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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왕하4:42-44, 요6:10-15) 201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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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6-07-27 11:23 조회 19,921 댓글 0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왕하4:42-44, 요6:10-15)    2016. 7. 24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건강하고 행복하고 안전하고 풍요로운 삶을 원한다. 그러나 살다 보면 전쟁, 흉년, 가난, 굶주림, 질병, 죽음. 이런 것들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요즘 유럽 전역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테러가 일어나고 있다. 테러의 피해자가 되어 죽어가는 이들이 스스로 그런 죽음을 선택하였겠는가. 열왕기 하 4장에는 다섯 가지의 기적 내용이 나온다. 첫 기적은 남편의 죽음과 남겨 놓은 많은 채무와 가난 가운데 살던 선지자 제자의 넘겨진 가족을 위해서 두 아들과 살아 보려 부르짖는 여인에게 이웃으로부터 빈 그릇을 빌리게 하였다. 집안에 남아 있는 기름 한 그릇을 그 빈 그릇에 부었더니 그릇마다 차고 넘치는 기적이 생겼다. 그 기름 팔아 빚을 값고 세 식구가 생활하게 되었다. 두 번째 기적은 자녀 없이 연세 들어가던 수넴 여인의 부부에게 일 년 후에 아들이 태어나게 하신 기적이다. 세 번째 기적은 그 아들이 들에서 머리 아프다 하며 집에 돌아가 엄마 무릎에 앉았다가 죽었다. 그 죽은 아들을 선지자 엘리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다시 살려 주셨다. 네 번째 기적은 흉년의 때에 길갈의 선지자 제자들을 먹이려고 들호박을 따다가 국을 끓였다. 그런데 독이 퍼진 국이어서 먹을 수가 없었다. 선지자 엘리사는 가루를 가져 오게 하여 그 가루를 들호박국 솥에 던져 넣어 먹을 수 있는 국으로 고쳐 주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 기적이 본문이다. 보리 떡 이십 덩이와 채소 한 자루를 갖고 백 명이 배불리 먹고 남는 기적을 보여 주셨다. 이 모든 기적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핍절한 생활보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경제적으로 회복되어 풍요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아들딸 태어나는 생명의 공급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이시다. 인간이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다. 그렇다. 인간의 편에서 물론 성실하게 노력하여야 하지만 인간의 생로병사와 길흉화복이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독이 펴져서 먹을 수 없는 들호박국 솥처럼 온 세상에 퍼져 있고 만연해 있는 죄와 악을 고치고 회복하실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다.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하게 얻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시다.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것도 기적이요, 6.25 전쟁 때에 김일성의 공산군에게 휴전선 남쪽만이라도 공산화 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다. 지금처럼 잘 살게 된 것도 기적이요, 군사 독재가 끝난 것도 기적이다. 국가적으로 각처의 지도자들 간에 이렇게 민망하고 부끄럽고 실망스러운 사고와 대형 범죄와 사건이 끝없이 많이 일어나는데도 나라가 망하지 않고 여전히 굴러 가는 것이 기적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산자와 죽은 자가 뒤섞여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불안한 날들이 계속된다. 누가 승자가 될지 누가 패자가 될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전쟁이다. 만약에 오늘 날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피해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 것이다. 

