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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초대교회 부흥의 시작(행2:37-47) 201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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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6-10-01 09:20 조회 17,570 댓글 0
 
초대교회 부흥의 시작(행2:37-47)             2016. 9. 25


예루살렘 교회는 이 땅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는 황해도에 세워진 솔내교회이다. 소래교회라고도 한다. 솔내교회는 한국에서 최초로 자생적으로 설립된 교회이다. 1883년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세워졌다. 평안도 의주 출신의 서상륜은 인삼장사로 만주를 드나들다가 영국인 선교사 존 로스 목사를 만나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성경번역을 도왔다. 그의 동생 서경조와 서상륜은 황해도 장연구 대구면 송천리의 소래마을의 한 초가집에서 1883년 5월 16일 한국 최초로 한국인 스스로 교회를 세웠다. 그 후 1895년 8칸의 기와집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1896년 8칸을 증축하였다. 이후 솔내교회는 신임 서양선교사의 한국어 교육장소로 또 동학군의 피신처로 사용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황해노회는 이 교회의 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솔내교회를 복원하기로 결정하고 총신대 양지캠퍼스에 증축된 솔내교회를 재현하였다. 감리교회인 내리 교회나 정동제일교회, 새문안 장로교회는 그 후에 아펜젤러, 언더우드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들이다. 오늘 날은 10만 교회 1000만에 육박하는 신도가 되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가셨을 때에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다. 예수를 향한 세상 사람들의 반응을 몰라서 물으신 것은 아니셨을 것이다.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중의 한 선지자 중 하나라”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반응이라고 전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재차 물으셨다.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이런 신앙 고백을 들으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7-19)

이때에 해 주신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말씀 가운데 ‘교회’에 대한 언급이 최초로 나온다. 

여러분은 교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 교회가 무엇이라고 정의하시나? “에클레시아”란 교회의 정의는 ‘....로 부터’의 .에크.와 ‘부르다’의 ‘칼레오’의 합성어이다. “...로부터 불러내다”이다. 즉 “세상으로 부터 불러냄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들의 모임이 교회이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각 사람의 신앙 고백이 교회이다. 그러므로 이단이나 사이비는 교회가 아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다. 장례 된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사십일을 이 땅에 더 계셨다. 그 동안에 열 한 제자와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평소에 주를 따르는 자들을 일일이 만나 주셨다.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만나 주신 적도 있으셨다. 승천하실 때에 예수께서는 열 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분부하셨다. 예수는 장차 임할 성령 세례는 세례 요한의 물세례와 다르게 성령 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120여명의 성도들이 모두 다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였다. 성령의 임재가 교회 탄생의 시작이다.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사람들이 변했다. 도망 다니고 숨고 하던 베드로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나니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변하였다.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은 예수 믿는 이들을 잡아다가 죽이려고 다메섹을 향하여 가고 있었다. 다메섹의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대제사장에게 청해서 받아 들고 가던 사울을 예수께서 부르셔서 사도 삼으셨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채로 다메섹을 향하여 가던 사울을 예수께서 강한 빛을 비추어 땅에 엎드러지게 하셨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부르셨다. 핍박자 사울이 변해서 초대 교회 시절에 이방 땅에 수 없는 교회가 탄생되게 하고 수많은 성도들이 세워지게 하는 전도자로 쓰셨다. 

본문은 교회의 탄생과 그 부흥의 현장을 기록한 말씀이다. 
베드로를 통한 복음 전파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회개의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물론 베드로를 비롯한 열 한 제자와 보충된 맛디아라는 이름의 제자까지 모두 다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등의 여인들도 성령을 받았다. 마리아가 남편 요셉을 통해서 낳은 동생들인 예수의 동생 야고보와 유다도 성령을 받았다. 성령의 충만함이 기도하던 120여명의 성도들에게 일일이 임하였다. 

