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행하고 버리지 말라(신14:22-29, 마23:23-24) 2017. 1. 8 청지기 주일
해마다 1월 둘째 주일을 청지기 주일로 지키며 십일조에 관한 설교를 한다. 새 가족들께서도 부담 없이 들어 주시길 바란다. 저희 가정은 십일조를 드리는 가정이다. 저희 두 아들들과 둘째 며느리도 십일조 생활을 한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서 십일조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십일조에 관한 말씀을 해마다 여러 번 들었어도 은혜를 받고 당위성을 깨닫고 결단을 하지 못하면 하지 못하는 것이다. 십일조 신앙은 수돗물을 쓰기 전에 마당 섶에 판 우물에 설치하였던 펌프에 붓던 마중물(priming water)과 같다.
“농부는 굶어도 씨앗을 베고 잔다.”는 말이 있다. ‘농부아사침궐종자’(農夫餓死, 枕闕種子)라고 한다. 다산 정약용이 편찬한 “이담속찬”(耳談續纂)에 기록된 속담이다. 다산은 이 말을 "어리석고 인색한 사람은 자신이 죽으면 재물도 소용없음을 모른다는 말이다"(언우린자 부지신사이재차무용, 言愚吝者, 不知身死而財且無用)고 풀이해 놓았다. ‘린’(吝)이란 욕심내고 탐한다는 글자다. ‘차’(且)자는 ‘또, 잠깐, 장차’란 뜻이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이란 말도 있다. 씨 과일은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자기 분깃과 자기 기업이 없이 성막에서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을 위한 몫으로 십일조를 구별하여 드리라고 하셨다. 그것으로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의 필요를 공급하라고 하셨다.
평안도 의주 출신의 서상륜은 인삼장사로 만주를 오고 갔다. 만주에서 영국인 선교사 존 로스 목사를 만나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한글 성경번역을 도왔다. 서상륜은 그의 동생 서경조와 함께 황해도 장연구 대구면 송천리의 소래마을에 한 초가집에서 1883년 5월 16일 한국 최초로 스스로 교회를 세웠다. 그것이 소래교회(松川敎會)이다. 그 후 1895년 8칸의 기와집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다음 해에는 8칸을 증축하였다. 그 후 소래교회는 신임 서양선교사의 한국어 교육장소로 사용되고 또는 동학군의 피신처로 사용되었다. 1884년이란 헨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제물포 항에 도착하던 1885년보다 오히려 3년 전의 일이다. 그 이후로 오늘 날에는 남한에만도 5만 여 개의 교회가 있다. 1000만 명에 가까운 기독교인들이 있다. 미국에 이민 간 한인들이 세운 한인교회만도 4000개가 넘는다. 그 많은 교회들과 그 많은 성도들이 헌금을 드리고 십일조를 드려서 하는 선한 사업의 규모는 어머 어마하다. 그 바탕은 십일조 신앙이다. 130년 전에 이 땅에 선교사들을 파송하던 미국, 캐나다, 호주,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교회와 성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십일조 신앙과 선교의 열정이 자기 소득 중에서 많은 부분을 헌금하고 헌신해서 선교사를 파송하고 오늘날과 같은 세계 선교를 이루어 온 것이다.