질병은 어떤가. 내가 병들어 보면 사람이 병약해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실감하게 된다. 흔히 하는 말대로 재물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는 것은 다 잃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만한 건강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그것이 우리 각 사람의 생애에 기적 중의 기적이며 축복 중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70년을 살아도, 80년을 살아도 하루하루를 살아서 70년을 살고, 80년을 사는 것이다. 시인 정호승의 표현처럼 “오늘은 어제 세상을 앞서 떠난 이들이 그렇게도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란 시간이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 왔다. 사무엘 상 9장 4절에 보면 ‘살리사’라는 지명이 나온다. 사울이 아버지의 잃어버린 나귀를 찾기 위해서 돌아다니던 곳이 ‘살리사’이다. 열왕기하 4장 38절에 나오는 ‘길갈’이란 곳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아마도 ‘바알 살리사’란 그 곳 ‘살리사’를 그렇게 부른 것으로 여겨진다. 바알이란 단어가 지명 앞에 붙은 것을 보면 당시 북 왕국 이스라엘이 얼마나 바알 신앙과 앗세라와 같은 우상 숭배에 젖어 있었나를 알 수 있는 지명이다. 바알 살리사에서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 온 한 사람은 농사하여 새로 거둔 새 곡식을 빻아서 처음 만든 보리 떡 이십 개와 첫 수확한 채소 한 자루를 가져다가 엘리사에게 드렸다. 엘리사는 흉년기에 늘 먹을 것으로 염려하는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어 먹게 하라고 하였다. 사환 게하시는 보리 떡 이십 개와 채소 한 자루를 갖고 어떻게 백 명에게 주어 먹게 할 수 있겠느냐고 아쉬움을 말했다. 그 때에 엘리사 선지자가 말했다.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엘리사의 말을 들은 사환 게하시는 하나님이 먹고도 남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다는 말씀을 믿고 나누어 먹도록 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배 불리 먹고도 오히려 남는 기적이 일어났다. 기적이 무엇인가. 사람 편에서는 기적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시다. 없는 것에서 있게 하시는 창조가 하나님의 창조하심이다. 창조와 보존과 재창조와 개선과 치료와 회복과 온전케 하심이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심이요 모든 것이 전능하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우리는 열왕기하의 기적의 내용을 접할 때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오병 이어의 기적을 떠올리게 된다.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 두 광주리의 부스러기를 거두게 하신 기적 말이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기적 내용이다. 예수님께서는 보리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갖고 여자와 어린이들을 제외한 장정만도 사천 명을 배부르게 먹이시고 일곱 광주리의 부스러기를 거두신 적이 있다.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 기적의 내용이다.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다.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에는 별의 별 기적 사건으로 가득 차 있다. 예수님의 생애도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시는 기적을 행하셨다. 심지어는 죽은 자도 살리셨다. 어떤 때는 갈릴리의 파도 위를 걷기도 하셨다. 이처럼 성경에는 각종 기적의 내용들로 가득하다. 

요즘 새벽마다 묵상하는 여호수아의 내용도 기적의 연속이다. 모세 때에 홍해를 육지처럼 건넜듯이 여호수아 때에 요단강의 바닥을 마른 땅 되게 하신 하나님의 기적 가운데 요단강을 건널 수 있었다. 여리고 성이 함락된 것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기적의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칼과 창으로 하지 않고 엿새 동안 매일 여리고 성을 한 바퀴씩 돌았다.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았다. 일곱 제사장들이 일곱 양각 나팔을 불었다. 그 뒤에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뒤 따라 걸었다. 앞뒤로 무장한 군사들이 함께 걸었다. 엿새 동안은 일곱 명의 제사장들이 일곱 개의 양각 나팔만 불며 걸었고 백성들은 침묵하며 걸었다. 마지막 일곱째 날에 여호수아가 ‘외치라’하고 명령하자 모든 백성들은 다 같이 큰 소리로 함성을 지르며 일곱 바퀴를 돌았다. 여리고 성은 그 날 그렇게 무너졌다. 여리고 성이 어떻게 무너졌는가. 하나님의 방법대로 그 명령에 순종하였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본문의 기적 내용도 그러하지 않나. 사환 게하시는 보리 떡 이십 개와 한 자루의 채소를 갖고 어떻게 백 명을 먹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의심하였다. 그 때에 선지자 엘리사는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하고 말하였다. 그 말을 전해들은 사환 게하시는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떡 이십 개를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저들 백 명이 골고루 먹고 오히려 남는 기적이 일어났다. 여호와의 말씀은 모든 것의 대답이며 언제가 기적을 이루신다.


첫 열매를 드린 한 사람.
바알 살리사에 사는 한 사람은 그 해에 농사하여 얻은 햇보리로 떡 이십 개를 만들고 농사한 채소 한 자루를 갖고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 왔다. 민수기 18장에 보면 제사장들의 먹을 몫으로 ‘거제물’과 ‘요제물’을 말씀하셨다. 거제물이란 제물을 높이 치 든다는 뜻이다. ‘요제물’은 흔들어 드린다는 뜻이다. 곡물이든 양과 염소와 송아지이든 소제나 속죄제나 속건제물을 드릴 때에 거제물이나 요제물은 제사장들의 몫으로 구별하여 먹도록 하셨다. 성경에는 다섯 가지 제사가 나온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가 그것이다. 

