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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며 하신 주의 말씀(눅19:41-48) 2017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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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03-26 20:27 조회 18,136 댓글 0
 
우시며 하신 주의 말씀(눅19:41-48)              2017. 3. 26

우리는 세상을 살다 보면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 좋은 일도 있지만 충격적인 사건도 겪게 된다. 그래서 때로는 웃기도 하고 때로는 울기도 한다. 예수께서도 우신 적이 있으셨다. 성화(聖畵) 중에도 예수께서 환하게 박장대소하고 웃으시는 그림은 있어도 우시는 모습을 그린 그림은 흔하지 않다. 본문에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도착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바라다보며 우신 장면이 소개 되어 있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우신 기록이 세 번 있다. 첫 번째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이다. 요한복음 11장 35절에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했다.  두 번째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신 본문의 장면이다. 또 한 번은 히브리서 5장 7절에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는 말씀이 나온다.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6장 21절에서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라는 교훈도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고 말했다. 야고보는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4:9)고도 말했다. 예레미야 애가의 시작은 “슬프다 이 성이여”라고 시작된다. 예레미야는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애2:18)라고 울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통회하고 회개할 것을 초청하였다. 희희낙락하며 점점 진정한 눈물과 마음을 담은 진실한 울음을 잃어 버려 가는 시대를 향하여 주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것이다.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가셨을 때에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다. 
역기서 “우시고”라는 것은 그냥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정도의 울음이 아니다. ‘에클라우센’이란 뜻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려 소리를 내어 크게 통곡하는 행동”을 말한다. 예수 곁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하고 환호하고 송축하는데 예수께서는 큰 소리를 울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지자들을 핍박하던 예루살렘 성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우신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행해진 지난날의 죄악들과 예루살렘에 다가올 심판을 예견하시며 우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일찍이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눅13:34)

예수께서 우시며 하신 몇 가지의 말씀들은 무엇인가. 


평화에 관한 일.
“예루살렘”이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갖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안에서 평화의 뜻을 이루었어야 할 예루살렘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생각하며 우신 것이다. 예루살렘 성민들은 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앞장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지경이 되었다. 하나님은 시시 때때로 하나님의 사람들인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말씀하셨건만 선지자들을 때리고 죽였다. 이제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조차 죽일 시간이 다가 오고 있다. 예수께서는 교만하고 완악하고 강퍅한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죄악과 타락상을 경고하시며 우신 것이다.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살렘 왕이란 평강의 왕을 일컫는다. 그는 그돌라오멜 연합군과의 전쟁 일선에까지 쳐들어가서 이기고 돌아오던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빌어 주었다. 아브라함은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나 전리품 중에서 십의 하나를 그에게 바치며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조카 롯과 조카의 식솔들의 생명을 건진 기쁨과 감사를 표한 적이 있다.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요 살렘 왕이요 평강의 왕이었다. 멜기세덱은 부모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과 생명의 끝도 없이 “하나님의 아들”과 닮은 “항상 제사장”으로 있는 분이라고 했다. 

영원한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바라다보시며 울고 계셨다. 이는 평강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이름만 그러할 뿐 하나님 안에서 평화의 진정한 가치를 잃어버린 예루살렘과 그 성민들을 바라다보고 우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선물하기 위해서 이 땅에 보냄을 받으셨다. 우리는 지금 누가복음 19장을 묵상하고 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의 탄생에 대한 기록이 있다. 베들레헴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셨다. 아기를 낳을 곳을 찾지 못한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를 낳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그 때에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Glory to God in the highest, 
and on earth peace to men on whom his favor rests.)

(눅2:14)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를 이룩하시는 평화의 왕으로 보냄을 받으셨다. 예루살렘은 해발 800미터의 높은 산악지대에 이룩된 아름다운 도시다. 그 역사가 3000년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평화가 떠나 버린 것을 보시고 우신 것이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평화에 대하여 모르고 있는 예루살렘, 평화에 관하여 눈이 가리어져서 진정한 평화를 바라다보지 못하는 불행에 대하여 안타까워하시며 우신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평화를 원한다. 개인적으로도 평화스러운 나날을 꿈꾸고 소망한다. 가정의 가족들 간에 평안하고 평화가 깃든 생활을 원한다. 그러나 부부 간에 혹은 부모 자식 간에 혹은 형제자매들 간에 혹은 동서 간에, 고부간에, 사돈 간에 별의 별 갈등과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순식간에 평화가 금이 가고 평화가 깨어지고 평화가 사라진다. 

