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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께 감사하나이다(사12:1-6) 2016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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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 16-11-19 20:23 조회 17,695 댓글 0
 
내가 주께 감사하나이다(사12:1-6) 2016. 11. 13
 
 
스페인의 인간탑쌓기 ‘카스텔스’는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되 있다. TV이나 신문 등 언론에서 한 번도 못 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위험과 난이도가 대단하지만 서로 협력하고 단합해서 사람 위에 사람이 10여 층 이상 올라가는 사고 위험이 높고 어려운 게임이다. 연합과 일치와 단합을 위한 자기 희생과 역할 분담이 아니고는 그런 어려운 게임이란 불가능하다. 이는 게임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범사가 다 그러하지 않나. 주어진 난관을 이겨 내야하고 감당해야 하고 극복해 나가야 한다.
 
첸 홍엔이란 이름의 중국 여자 청년은 올해 20살이다. 그녀의 별명은 ‘농구공소녀’다. 농구를 잘해서가 아니다. 농구공을 발삼아 이동하기 때문이다. 사진은 11년 전인 2005년에 중국 언론과 세계 언론에 알려 졌단 사진이다. 당시에 9살이었다.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손녀를 위해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농구공 발이다. 양 손에 나무 손잡이를 잡고 걷는다. 걷는다기 보다는 몸을 이동시킨다. 그녀는 4살 때에 교통사고를 두 다리를 잃었다. 그녀는 중국에서도 벽촌인 윈난성 루량현에서 자랐다. 시골 마을에서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어른들을 도우러 밭에 가다가 길모퉁이서 달려드는 화물차가 그녀를 덮쳤다. 차바퀴에 휩쓸려 들어갔는데 하반신을 잃고 살아남았다. 골반 이하가 모두 다 으스러졌다. 목숨만 살아남았다. 너무나 가난해서 휠체어는 상상도 못할 환경이었다. 몸을 땅 바닥에 끌고 다니는 모습을 딱하게 여기며 바라보던 그녀의 할아버지가 ‘농구공발’과 양손에 잡을 수 있는 나무 손잡이를 만들어 줬다. 9살 때에 그녀의 소식에 언론에 소개 되면서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농구공 대신 의족을 달았다. 중국 장애인 국가대표팀 감독인 장홍후 감독의 눈에 띄어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건강한 사람도 어려운 수영을 익히는 일은 두려움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두 다리가 없으니 물에 뜬다고 하여도 물속에서 방향을 잡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3년 후인 2008년 윈난성 장애인 체육대회에서 금메달 3개를 땄다. 이듬해인 2009년, 전국 장애인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 1개, 은메달 2개를 따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2010년엔 중국 전국 장애인 수영 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 3개를 더 따냈다. 그녀의 꿈은 올림픽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2011년 장애인 올림픽 예선전 직전에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말았다. 낙심한 그녀는 언론의 눈을 피해 고향에 돌아가 지냈지만 좌절은 계속되지 않았다. 다시 수영 연습을 시작했고, 2014년 9월 윈난성 지방 장애인체육대회 여자 평형 100M 결승에서 다시 금메달을 탔다. 크리스티안 바너드는 “사람을 고귀하게 만드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그 고난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렇다. 개인이든 국가이든 고난이 없을 수는 없다. 문제는 그 겪는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며 이겨 나가느냐는 것이 숙제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지구상의 그 어느 민족들보다 고난을 많이 겪은 민족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있던 때에 남 왕국 유다에서 활동한 선지자이다. 주전 739년부터 주전 680년경에 활동하던 선지자이다. 이사야의 이름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의미이다. 이사야 6장에 보면 남 왕국의 10대 임금이었던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내용이 자세하게 나온다.
하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통하여 장차 유다 백성들이 당할 고난과 회복의 소망에 대하여 함께 말씀해 주셨다. 1절에서 대하는 ‘그날에’라는 시제와 ‘전에는’ 혹은 ‘이제는’이라는 시제가 모두 다 미래에 있을 사건의 시점을 언급하는 것이다. 장차 세월이 많이 흐르고 고난과 시련의 때가 다 지나간 후에 과거를 기억하며 이런 회상을 할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스라엘은 북 왕국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망하였다. 남 왕국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예루살렘이 초토화되고 온 나라가 바벨론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런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같은 신실한 젊은이들이 모두 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갔다. 세월이 지나고 바벨론이 무너졌다. 메대 시대를 거치고 바사 즉 페르시아 시대를 맞으면서 포로 생활에서 회복되어 돌아 올 수 있는 날이 주어졌다. 꿈만 같은 순간이 찾아 온 것이다. 우리나라에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그렇게 갑자기 찾아 온 것처럼 말이다.
 
