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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어찌 그럴 때이냐(왕하5:20-27, 엡4:28) 201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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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 16-08-25 11:18 조회 19,231 댓글 0
 
지금이 어찌 그럴 때이냐(왕하5:20-27, 엡4:28)     2016. 8. 21



요즘 계속하여 엘리사 시대의 성경 말씀을 열왕기하서에서 대하고 있다. 지난 몇 주 동안 대한 내용이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인 나아만 장군이 이스라엘을 방문한 일이었다. 나아만 장군은 예물 받기를 거절한 엘리사 선지자의 곁을 떠나서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얼마 후에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 게하시가 속으로 생각하였다.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그리고는 나아만 장군의 뒤를 쫓아 나섰다. 얼마 후에 나아만 장군은 자신들의 일행을 뒤 쫓아 달려오고 있는 게하시를 만났다. 수레를 멈추고 마차에서 내린 나아만 장군은 “평안이냐”하며 게하시에게 물었다. 그 때에 게하시는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나누었다. “평안하나이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주라 하시더이다.”하고 거짓말을 하였다.

나아만 장군은 기꺼운 마음으로 은을 건넸다. “은 한 달란트를 요구하지 말고 두 달란트를 받으시오” 하고 강권하면서 전대에 은 두 달란트를 넣어 주었다.  그리고 엘리사에게 선물하려고 가지고 갖던 아람 산의 최고로 좋은 옷 두 벌도 아울러 게하시와 대동한 두 사환에게 지워 주었다. 게하시는 사마리아의 언덕 위에 있는 자기 집 가까이에 도착하자 두 사환을 멈추어 서게 하였다. ‘언덕’이란 표현을 하고 만 것을 보면 게하시는 경치 좋은 언덕에 있는 집에 살았던 것 같다. 게하시는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받아가지고 자기 집에 감추어 두었다. 게하시와 동행했던 두 사환은 각기 제 길을 갔다. 그 후에야 게하시는 엘리사 선지자의 곁으로 출근하였다. 그 때에 엘리사 선지자가 물었다.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게하시는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그 순간 게하시는 얼마나 당황하였겠는가. 상황을 그렇게 그냥 모면하는 줄 알았는데 엘리사 선지자가 다시 게하시에게 말을 걸었다.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이 말을 들을 때에 게하시의 심정이 어떠하였겠나 상상해 보라. 엘리사 선지자는 게하시의 출입과 동선을 환하게 알고 있었다. 
게하시를 향한 엘리사 선지자의 책망은 이어졌다.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더 이상 엘리사 선지자를 대할 면목이 없게 된 게하시는 엘리사 곁을 물러나서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게하시의 몸에는 나병이 생겨서 온 몸이 눈 같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성경 안에 소개 된 이런 정황의 말씀을 대할 때에 무슨 교훈을 받게 되나.


탐심(貪心).
탐심은 죄다. 탐심은 사탄이 인간의 마음에 뿌려 놓는 죄와 악의 씨앗이다. 인간의 마음에 탐심이 자리 잡으면 죄를 범하게 되고 만다. 탐심에 대한 금지 명령은 십계명에도 포함되어 있다. 십계명 중의 맨 마지막 계명이 무엇인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20:17)

사람이 마음이 탐심을 갖게 되면 그 탐심의 대상이 무엇이든 누구이든 탐하게 된다. 성경은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탐심의 대상은 사람일 수도 있고 물건일 수도 있다. 탐심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인간을 지배하는 무서운 악의 힘이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무너트린 사탄의 무기도 탐심에 불을 붙인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그 좋은 모든 실과나무의 열매를 자유롭게 먹도록 허락하셨다. 그리고 단 한 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금하셨다. 그런데 사탄은 하와의 마음에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향한 탐심이 생기도록 유혹하였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는 남편 아담에게도 같은 유혹의 손길을 내어 밀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소돔과 고모라 성을 선택하던 아브라함의 조차 롯의 마음을 지배한 것도 탐심이었다. 창세기 13장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의 풍경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다. 물이 넉넉하고 풍요로운 땅이었다. 나중에 하나님은 그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리셨다. 창세기 19장 25절은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탐심의 왕국은 영원하지 않다. 나라라도 민족이라도 어느 가정이든 개인이든 어른이든 어린이이든 탐심에 사로잡히면 그 나중이 불행해지고 만다. 좋은 것, 비싼 것, 귀한 것, 값진 것에 대하여 탐심을 갖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이 세상에 탐심이 없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 탐심을 다스리지 못하면 되 돌이킬 수 없는 화와 재앙을 부르고 만다.

