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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소녀의 한 마디 말(왕하5:1-7) 201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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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 16-08-01 00:26 조회 17,971 댓글 0
 
 어린 소녀의 한 마디 말(왕하5:1-7)       2016. 7. 31




말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이다. 말에는 그 사람의 생각과 사상과 꿈과 관심과 의지가 담겨 있다. 말에는 그 사람의 신념과 신앙과 희망이 묻어난다. 말은 곧 그 사람의 사람됨이다. 말은 곧 그 사람의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1963년 8월 28일에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에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특히 피부색이 다양한 소수 인종들이 모여 들었다. 그 자리에서 34살의 젊은 흑인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 (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목사가 마이크 앞에 서서 연설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today.)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자명한 진리가 드러나는 세상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사람은 피부색에 따라 차별 받거나 불공평하던 사막이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변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때가 되면 전 노예의 자녀들과 전 노예 소유주의 자녀들이 한 테이블에 함께 앉아 형제애를 나눌 날이 올 것을 믿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모든 계곡이 높아질 것이며 모든 언덕과 산은 낮아질 것입니다. 울퉁불퉁한 곳은 평평해질 것이며 비뚤어진 곳은 바로 될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며 모든 피조물은 함께 그것을 볼 것입니다.”


이런 반복되는 한 마디의 말,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로 시작된 그의 명연설은 참석자들의 마음에 평등을 향한 결단의 불을 붙였다. 그 다음 해인 1964년 미 의회는 인종, 소수 민족, 소수 국가, 피부색, 종교, 남녀의 성 등의 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53년 전의 일이다. 그 후로 미국은 유색 인종 출신 중에서 대통령도 탄생시켰다. 그리고 여성 대통령 후보도 탄생시키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가정, 직장, 일터, 기업체, 국가 경영, 외교 등등의 모든 생활 구석구석에서 한 마디 말의 위력이 얼마나 강하고 큰 가를 실감하며 살아간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다. 교회 학교 교사들 간에, 혹은 속회에서 속도원들 간에, 혹은  음식을 만드는 주방 공간에서, 각 기관과 부서에서 봉사하고 사역하는 중에 곁에 있는 그 누군가와 하는 말 한 마디가 곧 그 사람의 인격이며 그 사람의 됨됨이를 대변하는 것이다. 말 한마디가 그 공동체의 나아가는 방향을 좌우한다. 


영(靈)이신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와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 이처럼 말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힘이 있고 성령의 능력이 있으신 것처럼 인간의 말에도 힘이 있다. 사람의 말 한 마디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에덴동산의 사탄인 뱀은 말로 인간을 무너지게 하였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의 거짓된 말을 통해서 인간을 병들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타락하게 하였다. 나 자신이 요즘 즐겨 쓰는 말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말들인지 아니면 사탄 마귀가 좋아하는 말인지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아람 나라 군대 장관 나아만 장군이 나병에 걸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여주인에게 하는 이스라엘 어린 소녀의 말이 “주인마님! 장군님이 나병에 걸리셨다는데 저러시다가 얼마 못 가서 전역하시게 되겠죠. 사람이 안사는 곳에 가서 격리 생활 하시다가 얼마 못 가서 나병으로 돌아가시고 말겠죠”하고 입방정을 떨었다면 그 소녀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겠나. 그런데 그 어린 소녀의 말은 달랐다. “우리 주인이 이스라엘 사마리아에 계신 엘리사 선지자를 만날 수 있다면 저 나병에서 고침 받을 수 있을텐데요.”하고 치료의 가능성과 희망이 가득한 말을 하였다. 


이처럼 말에는 일을 이루어 가는 창조 능력이 있다. 요즘 바둑 왕 이세돌 씨를 내세워서 공익광고협의회에서 제작한 광고 영상물이 있다.


 “포기하지 마라. 좌절하지 마라. 경쟁에서 이겨라. 저는 그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좌절할 수도 포기할 수도 있죠. 경쟁에서 질 수도 있습니다. 저도 지는데 익숙한 선수인데 대신, 이런 말을 하고 싶어요. 괜찮아! 넌 잘 하고 있어.”


그렇다. 주님을 믿는 성도인 우리 서로는 말로 개인, 가족, 주변 사람, 국민을 격려하고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세워 나가야 만 한다. 한 마디의 말이 개인이나 공동체나 국가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아람 나라에 사로 잡혀 간 어린 소녀의 말 한마디가 나아만 장군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방문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결국은 우여곡절을 거쳐서 나아만 장군의 나병이 고침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한 마디 말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다. 

말이란 상대방의 위상을 힘 있게 세울 수도 있고 상대방의 인격을 무너트릴 수도 있다. 지혜 있는 자의 말과 어리석고 미련한 자의 말이 다르다. “유순한 말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15:1)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잠15:2)고 했다. “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4)이처럼 말에 대한 교훈이 잠언에는 넘쳐 난다. 


말은 곧 그 사람의 전인격을 드러내게 된다. 우리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세계는 나의 교구다”(The World is My Perish.)라는 말로서 열방 선교에 대한 그의 불타는 의지와 성령의 충만함을 표현하였다. “나는 한권의 책의 사람이 되겠다.”(Homo Unius Libri)는 말로 성경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가짐을 고백하였다. 