어려서 TV 없던 시절에 안마당에는 아침에 큰 소리를 라디오를 틀어 놓았다. 드라마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데 주제가 가사의 일부가 생각난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어도 우리들은 언제나 웃으며 산다.” 뭐 대강 그런 가사로 되어 있는 노래였다. 찾아보니 <즐거운 우리집>이란 KBS라디오 드라마였다. 드라마지만 그 내용 중에 별의 별 일들이 다 많았다. 어려서 라디오 드라마를 들으면서 작가들이 대단하다고 여겼다. 어떻게 저렇게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저런 사건과 대화를 풀어 가는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보니 세상살이가 다 그렇다. 집집마다 문제없는 집이 없고 걱정 없는 집도 없다. 근심 걱정 불안 질병이 하나도 없이 항상 좋고 항상 기쁘고 항상 감사가 넘치는 천국처럼 사는 집은 이 세상에 단 한 집도 없다. 개인으로 해도 그렇다. 파란 만장한 세상이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으며 사는 것이 인생이다. 나는 평화를 원하지만 나라가 전쟁에 휩싸이기도 한다. 나는 평화를 원하지만 나라가 없어져 버리고 난민 신세가 되기도 한다. 이 세상에는 나라의 안과 밖에서 종교의 갈등, 정치적 갈등, 경제적 갈등, 군사적 갈등, 외교적 갈등, 지리적 갈등, 땅과 바다와 하늘에서 서로의 영역을 향한 끝이 보이지 않는 대립과 갈등이 계속된다. 인종적 갈등, 가진 자와 덜 가진 자의 갈등, 누리는 자와 핍박 받는 자의 갈등, 힘이 있는 자와 압제 받는 자의 갈등, 피부색의 갈등 등이 끊임이 없다. 평화는커녕 계속하여 바다의 파도가 넘실거리고 출렁거리듯이 한 순간도 고요할 날이 없다. 

국가와 국가 간에 민족과 민족 간에 일어나는 분쟁이나 갈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볼 것도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미 집안에서 그런 분규와 갈등과 전쟁이 끊임이 없다.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눅12:53)는 말씀 그대로이다.  

이처럼 평화는 저절로 주어지질 않는다. 언제 마음에 불안이 찾아올지 모른다. 언제 마음이 뒤숭숭해지고 초조해 지거나 우울해 지거나 두려움에 휩싸일지 아무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고요한 동안 고요한 것이고 평화로운 동안 평화로운 것이다. 전쟁과 테러와 강도와 살인 등의 사고와 사건으로 인하여 세상은 단 하루도 잠시 잠깐도 조용하지 않다. 나라 안과 밖의 처처에서 별의 별 사고와 사건 소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오늘 이 아침에도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슬퍼하며 울며 또 다시 새 날을 맞고 있을 것이다. 도시 안에서, 바닷가에서, 빈 집에서, 혹은 가족을 멀리 떠난 타국에서, 병원의 병실에서, 감옥 안에서, 길거리에서 울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다는 아니지만 그들 대부분은 자신을 향한 눈물과 울음이 아닌가. 예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우신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셨고 예루살렘 성민들을 위하여 우셨다. 

지난 3월 24일에는 영국 런던에서 테러가 일어나서 4명이 죽었다. 사망자 중에는 결혼 25주년을 맞아 아내와 여행을 왔던 54살 된 미국인 관광객 커트 코크런은 부부가 죽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부상자는 모두 29명으로 이 중 7명은 위독하거나 부상 정도가 심각해 사망자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다친 사람들 중에는 한국인 관광객도 5명 포함되어 있다. 부상자를 수습하는 길가의 어수선한 현장 곁을 히잡을 쓴 이슬람의 젊은 여성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면 전혀 사건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냉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채로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걸어가고 있는 장면에 세계의 뉴스에 보도 되었다. 

오늘은 천안함 피격 사건이 일어난 지 7년이 되는 날이다. 2010년 3월 26일 밤 9시22분께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해군 초계함인 1200톤급 천안함의 선미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나 침몰했다. 천안함에 탑승했던 승조원은 104명이었다. 그들 중에 58명이 구조됐다. 40명이 죽고 6명은 시체를 찾지 못하고 실종되었다. 민군 합동조사단은 침몰 원인이 ‘북한의 어뢰공격’이라고 발표했다.