급하고 강한 바람과 같은 성령,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성령이 강력하게 기도하는 이들 가운데 임하였다. 성령 받고 각기 다른 언어로 방언하였다. 그 현장을 목격한 이들은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며 조롱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 베드로가 담대하게 일어나서 예수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예수의 부활은 스스로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무리들은 마음에 찔려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영적 고민을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털어 놓았다. 그 날 베드로 사도의 복음 설교를 들은 무리들 중에서 삼천 명이 동시에 세례를 받는 역사적인 일이 일어났다. 초대교회에 부흥이 시작된 것이다. “초대교회 부흥의 시작” 이런 제목으로 본문을 좀 더 자세하게 묵상하자.


성령 강림과 교회 부흥의 시작.
성령을 받는 길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는 길이다. 회개한다.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회복을 의미한다. 왜 인간에게 회개가 필요한가. 아담에게서 시작된 인간의 타락은 회개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는 세례 요한의 복음 전파의 시작이며 예수께서도 이 같은 말씀으로 복음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러면 회개와 천국은 무슨 관계인가. 회개는 후회나 뉘우침과는 다른 것이다. 회개는 아버지를 멀리 떠나 제 맘대로 살아가던 상태에서 생각을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의 비유가 나온다. 예수께서는 이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반복해서 강조하신 바가 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눅15:7, 10)이라는 말씀이다. 백 마리의 양 중에서 잃은 양 한 마리를 되찾았을 때의 기쁨, 열 드라크마 중에서 잃은 드라크마 하나를 다시 찾았을 때의 여 주인의 기쁨, 큰 유산을 일찍이 받아 가지고 아버지를 떠나 남의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고 주색잡기를 즐기던 둘째 아들이 거지가 되어 돌아 왔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 돌아 온 둘째 아들을 반갑게 반기며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즐거워하였다. 잃었던 둘째 아들, 죽은 줄 알았던 둘째 아들이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 온 것 그 자체만으로도 아버지는 기쁘고 감사하고 즐거웠다. 그래서 아버지는 종들에게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잔치를 벌였다. 허랑방탕하게 살며 주색잡기를 즐기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 온 아들인데 아버지가 하는 말씀은 달랐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말하자 종들까지도 다 같이 즐거워하였다. 회개란 이런 것이다. 죄 가운데 살던 인생이 하나님 아버지께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하신다. 그러면 회개가 무엇인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 안에서 아버지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와이파이’ 천국이다. 인터넷이 우리나라처럼 잘 터지는 곳은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없다. 미국 같은 나라에도 인터넷을 쓰려면 호텔마다 따로 인터넷 사용료를 받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도시나 농촌이나 인터넷 사각지대가 거의 없다. 놀라운 일이다. 통신 강국이다. 그런데 지난 번(2016.9.12.) 밤 7시 44분에 경주 지역에 강도 5.8의 지진이 발생했다. 그 후에 얼마 동안 통신이 두절되었다. 카톡도 멈추고 핸드폰 연락도 멈추어 버리고, 집 전화도 안 되고, 인터넷 사용도 불가능해 졌었다고 한다. 국가적으로도 재난 예보를 전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지적 받았다. 

신앙생활은 평소에도 하나님과 교감이 잘 되어야 하지만 비상시에는 더욱 더 하나님과 소통이 잘 되어야 한다. 그래야 신앙으로 살아가는 증거이다. 하나님과 교감이 끊기면 불행한 것이다. 우리가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였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말할 지라도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한느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고 경고하셨다. 

성도가 회개하고 세례 받고 죄 사함 받으면 그의 마음속에 성령께서 역사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동시적이다. 또 그래야 맞다. 회개, 죄 사함, 세례, 성령의 임재 이 모든 것들이 서로 하나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거룩한 교회로 부르심을 받는 것이다.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이 교회로서의 성도의 삶이다. 교회로서의 성도의 삶이란 초대교회와 같은 핍박기에 지하 교회인 카타콤베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더라도 그 곳에서 구원 받은 성도의 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 충만한 교회와 성도의 모습이란 무엇일까. 성령의 충만을 받고 부흥해 가던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모습은 어떠하였나. 사도 베드로의 복음 설교를 들은 무리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 41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세례 받은 이들이 그 날 삼천 명이나 더했다. 예수의 부활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은 저들의 신앙생활의 특징이 무엇인가. 


