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눅15:1-10) 2017. 3. 12
본문에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예수님의 비유 두 가지가 연 이어 나온다. 비유의 주제는 소유하고 있던 것을 잃어버린 상실감과 잃은 것을 다시 찾은 회복의 기쁨을 다루는 내용이다. 그 하나는 “잃은 양을 찾은 목자 비유”이다.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키웠다. 그 중에 한 마리를 잃어 버렸다. 주인은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서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눅15:4)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이 표현에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안타까워하며 온 산과 들을 헤매고 다니는 절절하고 다급한 심정이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잃은 양을 찾은 주인이 그 양 한 마리를 어깨에 메고 즐거워하면서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한 그 주인은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고 말하며 기뻐하였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건강을 잃어 보거나 혹은 많은 재물을 잃어 보거나 애쓰고 불철주야 수고해서 쌓아 오린 사회적인 지위나 입지를 잃어 버렸을 때의 상실감을 상상해 보라. 그러나 예수님의 이 비유의 주제는 그런 정도의 상실감이나 회복의 기쁨을 말씀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던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를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연 이어 해 주신 비유는 소위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자의 비유”이다. 어떤 여자에게 열 드라크마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하나를 잃어 버렸다. 밖에서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집 안에서 잃어 버렸다. 그 어떤 여자는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면서 샅샅이 찾고 찾았다. 예수님은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영어 표현에 “until he/she finds it?”라는 예수님의 비유의 강조는 찾다가 힘이 들거나 어렵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찾기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고 또 찾아서 꼭 찾아내고야 마는 그런 자세, 그런 태도, 그런 모습, 그런 기질을 강조하신 말씀이시다.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집안에서 찾아 낸 그 어떤 여자도 마찬가지로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였다.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 비유에서 똑 같은 강조를 반복해서 하셨다. 찾는 노력과 수고 그리고 찾은 후에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에 대하여 강조하셨다. 주인이 “나와 함께 즐기자.”고 말씀한 그 기쁨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어쩌면 양 한 마리 찾은 것보다 벗과 이웃을 초청하여 잔치하며 즐거워하는 값이 더 들것이다. 한 드라크마 찾은 값어치보다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즐겁게 먹고 마시며 드라크마를 찾은 경위를 신나게 설명하며 잔치하는 값이 훨씬 더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주인은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잔치하며 즐거워한다. 왜일까. 잃은 것을 찾은 기쁨이 그만큼 큰 기쁨이기 때문이다.
7절과 10절의 반복적인 내용의 강조는 거의 같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 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고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이 무엇인가.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세리와 죄인들이 가까이 예수를 찾아 나섰고 예수의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비유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였다.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며 말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수군거리는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해 주신 말씀이 본문이다.
죄인(罪人).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리나 다른 사람들을 바라다보면서 ‘죄인’(罪人)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과연 누가 죄인인가.”하고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세리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보고 ‘죄인’이라고 말한 바탕에는 자신들은 죄인이 아니란 구별의식을 갖고 있다는 증거이다. 과연 그런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죄인이 아니고 의인(義人)들인가.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모세의 법을 잘 따르며 살아가는 의인이라고 자부하였다. 그리고 자신들과 같은 계층이나 신분에 있지 못한 세상 사람들을 ‘죄인’ 운운 하였다. 1절의 말씀처럼 그 당시에 ‘세리’들을 죄인 취급하였다. 지배 국가인 로마에 빌붙어서 동족을 과세 늑징하는 악한 계층으로 멀리하려 하였다.
로마서 3장 10절에 보면 시편 14편 1절을 인용한 말씀이 나온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다 죄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 먹고 타락한 이후의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인간의 모든 후손은 누구나 다 죄인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고 하였다. 인간은 그 어느 누구라도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가 없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지 죄를 용서하는 힘은 없다. 인간은 다 죄인이다. 아담과 하와와 가인과 아벨이 모두 다 죄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벨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을까. 히브리서 11장 4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니라.”(히11:4)는 말씀이 있다. 아담도 죄인이고 하와도 죄인인데 어떻게 저들에게서 태어난 둘째 아들인 아벨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니라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을까.