번제(燔祭)는 제물을 온전히 태워서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고 예배자의 죄를 완전히 소멸하는 제사이다(레1:9,13). 번제를 드리는 사람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하여 자신의 죄를 전가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에 의해 성취되었다.(요1:29) 

소제(素祭)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감사의 표시로 드리는 제사로서 유일하게 피 없이 드리는 곡식 제사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여 하나님께 드리셨음을 예표한다.(요17:4) 또한 성도들의 순수한 충성을 나타낸다.(빌2:17)

화목제(和睦祭))는 하나님과 예배자간의 화목과 친교를 위해 드리는 제사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여 하나님과 성도가 화평을 이루고(롬5:1), 성도간의 화목과 친교를 도모하는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속죄제(贖罪祭)는 부지중에 범한 죄를 사함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로서 제사 드리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희생 제물이 달랐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속죄를 위해 피흘리심으로 성취되었다.(마20:28; 요19:34) 

속건제(贖愆祭)는 하나님의 성물이나 타인의 물건에 해를 끼친 죄를 사함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다. 범죄한 대상에 따라 흠 없는 수양이 희생 제물로 드려졌다. 죄를 범한 것의 1/5에 해당하는 배상을 함께 제사 드려야 했다. 이는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의미한다(사53:4-6, 벧전2:21-24)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은 자기 몫의 땅이 없고 아무 기업도 분깃도 없기 때문에 일반 다른 지파의 백성들이 자기 몫의 땅에서 농사한 것과 키운 짐승들 중에서 제사장들의 몫을 구별하게 쓰고 먹도록 구별하였다. 민수기 18장 12절 이하에 보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제일 좋은 곡식을 제사장들에게 가져다주어서 제사장들이 그것을 먹고 하나님의 일을 섬기도록 명하셨다. 요제로 흔들어 드린 짐승의 가슴이나 오른 쪽 넓적다리는 제사장들의 몫으로 구별하여 먹게 하라고 하였다. 

태어난 아들들 중에서 첫 아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대속하는 속죄제를 통해서 대속하라고 하셨다. 첫 아들을 대속하는 방법은 은 다섯 세겔을 드려서 대속하게 하셨다. 노동자 하루의 품삯이 한 세겔이니까 다섯 세겔이면 20일의 품삯이다. 
소나 양이나 염소의 첫 것은 잡아서 피를 제단에 뿌리고 기름을 불살라서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화제로 드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고기는 가슴과 오른 쪽 넓적다리를 흔들어 요제로 제사 드리고 그것을 제사장들에게 주어 먹게 하라고 하셨다. 이처럼 요제와 거제물의 고기들은 아론과 그 후손들인 제사장들이 영구히 자신들의 몫으로 받아먹는 음식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아론과 그의 후손 제사장들이 받게 될 “영원한 소금 언약”이라고 하셨다. 