한 번은 무리 중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께 물었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그 때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하시고 이런 교훈을 말씀해 주셨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그리고 이어서 해 주신 비유의 말씀이 ‘한 부자의 비유’이다. 한 부자가 농사가 잘 되었다. 밭에 소출이 넘쳐 났다. 마음으로 생각하였다. “내가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그리고 계획을 세웠다. 곡간을 헐고 새 곡간을 크게 짓고 거기에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 두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스스로에게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후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21)고 교훈하셨다. 


여호수아 시대의 아간의 탐심으로 인한 범죄, 아말렉 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던 사울 왕의 탐심으로 인한 범죄,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 임금과 이세벨의 탐심, 말라기 선지자당시에 하나님께 드릴 십일조와 봉헌물을 도둑질 하던 탐심, 헤롯왕이 동생의 아내를 부인으로 빼앗아 취한 범죄를 보라. 인간이 헤롯왕처럼 탐심에 사로잡히면 자기 동생의 부인이라도 제 아내로 빼앗아서 사는 패륜한 일을 저지른다.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버린 가롯 유다나 초대 교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범죄를 보라. 이 모든 것의 뿌리가 탐심이다. 탐심은 인간을 병들게 하고 죄에 깊이 빠져 들게 한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여기 ‘욕심’이 뭔가. 그 욕심이란 말 대신에 탐심을 바꾸어 넣고 읽어 보라. “탐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러므로 탐심을 이기며 살아야 한다. 강남의 수 만 명이 모이는 큰 교회를 목회하고 은퇴하신 목사님의 목회 일화 중에 이런 간증이 있다. 

그 교회 교인 중이 부자가 많았다. 어느 젊은 부인이 다이아몬드 수집 광이다. 백화점 보석 가게 앞을 그냥 지나질 못한다. 자기 맘에 드는 다이아 반지, 목걸이, 팔찌, 귀걸이가 있으면 남편을 졸라서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 손에 넣는다. “저것 사 주지 않으려면 내 곁에 얼씬도 하지 말라”며 남편에게 으름장을 놓고 또 사들이 또 사들인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다이아몬드 장식을 사들이고 사들이는데도 마음에 평화가 없다. 오히려 어디 밖에 외출했다고 집에 돌아오면 금고를 열고 그 다이아몬드 보석부터 들여다본다. 그런데 늘 마음에 평화가 없고 불안이 떠나질 않았다. 그렇게 엄청난 보석을 대형 금고 가득 쌓아 두고 사는데도 마음에 기쁨이 없다. 그래서는 그가 형식으로 드나들던 교회의 담임 목사를 찾아 갔다. 금고 속에 사서 모아 쌓아 두었던 그 많은 다이아몬드를 몽땅 싸들고 목사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자기의 심정을 말하면서 그것 다 팔아 좋은 일에 써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렇게 해서 교회는 그 다이아몬드 판돈으로 경기도 성남에 아파트 22채를 사들였다. 앞을 보지 못하며 부부 간에 시각 장애인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서 ‘소망의 집’이라고 이름 붙이고 형편과 처지가 비슷한 이들끼리 모여 사는 곳을 이루었다. 

탐심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 탐심에서 벗어나야 참 사람답게 살 수 있고 보람 있게 살 수 있다. 부자는 문간에서 구걸하며 병들고 헤어진 피부의 헌데를 개가 핥는 그 불쌍한 거지 나사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부자의 눈에 그런 초라한 거지가 눈에 들어 올 리가 없다. 부자도 죽었고 거지 나사라도 죽었다. 부자는 지옥에 떨어졌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갔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내용이 아닌가.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인가. 아니다. 거지이기 때문에 나사로가 천국에 갔나. 그것도 아니다. 예수 안에서 거듭난 신앙으로 살아가야 천국 백성이 되는 것 아닌가. 