상상해 보라. 만약에 우리나라에 아직도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오지 못했다면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 왔을까.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잇는 불교 1000년, 그리고 조선 시대의 유교 500년 뿐 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신세계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우상 숭배와 조상 숭배와 미신이 신앙 세계의 전부라고 상상해 보라. 그런 가운데 130여 년 전에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 와서 오늘 날에 이른 것이다. 우리나라에 기독교 병원, 기독교 유치원, 기독교 초등학교, 기독교 중 고등학교, 기독교 대학 교육의 영향을 생각해 보라. 기독교의 손길에 의한 고아원, 양로원 등의 복지 사업을 돌아보라.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와서 죄 사함과 영생과 구원의 복음을 선물로 준 것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지 않았나. 기독교는 구한말 자기 이름이 없이 살아가던 이 땅의 여인들에게 자기 이름을 갖게 하였다. 기독교는 말은 하지만 한글을 모르던 백성들에게 한글을 깨우치게 하였다. 영어를 배우고, 불어와 독일어를 배워서 이미 100년 전에 미국과 구라파를 드나들며 세계화에 눈이 뜨게 하였다.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네델란드 헤이그에 고종 임금의 특사로 파견되었던 이준, 이상설, 이위종 같은 인물들은 이미 그 당시에 외국어에 능통한 인재들로 자리 잡았었다. 저들은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파견되었던 인물들이었다. 그 배후에는 이미 그 당시에 이 땅에 와서 선교하던 선교사들의 공로와 헌신의 영향이 컸다. 그 선교의 배후에는 130년 전에 우리가 만나 본 적이 없는 미국 교회와 캐나다, 호주,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교회와 성도들이 갖고 있던 십일조 신앙과 선교의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화도 섬 마을의 나의 고향에 1906년에 데이밍이나 스크랜턴 같은 선교사들이 찾아 가지 않았다면 그 당시에 어떻게 조선 땅의 섬 마을에서 기독교 복음을 받아드리는 기적이 일어났겠는가. 저들에게 십일조 신앙과 헌신 신앙을 가르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마을마마 아름다운 예배당이 지어지고 자손들을 신앙을 배출할 수 있었겠는가. 강화도의 마을마다 교회 없는 곳이 거의 없다. 강화도 섬의 읍 언덕에 있는 1900년에 시작된 강화중앙교회는 1500명쯤 들어가는 큰 예배당이 세워졌다. 강화도의 교회들마다 수많은 목회자를 배출하고 선교사를 배출하고 거기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거기서 은혜를 받은 장로, 권사, 집사를 서울과 인천과 수도권과 전국과 해외 교회의 수많은 일꾼으로 배출하였다. 강화도의 마을마다 교회가 있다. 누가 예배당을 그들에게 지어 주었는가. 아니다. 강화도의 저 북쪽 외딴 섬 교동 같은 북한에 가까운 섬 마을에도 교회가 마을마다 있고 곳곳마다 있다. 십일조 신앙과 헌물 신앙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누가 저들 가운데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해 주었고 자손들을 복음으로 세워 주었겠는가.
십일조 신앙과 헌신 신앙과 성령의 역사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한국 교회 초기에 대부흥이 가능했겠는가. 어떻게 길선주, 깡패 출신 대 부흥사 김익두, 예수천당 최봉석, 제주 선교사 이기풍, 감리교 전덕기 같은 인물들을 세울 수 있었겠는가. 은혜 받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바치는 십일조 신앙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핵연료와 같은 에너지의 원천이다. 지난 이천년 동안 세계 교회는 성령 받고, 은혜 받고, 가슴이 뜨거워지고 헌신적인 성도들의 십일조 신앙과 재산과 재물과 생명까지라도 전부 다 바쳐 헌신하려는 불길 같은 열심에 의하여 오늘날과 같은 세계 선교를 이루어 온 것이다.