그와 같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바알 살리사의 어느 한 사람이 첫 열매인 햇보리를 구워 만든 떡 이십 개와 새로 재배한 채소 한 자루를 엘리사 선지자에게 가지고 온 것이다. 당시에 북 왕국에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북 왕국이 시작되던 첫 임금인 여로보암이 레위 지파 제사장들을 핍박하였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남 유다의 르호보암 왕 앞으로 다 이동하였다. 여로보암은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제사장들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그러자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은 모두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였다. 여로보암은 북 왕국 이스라엘을 우상의 소굴로 만들었다. 처처에 산당을 지었다. 숫 염소를 우상으로 섬기게 하였다. 자기가 나서서 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 역대하 11장 13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이다. 북 왕국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제대로 잘 믿던 이들은 모두가 제사장들을 따라서 남 왕국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였다. 남 왕국 유다의 초대 임금인 르호보암은 솔로몬의 아들이 아닌가. 그는 첫 통치 삼년간은 모여든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강성한 하나님 중심의 왕국을 세워 나갔다. 그러나 해가 지날수록 그도 변하고 말았다. 르호보암의 첫 부인은 르호보암의 할아버지 다윗의 여덟 형제들 중에서 가장 큰 형인 장남이다. 그 엘리압의 외손녀가 마할랏이다.(대하11:16) 르호보암 왕은 나중에 압살롬의 딸과 새 장가를 들었다. 그 후로 르호보암은 여덟명의 아내와 예순 명의 첩을 두었다. 아들 28명을 낳았고 딸 60명을 낳았다. 르호보암 왕은 68명의 처첩들 중에서 압살롬의 딸인 마아가를 모든 처첩들보다 가장 사랑하였다. 르호보암은 17년 동안 왕으로 있었는데 나중에 28명의 왕자들 중에서 마아가를 통해서 낳은 아비야 왕자를 다음 대의 왕으로 세웠다. 르호보암은 자신에게 왕의 권력이 있는 동안에 그 외의 27명의 왕자들을 유다 나라의 여러 곳에 흩어서 제 각각 견고한 성읍에서 왕자의 권력을 누리며 살아가게 해 주었다. 문제는 나중이었다. 르호보암은 자신의 남 유다가 견고해지고 세력이 강성해지자 점점 여호와의 율법을 떠났다. 르호보암은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여호와께 범죄하는 왕으로 타락하고 변질되어 가고 말았다. 

그런 시대에 북 왕국에는 제사장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임금들마다 바알을 숭배하고 앗세라를 숭배하는데 앞장섰다. 엘리야 선지자 때의 북 왕국의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는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숭배하던 대표적인 왕이었다. 엘리야의 대를 이어 북 왕국에서 선지자 활동을 하던 엘리사에게 어느 날 한 사람이 햇보리 농사를 하여 보리 떡 이십개와 채소 한 자루를 갖고 방문하였다. 이는 온 나라가 바알 숭배에 빠진 것 같지만 여전히 여호와의 말씀 신앙을 지켜 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처처에 남아 있었음을 보여 주는 장면이 아닌가. 

오늘 날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이 여러 성도들이 생활 중에 벌어 드린 소득에서 첫 열매를 드리고 십일조를 드리고 절기 예물을 드리고 감사 예물을 드리는 것 중에서 그 일부를 받아서 생활하며 각 부서마다에서 교회를 섬기고 주를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지 않는가. 이런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하고 시원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예배드릴 수 있는 것도 성도 여러분의 끊임이 없는 헌신 때문이 아닌가. 첫 열매를 드리고, 십일조를 드리고, 절기 헌금을 드리고, 감사 예물을 드리고, 목적 헌금을 드리고, 주일 헌금을 드리고, 특별 헌금을 끝없이 드리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그 예물로 인하여 힘을 얻어 이와 같은 일을 이룩하고 주를 섬기고 나라 안팎에 선교하고 구제하고 선한 사업에 앞장 서는 것이 아닌가. 



나누고 돌보며 살던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엘리사는 바알 살리사에서 한 사람이 가지고 온 햇보리 떡 20덩이와 채소 한 자루 중에서 자기가 먼저 그 것의 일부를 먹고 배부르게 하지 않고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38절에 보면, 길갈에 흉년이 들었다. 흉년이 무엇인가. 한 해 농사가 잘 안되며 그 후유증이 하루 이틀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다시 농사를 지었고 햇보리 농사를 거두어서 햇보리 떡을 만든 한 사람이 그것을 선지자 엘리사에게 가져온 것이다. 선지자 엘리사는 늘 넉넉하지 못하게 먹고 사는 이웃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게 하였다. 43절에 백 명이란 표현을 보면 아마도 그들은 선지자 제자들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문제는 그 보리떡 이십 개로는 백 명이 먹기에는 너무나 부족하였다. 그래서 사환 게하시가 말한 것이다. 42절에 보면 엘리사를 선지자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엘리사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는 갈멜 산에 있어도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 어디에를 가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수넴에 사는 연세 많은 부부의 집에서 마련한 담장 위의 작은 방에 거할 때에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이루시는 기적을 보며 살아 왔다. 열왕기하 4장에 나오는 다섯 가지의 기적의 현장에 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늘 그 곳에 있었다. 엘리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사람다운 삶을 살았다. 