인간은 다 죄인인데 어떻게 아벨이나 에녹이나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받았을까. 모세는 사람을 죽인 죄인 중의 죄인이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께 존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을까. 다윗도 부하의 가정을 파괴하고 고의적으로 부하 장군 우리아를 전쟁의 최 일선에 배치해서 전사하게 한 죄인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었을까.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온다. 게네사렛이란 갈릴리 호수의 다른 이름이다. 그 곳에는 그 시간에 배 두 척이 있었고 어부들은 배에서 내려서 해변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말씀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다. 지난밤에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 하였으나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어부들이었다. 그 어부들 중에 시몬이 나서서 대답하였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그리고 그물을 내리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혔다. 시몬은 다른 배의 어부들에게 와서 도와 달라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리고 두 배에 가득하게 물고기를 실었다.
그 때 시몬 베드로가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렸다. 그리고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Go away from me, Lord; I am a sinful man.)(눅5:8)라고 고백하였다. 영어 표현에 보면 자신은 “죄가 가득한 사람”(sinful man)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날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했던 그 한 사람! 그가 사도행전에 소개되는 예루살렘의 초대교회 부흥의 주역이 된 베드로가 아닌가. 시몬 베드로의 출발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는 죄의 고백으로 부터였다. 신앙생활의 출발은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認定)하고 시인(是認)하는 것으로부터이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기도가 창세기 18장에 나온다. 그 당시의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의 상징과 같은 곳이었다. 영어 단어 중에 소돔사람을 말하는 ‘sodomite’란 단어는 ‘동성애자’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을 정도로 그 당시의 소돔과 고모라는 죄와 악이 가득한 도성이었다.
아브라함은 그런 소돔과 고모라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 성 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찌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용서하지 아니하실 것입니까.”하고 기도하였다. 계속되는 아브라함의 기도는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18:25)
하나님은 그렇게 하겠다고 응답해 주셨다. 그런데 기도하던 중에 아브라함은 무슨 불안한 생각이 들었든지 “의인 오십 명 중에서 다섯 명이 부족하다면 그래도 온 성을 멸하시겠습니까.”하고 다섯을 감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렇게 시작된 아브라함의 기도는 “의인 사십, 의인 삽 십, 의인 이십, 의인 열 명”으로 점점 숫자를 줄여 가면서 간청하는 기도를 계속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와 같은 기도의 내용을 통해서 무슨 교훈을 깨닫는가. 하나님은 마음씨 넉넉한 분으로 등장하신다. “내가 의인 열 명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그런데 우리가 아는 대로 소돔과 고모라 성이 어떻게 되었는가. 왜 하나님은 소돔 성과 고모라 성에 유황과 불을 비처럼 내려서 멸하셨는가.
아마도 아브라함이 그렇게 안타깝게 소돔과 고모라 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던 이유 중에는 그 도성 안에 조차 롯과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롯과 두 딸은 심판을 면하였으나 뒤를 돌아다 본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다. 장인 롯을 통해서 전하는 여호와의 심판 예언을 들은 롯의 두 딸들과 정혼한 두 사위 감들은 그 말을 농담처럼 여겼고 유황불이 쏟아져 내리는 소돔 성에 그냥 남아서 심판을 받고 말았다.
하나님은 이 땅에 죄인을 불러 의롭게 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 예수께서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고 말씀하셨다.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양 백 마리를 기르던 “어떤 사람”과 열 드라크마를 갖고 있던 “어떤 여자”란 곧 하나님이시며 곧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시는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심과 예수님의 관심은 주인 곁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 양이 아니라 주인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게 있다. 주인의 시야에서 벗어난 한 마리의 양, 찾고 찾아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양, 어디 낭떠러지 가시덤불에 걸려 있는지 혹은 사자나 곰에게 쫓기거나 부상을 당하지는 않았는지 혹은 맹수의 먹잇감이 되어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는지 주인의 마음을 초조하게 하고 착잡하게 하는 그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에게 주인의 온갖 관심과 신경이 다 쏠려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내기 까지 찾아다니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수많은 각색 병자들을 고쳐 주실 때에도 병을 고쳐 주시기 전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죄 사함을 먼저 선포해 주셨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 외에 감히 누가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느냐고 하며 항의하려 하였다. 예수님이 죄를 용서하시는 선언을 하실 때에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참람하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런가.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갖고 계셨다. 누가복음 5장에는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들것에 메고 와서 예수님 계신 집의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린 장면이 나온다. 그 때에 예수께서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시기 전에 그의 죄인 됨을 주목하시고 죄의 용서를 먼저 선언해 주셨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그 한 마리 찾고 찾아 헤매는 그 양을 “죄인 한 사람”(눅15:7) 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어떤 여자가 등불을 켜 들고 집안을 쓸고 청소하면서 찾아내기 까지 부지런히 찾고 찾는 그 한 개의 드라크마는 그냥 잃어버린 동전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이 찾으시는 “죄인 한 사람”(눅15:10)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오늘 날도 그 죄인 한 사람을 늘 찾고 또 찾고 계신다.