이 세상에서 탐심으로 살아가는 자는 그 탐심의 노예가 되고 만다. 매사에 자기 중심의 이기심에 갇혀 살고 만다. 스스로 만족도 없고 행복도 빼앗기고 만다. 물로 돈 많으면 남들보다 편리하게 떵떵거리며 여유 있게 살 수 있다. 그러나 부자라고 해서 행복이 정비례하는 것만은 아니다. 

어느 총각이 결혼 상대 여성을 구하는데 늘 돈이 많은 여자를 찾으려 했다고 한다. 그래서는 늘 ‘돈’과 ‘여자’를 입에 달고 살았다 ‘돈, 여자, 돈, 여자, 돈, 여자’ 그런데 정작 결혼 하긴 하게 되었는데 결국은 ‘돈 여자’와 결혼하고 말았다고 한다. 우습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산다. 북한의 체제를 보라. 이 땅의 기업가들을 보라. 이 땅의 권력을 가진 집권당의 정부 고위층 인사들의 처세를 보라. 사법 고시, 행정 고시 등 국가고시에 아무나 합격하나. 그러나 판사, 검사, 혹은 정부 최 고위직 공무원들이 잘 못 되는 경우가 왜 생기나. 왜 저들 중에 그렇게 민망하고 부끄러울 일을 겪는 이들이 왜 생기나. 

탐심은 인간을 수렁에 빠지게 한다. 수렁에 빠진 사람은 허우적거리면 허우적거릴수록 점점 더 깊은 수렁 속에 빠져 들고 만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6:6)고 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고 경고하였다. 본문에 보라. 게하시는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라고 말하며 하나님까지 운운해가며 탐심에 빠져 범죄하고 말았다. 탐심은 우상 숭배이다. 탐심은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부르는 파멸의 시작이다. 



거짓말.
우리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말이 있다. 거짓말도 마찬가지이다. 작은 거짓말의 반복이 인격을 파멸시킨다. 게하시는 자기 안에 가득하게 치 밀어 오르는 탐심을 해결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거짓말을 꾸며 내었다. 엘리사 선지가가 교장으로 있는 선지자 학교에는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게하시는 나름대로 연극을 연출하고 있었다. 자작극을 벌인 것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왕하5:22) 게하시는 자기의 탐심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기가 모시는 선지자 엘리사를 이용하고 선지자 학교의 제자인 두 명의 청년 까지 거론하면서 완전 범죄를 계획하려 하고 있었다. 

심리학에서는 ‘거짓말’에 대하여 학문적인 설명을 한다. 그러나 이 시간에 그런 딱딱한 이론들을 대할 상황은 못 된다. 단지 거짓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거짓말을 속이기 위해서 나름대로 당황해 하지 않는 자기의 모습을 보이고 의연한 척 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중에 하는 태도가 손을 콧잔등을 만지거나 비빈다든지, 손으로 눈을 비빈 다든지 시선을 흐트러트려서 다른 곳을 바라본다든지, 양 손을 넓게 펴서 하늘을 향한다든지, 손이나 손가락으로 입을 가린다든지, 갑자가 말이 빨라지거나 말끝을 흐린다든지, 평소에 볼 수 없던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든지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21:16) 이 말씀은 십계명 중에서 아홉 번째 계명이다. 거짓말은 심각한 범죄 행위이다. 게하시는 자기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자기가 모시는 엘리사 선지자의 권위와 지위를 악 이용해서 거짓말을 일 삼으며 탐욕에 사로 잡힌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나아만 장군이 이스라엘에 실고 왔던 모든 예물을 다 내어 놓으라 하지 않았다.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 이렇게 정하여 요구하면서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셨다”고 주인 엘리사 선지자의 이름을 팔았다. 이런 것이 거짓말이다. 사람이 거짓말 해 버릇하면 그 거짓말이 점점 실력이 늘게 된다. 그래서 거짓말에 재미를 붙인다. 미국 벤살렘 교회 목회 할 때에 거짓말 잘하는 권사가 있었다. ‘강 00’ 권사이다. 그 여성 권사는 이리 거짓말 저리 거짓말을 했다. 그 주변 사람들이 다 안다. “아이고 저 아무개 권사 또  거짓말 하네” 이렇게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 댈 정도였다. 거짓말도 습관이다. 좋은 일도 습관이 되면 익숙해지는 것처럼 나쁜 일도 습관이 되면 잘 고쳐 지질 않는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이 있지 않나. 게하시는 이 사건의 처세로 보아서 좋은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다가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엘리사가 그런 유형의 인물을 곁에 사환을 두었는지 의아할 정도이다. 그러나 여하튼 게하시는 하나님을 속이고, 엘리사를 속이고, 자기가 함께 동행한 두 사람을 속여 가면서 음모를 갖고 나아만 장군을 이용해서 자기 탐심을 채우려고 하였다. 