십일조에 관한 첫 사례는 아브라함 때이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그의 식솔들을 잃었다.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비롯한 네 왕국의 연합군에 의해서 저들이 전쟁 중에 붙잡혀 갔다. 아브라함은 가정의 남자 318명을 동원하고 적의 왕국에 쳐들어갔다. 야간 기습작전을 해서 성공하였다. 그리고 조카 롯과 그의 식솔들인 부녀와 친척들과 빼앗겼던 재물을 모조리 다 되찾아 왔다. 돌아오던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났다. 멜기세덱 왕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왕 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제사장이었다. 그가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
“천지의 주재이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창14:19-20) 그 때에 아브라함이 전리품들 중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창세기 28장에 있는 내용이다. 형을 대신하여 아버지 이삭의 축복기도를 먼저 받은 야곱이 형을 피하여 도망하게 되었다. 어머니 리브가와 아버지의 도움으로 보따리 하나를 메고 루스 광야를 거쳐서 브엘세바에서 하란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 밤에 루스 광야에서 잠을 청하다가 꿈을 꾸었다. 돌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는데 생생한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요셉은 생생한 환상을 보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사닥다리가 하늘 꼭대기에서 땅에 닿아 있었다. 하나님의 천사가 사닥다리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사닥다리 꼭대기의 하늘에 하나님이 서 계신 것도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도 분명하게 들었다. “13.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3-15)
그 때에 잠에서 깨어난 야곱이 하나님 앞에 베개 돌을 세워 기둥 삼고 서원 기도한 내용 중의 하나가 십일조에 관한 서원이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28:22) 십일조 신앙은 성도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룩해 가시는 구원 사역에 참여하는 증거 중의 하나이다. 온 나라의 백성들이 각 분야에서 열심히 땀 흘려 일하고 자기 소득의 일정 부분을 국가에 세금으로 납부해서 국가의 기간산업과 공공 발전에 공헌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십일조 신앙으로 하나님의 선한 사업이 발전해 오게 하셨다.
십일조란 무엇인가.
출 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파별 수자가 민수기에 나온다. 레위 지파를 제외한 20살 이상의 남자들이 603,550명이었다. 레위인은 그 수자에 포함되지 않았다. 레위인의 임무는 성막을 섬기고 기구와 부속품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백성들이 광야에서 이동할 때마다 성막을 거두고 운반하고 이동하여 다시 세우고 봉사하고 성막 주위에 진 치는 일을 전담하도록 구별 받은 자들이 레위 인이었다. 각 지파는 자기들이 지낼 장막을 진영별로 진을 치되 성막은 오직 레위인들 만이 전담하여 맡아 하게 하였다. 나중에 레위인만 따로 계수해 보니 8,580명이었다.(민4:48)
민수기 18장에 보면 아론과 아들들과 레위 지파의 사람들을 불러다가 성막 제사를 전담하게 하였다. 레위인들은 자기의 분깃이 따로 없었다. 이는 모세의 광야 때에도 그랬고 여호수아의 가나안 시대에도 그랬다. 하나님은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민18:20)고 하셨다.
모세 때에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명령하셨다. 레위 지파 이외의 백성들이 드리는 십일조로 자기 분깃이 없이 성막을 섬기는 레위 사람들의 기업이 되도록 주라고 하셨다. 그 대표적인 것이 ‘거제’라는 제사의 제물이었다. ‘거제’란 짐승을 제물로 제사할 때에 높이 치켜들어서 제사하는 제사법이다. 그 제물 곧 거제물을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의 몫으로 구별하라고 하셨다. 레위인도 십일조를 드렸다. 그들은 백성들이 십일조로 드린 것을 자기 몫으로 받아서 다시 또 십일조를 거제로 삼아 여호와께 드렸다. 레위인이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회막에서 일한 너희의 보수니라.”(민18:31)고 하셨다. 십일조는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성물이라고 하셨다. 민수기 18장 32절에 나온는 말씀이다.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성물을 더럽히지 말라.” 이는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드린 십일조를 거룩하게 제대로 잘 사용할 것을 경고하신 것이다.
십일조 규례는 레위기 27장과 민수기 18장과 본문인 신명기 14장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신명기 14장은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받은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아갈까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십일조 규례를 말씀하셨다. 왜 그랬을까. 거룩한 백성들로 부름 받은 성도들은 정결한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십일조의 의무 또한 감당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신14:22)라고 하였다. 마땅히 드리라고 했다. ‘마땅히’가 무엇인가 ‘반드시 드리라’는 말씀이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소와 양을 비롯한 짐승의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목적은 자기 분깃과 기업이 없는 레위인을 섬기며 구제 사업이 가능하게 하며 나그네를 돌보며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게 하기 위해서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였다. 민수기 14장 29절 끝에 보면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약속하셨다.
민수기 14장 28절에는 매 삼년마다 그 해 소산물의 십분의 일을 더 내어 성읍에 저축하라고 하셨다. 그것으로 지기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 나그네, 고아, 과부들을 섬기는 기금이 되게 하라고 하였다.
