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복이 있는 자인가(눅11:14-28) 2017. 2. 26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들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이렇게 말할 때가 있다. “저 사람은 무슨 복이 많아서 저러고 사나.” 무엇이 복인가. 누가 복이 있는 사람인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복된 사람의 모습인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시편 1편은 무어라고 말씀하시나. “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어느 날 많은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큰 소리로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이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이런 대화는 예수께서 교훈하신 말씀을 들은 무리들 가운데서 나선 한 여자와 대화 중에 하신 말씀이시다. 예수께서는 말 못하게 하는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서 그 사람을 건강하게 회복시켜 주셨다. 귀신의 지배를 받아서 말을 못하고 지내던 한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무리들은 놀라워했다. 문제는 예수께서 귀신을 내어 쫓으신 기적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한 일이라고 조롱하는 이들이 있었다. 바알이란 셈족을 비롯한 바벨론 사람들의 이방 우상의 이름이다. “세불” 즉 “제블”은 “제븝”의 변형인데 파리 떼를 말하기도 하고 오물 즉 더러운 쓰레기를 말한다. “바알세불”이란 “파리 떼의 왕”이란 뜻이다. 무리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더러 예수를 시험하려고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기도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본문의 긴 내용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들은 모두가 다 옳다. 그렇지 않나. 분쟁하는 나라치고 안정된 나라가 있겠는가. 분쟁하는 집안이 든든하게 세워져 가겠는가. 예수께서 행하시는 각종 기적의 힘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 입은 것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어리석은 접근이다. 귀신에 들린 사람을 귀신의 힘을 빌려서 귀신이 쫓겨 나가도록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렇지 않나. 귀신이 귀신끼리 싸우나.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에 ‘강하다’는 상태는 매우 상대적이다. 더 강한 힘이 오면 그 강하다는 상태가 별것 아니다. 젊은이들의 시쳇말처럼 “포크 레인 앞에서 삽질하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힘의 균형이란 것은 더 큰 힘이 오면 그 힘의 균형이 금방 깨지고 마는 법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교훈도 말씀해 주셨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눅11:23) 그렇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예수님과 뜻을 같이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어서 교훈하신 말씀이 우리가 잘 아는 이 내용이다.
어느 사람에게서 쫓겨났던 귀신이 마땅히 머물 곳이 없었다. 귀신은 자기가 쫓겨난 그 사람의 마음에 다시 찾아 와서 들여다보니 그 사람의 마음이 텅 비어 있었다.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돌아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그 사람 속에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고 설명해 주셨다. 그렇다. 기독교의 신앙생활이란 이 세상에 그 어떤 종교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다. 가령 불교에서는 비우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공’(空) 혹은 ‘허’(虛)를 비중 있게 다룬다.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비우고, 욕심을 비우고, 욕망을 비우고, 탐심을 비우고, 물질세계를 향한 그 무엇인가를 끊임 없이 비워 가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반대다. 가득하게 채우는 충만을 강조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은혜 충만, 성령 충만, 말씀 충만, 기쁨 충만, 복음 충만, 사랑 충만” 이처럼 충만한 상태의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다. 충만(充滿)이란 가득하게 채우고 넘쳐나는 상태를 말한다.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리라”말씀하시는 말씀 그대로이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시작이 무엇인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은 창조 이전의 상태를 “빛이 있으라.”는 말씀과 함께 빛의 충만의 상태로 변화 시켜 놓으신 것이 창조의 시작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그렇다. 무엇으로 가득하게 채워지느냐에 따라서 그것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를 믿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잘 익은 석류의 붉은 속살처럼 그렇게 가득 찬 충만으로 충만한 사랑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성경에서 인용되는 석류의 의미는 풍성함, 가득함, 충만함, 넉넉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솔로몬 성전의 두 놋 기둥 머리에도 200개의 석류모양이 각각 새겨져 있었다. 이해인 수녀는 “석류의 말”이란 시에서 이렇게 썼다.
