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 하듯 하라(골3:18-4:1) 2017. 7. 9
1930년대에 미국 하버드 대학교 연구소에서 그 학교 출신 300여명의 졸업 후의 삶을 60년간 추적한 연구 결과가 있다. “누가 행복하게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대통령, 상하의원, 기업가, 재벌, 예술가 등 각 분야의 별의 별 인물들이 다 나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실직자로 지내기도 했다. 어떤 이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말았다. 어떤 이는 세상살이를 일찍 접어 버린 이도 있었다. 60년 연구의 통계로는 가정이 행복한 사람과 인간관계가 원만한 사람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야, 누군 행복하겠다. 야, 누군 좋겠다. 야, 아무개가 부럽다. 야, 누군 팔자도 좋다.”그렇게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보라. 학력, 학벌, 권력, 인기, 재물, 성공, 출세, 지위, 명예, 외모 뭐 이런 것들을 기준으로 해서 누군가를 부러워하거나 상대적으로 남을 대단하게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닌 것처럼 행복은 권력순도 아니고 소유에 비례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돈이면 다 된다면 우리나라의 최고 기업의 총수가 몇 년째 병원에 갇혀서 지내겠나. 돈이면 다 된다면 우리나라 최고 기업의 부회장이 구속된 채로 수갑 차고 지내겠나. 권력이란 것도 그렇다. 권력이 있을 때에 권력이지 그 권좌에서 물러나고 나면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것이 권력이지 않나.
늘 말하지만 헬라의 알렉산더는 33살에 열병으로 고생하다 결국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마릴린 먼로는 36살에 죽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활동하던 중국계의 무술인이며 인기 많던 영화배우 이소룡은 33살에 죽었다. 생노병사와 희로애락이 자기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44대 대통령이었던 잔 F. 케네디(John F. Kennedy,1917-1963)도 46살에 피격되어 숨졌다. 여러 해 전에 우리나라 최고 기업의 막내딸이 27살에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생을 끝냈다. 그 당시 그녀 몫의 재산은 1800억이었다. 부모가 없나, 유산이 없나, 공부를 못했나, 인물이 빠지나... 뭐 때문에 그런 극단적인 결정을 하는 걸까.
우리는 남의 생을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남 이야기 할 것 없이 자기 자신을 들여 다 보라.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의 서두에서 교회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인 우리의 믿음 생활은 어떠하여야 하는가. 성도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어떤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는가를 교훈하였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아내와 남편, 남편과 아내, 자녀와 부모, 부모와 자녀, 종과 상전, 상전과 종들의 관계에 대하여 자세하게 교훈하고 있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 23절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하였다. 24절에서는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는 말씀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성도답게 가족과 세상 사람들을 대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다.
어떤가. 세상에는 빈부귀천의 차이가 있나 없나.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쉽게 함께 어울릴 수 있나. 권력을 가진 이들과 평민들이 쉽게 한 자리에 둘러앉을 수 있나. 많이 배운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차별 없이 쉽게 서로 어울릴 수 있나. 비싼 옷을 화려하게 잘 차려 입은 사람과 거지처럼 남루한 행색을 한 노숙자가 한 자리에서 격을 같이 하며 한 식탁에 둘러앉기가 쉬운가.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세상은 과거나 오늘 날이나 차별과 격식과 높은 담과 건너기 쉽지 않은 큰 강이 저편과 이편을 갈라서게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나. 택하심, 거룩하게 하심, 사랑하심을 입은 자들은 다르다는 것이다. 이 땅에는“긍휼, 자비, 겸손, 온유, 인내, 용서, 사랑, 평강, 감사, 그리스도의 말씀의 지혜, 찬양”가운데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강조이다. 그리고 바울은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교훈하고 있다.
가족들 간에 부부, 보모자녀에 대하여 말씀하였다. 세상살이 중에 종과 상전의 대인관계에 대하여 권면하였다. 이 모든 인간관계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하였다. 그래야 주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고 가치 있고 보람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 어떤 인간관계이든 주께 하듯 하라는 것이다.