이사야 12장 1절 말씀은 그런 내용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그 ‘전에는’이란 때가 언제인가. 하나님이 노하셔서 유다 백성들을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의 침략군의 압제 아래 버려두신 때를 말한다. 하나님이 노하시면 나라가 없어진다. 민족이 사라진다. 부모 형제자매가 전쟁으로 죽거나 열방 가운데 흩어지고 만다. 이스라엘 배성들에게는 430년 애굽의 노예 생활이 그런 아픔과 시련의 역사이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앗수르가 쳐들어오고 바벨론이 쳐들어 와서 북 왕국 이스라엘이 없어졌다. 남 왕국 유다도 예루살렘이 불바다가 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엉망진창이 되고 성전 기물들을 바벨론이 다 끌어가고 집어가는 참담한 침략의 순간이 찾아 왔다.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역사학자들은 한 국가나 한 민족의 흥망성쇠를 보는 눈이 다르다. 그들은 지정학적으로 군사적으로 정치적이거나 국제적인 역학 관계로 해석한다. 그러나 성경은 역사를 그렇게 평가하지 않는다. 왜 이스라엘이 망했는가. 왜 유다에 바벨론이 쳐들어갔는가. 하나님을 잘 믿고 섬겨야 할 이스라엘 백성, 유다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날 때에 하나님이 노하셔서 심판의 칼로 앗수르나 바벨론을 들어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치셨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지금 이사야 12장 1절 말씀은 그런 시대 배경과 역사의 교훈을 담고 있는 예언적인 말씀이다. 이런 날이 올 것이란 말씀이다. 세월이 흐른 오늘 날 우리는 저들 유대인들이 겪은 아픈 역사를 성경 속에서 교훈 삼는 것이다. “전에는 내게 노하셨으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라고 했다. 하나님이 왜 언제는 노하시고 왜 언제는 진노에서 돌아서시는 것일까. 하나님이 언제는 왜 진노하시고 언제는 왜 용서하시는 것일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빌려서 말씀하신다.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사12:1, 4) 도대체 이사야의 입을 열어서 하나님의 무엇을 감사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인가. 오늘 날 우리는 어떠한가. 신앙으로 살아오고 올 한해를 여기까지 살아오면서 무엇을 주께 감사하게 되는가.
 
 
주께서 안위(安慰)하시오니 감사.
그렇다. 하나님 아버지는 때로 진노하시는 심판의 주님이시도 하지만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는 백성들과 인생들을 안위하시는 아버지이시다. 더군다나 우리는 “나름대로 신앙으로 살고 나름대로 주여 주여 하면서 살아가는데 왜 나에게 혹은 우리 가정에 이런 시련이 있는 것일까.”, “나름대로 주께 기도드리며 주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데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있는 것일까.”하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계절을 살아가며 절대 감사를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하는 이사야의 고백처럼 장차 고난을 이기고 안위 받게 하실 하나님의 안위하심을 기대하며 미리 감사하고 소망 중에 감사하고 회복의 은총을 믿고 감사할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 의롭게 살아가는 성도가 당하는 고난이란 하나님을 등지고 살며 하나님을 멀리 떠나 제 마음대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과는 그 고난의 차원이 다른 것이다.
 