“감추려고
감추려고
애를 쓰는데도
어느새
살짝 삐져나오는
이 붉은 그리움은
제 탓이 아니에요
푸름으로
눈부신
가을 하늘 아래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서
터질 것 같은 가슴
이젠 부끄러워도 할 수 없네요
아직은
시고 떫은 채로
그대를 향해
터질 수밖에 없는
이 한 번의 사랑을
부디 아름답다고
말해주어요.”
성도의 신앙생활은 바알세불을 힘입는 생활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귀신들려 말 못하던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아 고침을 받고 말을 하게 해 주신 후에 황당한 이런 일을 겪으신 후에 그래도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아보고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하는 말씀을 들으신 후에 무엇이 복이며 과연 누가 복이 있는 자인가를 말씀해 주셨다. 우리도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누가 복이 있는 자인가.”
한 번도 일등을 빼앗겨 본 적이 없는 우등생인가. 남들보다 잘 생긴 사람인가. 남들보다 키가 큰 사람인가. 돈 많은 부자인가. 권력자인가, 한 국가의 최고 권력자인가. 황금 배지를 양복 깃에 달고 다니는 이들인가. 인기가 많은 사람인가. 좋은 집에 사는 사람인가. 좋은 차 타는 사람인가. 도대체 누가 복이 있는 사람인가. 본문은 무어라고 말씀하고 있나.
하나님의 손을 힘 입은 자.
예수님의 모든 사역의 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공급되는 것이었다. 각색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이 예수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런 기사와 이적을 행하신 것이다. 누가복음 11장20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손을 힘 입어”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손이 있으신가. 하나님은 육체가 없으시기에 손이 없으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손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능력을 그렇게 표현 하신 것이 아닐까.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세례요한의 탄생에 대한 내용이 있다. 제사장 사가랴의 가정에 아들이 태어났다. 나이 많던 저들 부부에게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 것이다. 아내 엘리사벳은 아들을 낳은 후에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려고 하였다. 집안사람들이 다 의아해 하였다. 조상 대대로 그런 이름을 지어 부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에 남편 사가랴가 몸짓으로 서판을 달라고 하더니 ‘요한’이라고 썼다. 사람들은 모두 다 놀랍게 여겼다. 일 년 동안 말을 못하고 지내던 사가랴 제사장이 아들이 태어난 후에 서판에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쓴 후에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고 말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다. 세례 요한의 탄생 이야기가 온 유대의 산골 마을마다 퍼져나갔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생겼다. 사람들은 “이 아이가 장차 어찌될까.”하고 세례 요한의 장래에 대하여 궁금해 하였다. 그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눅1:66)는 말씀이 나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을 힘 입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돌보심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는 것을 표현한 말씀이다.
창세기 49장은 아버지 야곱이 아들들을 축복하며 기도한 내용이다. 그 중에 창세기 49장 24절은 요셉에게 하신 말씀이다.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여기서 말씀하는 “목자의 손”이란 곧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의미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에 보내서 강퍅한 임금 바로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광야로 출애굽하게 하실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하셨다. 그 내용에 보면 하나님은 자신의 손을 “강한 손”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강한 손으로 애굽을 치기 전에는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쉽게 풀어 놓아 주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출3:20)고 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내 손”이라고 표현하셨다. 출애굽기 15장은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는 출애굽을 성공적으로 경험한 후에 모세가 하나님을 찬양한 “모세의 노래”이다. 거기에 보면 “주께서 오른 손을 드신 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출15:12)고 노래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손으로 홍해의 물줄기를 갈라서게 하셔서 물 가운데 육지가 생기게 하셨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손길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셔서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뒤 쫓아 추격해 오는 애굽의 바로 왕의 군대와 마병을 주께서 오른 손을 드시니까 양편에 나뉘어 서 있던 물 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거대한 물줄기가 애굽의 군대와 마병을 수장시키고 말았다.