말라기 3장의 십일조 교훈은 모세 때에 교훈하신 십일조 신앙에서 멀어져 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상을 지적하고 책망하고 회복을 촉구하신 말씀이다. 말라기 1장에 보면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모두 다 함께 타락하였다고 책망하셨다. 하나님이 화가 잔뜩 나서 말씀하셨다.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하고 종은 주인을 공경하는 법인데 어찌 너희들은 “나 만군의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경외하지 않느냐고 책망하셨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말1:7)고 책망하고 계시다. 경건한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서 함부로 말한다고 책망하셨다.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과 병든 것을 가져 왔느니라. 너희가 이 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말1:13)
그리고 우리가 아는 대로 십일조 신앙의 회복을 가르치시면서 말씀하신 내용이 말라기 3장이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 돌아 가리라.”(말3:7)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십일조 신앙은 세상에서 살던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증거라는 말씀이시다.
예수의 십일조 교훈.
마태복음 23장의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십일조 교훈이 나온다. 십일조를 제대로 드리라고 하셨다. 박하, 회향,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셨다. 이는 이름만 십일조인 형식적인 십일조 신앙이 아니라 제대로 정직한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드리라는 말씀이시다. 민수기의 본문에 보면 곡식와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말씀하셨다. 소와 양과 같은 짐승의 십일조를 말씀하셨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십일조 규례를 세분화해서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는 열심까지 가졌다. 박하란 유월절 때 먹는 쓴 나물의 양념이다. 회향과 근채는 미나리과의 향신료이다. 바리새인들에게 그런 열심이 있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화있을진저”라는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마태복음 23장에는 13절부터 일곱 차례에 걸쳐서 “화있을진저”라는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을 담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바리새인들인데 잘 못 믿고 있다고 그 위험성을 지적하신 것이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교만으로 똘똘 뭉쳐져 있었다. 그런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책망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23장의 시작부터 그런 내용이 가득하다.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말은 듣고 지키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 우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한 분으로 족하다고 하셨다. 우리의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족하다고 하셨다. 남을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셨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고 하셨다.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조심해야 한다. 남들보다 신앙생활을 먼저 시작했다고 교만하면 안 된다. 남들보다 유창하게 기도하고 아름답게 찬송하고 익숙하게 신앙생활하면서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마23:5)라는 예수의 지적을 받던 바리새인들처럼 행동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것 같은데 잘 못하면 예수께서 경고하신 화 있는 자가 되고 말수도 있단 말씀이다.
13절, 천국 문에 막아서서 자기도 들어가려 하지 않고 남들도 못 들어 가게하며 “천국 복음을 방해 하는 자”라는 책망이다. 천국관이 없단 말이다. 오늘 날 혹시 우리는 어떤가. 이 세상이 좋고 이 세상이 살만하고 이 세상이 즐길만하고 이 세상에 낙이 많고 이 세상이 괜찮은데 천국은 무슨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무슨 하나님의 나라...혹시 이런 식으로 신앙 생활하는 이들은 없는가. 천국 신앙은 모세의 율법을 뛰어 넘는 믿음으로 얻는 상급이 아닌가 말이다.
15절, 남의 신앙생활을 실족시켜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시다. 오늘날 기독교의 복음을 변질 시킨 이단과 사이비의 앞잡이들이 이런 심판과 책망을 벗어 나지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강조하셨다. 교인 한 사람을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그들을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느냐고 책망하셨다.
일곱 가지를 일일이 다 묵상할 시간이 없다. 그 중에 하나가 본문 말씀이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 까지 드리는 철저함이 귀하지만 신앙적으로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고 지적하신 내용이다.