창세기의 요셉은 아브라함의 증손자이다. 야곱의 11번째 아들이다. 그가 애굽에 노예 시장에 팔려 갔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배 다른 10명의 형들에 의해서 팔려 갔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죽은 줄로 알고 20년을 지냈다. 10형제가 아버지 야곱을 감쪽같이 속였다. 속이는 일은 세상에만 있고 정치계에만 있고 경제계에만 있는 게 아니다. 형제간에도 속이는 일이 있다. 아담의 큰 아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도 하나님 앞에서 “내가 아벨을 지키는 자입니까”하고 시치미를 떼지 않나. 이게 인간이다. 타락한 인간의 죄악상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요셉은 17살에 애굽의 노예 시장에 팔려가서 30살 까지 노예로 지냈다. 바로 왕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온갖 살림을 맡아 하는 종이었다. 그런 그가 나중에는 주인마님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셉을 그 감옥에서 불러 내셔서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는 해석자로 세우셨다. 한 순간에 요셉은 애굽의 제 2인자가 되었다. 애굽의 칠년 풍년 후에 칠년 대 기근이 찾아 왔다. 그리고 그 흉년 이태 째 되던 해에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이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동냥하기 위해서 내려갔다. 가나안의 흉년이 아니었으면 영영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만날 수 있는 길이란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요셉이 애굽의 제 2인자로 출세하였으니 국제적으로 수소문해서 아버지의 생사를 알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굽의 흉년과 가나안의 흉년을 통해서 아버지 야곱과 아들 요셉에게 재상봉의 날을 예비하셨다. 동생을 팔아 버렸던 열 명의 형들과 그 형들이 이룬 가정의 형수들과 조카들까지 무려 70명을 고센 땅에 정착시킨 주인공은 형들이 발가벗겨 팔아 버렸던 동생 요셉으로 인한 섬김이었다. 이런 일을 우리의 소견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고난을 겪는다. 우리의 상식이나 나의 좁은 소견으로는 쉽게 해석할 수 없는 생의 우여곡절들을 겪으며 살아간다. 요셉은 17살에 국제적으로 노예 시장에 팔려가는 불운한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 요셉이 이십년 후에 가족 70명의 목숨을 구하는 주인공이 될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신 후에 동생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동생 요셉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 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그렇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시다.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전능자이시다. 하나님은 진노를 바꾸어 안위의 두 팔을 벌려 택한 백성들을 품 안에 안아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우리는 안다. 바벨론 포로 시대에 바벨론으로 끌려간 젊은이들 중에 다니엘과 같은 신실한 젊은이가 있었다. 다니엘은 여호와를 향한 신앙이나, 인격이나 성품에 있어서 바벨론에 끌려 다니며 조롱을 받고 억울한 환경에 쳐해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젊은이였다. 그러나 다니엘의 청년기에 유대의 국운은 기울었고 다니엘은 세 친구와 함께 바벨론 땅에 포로로 붙잡혀 끌려가는 불행한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달랐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달랐다. 다니엘서에서 만나는 저들의 이야기를 보라. 성도는 시대적으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중에서라도 하나님의 안위하심을 기대하고 찾아 나설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합당한 모습이다.
 
시편 147편에 보면 “여호와는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심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시147:2-3)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는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며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시147:6)고 했다. 안위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은총이 풍성한 나날을 살아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주께서 구원(救援)하시오니 감사.
하나님은 인생들이 죄와 사망에서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 사탄은 인생을 넘어지게 하고 죄악의 함정 가운데 빠지게 하고 멸망하게 하지만 하나님은 인생을 구원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하나님은 이사야의 입을 열어서 선포하게 하신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사12:2) 성도가 두려움이 없는 마음으로 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신뢰 할 수 있는 믿음이 어디서 나오는가. 여호와는 그를 믿고 따르고 섬기는 자의 힘이시며 노래시며 구원이시기 때문이다.
 
마귀 사탄은 땅 굴을 파는 두더지나 작은 구멍으로 드나드는 생쥐처럼 들락거리면서 정부라도 조롱을 당하게 하고 국가라고 병들게 하고 왕이라고 무너지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그를 믿고 따르고 섬기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매 순간마다 힘이 되어 주시고 찬양을 받으시며 구원을 이루어 주신다. “여호와는 나의 노래시며”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모세 시대에 모세를 앞장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 현장에서 불러 내셔서 출애굽하게 하셨다. 출애굽에 성공한 모세는 백성들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저들 가운데서 행하신 크고 놀라운 출애굽의 기적을 노래하였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15:2) 그렇다. 전능하신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믿는 백성들의 힘이시며 노래시며 찬송할 이유이시며 구원의 대답이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뒤를 추격해 오던 애굽의 바로 왕이 보낸 말과 병거와 그 말 탄자들을 누가 다 홍해의 물 가운데 수장시키셨는가. 홍해를 육지처럼 건넌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은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같이 일어서고 큰물이 바가 가운데 엉기나이다.”(출15:8)라고 주님을 경배하였다.
 