부부 사이에 주께 하듯 하라.
우리 가운데는 평생 혼자 살거나 혹은 사별이든 그 어떤 사연으로든 홀로 된 이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여하튼 성경이 아내와 남편, 남편과 아내에 대하여 말하는 교훈을 대해 보자. 아내가 남편을 대할 때에 복종함으로 대하라고 하였다. 여성들 특히 아내들 중에는 “남녀평등인데 여성 상위 시대인데 왜 성경은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교훈하나 하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강조하는 ‘복종’이란 억지로 하는 복종이 아니라 자발적인 복종을 의미한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훨씬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5:22-24)
여기 에베소서 5장 22절에 보면 아내가 남편을 대할 때에 “주께 하듯 하라.”고 하였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듯이 아내는 남편을 그런 마음가짐으로 대하여야 한다는 교훈이다. 이는 굴종이나 억압에 의하여 마지못해 하는 그 무엇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아내는 매사에 남편에 대하여 주께 하듯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결국은 그것이 아내로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편을 왕같이 대하면 자신은 왕비가 되고 남편은 거지같이 대하면 거지 부인이 되고 마는 게 아닌가.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는 말씀은 아내가 남편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주 안에서 적절한 일이라는 뜻이다. ‘주 안에서’라는 강조가 중요한 강조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런 편지를 쓸 그 당시의 여성 즉 아내의 신분은 남편의 종속물과 같았다. 그런 당시에 남편을 대할 때에 주께 하듯 하라는 교훈은 가히 신선하고 새로운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예수님 당시에는 여성들이나 어린 아이들은 숫자를 셀 때에 조차 포함되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나라는 조선 시대 말기까지만 해도 여성들에게 변변한 이름이 없이 그냥 “무슨 무슨 댁” 혹은 “누구 엄마, 아무개 엄마” 이런 식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지 않나. 상반제가 있어서 사람의 신분을 구분하였다. 여성들 중에대 사대부 집안의 부인들이야 그렇지 않았지만 평민들 가정의 여성들이나 아내들은 자기 이름 조차 변변히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차라리 고려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고려 시대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가졌다. 여성도 외출할 때는 말을 타고 다녔을 만큼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았다. 고려 시대에는 결혼 후 남자가 처가살이를 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여성들의 재혼도 자유로웠다. 재산은 아들딸 구별 없이 균등하게 상속받았다. 족보에 이름을 올릴 때도 출생 순으로 하여 아들딸을 차별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 초기만 해도 여성의 지위가 고려 시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시, 그림, 글씨 등에 능했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이 결혼한 후에도 친정에서 지냈다. 신사임당의 친정아버지가 신사임당에게 가계를 물려주고 싶어 해서 신사임당은 결혼한 후에도 한동안 그렇게 하였다. 율곡 이이(李珥)도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났다. 19살에 결혼한 신사임당은 거의 늘 친정에서 살다가 38살 때에 시집 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강릉에서 서울로 이사 왔다.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과 청진동에서 살았다. 47살 때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그 해 여름에 남편이 수운판관(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부임했는데 신사임당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때 신사임당의 나이는 47살이었다.
조선 시대는 17세기 이후에 유교적 사회 윤리를 더욱 강조하게 되면서 여성의 지위도 크게 달라지고 말았다. 여성은 바깥에 나가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도 없었고 공부할 기회도 남성들과 같이 주어지질 않았다. 결혼한 후에는 시댁에 들어가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아야 했다. 남편이 죽으면 3년 동안 재혼이 금지되었다. 재혼한 여성의 아들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 여성은 제사에 참석할 수 없었고, 재산 상속에서도 제외 되었다. 그런 시대가 조선 시대 말까지 이어졌다.