거짓말 해 버릇하면 사탄의 그 마음에 파고든다.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의 마지막 밤에 대한 내용을 자세하게 담고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고 계셨다. 예수님은 저녁을 잡수시다가 말고 웃옷을 벗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신 후에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 주셨다. 그리고 다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셨다.  그러던 중에 심령에 괴로움을 느끼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서로 당황하며 여쭈었다. 시몬 베드로는 머릿짓을 하며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고 예수님께 채근하였다. 예수님은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제자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알고 있었다. 이미 가롯 유다의 마음속에는 사탄이 들어 가 있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13:2)

거짓말은 성령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다. 거짓말은 사탄이 이용하는 마음이다. 사기, 횡령, 공갈, 협박 등 그 모든 악의 뿌리는 거짓말이다. 마귀는 어떻게 하면 거짓말을 해서 상대방을 궤계에 빠지게 하고 악하게 이용할 수 있을까 하고 사람의 생각 속에 거짓말을 하게 만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거짓 같은 사실보다는, 사실 같은 거짓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말을 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사소한 거짓말도 자꾸 반복하다 보면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처럼 아무도 그의 거짓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거짓말은 그 거짓말하는 사람 자신을 불행의 늪에 빠져 들게 한다. 거짓말의 반대말이 무엇인가. 진실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진실하신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 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진실하여야 한다. 거짓되면 안 된다.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재산을 적게 바쳐서 죽임을 당하였나. 아니다 베드로의 책망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거짓말에 관한 것이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거짓말 한 것이로다”(행5:3-4)고 책망하였다. 그런데 아나니아가 바닥에 엎드러졌고 혼이 떠나고 죽고 말았다. 이 소문을 들은 초대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모두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다 크게 두려워하였다. 세 시간 후에 나타난 아내 삽비라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거짓말을 이어서 계속하던 아내 삽비라도 남편처럼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서 그녀의 혼이 떠나고 죽고 말았다. 젊은이들이 베드로의 방에 들어와서 아내 삽비라의 시체를 메어다가 남편의 곁에 장사지냈다. 이 일로 인하여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행5:11)고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청와대, 사법부, 국회 할 것 없이 국가적인 요인들 주변의 불의 한 사건들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짓말이 온 나라의 정치계에 독감 바이러스처럼 번져 가고 있다. 

엘리사 시대 때에만 탐심 사건, 거짓말 사건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당시에 엘리사도 거국적인 선지자요 왕을 상대하고 이웃나라의 정상들과 고위직들을 상대로 하는 이름 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처럼 덩달아서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도 그 주변에 상대하는 이들 중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못 만날 사람이 없었고 상대 하지 못할 사람이 없었다. 게하시는 그런 자신의 역할과 엘리사 곁에서의 입지를 악 이용해서 거짓말 촌극을 벌인 것이다. 거짓말하면 그 꼬리가 잡히게 마련이다. 영원한 거짓말이란 이 세상에 없다. 언젠가는 들통 나게 마련이다. 게하시는 거짓말로 얻은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자기 집에 감추었다. 그리고 출근 한 후에 마주친 엘리사의 질문 앞에 시치미를 떼고 거짓말을 계속하려 하였다. 거짓은 거짓을 낳고 악은 악을 부르게 된다. 