그날도 그랬다. 사환 게하시는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하고 말하며 곤혹스러워 하였다. 그런데 선지자 엘리사의 대답은 달랐다. 하나님이 먹고도 남게 하시겠다고 이미 말씀하셨다고 대답해 주었다. 이는 무슨 말인가.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 엘리사는 언제나 매사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리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며 살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내용이 아닌가. 그렇다. 창세기로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이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살아가던 하나님의 사람들의 일화로 가득하다. 

예레미야를 찾아보자. 예레미야 1장 2절,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라고 했다. 그리고 1장 전체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말씀이 반복된다.

그렇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사는 것이다. 사람이 제 생각을 말하고, 제 사상을 말하고, 제 견해를 말하고, 제 입장을 말하고, 제 주장을 말하고, 제 지식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임무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누구나 나를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여야 한다.

왜 선지자 엘리사는 햇보리 떡 이십 덩이와 채소 한 자루를 받아 들고 게하시와 자기가 먹으려 하지 않고 무리를 생각하였을까. 이는 언제나 엘리사의 마음에는 배고픈 선지자 제자들, 넉넉하게 먹으며 지내지 못하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그의 생각에 꽉 차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한 단면이 아니겠는가. 

며칠 전에 어느 목사님의 30대의 젊은 아들 선교사가 인도의 빈민가에서 선교하며 겪고 있는 일상을 영성일기 형식으로 쓴 선교 편지를 받아 보았다. 그는 빈민가의 어린이들을 불러 모아 놓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찬양도 가르치고 율동도 가르치면서 날마다 수고 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 지역의 족장의 허락을 받고 족장이 묵인해 주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족장의 조카인 청년이 다른 청년들을 몰고 와서 프로젝터 스크린을 엎어 버리고 빔 프로젝터를 내동댕이치며 방해를 놓았다. 족장에게 허락 받은 일인데 왜 그러느냐고 하자 선교를 방해하고 훼방하던 그 청년은 엎드려서 발을 만지려 하면서 간청하며 제발 자기들의 지역을 떠나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다시 사나운 폭도로 변해서 지금은 발을 만지며 말하지만 자기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다음에는 너희들의 이 발을 잘라 버릴 것이라고 엄포를 놓으면서 선교를 방해 하였다는 것이다. 그 선교사는 그 지역에 이미 한국의 의료 선교 팀도 초청하여 두 차례나 의료 선교도 정성스럽게 진행한 상태였다. 어린이 선교를 할 때마다 수많은 어린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방해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영적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떠하였나.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나. 10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얼마나 우상 숭배가 심했나. 그런 우리나라에 가난하고 못 배우고 배고픈 무리들을 먼저 생각한 선교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찾아 왔나. 교회, 서양식 학교, 병원, 고아원, 유치원이 어떻게 시작되었나. 배재학당, 연세학당, 경신학당, 이화 학당, 광혜원, 세브란스 병원 다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이 땅에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독일, 호주 등지에서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과 의사, 간호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하고 교육과 의료 선교, 간호 사역, 양육 사역에 얼마나 앞장서고 헌신 했는가. 배고픈 무리를 먼저 생각한 제이, 제 삼의 엘리사의 사역이 이 땅에 오늘 날과 같은 그런 기적을 이룩한 것이 아닌가. 

