로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 한지 모른다. 상대방의 100가지 장점과 칭찬할 점과 좋은 점을 두고 한두 가지 약점과 단점과 부족한 점을 꼬투리 잡고 시비 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수 많은 무리로 부흥해 가고 큰 무리로 부흥해가던 안디옥 교회에 파송 받은 바나바는 저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다. 바나바가 누구인가. 바나바는 12사도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다. 바나바는 바울도 아니다. 바나바는 바나바 일뿐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자세해 대해 보면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 얼마나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고 주변 사람들을 위로하던 구부로 출신의 레위 사람 요셉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바나바라고 불렀다. 그는 주변 사람을 위로할 줄 알던 착한 일꾼이었다. 교회에는 기관과 속회와 구석구석에 바나바와 같은 성숙한 신앙 인격을 가진 안정되고 향기 나는 신자들이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져 가게 된다. 사탄 마귀는 개인, 가정, 교회, 나라, 민족을 병들게 하고 무너지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시면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나라에 은혜로운 일들이 넘쳐 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때는 나라를 위하여 기도해야 할 때이다. 지도자 한 사람을 잘 못 세워 놓으면 어떤 불행을 겪게 되는가를 역사가 교훈하고 있다.

이는 나라도 마찬가지, 교회도 마찬가지,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줄 알던 성숙한 눈을 가진 훌륭한 일꾼이었다. 그는 성도들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면서 환난과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는 믿음의 사람들로 살아가라고 권면할 줄 알던 인물이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이 충만하고 믿음이 충만한 지도자였다. 

뿐만 아니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가 못마땅하게 여기고 배척하던 바울을 찾아 나선 인물이었다. 바나바는 다소에 찾아 가서 바울을 만났다. 25절의 “찾으러 가서”라는 “아나제테사이”라는 말씀은 “집집마다 일일이 자세히 뒤져서 세밀하게 찾는 것”을 말한다. 찾아도 그만 못 찾아도 그만이 아니라 찾고 찾을 때까지 찾아 나서는 적극적이고 끊질 긴 모습을 말씀하는 내용이다. 바나바의 마음에는 바울을 반드시 찾아내서 다메섹 변화의 체험과 은혜를 바탕으로 초대 교회 이방 선교의 불을 붙여 나가야겠다는 선교의 열정이 있었다. 구브로 출신인 바나바도 헬라말에 유창한 인물이요 로마의 시민권자였던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저들 두 사람은 유창한 헬라어 솜씨를 갖고 안디옥 교회 부흥의 두 기둥이 되었다. 바나바는 찾고 찾아 나서서 만나게 된 바울을 안디옥 교회에 데리고 왔다. 함께 일 년 간을 지내면서 큰 무리를 가르쳤다. 아직은 우리교회가 큰 무리가 아니지만 점점 부흥해서 ‘큰 무리’의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고 기도한다. 하나님은 몇 사람의 구브로 사람, 구레네 사람과 바나바와 바울을 큰 무리의 부흥을 이루는 안디옥 교회 부흥의 불쏘시개처럼 쓰임 받게 하셨다. 우리도 그렇게 쓰임 받기를 간절히 사모하자. 시간과 재물과 재주와 경험과 젊음을 바쳐서 주님의 손이 함께 하시는 멋진 교회로 섬겨 가자. 내 남은 생애 중에서 지금이 가장 젊은 때다 그런 마음가짐을 갖고 열정과 정열을 갖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헌신의 삶을 살아가자. 구경꾼이 되지 말고 주인공이 되자. 관객이 되지 말고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되자. 관람석에서 팝콘 먹고 콜라 마시며 평가만 하지 말고 내가 무대 위에서 땀 흘리는 주연 배우가 되고 운동장에서 땀 흘리는 주전 선수가 되자. 바나바와 바울은 그런 삶을 살았다. 안디옥 교회에 일 년을 머무는 동안에 큰 무리의 부흥을 이루었다. 다시 칠년을 시작하는 앞날에 하루하루 한 주 한 주 한 달 한 달 그런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기를 소망하자. 서로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며 기뻐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그런 큰 무리의 부흥의 기적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는 교회.
어린 아기가 자라서 소년 소녀가 되고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된다. 모세도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 강에 버려졌던 어린 아기 시절이 있었다. 다윗도 아버지 이새의 양떼를 몰고 베들레헴의 산허리를 오르고 내리며 들판을 오가던 어린 소년 시절, 어린 목동 시절이 있었다.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가 된 에스더도 부모 잃은 고아 소녀로 사촌 오빠 모르드개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하던 외롭고 고독한 어린 시절이 있었다. 

이는 개인이든 교회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안디옥 교회가 어느 날 며칠 만에 갑자가 큰 무리의 교회가 된 것은 아니었지 않나. 몇몇 사람들의 구브로 섬사람과 구레네 아프리카 사람들이 다 인종이 모여 사는 안디옥이란 큰 도시에 가서 주 예수를 전파하기 시작한 것인데 성령이 역사하고 하나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신 결과이다. 그렇다. 주의 일은 철저히 주님의 손이 함께 하셔야 한다. 인간의 노력과 열심히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결과와 열매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바나바와 바울이 함께 한 복음의 가르침은 큰 무리 가운데 주의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안디옥 사람들은 그들 안디옥 교회의 예수 믿는 이들을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유대인들은 예수 때에 예수나 절반 이상의 갈릴리 호수의 어부 출신이었던 그의 12 제자들을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놀렸다. 예수를 나사렛 사람이라고 놀렸다. 오늘 날로 하면 시골 사람, 촌사람이란 말이다. 당시 갈릴리와 나사렛이 그런 곳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비웃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일은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비로소 안디옥교회의 큰 무리와 주 예수를 믿는 제자들을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라는 뜻이다.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허락하신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필요할 때 종교 기록란에 ‘기독교’라고 쓰는 정도의 교인이 아니라  주어진 시간과 앞으로 주어질 시간과 재물과 은사와 경험을 바쳐 헌신하고 생명 바쳐 주를 섬기고 따를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그런 교회를 세워 나가자. 그런 교회를 건설해 나가자. 몇몇의 복음 전파를 시작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온 큰 무리의 안디옥 교회”가 된 것럼 주의 손이 함께 하시고 서로가 체험하는 은혜 생활을 보며 기뻐하고 감사하고 칭찬하고 인정하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바나바와 같은 그런 믿음의 섬김을 다하자.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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