맞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다.” 누가 이런 고백과 이런 노래와 이런 찬송을 부를 수 있는가. 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불러 내셨는가. 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의 압제에서 풀려나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셨는가. 누가 이 땅의 백성들 가운데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입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게 해 주셨는가.
 
누가 38년 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하셨는가. 누가 12해 혈루증 여인을 깨끗하게 하였는가. 누가 간음현장의 여인에게 새로운 삶을 선포하였는가. 누가 여섯 번째 남자와 만나 살던 수가 성 여인에게 메시야를 만나는 은혜를 입게 해 주었는가. 누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는 비밀을 깨우쳐 주었는가. 누가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모두 다 깨끗하게 하였는가. 누가 지붕에 달려 내려온 중풍병자를 깨끗하게 고쳐 주었는가. 누가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12살짜리 딸을 다시 살려 주었는가. 누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고 이미 장사 지낸 나사로를 그의 무덤에서 불러내었는가. 누가 벳세다 광야의 배고픈 무리들에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배 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의 부스러기가 남게 하셨는가. 누가 갈릴리의 풍랑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였는가. 누가 십자가에 죽이시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장사 지낸 예수 그리스도를 사흘 만에 다시 살려 내셨는가. 누가 나라를 구원할 수 있는가. 누가 국가를 보전할 수 있는가. 누가 국민을 안위할 수 있는가. 누가 개인과 가정과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사망의 늪에서 건져 낼 수 있는가.
 
하나님을 떠나면 이스라엘이라고 불행해지고 유다라도 예루살렘이라도 불행해지지 않았나. 구원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나의 구원, 내 가족의 구원, 이 민족의 구원, 현 정부의 구원, 이 시대의 구원이 어디에서 오나, 누구로부터 오나.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미리 예언하셨고 미리 말씀하셨다. 장차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바벨론 포로 시대와 다시 회복하실 안위의 날과 구원의 날을 미리 말씀하셨다. 맞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계속하여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12:3)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샘이 솟아나는 우물을 만나는 것은 얼마나 크나큰 축복인지 모른다. 사막과 광야와 황량하고 메마른 땅에서 물을 찾고 샘을 찾고 푸른 초장을 찾아 양과 염소와 소와 말과 약대를 먹여야 하던 저들에게 있어서 우물물을 만나는 것은 말씀의 표현처럼 기쁨이요 구원임이 분명하다.
 
더 나은 목축을 위해서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동과 서로 갈라서지 않았나. 이삭의 때에 짐승 먹일 우물 샘을 마련하기 위해 원주민의 종들과 수 없는 갈등과 대립을 경험하지 않았나. 창세기 26장에 보면 이삭의 종들이 우물 샘을 파면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고 빼앗으려 덤벼들었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나서서 이삭에게 “네가 우리보다 크고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고 하였다. 우리도 이런 날이 오길 바란다. 우물 샘을 파면 샘 근원이 마르지 않는 깊은 샘이 콸콸 솟아오르길 바란다. 원주민들로부터 시기를 받고 대적을 받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이삭은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이었다. 이삭은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아졌다.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를 받을 정도였다.(창26:12-14) 여러분의 직장과 산업과 생업의 현장에 이런 복이 임하길 소망한다. 이렇게 창대해지고 이렇게 왕성해지고 이렇게 거부가 되어도 평생토록 겸손하고 자자손손 주님 앞에서 겸비한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생각하여 보아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이란 얼마나 복되고 엄청난 감격의 사건인가. 어찌 힘이시며 노래시며 구원이신 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는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긷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주께서 아름다운 일을 행하시오니 감사.
성도의 삶은 어떠하여야 하는가. 우리는 경험하야 알지 않는가. 체험하여 깨닫지 않는가. 4절에 왜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하셨는가.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면 갈수록 여호와의 이름을 높여 부르고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그의 능력을 경배하게 되지 않나. 우리가 왜 만국 중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선포하게 되는가. 왜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시는가.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그를 믿는 자들 가운데서 극히 크고 아름다운 일을 행하시는 전능자이시다.
 