欲爲大者 當爲人役
(욕위대자 당위인역)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
Whoever would be great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이것은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서 1885년에 시작된 배재학당의 교훈이다. 오늘 날 교회의 존립 목적, 성도의 삶의 목적도 이러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힘을 모아서 떡 이십 개와 채소 한 자루로 백 명의 배고픈 무리를 먹이고 남는 기적을 행했던 엘리사 때의 하나님의 기적처럼 끊임없는 기적을 보며 살아가는 섬김의 공동체, 나눔의 공동체, 베풀고 돌보고  찾아가 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기적. 
본문 43절과 44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란 표현이 반복된다.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이루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노아 홍수의 노아 여덟 명 가족이 구원 받은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사건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믿고 방주에 들어간 노아와 그의 여덟 가족은 구원을 받았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통하여 아들 이삭을 낳은 일도 그렇다. “내년 이맘 때에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아브라함으로부터 송아지 고기를 대접 받은 천사들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했고 일 년 후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렇다. 하나님 여호와는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전능하신 여호와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먼저 말씀하셨고 바로 왕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에 성공하도록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는 기적을 행하셨다. 말씀하시고 이룩하시고 말씀하시고 성취하시고 말씀하시고 증거로 보여 주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개인, 가정, 가족, 교회, 사회생활의 모든 면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이와 같은 다양한 기적을 보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믿고 섬기고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목자가 되어 주신다. “푸른 풀밭에 눕게 해 주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게 해 주신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해 주신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신다, 기름을 머리에 발라 주신다, 내 잔이 넘치게 해 주신다"

이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목자다운 사랑과 은총은 어쩌다 임하는 은혜가 아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는 고백이 입에서 절로 나오게 하시는 분이 우리의 사랑의 목자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삼년 전의 베드로는 갈릴리에서 대를 이어 어부로 생활하던 가정의 젊은 가장이었다. 그런 그를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로 부르셨다. 삼년 동안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엄청난 천국 비유의 말씀들을 듣고 배웠다. 수많은 기사와 이적들도 보았다. 심지어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도 보았다. 회당장 야이로의 열두 살된 외동딸을 살려 내실 때에도 베드로는 거기에 있었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 내실 때에도 현장에 있었다. 베다니의 나사로를 죽은 자 나흘 만에 무덤 앞에서 불러 내셔서 살려 주실 때에도 거기에 있었다. 그렇게 별의 별 기적을 보았던 베드로지만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에 그를 알아 본 여자 아이 앞에서 자기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가 버렸다.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밖에 뛰쳐나가 통곡하며 울며 회개하는 것 같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끌려가서 사형 언도를 받고 십자가를 메고 가시며 쓰러지실 때에 그 현장에 없었다. 예수님의 옷은 벗겨졌고 로마의 병정들이 시시덕거리며 예수를 조롱하며 비웃고 침 뱉고 따귀를 때리고 주먹으로 얼굴을 치며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는 동안 베드로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숨고 나타나지 않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베드로의 흔적은 더 이상 예수님의 곁에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롭고 고독하게 홀로 십자가를 지시고 그 십자가에 못 박혀 달려 돌아 가셨다. 

멕스 루케이도(Max Lucado)의 책, <짐을 버리고 길을 묻다>(Traveling Light)에 도 읽어보면 그도 이런 묵상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미국 텍사스 센 안토니오에 있는 오크 힐스 교회(Oak Hills Church)의 담임 목사이다.

예수님은 누구의 도움이 없이도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이룩하실 수 있는 분이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그를 버리고 떠났다.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날 밤에 일일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한 식탁에 둘러 앉아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고 마시게 하시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예언해 주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렸다. 심지어 제자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버렸다. 예수님은 철저히 홀로 남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셨다. 예수님은 죽으셨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묘실에 장례되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아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다시 살려 내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숨어 있던 제자들 곁으로 찾아 가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의 손과 옆구리의 못 자국과 창자국을 보여 주셨다.
숨어 두려워하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으라.
서로의 죄를 용서하라.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도 식탁을 준비하게 하여 제자들과 함께 잡수셨다.
예수님은 부활 하신 후에도 갈릴리 해변에 찾아 가셔서 밤새 물고기를 잡으려 했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위해서 해변 가에 숯불을 피우시고 떡과 물고기를 구워 먹게 해 주셨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명하셔서 153마리의 큰 물고기를 잡도록 기적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여호와의 말씀의 성취자이셨다. 여호와의 말씀은 그의 말씀을 믿는 이들을 통해서 끊임없는 기적의 열매를 보게 해 주신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엘리사의 하나님이시며 엘리사의 하나님은 오늘 날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시다.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믿음의 기적을 보는 나날이 되기를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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