오늘 날 나는 어떤가. “이 정도로 주일 지켰으면 됐지. 이 정도로 십일조 신앙 가졌으면 됐지. 이 정도로 봉사하고, 이 정도로 충성하고, 이 정도로 헌신하고, 이 정도로 기도하고, 이 정도로 성경 말씀을 대하고, 이 정도로 ‘주여! 주여!’ 하며 살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이렇게 반응하지는 않는가. “뭘 도대체 얼마나 더 하란 말인가.”하고 하나님께 항변한다. 마태복음 23장 25절에 보면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한” 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실상이라고 고발하셨다. 혹시 오늘 날 “주여! 주여!” 하며 살아가는 나의 모습 속에 그런 부분은 없는가 말이다.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철저히 잘 드리고 대단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 나를 보실 때의 실상은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다르다면 어떻게 할까.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과 같은 이들이 있다”고 지적하고 책망하신 것이다. 나는 어떤가.
정의와 긍휼과 믿음.
예수님께서는 십일조 신앙에 철저한 성도들에게 좀 더 회복해야 할 신앙의 덕목을 숙제로 주셨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회복하라고 하셨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강조하셨다.
그렇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거의 다 십일조 신앙을 갖고 계시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십일조를 제대로 드리는 신앙생활을 하되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리지 말라”고 하셨다. 성경을 한 자 한자 옮겨 쓰던 당시의 서기관들과 모세의 율법 생활에 철저하다고 스스로 자랑하면 교만하던 바리새인들이 십일조 생활을 그렇게 철저히 하면서도 예수님께 받은 책망이 무엇인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예전 번역은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버렸도다”이다.
‘정의’(正義)가 무엇인가. 옛 성경에는 ‘의’(義)라고 한 자로 해석해 놓았다. 원어로 ‘크리시스’(κρίσις)라는 말의 뜻은 “말과 행실로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또 다른 뜻은 “공평함”을 의미한다. 예레미야 5장에서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正義)를 행하며 진리(眞理)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2.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렘5:1-2)
오늘 날 우리들이 몸담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우리나라의 구석구석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이런 거짓으로 가득 차 있지 않나. 어디서 정의를 찾을 수 있나. 어디서 정의를 만날 수 있나. 어디서 정의를 구할 수 있나. 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느껴지지 않나. 왜 예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정의를 버린 자들이라고 경고하고 책망하셨는지 알 것 같지 않나. 하나님은 신명기 16장 19절에서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고 하셨다. 정의를 뜻하는 헬라어 ‘크리스스’에서 위기라는 영어 단어가 나왔다. 위기는 곧 정의로 되 돌이킬 수 있는 회개의 기회가 될 것이니 어쩌면 희망적이다.
손님을 대접하느라 어느 식당에 갔는데 초등학생 2-3학년 쯤 되는 남자 어린이 둘이서 서로 질문하고 답하는 말을 우연히 들었다. “물 중에 가장 깨끗한 물이 뭐게”, “선물”, “그럼 물 중에 가장 더러운 물은 뭐게.”, “뇌물” 우리나라는 초등학교 학생들의 수준이 그 정도이니 역시 희망이 있는 나라가 아닌가.
또 하나는 ‘긍휼’(矜恤)을 말씀하셨다. 예전 성경에는 ‘인’(仁)이라는 한 자로 해석해 놓았다. 헬라어로는 ‘엘레오스’(ἔλεος)인데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 등을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면 사랑을 실천하란 말이다. 입으로만 “배부르게 하라, 따뜻하게 하라”고 말하지 말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라는 말씀이시다. 병든 자를 돌아보고 옥에 갇힌 자를 찾아가 보라는 말씀이시다.
‘믿음’이란 예전 성경에는 ‘신’(信)이라고 했다. 즉 ‘피스티스’(πίστις)이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약속을 지키는 신실성을 말씀하는 것이다. 십일조를 늘 꾸준히 드리는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믿음의 표현일 수 있다.
예수님은 강조하셨다. 십일조 신앙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나, 나와 이웃 사이에 믿음 즉 신실한 신앙으로 살아가라는 가르침이시다. 우리의 당 대 뿐만 아니라 자자손손 주님 오실 때까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않는 믿음의 명문가를 이루자. 언제나 주 안에 새로운 간증과 복된 증거들이 풍성한 믿음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