가르치고 교제하고 기도하는 교회.
회개하고 죄 사함 받고 성령 받은 감격과 구원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기 시작한 성도들은 계속하여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말씀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였는데 점점 더 부흥이 계속되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31), “그달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5:42),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행6:4) 사도행전 10장 44절에도 보면,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였다. 이처럼 말씀을 가르치는 것, 말씀을 배우는 것처럼 소중한 일이란 없다. 교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다. 예배와 설교 시간을 통하여, 새벽이든 낮이든 밤이든 계속하여 성경 묵상과 성경 말씀을 나누는 생활을 통하여, 커피 브레이크를 통해서 주님을 믿는 우리들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 설교하는 본인은 태어나서 오늘 날까지 교회를 떠나 본 적이 없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모든 말씀이 새롭고 모든 말씀이 은혜와 교훈이 된다. 왜 그럴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찬송한 203장 찬송의 가사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며, 은혜의 말씀이며, 진리의 말씀이고, 사랑의 말씀이다.” 시편 19편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고, 영혼의 눈을 밝게 하신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까지 이르며 다 의롭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를 즐겨 했던 시편 기자는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19:10)고 하였다. 

성령 받은 초대 교회 성도들 가운데 말씀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이번 부흥회에 말씀의 은혜가 더해지기를 소망한다. 날마다의 강단의 말씀과 모든 예배의 말씀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과 가르침이 깊이를 더해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마음 문이 열리기 시작하면 성경 말씀을 깨닫는 시간처럼 행복한 시간이 없게 된다. 시편 19편을 쓴 다윗은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고 고백하였다.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그런 말씀의 가르침과 교훈이  점점 깊어 가기를 소원한다. 42절에 보니까 성령 받은 초대 교회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날마다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사귐을 가졌다. 오로지 기도하는데 힘썼다. 이것이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다. 말씀과 성도의 교제와 기도 가운데 교회는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부흥하던 때처럼 계속하여 부흥하게 될 것이다. 서로 간에 성도의 사귐을 소중하게 여기고 신중하게 해야 한다. 기도 생활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열심을 품고 기도하여야 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 계속하여 기도하기에 힘썼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미하는 교회.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신명기 11장 2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사람들로 하여금 저들을 쳐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두렵고 무서운 마음을 갖도록 해 주셨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탄생과 부흥은 당시에 주변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되었다. 성령 받고 방언 하는 모습을 보고 대 낮에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던 예루살렘 시민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교회와 성도들을 조롱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마다 두려워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초대 교회가 사람마다 두려워하는 가운데 사도들로 인한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 이와 같은 일련의 일들은 점점 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도들 간에 주를 믿는 서로를 두렵게 대하는 경건 운동이 벌어졌다. 맞다. 교회는 그래야 한다. 사도행전 3장에서는 나면서 못 걷던 40살 쯤 된 성전 미문 앞의 걸인을 걷게 하는 하나님의 기적이 베드로 사도를 통해 일어났다. 사도행전 4장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가 앞장서서 종교재판을 열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계속하여 예루살렘 교회는 부흥해 가고 있었다. 남자들만 오천 명이 되었다. 사두개인들과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은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들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모든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같이 모여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고 다그쳤다. 그 때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대답하였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0-12)  

믿는 사람이 다 함께 모이기를 즐거워하였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서로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 집집마다 모여서 서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 날마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성도들로 예루살렘 거리마다 차고 넘쳤다. 입당 3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에도 이런 부흥의 역사가 새롭게 계속되기를 소원한다. 