최근까지 거짓말로 학력을 속이고 직장 경력을 속이며 전국에 공영 TV, 라디오, 기업체 등에서 고액의 강연료를 받으며 수 백회 이상의 유명 강사로 불려 다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기독교계의 인사를 자처하며 그 동안 거짓말로 자신을 위장해 온 전말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베스트셀러였던 책들도 전국의 서점에서 모두 다 수거 되었다. 그가 강연하면 모두 다 빨려 들어가듯 그의 유창한 화술과 입담에 그에게 매료되었다. 그런데 그가 졸업했다는 최고 명문대 법대에는 졸업생 명단에 그의 이름이 없었다. 고위직 공무원이었었다는 기록도 거짓으로 드러났다. 그는 학력과 신분을 위장한 사기꾼이었다. 그의 사기 행각에 오래 도록 여러 해 동안 TV를 비롯한 언론과 대기업체와 고위직 공무원들이 농락을 당하였다. 

거짓말의 끝은 항상 좋지 못한 결과로 끝나고 만다. 거짓말은 하나님을 속이고, 주님을 속이고, 성령을 속이는 결과를 가져 온다. 그러므로 거짓말의 끝은 불행이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성도라면 진실해야 한다.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마음 만져 주소서 
하나님 나의 영혼 새롭게 하소서”

이런 찬송의 고백이 삶을 진실하게 지켜 가는 힘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책망과 벌.
게하시의 출입을 손 바닥 들여 다 보듯이 다 알고 있던 선지자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물었다. “네가 어디서 오느냐” 게하시는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하고 시치미를 떼며 주인을 속이려 하였다. 엘리사 선지자는 진실하지 못하고 거짓을 일관하는 게하시에게 더 이상 참아 주지 않았다. 게하시를 향한 선지자 엘리사의 책망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왕하5:26)

하나님을 속이고 주인 엘리사를 속이며 거짓으로 일관하는 파렴치한 사환 게하시를 향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책망이 포문을 열었다.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그 순간 게하시는 엘리사의 방을 벗어나 나갔고 그의 몸에는 흰 눈 같은 나병이 전신에 번졌다. 

예수님은 앞 못 보는 한 사람에 대하여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그는 자기의 죄나 자기 부모의 죄로 인하여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살다 보면 병들 수도 있고 재물이 날아가 버릴 수도 있고 가난하거나 궁핍해 질 수도 있다. 실패 할 수도 있고 답답한 일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다. 범죄하면 안 된다.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범하면 안 된다.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였다.

선을 심으면 선을 거둔다. 악을 심으면 악을 거두고 만다. 숨길 수가 없는 법이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고 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고 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고 하였다. 

성공, 출세, 권력, 재물, 인기 그런 것 못 얻고 못 누려도 좋다. 성도는 진실해야 한다. 믿음의 사람은 신실하여야 한다. 높은 나무 위에서 떨어지면 훨씬 큰 대형 사고를 부른다. 높은 것 너무 부러워하면 안 된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지만 불행하게 끝나고 말았다. 솔로몬은 삼천 잠언을 지어 내던 지혜의 왕이지만 우상 숭배와 타락에 빠지니 그의 말년이 불행해 지고 말았다. 게하시는 엘리사 선지자만큼은 아니지만 온 나라가 알고 나라의 왕도 그를 알던 국가적인 인물이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선지자가 있는 그 곁에는 늘 게하시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탐심에 사로잡히고 거짓말을 일삼을 때 심판과 책망과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자가 되고 말았다.

주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신다. 주님은 진실한 자에게 은혜 주신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도 아시고 생각도 아시고 느낌도 아시고 우리 마음의 전부를 다 아신다. 주님 안에서 복된 생각과 믿음으로 살아서 복된 열매를 맺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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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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