그렇다. 하나님의 손은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는 손이시다. 세우기도 하시고 무녀트리기도 하시는 손이시다. 안아 주시기도 하시도 밀어 내기도 하시는 손이시다. 심기도 하시고 뽑기도 하시는 손이시다. 돌을 던지기도 하시고 던진 돌을 거두기도 하시는 손이시다. 찢기도 하시고 꿰매기도 하시는 손이시다. 전쟁하게도 하시고 평화하게도 하시는 손이시다.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손이시다.
예수님은 손은 곧 하나님의 손이셨다. 예수님은 그 손으로 어린 아이들을 쓰다듬어 주시면 축복하시고 안수하셨다. 예수님의 손은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며 열병을 낳게 하셨다. 예수님의 손은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12살된 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며 “달리다굼”하고 말씀하셔서 죽은 딸을 살려 내신 손이시다. “달리다굼”이란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이다. 마가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회당에 모여서 서로 놀라는 반응을 보이며 수근거렸다. “예수님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권능이 어찌됨이냐.”고 말하며 예수님의 지혜의 교훈과 수 많은 기사와 이적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였다.
벳세다 지역에서 앞 못 보는 사람이 예수께서 곁에 계신 것을 알고 예수님이 자신에게 손을 대 주시기를 구하였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 앞 못 보는 사람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셨다. 그리고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다. 그 때 그 앞 못 보던 사람이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 때 예수님이 그의 눈에 다시 안수하셨다. 그러자 완전히 나아서 밝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병자를 고치시는 손, 병자를 손 붙잡아 주시는 손, 죽은 자의 손이라도 붙잡아 다시 살아나게 해 주시는 손이시다. 예수님의 손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던 손이시다. 예수님의 손은 두 손 모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던 손이시며 두 손 들고 아버지께 절규하시듯이 기도하시던 손이시다. 예수님의 그 두 손은 로마 병정들에 의해서 큰 못에 목 박혀 죽임 당하셨던 손이시다. 부활 하신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 가에서 이른 아침에 숯불을 지피시고 떡과 생선을 구워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떡을 먹게 하시고 생선을 먹도록 섬기신 손이시다.
예수님을 통하여 역사하신 하나님의 손은 사랑의 손, 격려의 손, 회복의 손, 치료하시는 손, 살리시는 손, 용기를 주고, 새 힘을 주시는 손이시다. 누가 복이 있는 자인가. 하나님의 손, 예수님의 손에 붙잡혀 살아가는 자가 복이 있는 자인 줄로 믿는다. 하나님의 손은 우리의 때로는 약해지고 때로는 피곤한 손을 힘 있게 붙들어 주시는 손이시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라는 찬양이 있지 않나.
“주님여 이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 도와 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자.
예수님은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실 때마다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모든 비유의 주제가 한결 같았다. 오직 천국,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만을 하셨다. 예수님의 모든 관심은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은 나그네 세상이다. 이 세상에서 100년 살 인생이 몇이나 되나. 이 세상에 천년 동안 산 인생이 있는가. 이 세상은 나그네와 같은 생을 사는 것이다. 성도의 본향 집은 천국이다.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땅 위에 살아가지만 이미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된 것이다. 내 마음에 하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기 시작하면 내 마음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 백성답게 살아가야 한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삶을 살아갈 줄 알아야 하다. “믿음 위에 덕을 덕 위에 지식을 지식 위에 절제를 절제 위에 인내를 인내 위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 위에 사랑”을 더하며 살아 갈 줄 알아야 한다.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남에게 덕을 세우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위엣 것을 찾으며 살아야 한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이미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자라면 섬김을 받기 보다는 섬길 줄 아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남들보다 높아지려고만 하지 말고 낮아 질 줄도 알아야 한다.
이미 ‘입춘’(立春)도 지나고 ‘우수’도 지나고 일주일만 있으면 ‘경칩’(驚蟄)이다. 어제는 얼마나 화창하고 봄기운이 감도는 날씨였나.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다. 아무리 세상이 시끄럽고 흉용(洶湧)하여도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 백성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이다. 우리는 천국의 시민이다. 우리는 이 땅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대사이다. 대통령이나 왕의 권세도 대단하지만 상대편 국가에 파송 받은 대사의 권한도 대단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 땅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대사들이다.