지금 내가 평안하고 지금 내 마음이 평화스럽다고 해서 세상이 평안하고 세상에 평화가 찾아 온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하고 말씀하시며 이 평화, 영원한 평화에 대하여 ‘화두’를 던지며 울고 계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목사 안수를 받은 지 30년이 된다. 1987년 3월 27일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생각해 보라. 목사 안수를 받으면 평화가 보장되나. 어떤 직분, 어떤 직위, 어떤 직임, 어떤 자리, 어떤 그 무엇이 주어지면 자연히 ‘평화’가 보장되나. 그렇지 않다. 평화는 그렇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평화란 평화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다.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은 순교의 위기나 도전 앞에서도 이 평화를 빼앗기지 않는 평화가 있었다. 이는 믿음으로 인한 평화인 것이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라.”는 히브리서 11장 38절의 증언처럼 그 어떤 그 무엇으로도 저들의 믿음과 그 영원한 평화를 빼앗을 수 없었다. 그와 같은 믿음의 선조들은 “심한 고문과 조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히11:35-37)받으면서도 그의 믿음과 주 안에 공급 받는 평화를 빼앗기지 않았다. 

한 번은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you. I do not give to you as the world gives.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and do not be afraid.)(요14:27)

우리는 이런 찬양을 부르며 살아간다. 이것은 평화와 평안을 추구하는 우리의 염원이요 기도이기 때문이다. <주는 평화>라는 찬양이 있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보살핌을 받는 날.
우리 성경에는 “보살핌을 받는 날”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예전 성경인 개역 한글 성경에서는 “권고 받는 날”이라고 번역했었다. 그렇다. 하나님은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과 심지어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 자신을 통하여 수 없이 반복적으로 권고하셨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살아서는 예루살렘의 패망을 피할 수 없다. 이 세상에 영원한 평화란 없다. 이 세상에 영원한 안전이란 없다. 원수들이 쳐들어  오고 부모가 보는 앞에서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는 날이 온다. 거대한 도성 예루살렘이라도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무너지는 파괴와 살상의 비참한 날이 다가 오고 있다. 그렇게 심각하게 경고하셨지만 그 어느 누구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영어 성경에 보면, “the time of God’s coming”이라고 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이 땅에 그의 아들을 재림주로 다시 보내시는 날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날이 이를지라”는 말씀과 함께 그나마 있던 평화 누리던 평화조차 산산조각이 나는 날을 예언하시며 우신 것이다. 
AD 70년 예루살렘을 포위한 티토 장군이 이끄는 로마의 군대는 단 삼일 만에 토성을 쌓고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그 당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유대의 전역에서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던 100만 명이 훨씬 넘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 안에 갇혔다. 기근과 질병으로 죽어 갔다. 성 안에는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로 아비규환이었다. 살아 있는 것이 산 것이 아니었다. 본문 44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마음 아픈 예언을 하고 계시지 않나.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이 얼마나 안타까운 말씀인가. 참담한 비극적인 살인과 황폐한 폐허의 순간이 다가 오고 있다는 경고의 말씀이 아닌가. 이 말씀을 하시며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울고 계셨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그렇지 않나. 요즘이야 날짜 시간 정해 놓고 배를 열고 수술하여 출산하기도 하기는 한다지만 그러나 여전히 해산의 불안과 고통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불안과 고통이 아닌가. 이 세상의 끝 날이 그렇게 임할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 땅에 구원을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예루살렘과 이 세상이 그를 거부하였다. 요한복음 1장이 그런 말씀이 아닌가.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10하-11) 이 상태가 구원 받지 못하는 상태, 불행한 상태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고 영접하지도 않는 상태 말이다. 그러나 더러 영접하는 자가 있다. 그들에게 구원이 임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보살핌을 받는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요한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요1:12)라고 말씀하였다. 