올해 올림픽이 열렸던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바위 산꼭대기에 있는 양 팔을 벌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동상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라 하지 않나. 그리스도 상은 브라질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1931년 코파카바나 해변 맞은편에 위치한 해발 710미터의 코르코바도 언덕 정상에 건설되었다. 브라질인 에이토르 다 실바 코스타가 설계를 마무리했다. 원래 십자가를 들고 있는 청동상으로 설계되었으나 금속 골조는, 당시 브라질 정황을 감안할 때, 정권이 바뀌면 철거하고 녹여버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철근 콘크리트 골조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차례의 설계 변경을 거치면서 결국 프랑스의 조각가 폴 란도프스키가 디자인한 것이다. 높이가 38미터이다. 양팔을 벌린 길이가 28미터이다. 손바닥 크기 3미터이다. 무게가 1145톤이나 되는 세계 최대의 거대한 예수 조각상이다.
 
예수를 진심으로 내 마음 속에 영접하고 그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 보라. 그런 거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동상을 바라보는 것보다 백배, 천배, 만 배 더 크고 더 깊고 더 은혜롭고 더 놀랍고 아름다운 일들이 내 삶에서 구체적으로 경험되고 간증되게 해 주실 것이다. 이 곳에서 우리 각 사람이 그런 새로운 꿈의 공동체를 세워 나가자.
 
하나님은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보다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믿고 살아가는 베들레헴의 어린 소년 다윗을 그 시대에 골리앗보다 백배 천배 크고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들어 사용하셨다. 온 이스라엘 여인들이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이 노래는 다윗을 노래하는 노래가 아니었다. 이 노래는 다윗이 던진 물맷돌로 역사를 바꾸어 가신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를 높이는 노래가 아니었나.
 
그러므로 우리는 착각하면 안 된다. 예수로 인하여 새끼 나귀가 가는 길에 종려나무 가지를 깐 것이지 그냥 그 새끼 나귀 때문이 아니지 않나. 베들레헴이 왜 유명한 고을이 되었는가. 그 마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셨기 때문이 아닌가. 왜 나사렛이 우리에게 알려진 동네가 되었는가. 예수께서 그 마을에서 성장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는 예수가 우리의 삶의 의미이고 이유이고 대답이고 목적이고 영원한 소망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권력이 부럽나. 부자가 부럽나. 권력자의 곁에서 겸상하고 권력자의 대포폰으로 통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나. 우린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나의 삶의 이유이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의 대답이시고 성령님이 내 삶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공급자이심을 시인할 수 있어야 한다.
 
5절의 ‘아름다운’이란 ‘게우트’는 ‘장엄한, 영광스러운’ 그런 뜻이다. 세월이 지나고 출애굽할 수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체험은 여호와 하나님이 보여 주신 아름다운 일이었다.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이스라엘이, 유다 백성들이 앗수르의 압제에서,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고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 갈 수 있는 날이 온 것은 아름다운 일이며 장엄한 일이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예루살렘에 되 돌아 간 백성들이 수룹바벨을 앞장세우고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건축 할 수 있었던 것은 눈물이 나도록 감격스럽게 영광스러운 일중의 일이었다. 느헤미야가 나서서 무너진 지 오랜 세월이 되도록 방치되어 있던 예루살렘 성곽을 52일 만에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름다운 일이며 장엄한 일이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오늘 날, 아니 올해 당신에게 있어서 아니 나에게 있어서 여호와께서 이루어 주신 아름다운 일, 장엄한 일, 영광스러운 일이 무엇인가. 아니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아름다운 일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 날에, 전에는, 이제는”이라고 말씀하시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주님의 손바닥 위에 얹어 놓으시고 다스려 가시는 역사의 주인이신 줄로 믿는다. 내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제한하지 말자. 내 좁은 소견으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려고 하지 말자. 욥기 38장 이하에 보면 하나님이 욥에게 질문하시며 대답해 보라고 채근하신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38:4),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욥38:16),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소리를 내겠느냐”(욥40:9), “네가 낚시로 악어를 끌어 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욥41:1) 하나님의 항변을 듣던 욥이 하나님께 대답한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42:1),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행하시는 온갖 크고 작은 아름다운 일들로 인하여 여호와의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일들을 찬송하고 경배하는 나날이 되기를 소망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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