2천 년 전의 유대 여성들은 남성들의 소유물과 같았다. 이혼 증서 하나 써서 손에 들려주면 집 밖으로 쫓겨나야 하던 시절이었다. 아내가 남의 남자와 이야기만 해도 이혼 당했다. 남편 허락 없이 어딜 갔다 오기만 해도 이혼 당했다. 음식 잘 못 만든다고 이혼 당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뒷모습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아내를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 당시에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하녀 취급을 받던 때였다. 그런 당시에 남편과 아내, 아내와 남편이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서 부부 관계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교훈하는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는 말씀은 아내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고 소망이 되고 격려가 되고 약속이 되는 말씀인지 모른다. 아내들이 주 안에서 남편을 대하고 주 안에서 남편에게 복종하며 살아 갈 수 있는 신앙적인 관계,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되 억지로 마지못해서 불만에 가득 찬 상태에서 복종하라는 강요가 아니다. 아내로서 당당하고 떳떳하게 주 안에서 주님을 대하듯이 섬기는 마음가짐으로 복종하라는 권면이다.
남편들에게는 아내를 사랑하되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답시고 아내를 괴롭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못된단 말이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적극적인 권면이다. 그러나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은 소극적인 경계이다. 아내를 사랑하되 아내가 행복해 하고 아내가 좋아하고 아내가 기뻐하고 아내가 즐거워하고 아내가 만족해하는 면에서 사랑하라는 말이다.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은 아내를 짜증나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
미국 네브라스카 주립대학교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이란 어떤 가정인가를 발표한 바 있다.
첫째,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감사하는 말을 하는 가정
둘째, 서로 섬기고 헌신하는 가정
셋째, 가족 간에 만남과 대화가 풍성한 가정
넷째, 정신적으로 낙천적이고 건강한 가정
다섯째, 가족이 다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라고 했다.
평범한 이야기 같지만 세상에는 이런 평범한 행복을 지켜 가지 못하는 불행한 부부, 불행한 부모자녀, 불행한 가정들이 의외로 많다.
오래도록 만나지 못하는 친척이나 가족보다 늘 만나는 이웃이 정이 드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생활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성도들 간에 함께 예배드리고, 음식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이야기 나누고, 기도 제목 나누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칭찬하고 서로 위해주고 서로 관심을 갖고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살아가는 교회 생활 안에서 가족과 같고 가정과 같은 행복이 만들어져 간다.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본문보다도 에베소서에 훨씬 자세한 말씀이 나온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5:25-28)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나. 예수께서 자기의 몸을 교회를 위하여 내어 주신 사랑처럼 사랑하라고 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되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다. 그러므로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는 남편은 자기 자신조차도 사랑할 줄 모르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사랑’이란 표현은 에로스나 필레오의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의 사랑이다. 예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이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라는 강조이다.
우리 중에는 아내가 앞서 이 세상을 떠났거나 혹은 남편이 먼저 이 세상을 떠난 가정들도 적지 않다. 그 어떤 형편, 그 어떤 처지에 있든지 서로 서로 주 안에서 복종하며 사랑하며 주께 하듯 하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부모 자녀 사이에 주께 하듯 하라.
그러면 자녀와 부모,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어떠하여야 할까.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자녀로서 부모에게 순종하되 주 안에서 부모의 기쁨이 되는 아들딸, 부모로서 자녀를 사랑하되 자녀들을 노엽게 하거나 낙심되게 하지 않는 부모가 되어야 한단 말이다.
그렇지 않나. 자녀로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기서 말씀하는 순종은 절대적이고 지속적인 순종을 의미한다. 왜 그래야 하나. 아들딸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결국은 장차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주를 믿는 자녀들이라면 주님의 기쁨이 될 뿐만 아니라 부모에게도 기쁨이 되어야 한다.
부모로서 자녀들을 양육할 때에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이 무엇인가. 자녀들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 아들딸을 어느 나이 때에든지 인격적으로 대하란 말이다. 자녀들은 부모의 종속물이 아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의 주인공들로 자라나도록 부모에게 맡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양육하고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아들딸답게 부모가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이며 기쁨으로 돌보고 양육하여야만 한다. 이 세상을 보라. 문제 어린이와 문제 청소년의 배후에는 반드시 문제투성이의 엄마 아빠가 있다. 엄마가 문제고 아빠가 문제투성이다. 애들이 문제가 아니다. 애들을 부모의 어떤 기대를 만족시켜가는 대리 만족의 종속물로 삼아서는 결코 안 된다. 아들딸을 주님 안에서 그들만의 은사와 재주와 실력과 믿음을 갖고 자라나도록 세심하게 돌보고 뒷바라지 할 수 있어야 한다.