회개(悔改).
예수님은 찾고 찾다가 결국 찾게 된 그 한 마리의 잃었던 양이나 드라크마 한 개를 “죄인 한 사람의 회개”로 대입해서 설명해 주셨다. 그러면 ‘회개’가 무엇인가.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라는 회개의 뜻은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것’ 즉 ‘생각을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회개가 왜 중요한가. 세례 요한이나 예수께서 이 땅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한 그 첫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이다. 회개와 천국, 회개와 하나님의 나라, 회개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이처럼 중요한 관계가 있다는 말씀이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이미 회개한 아흔 아홉 사람보다도 새롭게 회개한 그 한 사람 죄인의 회개로 인해서 하늘의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했다. 하나님의 사자 즉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기쁨이 된다고 하였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예수님의 세 가지 비유가 나온다. 11절부터 긴 내용으로 나오는 또 하나의 비유가 소위 “탕자의 비유”라고 말하는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이다. 집 나갔던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 왔다. 아버지는 그 둘째 아들을 여전히 환영하고 기쁘게 맞이하였다. 우리는 그 비유에서 대개 둘째 아들이나 큰 아들에 대하여 많이 말하지만 사실은 아버지의 변함이 없으신 사랑에 대한 교훈을 강조하시려는 주님의 비유의 말씀이 아닌가. 그 비유에 등장하는 큰 아들은 회개의 경험을 갖지 못한 아들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진심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늘 섭섭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장남이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일찍이 타국에 가서 온갖 세상살이를 다 경험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 왔다. “아버지의 집에는 종들도 내 신세보다는 더 나은데....”그런 마음을 갖고 돌아 왔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아들, 유산을 다 주색잡기로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된 채로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나.
이 비유의 강조는 무엇인가. 집 나갔던 아들이 유산을 갖고 사업해서 받은 유산보다 백배 천배 만 배 더 많은 재산을 벌어 모아 갖고 거부가 되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인가. 아니다.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몸과 마음이 아버지의 곁에 머물면서 아버지와 함께 기쁨과 즐거움과 슬픔과 고난을 더불어 나누며 살아가는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 그럼 큰 아들은 어떤가. 늘 아버지의 곁을 떠난 적이 없는 것 같으나 정작 동생이 돌아 왔을 때에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 한 채 늘 마음 한 구석에 섭섭한 마음을 갖고 지내는 큰 아들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오늘 날 우리는 어떤가. 나는 어떤가.
아버지의 곁에 머물러 있느냐 혹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살았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향하신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의 사랑을 얼마나 제대로 헤아려 아느냐는 것이다. 이처럼 회개는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회개의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면 죄가 사해진다. 누가복음 마지막 장인 24장에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으시고 죽으셨다.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한 자리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 예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놀라워하고 무서워하고 심지어는 예수님의 부활을 단순히 “영”으로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하느냐”고 말씀하시면서 손과 발을 만져 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내어 드리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잡수셨다. 누가복음 24장 36절 이하에 나오는 장면이다. 예수께서는 거기 한 곳에 모여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몇 마디의 교훈을 더 해 주셨다. 그 중에 하나가 “예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서 전파될 것이며 너희들은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는 말씀이셨다. 거기 누가복음 24장 47절의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에 주목하여야 한다. 교회의 존재 목적이 이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이름으로 한 사람의 죄인이 주께로 돌아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사건이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계속하여 일어나야 하는 곳이어야만 한다.
베드로의 복음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이 삼천 명이 동시에 회개하고 세례 받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였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령이 임한 후에 베드로의 설교 말씀을 들은 무리들 가운데 일어난 초대 교회 대 부흥의 현장이다. 이처럼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그 회개를 예수님은 열방 가운데 주목하고 계신 것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그 개인뿐만 아니라 온 가족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죄인이 회개하고 주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일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간수장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고 선포하였다. 그렇다. 회개하고 주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구원을 받는 축복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찬송 534장, “주님 찾아 오셨네”의 가사를 보라.