신구약성경의 인물들도 하나님 앞과 그들의 시대 상황 앞에서 남긴 말들이 성경에 가득하다.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창37:6) 요셉이 자신에게 절하는 곡식 단의 꿈과 해와 달과 열 한 개의 별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꾼 후에 형들 앞에서 한 말이다. 요셉은 애굽에 팔리어 갔지만 13년 후에 그의 말한 꿈대로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다. 야곱은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으로 가기 전에 아들 요셉에게 이런 축복의 말을 남겼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창49:22) 모세도 하나님 앞으로 가기 전에 지파별로 축복하는 기도 중에 요셉지파의 후손을 이렇게 축복하였다.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신33:16)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수23:11) 여호수아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유언의 말 중의 일부이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는 신앙 고백으로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삶을 말로 그렇게 표현하였다. 


신약성경의 인물들은 어떤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이는 세례 요한이 남긴 말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8:35)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이처럼 사도 바울은 복음 안에 살고, 은혜 안에 살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살아가면서 수 많은 신앙고백적인 말들을 그의 편지에 기록하여 전하였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은 말의 중요성을 교훈한 말이 아닌가.


가정이란 가족들이 말의 집에서 사는 곳이다. 사랑과 화해와 용서와 화목과 격려의 말을 하며 사는 가족이 있고 그와 반대로 비난과 책망과 시비와 원망과 싸움과 다툼 가운데 살아가는 가족이 있다. 관계가 어렵고 조심스러운 사람들과의 말에는 별 실수가 적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이 오히려 문제다. 가족이든, 친구이든, 직장 선후배 혹은 동료이든, 친구 간일수록 더욱 더 말조심하여야 한다. 시집과 관련해서 마음에 상처가 있는 며느리는 ‘시’자가 싫어서 시금치도 안 먹고, 성경 중에서도 시편은 안 읽으려고 한다고 한다. 몸에 난 상처는 시간과 세월이 지나면 치료 되지만 말 때문에 마음에 난 상처는 수 십 년이 지나도 혹은 평생을 살면서 해결 되지 않고 마음에 응어리로 남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소망의 말, 격려의 말, 용기를 주는 말, 칭찬하는 말, 기분 좋은 말, 인정해 주는 말, 위로하는 말 등 덕담하기를 즐겨하여야 한다. 


반대로 남을 비난 하는 말, 꼬투리 잡는 말, 시비 거는 말, 흉보는 말, 수군거리는 말, 판단하는 말, 책망하는 말, 불평의 말, 원망하는 말, 탄식하는 말, 힘 빠지게 하는 말, 맥 빠지게 하는 말, 기분 잡치게 하는 말,  부정적인 말, 소극적인 말, 김새게 하는 말, 남의 약점이나 부족한 점을 재밋거리처럼 거론하는 말, 남의 사 생활의 비밀을 지켜 주지 못하는 말을 삼가고 조심하여야 만 한다. 


공갈, 협박, 사기, 횡령 이 모든 것이 말로 인해서 상대방의 인격과 재산과 삶을 해치는 죄와 악이 아닌가. 


직장 생활이나 사회생활이 일이 벅차고 일이 힘들어서 힘겨워 하기 보다는 적지 않은 경우에 말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직장 상사가 남녀의 성을 차별하는 발언을 함부로 한다든지 혹은 해서는 안 되는 욕설을 한다든지 인격을 비하하는 말을 한다든지 여성에게 성 희롱하는 말을 하는 경우 등이 그러하다. 


최근에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대 기업의 계열사 사장이 자신의 차량 운전기사에게 폭언을 한다든지 폭력을 쓴다든지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이유로 인해서 몇 달마다 자주 운전기사가 교체되는 어려움을 겪은 사실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국


교육부의 고위직 공무원으로 있는 이가 말 한마디 잘 못해서 면직되지 않았나. 교육부 정책기획관은 2급 공무원이다. 거기서 잘 하면 장관에 등용될 수도 있는 자리다. 27살에 행정고시 합격한 인물이다. 47살에 2급 공무원의 자리에 있었으면 소위 출세한 공무원이다. 이전 정부 때에는 청와대 행정관으로 근무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는 국민을 1%의 지배층과 99%의 피지배층으로 편을 갈라서 개와 돼지에 비유하며 저속하게 말했다. 결국은 그 한 말 한마디로 말미암아 온 국민과 언론의 지탄을 받고 면직되고 말지 않았나. 


나아만 장군은 자기 아내의 곁에서 수종드는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가 한 말을 아내로부터 전해 듣고 그 내용을 임금 앞에 전하였다. 본문에는 아람의 왕 이름이 소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열왕기하 6장 24절이나 8장 7절에 보면 그는 벤하닷 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나아만 장군으로부터 이스라엘 어린 소녀의 말을 건네 들은 왕은 나아만에게 “갈지어다.”하고 당장 준비해서 이스라엘에 다녀오라고 허락하였다. 아람 왕은 이스라엘 왕에게 보낼 친서도 써서 건네주었다.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이스라엘 왕에게 선물로 건네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병은 왕이라도 못 고친다. 이스라엘 왕이 말하지 않았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렇다.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과 생로병사(生老病死)는 한 나라의 임금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범사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본문을 좀 더 자세히 묵상해 보자. 



나아만 장군과 이스라엘 소녀와의 만남.

인생은 만남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내 인생이 좋아지기 시작하고 나쁜 사람을 만나면 그로 인해서 내 인생이 꼬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원리는 서로가 다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부모형제도 잘 만나야 하고 부부도 잘 만나야 하고 친구도 잘 만나야 한다. 교회도 결국은 그 교회의 주요 구성원들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 교회의 성격과 색깔을 결정짓게 된다. 우리교회처럼 역사가 짧은 교회는 더욱 더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나는 우리 집에서, 우리 가족 구성원들 중에 누구인가. 나는 직장 혹은 내 일터에서 어떤 존재인가, 나는 사회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교회 구성원들 간에 어떤 모습으로 선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 앞에 스스로 자신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상대방에게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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