대사(大使)는 대사다워야 한다. 옛날 초등학교 때에는 소사라는 일이 있었다. 깨진 유리창도 갈아주고 낡은 문의 도르래도 갈아 끼우고 학교의 크고 작은 소소한 일들을 도맡아 하는 이들을 소사라고 하였다.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 땅에 보냄을 받은 대사들이다. 특별한 임무를 맡은 대사를 특사(特使)라고 한다. 비밀스런 임무를 맡은 대사를 밀사(密使)라고 한다. 천국에서 이 땅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심부름을 맡은 영을 천사(天使)라고 한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신분, 어떤 경제 여건, 어떤 건강상태, 어떤 사회 능력, 어떤 신분, 어떤 지위를 갖고 살더라고 그것으로 자신을 판단하면 안 된다.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나의 마음속에 임한 하나님의 아들딸이란 자긍심을 갖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기도한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기도한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나라’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권세’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권세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천지 만물 가운데 가득한 충만이시다. 그 하나님의 권세가 임하는 모든 곳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이 가득 찬 마음가짐을 갖고 살아가면 나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 마음 속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신앙고백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
우리가 아무리 많은 주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고 하여도 그 들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밴 어머니의 태나 나에게 젖을 먹인 어머니 젖이 복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자”라고 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암송하고 많이 연구하는 것도 좋고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된 자이다. 요한계시록 1장 3절에도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 듣는 자,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자라고 하셨다. 우리 속담에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는 속담이 있지 않나. 아무리 많이 알아도 실행에 옮길 줄 모른다면 무슨 소용이 있나.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다” 맞다. 행함이 없는 사람들은 핑계만 많다. 잠언에 보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26:11)는 말씀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의 행동은 그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인지조차 분별하지 못하고 반복적인 실수와 잘못을 범한다는 말씀이 아닌가. 이런 말씀도 있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26:14-16)
교회 생활도 오래 하고, 꽤나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만약에 늘 듣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만 그치고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며 실행하고 지키는 자로 성숙해 가지 못한다면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는 게으름뱅이”와 무엇이 다른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들을 만나서 옷이 벗겨지고 매 맞고 거반 죽게 된 채로 버려진 나그네가 있었다. 그 현장을 제사장도 레위 사람도 그냥 지나갔다.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이면 얼마나 성경을 많이 알겠나. 얼마나 제사를 많이 드렸겠나. 얼마나 성경 공부도 많이 했겠나. 얼마나 성전에 자주 드나들었겠나. 얼마나 “하나님 하나님, 여호와여 여호와여”하며 살았겠나. 그런데 정작 이웃이 그들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는 모르는 척 하고 그 자리를 피해서 눈길을 돌리고 외면한 채로 지나가 버렸다. 그 현장을 지나가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에게 다가가서 기름과 포도주로 환부를 치료하고 싸매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돌보아 주었다. 다음 날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건네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아 주겠소.”하고 부탁한 후에 급한 볼일을 보기 위하여 떠났다. 이것은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다.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께 나아와 물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의도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 때 예수께서 반문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면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 율법교사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10:27) 이 말씀은 구약 신명기 6장 5절을 인용한 대답이다. 예수께서 그 율법 교사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그렇다. 예수님의 강조는 행하라는 말씀이셨다. 이것은 당시나 오늘 날이나 마찬가지다.
“기도해야지. 말씀 보아야지. 예배드려야지. 말씀대로 살아야지. 전도해야지. 봉사해야지. 충성해야지. 헌신해야지. 열심히 살아야지. 믿음의 사람답게 살아야지. 선한 영향력이 있는 신자답게 살아야지.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지”라고 듣고 읽어 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아는 데만 그치고 지켜 행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자이며 스스로 부끄러운 자인가. 주님은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이런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두 다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