베드로를 통하여 성전 미문 앞의 걷지 못하던 걸인이 고침을 받고 걷고 뛰게 되면서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과 성전 지키는 자들이 긴장하기 시작하였다. 핍박은 점점 심해져 갔다. 사도들을 옥중에 가두었다가 끌어내어 종교 재판석에 피고로 앉혔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담대하게 맞섰다.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풀려 나자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더욱 더 한 마음으로 기도하기에 힘썼다. 사도행전 4장 24절에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라고 했다. 여기서 “이르되”란 말은 “기도하여 이르되, 부르짖어 이르되” 이런 말이다.  초대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무엇이라고 기도하였나. 사도행전 4장 24절부터 30절까지의 기도 내용 중에서 29절과 30절을 보자.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행4:29-30)
이렇게 기도하자 그들이 모여 기도하던 곳이 진동하였다. 3D, 4D상영극장에 앉아 있으면 의자가 흔들거리는 것처럼 진동이 느껴졌다.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뜻이 되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다. 무리가 다 큰 은혜를 받았다. 가난한 자들이 가진 자들과 있는 자들로 인하여 경제적으로 배려를 받았다. 밭과 집이 있는 자는 팔아서 그 판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누는 일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필요를 나누는 공동체 생활이 일어났다. 우리가 아는 바나바가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둔 것은 그 많은 사례들 중의 하나를 기록한 것뿐이다. 기적은 계속하여 일어났다. 예루살렘 교회의 부흥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남녀의 큰 무리”(행5:14)가 되었다. 병든 자를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나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나기를 기다리는 이들도 있었다.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환자 위로 그림자만 덮여도 나으리라.”는 기대와 믿음을 가진 이들이 모여들었다. 사도행전 5장 15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병든 자들과 더러운 귀신 들려 괴로움을 받는 자들을 데리고 왔는데 저들이 다 나음을 얻었다.(행5:16) 가르침과 성도의 사귐과 기도 가운데 기적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온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으며 부흥하는 교회.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성도들은 모여서 기도하고 서로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함께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었다. 모일 때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교회는 하나님을 찬미하는 곳이다. 성도는 하나님을 찬미하는 무리들이다. 교회의 이천년 역사는 찬양의 역사다. 교회 음악이 구라파 음악의 뿌리다. 우리가 아는 고전음악, 중세 음악의 거장들을인 작곡가들을 보라. 저들은 대개가 성경에서 작곡의 영감을 받고는 하였다. 헨델, 하이든, 베토벤, 브라암스, 차이코프스키, 수베르트, 요한 세바스찬 바하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음악가들이 성경을 기반으로 한 기독교 음악 역사의 증인들이다.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 1685-1759)이 오라토리오 ‘메시야’를 작곡 할 때에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다. 그는 독일에서 외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루터교 목사의 딸이었다. 외할아버지가 루터교 목사였다. 1741년 8월 22일부터 9월 14일까지 23일간 거의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의 손길에 사로 잡혀서 역사적인 작품을 완성하였다. 그는 나중에 “나는 그 때에 오직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그 나라의 주인이신 메시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라고 고백하였다. 첫 연주회에는 영국 왕죠지 2세도 참석하였다. “할렐루야 영광의 주 하나님 존귀와 찬양을 받으소서”라는 찬양이 울려 퍼지지 영국의 왕 죠지 2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신하들과 청중들도 모조리 다 함께 일어났다. 1743년 3월에 있었던 일이다. 이후로 헨델의 메시아 연주 중에 할렐루야 찬양이 시작되면 청중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전례가 생겼다. 

하나님은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지으셨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함이니라.”(사43:21)고 했다. 

“모든 만민들아”라는 찬양이 있다. 

“모든 만민들아 주를 찬양하여라 위대하신 우리 주님을 소리높여 찬양해 우리 주예수 찬양 하라 찬미 주 할렐루야  오- 찬미 주 할렐루야 할- 렐- 루- 야- 찬미 주 할렐루야  오- 찬미 주 할렐루야 할- 렐- 루- 야-.”

교회는 기도와 찬양과 말씀과 성도의 교제 가운데 회개와 죄 사함과 병 고침과 회복과 격려와 용기와 희망과 결단과 꿈과 고백이 계속되는 곳이다. 사도행전의 기적이 시작된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그랬다.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과 성전을 섬기는 이들에 의하여 위협과 핍박이 계속되던 예루살렘교회는 온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는 교회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구원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믿는 신자의 수가 점점 날마다 더해 갔다. 주께서 그렇게 해 주신 것이다. 사도행전 2장 47절은 이렇게 끝난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입당 제 3주년을 맞는 예수사랑교회에 이와 같은 초대교회와 같은 부흥의 역사가 계속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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