애들이 뭘 전공하느냐, 어느 대학 가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행복한 인격으로 자라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래야 이 험한 무한 경쟁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고 꾸준히 평생토록 자기 분야에서 자기 믿음을 지켜 나가며 사회와 교회와 세상에 유익을 주는 존재로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자녀들이 대를 이어 믿음의 가정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엄마 아빠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만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도 성공적인 자녀교육을 하는 것이다. 자녀들이 열 받게 하지 말고 자녀들이 뚜껑 열리게 하지 말고 자녀들이 노엽게 키우지 말란 말이다. 자녀들이 순간순간 가출 충동을 느끼도록 그런 공포 분위기의 가정을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그리고 반면에 자녀들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 낼 줄 알아야만 할 것이다.
종과 상전 사이에 주께 하듯 하라.
종은 과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 날에도 주종 관계는 여전하다.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에 관계에는 예전이나 오늘 날이나 제도적으로 혹은 정서적으로 복잡한 내용들이 얽혀 있다. 더군다나 2천 년 전의 종의 상태란 설명으로 부족할 정도이다. 로마 시대 인구의 삼분의 일이 노예였다. 그런 당시에 바울은 노예 해방에 대하여 말한 것이 아니라 노예와 주인, 종과 상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종들은 주인에게 순종하라. 주인을 성실한 마음으로 대하라. 주인에게 마음을 다하여 하라. 눈가림으로 하지 말라고 했다. 주께 하듯 하라고 힘주어 말했다.
상전은 종들에게 의와 공평으로 대하라는 내용만 보아도 바울이 강조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신분으로는 종이요 노예이지만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말이 아닌가. 사람답게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말이다. 종들을 위협하지 말라고 했다.
바울은 골로새서와 함께 특별히 에베소서에서 자세하게 강조하고 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엡6:5-9)
골로새서 본문은 종과 상전에 대하여 무어라고 말씀하고 있나.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順從)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誠實)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賞)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상전들아 의(義)와 공평(公平)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골3:22-4:1)
예수께서는 세리나 창기를 평등하게 대하셨다. 그 당시에 미움 받던 세리나 사람 취급 받지 못하던 창기들에 대하여도 예수는 마음 문을 활짝 여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각색 병든 이들과 귀신 들려 정상인의 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들을 일일이 고쳐 주셨다.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리신 적도 있었다.
예수님 당시나 바울 당시와 그리고 오늘 날에나 여전한 현상이 무엇인가. 누구나 다 상전이 되고 누구나 다 경영주가 되고 누구나 다 기업주가 되고 누구나 다 대 재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에 종과 상전의 관계가 있었듯이 오늘 날에도 주종 관계는 있다. 요즘도 갑질하는 기업가나 경영주들을 보라. 혹은 여직원을 함부로 대하다가 망신당하는 악덕주들을 보라.
그러므로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종이냐 상전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노예의 문제는 근대사에까지 이어진 문제이다. 미국 같은 나라도 제도적으로야 노예제도를 해방하였다고 하지만 지금도 흑백문제와 소소인종이 차별 받고 무시 받는 경우는 그냥 통계 수치로는 다 느낄 수 없는 절절한 아픔과 슬픔과 회한을 안고 있는 문제이다.
어떻게 대하라고 했나.
순종하라.
성실함으로 하라.
무슨 일이든지 마음을 다하여 하라.
상 받을 자 답게 하라.
의와 공평으로 하라.
부산의 고신대학교, 천안의 고신대학교 분교인 대학원의 정문에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라는 교훈이 돌비에 새겨져 있다. 이런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이 모든 강조의 바탕은 무엇인가. 종이든 상전이든 상대방에게 진실한 마음가짐과 태도로 인격적으로 서로를 대하라는 말씀이다.