우리나라도 전쟁을 많이 겪은 나라이지만 이스라엘도 평안한 날이 별로 없었다. 예수 당시에도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스라엘 민족은 민족이 되기 전에 애굽에 끌려가서 43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였다. 나중에 바벨론 포로 생활도 70년이나 하였다. 애굽, 앗수르, 바벨론, 메대, 바사 즉 페르시아, 헬라, 로마의 끊임없는 침략과 전쟁으로 평안할 날이 없었다. 예수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예수께서 이 땅을 다녀가신지 40여년 후 예루살렘은 다시 불바다가 되고 말았다. AD 70년 그 당시 예루살렘 성의 전체 인구는 60만 명이었다. 그러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전국 각처의 방문객을 포함하여 100만명 이상이 예루살렘 성 안에 가득하였다. 그런 상태에서 성은 포위 되었다. 예루살렘 헤롯 성전도 불타고 무너졌다.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 때 유대인 포로가 9만 7천 명이었다. 유대인들이 3개월 간 성 밖으로 끌어낸 시체만도 115,800구였다고 한다. AD 71년에 티토 장군은 로마에 개선하여 유대 전쟁의 대승을 거대한 개선 행렬로 경축하였고 그 개선문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후 2000년 동안 나라 없는 민족으로 세계 열방 중에 유리방황하였다. 1948년에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다시 세워지고 히브리어를 다시 쓰는 민족으로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예루살렘은 9미터 높이의 높은 담장을 처처에 쌓아 높고 무장한 군대가 성을 지키며 전쟁과 테러의 불안과 공포가 짙게 깔려 있는 위기의 땅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예루살렘 성전 터는 여전히 이슬람이 차지하고 있다. 이슬람의 사원이 황금 돔의 모스크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회개하며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개인이든 가족이든 나라든 민족이든 어미 닭이 새끼 병아리를 날개 깃 아래 품듯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아니하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이기며 살아 갈 수 있는가. 보호하시는 하나님, 돌아보시는 하나님, 은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를 돌아보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기도하는 집.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하신 예수께서는 성전 안에 들어 가셨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모여든 백성들이 성전 마당에 가득하였다. 그 당시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먼 지방에서 유월절을 지키러 오는 이들을 위하여 제물용 양과 염소를 예루살렘 성 밖에서 따로 키워서 비싼 값에 팔고 샀다. 그러하다 보니 유월절은 장사하는 분위기로 넘쳐 났다. 예수께서 그 장면을 못 마땅하게 보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My house will be a house of prayer’; but you have made it `a den of robbers..)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백성들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몹시 배척을 받으셨고 미움을 받으셨다. 저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여 없앨까 하고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날마다 성전에서 그의 곁에 모여 드는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전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백성들의 수가 적지 않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과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당황해 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가롯 유다는 예수를 은 삼십 냥에 흥정하고 팔아 버렸다. 가롯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서 돈을 받고 예수를 넘겨 줄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누가복음 22장 3절에 보면 그 사건에 배후에는 가롯 유다의 마음에 사탄이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붙잡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도 계속하여 기도를 강조하셨다. 예수께서 우시면서 말씀하신 것이다. 기도 생활을 회복해야 한다고. 1880년에 독일에서 태어난 조셉 필라테스(Joseph h. Pilates, 1880-1967)가 개발한 운동법이 필라테스 운동법이다. 그는 세계 제 1차 대전 때에 영국의 포로 수용소에서 일했다. 수용소의 재소자들의 운동과 재활 치료와 건강 관리를 위해서 다양한 운동법을 개발하였다. 이는 반복적인 신체 동작으로 전신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과학적인 운동법으로 오늘 날 우리나라에도 인기가 높다. 필라테스는 몸의 균형과 힘, 유연성 증가, 심폐 능력과 순환기 능력 강화, 긴장 해소와 스트레스 감소에 효과가 있다. 이처럼 우리 몸이 골고루 운동을 통해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듯이 기도가 필요하고 기도가 중요하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예배와 기도이다. 이사야 56장 7절에 보면, “내 집은 만만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내어 쫓으시면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시다. 

그렇다. 우리는 오늘 날 이 집을 기도하는 집으로 삼아야 한다. 다른 여러 목적과 용도로 사용할 수 있지만 이 집은 기도하는 집이어야만 한다. 교회, 예배당- 이 곳에서 예배와 찬송과 말씀과 기도가 가득한 기도하는 집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예수께서 울며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는 이 곳에서 기도하야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이마의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떨어지도록 기도하신 것처럼 기도 생활을 회복하는 기도의 집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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