“주님 찾아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가시관을 쓰셨네 모시어 들이세
우리 죄를 속하려 십자가를 지셨네 받은 고난 크셔라 모시어 들이세
보라 성자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인자 높이 들렸네 모시어 들이세
헛되 교만 버리세 우리구주 모시고 영원 복락 누리세 모시어 들이세
겸손한자 찾도다 모시어 들이세 하늘에서 부르네 모시어 들이세
좋은 자리 드리고 주의 은혜 구하세 하늘 나라 세우세 모시어 들이세
주여 내가 믿으니 오소서 오소서 주여 환영 하오니 모시어 들이세
생명길로 이끄사 슬픔위로 하시고 진리알게 하소서 오소서 오소서”
기쁨.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미 회개한 아흔 아홉 명보다 하늘나라에서 더 기뻐하고 기뻐하신다. 죄인이 회개한 증거가 무엇인가. 기쁨이다.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불안하다. 초조하다. 답답하다. 괴롭다. 되는 일이 없다. 의욕이 없다. 살맛이 안 난다.” 그런 사람이 있나. 아니지 않나.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회개하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살아가면 기쁘고 즐겁지 않나.
에녹이 65살에 무드셀라를 낳았고 그 후에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고 살았다.(창5:21-22) 에녹은 엘리야와 함께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 간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런 그의 생애를 히브리서 11장 5절에 보면, “믿음으로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느니라.”고 하였다. 에녹은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후에 300년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의 삶을 살았다. 본문에 소개 된 죄인 한 사람의 회개를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기뻐하고 기뻐할 일이다.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기뻐하는 기쁨이 된다”고 반복하여 강조해 주셨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회개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면 그 열매가 무엇이란 말씀인가. 기쁨이 주어진다. 기뻐진다. 물론 예수님 믿고 주의 자녀 되어 산다고 항상 신나고 항상 즐겁고 항상 형통하고 항상 인생이 술술술술 풀려지는 것만은 아니다. 예수 안에 살아도 고난도 있고 실패도 있고 질병도 있고 사고도 있고 속상한 일도 있고 어려움도 있고 답답한 일도 생긴다. 그러나 그러 생의 우여곡절이 우리의 생의 전부는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 된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서 복되고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신명기 33장 29절에 보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라는 말씀이 있다. 그렇다. 이는 하나님이 모세의 입을 열어 아셀 지파의 자손들을 축복하신 말씀 가운데 일부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들에게 국한된 말씀만은 절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의 상태에서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는 말씀은 우리 각 사람에게도 모두 다 해당되는 축복의 말씀임이 분명하다.
지난주에 성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의 <참회록>(Confessions)의 많은 분량을 다시 읽어 보았다. 그도 젊어서 죄의 문제를 갖고 얼마나 심각하게 괴로워하며 씨름하였는지 모른다. 그런 그를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시고 죄를 회개하고 거듭난 5세기의 성자의 존귀한 삶으로 이끌어 주셨다.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치고 있었다. 배 밑 바닥에서 잠이 들었다. 풍랑이 일어났고 요나는 제비 뽑혀 바다에 던져졌다.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동안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큰 물고기에게 명령하셔서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 내게 하셨다.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만에 육지에 토해진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였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면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니느웨는 그 당시 앗수르의 수도였다.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만도 12만 명이 살던 큰 도시였다. 요나의 회개 선포를 들은 니느웨의 성민들이 왕부터 백성들과 소나 양들까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부르짖어 회개하였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멸망시키려던 뜻을 돌이키시고 용서하셨다. 재앙을 거두셨다.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였던 니느웨의 임금과 대신들과 백성들과 짐승에 이르기 까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온 도성 안에 기쁨이 가득해 졌다.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회개 한 나 자신에게도 기쁨이 선물로 주어진다.
죄를 회개하면 죄 용서함 받고 영생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죄를 회개하고 성령 받고 나면 주님께서 늘 동행 하여 주신다. 주님 안에서 질병과 고통과 두려움과 고난과 환난과 재난과 역경과 마귀가 다 물러가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와 소망과 사랑이 강물처럼 넘쳐흐르는 복된 주인공으로 살아가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