눈가림으로만 하지 말라.
매사에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볼 때만 잘하는 척하고 안 볼 때는 대강 하는 그런 태도로 하지 말라.
불의를 행하면 불의에 대한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니 삼가서 하라고 했다.
심지어는 상전들에게는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신을 알지어다.”라고 교훈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에 계신 상전’이란 하나님 아버지를 말씀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이 세상의 지위와 권력과 힘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종이나 상전이 따로 없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철장으로 질그릇을 부수시듯 심판하신다고 했다.(시2:9)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2:11)라고 했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2:4)라는 말씀도 먼저 하셨다. 시편 2편의 마지막 부분의 말씀은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이다. 그렇다. 종이냐 상전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서로를 대할 때에 “누가 갑이냐 누가 을이냐”로 대하지 말고 서로를 독립된 인격으로 대하고 존중하라는 강조이다.
그러므로 종과 상전, 상전과 종의 관계를 잇는 그 중심에 주님이 계셔야 한다.
골로새서는,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께 하듯 하라.
기업의 상을 주께로부터 받을 자 답게 하라.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 답게 하라고 했다.
그렇지 않나. 이는 마치도 예수께서 말씀하신 달란트의 비유와 같다. 주인이 와서 계산하자 할 때가 찾아온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 23) 이 칭찬은 다섯, 두 달란트 받았던 두 종이 골고루 받은 칭찬이다. 무슨 말인가. 주님의 칭찬은 상대적인 것 같지만 아니다. 절대적이다. 내가 주님 앞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주어지는 결과이며 열매이며 상급이다.
종이냐 상전이냐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내 할 탓이다. 프랑스 루이 14세 때에 재무장관을 지낸 이가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 1619-1683)이다. 그는 소년 시절에 포목점에서 직원으로 일했다. 어느 날 큰 은행가가 호텔에 묵으면서 적지 않은 양의 옷감을 사 갔다. 호텔에 옷감을 배달하였다. 그런데 값을 잘 못 계산해 받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인은 부자의 돈이니 그냥 챙기자고 했다. 그러나 종업원이었던 콜베르는 주인의 그런 태도가 못마땅하였다. 기어코 콜베르는 주인을 설득해서 남은 돈을 호텔에 갖다가 전달하였다. 포목점 주인은 주인 말을 듣지 않는다고 콜베르에게 화를 내면서 그를 해고하였다. 결국 콜베르는 일자리를 잃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나중에 그 은행가가 알게 되었다. 그 은행업자는 콜베르를 은행에서 일하게 해 주었다. 그 콜베르가 커서 프랑스의 유명한 재무장관이 되었다. 오늘 날의 프랑스로 발전하도록 상공업, 농업, 토목, 식민문제, 해군의 업무를 담당, 거의 재상과 같은 힘을 발휘하였다. 특히 경제개혁에 주력,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여 프랑스의 국부를 증대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매사를 사람에게 하듯 하지 않고 주께 하듯 하면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날이 찾아온다. 진실하게 정직하게 성실하게 마음을 담아서 의롭게 공평하게 하다 보면 스스로 존귀해 지게 마련이다.
하나님은 그가 종이냐 상전이냐를 보시는 것이 아니다.
가령 애굽의 바로 왕과 감옥의 청년 요셉을 보라. 다니엘서의 주인공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보라.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유다 청년들을 바벨론으로 끌어갔다. 순식간에 포로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뜻을 정하고 늘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였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지혜와 명철을 주셨다. 다니엘 주변에 다니엘을 없애 버리려고 음모하는 세력들이 얼마나 많았나. 그러나 다니엘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믿는 청년다운 삶을 살아갔다. 하나님이 다니엘을 높이시니 낮출 자가 없었다. 다니엘은 그 나중이 점점 더 존귀해졌다.
주 안에서 부부, 부모 자녀, 종과 상전, 상전과 종으로서 신분으로 인하여 교만하거나 탄식하지 말고 주께 하듯 하며 살아가는 중에 주님의 긍휼과 은총이 임하길 축원한다.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