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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보혜사(요14:15-21) 2017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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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05-22 02:55 조회 16,712 댓글 0
 
또 다른 보혜사(요14:15-21)           2017. 5. 21 웨슬리 회심 279주년 기념주일


‘보혜사’란 ‘도우시는 영’ 즉 ‘성령’인데 “또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시니까 보혜사이면 보혜사이지 또 다른 보혜사가 무엇인가. 누구신가 하고 오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오해하면 안 된다. 예수 자신이 돕는 영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 위에 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도 보혜사이시고, 예수님도 보혜사이시고, 예수께서 보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도 돕는 영이신 보혜사이시다. 

‘보혜사’란 ‘파라클레토스’는 ‘곁에서’라는 뜻의 ‘파라’와 ‘부르다’는 뜻의 ‘칼레오’의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보혜사란 곁에서 부른다는 의미이다. ‘변호자, 대언자’라는 뜻이다. 평소에는 모르지만 무슨 일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을 때 몸값이 비싼 변호사를 만나서 사건에 전문적인 법적 자문을 구하고 도움을 청하려면 큰돈이 들고 목돈이 든다. 그러나 도우시는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께 지혜를 구하고 능력을 구하고 위로를 구하고 도우심을 구하면 넉넉한 사랑의 근원이신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역사하시기 시작하신다. 성령님은 값없이 도우시는 영이시다. 

이사야서 55장의 말씀에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사55:1-3)  

예수님이나 성령님이나 모두 성도들의 곁에서 우리를 도우시고 대언하시는 영이시다. 그러므로 보혜사이신 예수님, 보혜사이신 성령님이란 표현을 해도 무방한 것이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6-28)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이것을 위하여 기도하신다고 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라는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셔서 이 땅의 성도들에게 보혜사이신 성령을 부어 주시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이시다. 그러면 ‘또 다른 보혜사’ 라고 말씀하시는 보혜사이신 성령님에 대하여 함께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자. 


영원토록 함께 거하시는 보혜사.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또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신 성령님은 믿는 자들의 마음에 찾아 오셔서 떠나지 않으시고 머무시며 늘 함께 영원히 동거하시고 동행하시는 영이시다. 예수님의 기도 내용이 그것이다. 성도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주셔서 영원토록 성도들과 함께 있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하신 많은 말씀들 가운데서 마태복음 마지막 부분인 28장 20절에 보면,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다. 그렇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으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셨으나, 죽은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님은 영원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 어떤 세상 방법으로도 이길 수가 없다. 예수님의 생명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이시다. 이  세상의 모든 군대를 다 동원해도 예수의 생명을 죽일 수는 없다. 이 땅의 핵무기를 총 동원해도 예수의 생명을 해할 수는 없다. 이 세상 모든 왕들과 권력을 다 합해도 만왕의 왕이며 영원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을 꺾을 수는 없다. 예수님의 생명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어둠과 흑암으로도 이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명은 영원한 빛이시며 목마른 자의 목을 시원하게 해 주시는 영원한 생명수이시며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하시는 영원한 생명의 떡이시다. 

예수는 놀라우신 상담자요 전능하신 아버지요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며 평강의 왕이시다. 예수님은 그와 같은 모습으로 그분을 구주로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영원히 함께 하신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성도들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으시고 늘 함께 하신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면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늘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에서 떠나지 않고 마음에 가득하고 눈에 아른거린다. 그렇지 않나. 예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은 믿는 성도들 마음속에 찾아 오셔서 영원히 함께 거하시는 사랑의 영이시며 능력의 영이시며 도우시는 영이시다. 
성령님은 믿는 성도들을 보호시고 은혜 주시고 가르치시는 영이시다.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은 우리 곁에 늘 함께 거하시는 영이시며 우리 속에 계신 영이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외모에 많은 신경을 쓴다. 물론 외모나 얼굴의 혈 색, 눈의 맑은 정도를 비롯한 이목구비의 건강 상태, 피부의 윤기 등이 보이지 않는 오장 육부의 건강상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 각 사람의 몸 안에는 오장육부가 있다. 오장은 간(肝)·심(心)·비(脾)·폐(肺)·신(腎)을 말하고, 육부는 담(膽)·위(胃)·대장(大腸)·소장(小腸)·방광(膀胱)·삼초(三焦)를 말한다. 오장육부는 인체의 중요한 장기이지만 형태와 기능면에서 서로 구별되며 생리활동이나 병리변화의 측면에서는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장기는 생명활동의 중요한 요소인 정(精)·기(氣)·신(神)·혈(血)·혼(魂)·백(魄)의 저장소로서 생명의 근본이 된다. 육부의 기능은 주로 수곡(水穀)을 소화시키고 진액(津液)과 음식물의 영양분이 흡수되고 남은 찌꺼기인 조박(糟粕)을 받고 내보내는 기능을 한다. 이처럼 몸 안에 보이지 않는 오장육부의 기능이 건강해야 이 세상의 나그네 인생길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성도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내 안에 함께 거하시되 영원토록 함께 거하시며 내 속에 계신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의 충만하심 가운데 살아가는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고, 17절 끝에서는 “그는 너희와 함께 계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지만 보내 주신 성령님은 믿는 성도들의 마음에 찾아 오셔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는 보혜사의 영이시다. 

보혜사이신 성령님은 우리가 연약하면 연약할수록 더욱 더 함께 하신다. 가족들이 평소에 서로 건강할 때에는 각자가 자기일 하기 바빠서 생활하지만 가족들 중에 누군가가 약해지거나 병들면 그 한 가족의 질병 회복을 위해서 온 관심을 한 가족에게 쏟지 않나. 마찬가지다. 보혜사 성령님은 성령님을 환영하는 성도들 곁에서 영원히 함께 하시며 매 순간순간마다 도우시는 영이시고 힘이 되어 주시는 영이시다. 

우리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목사는 영국 교호의 목사 아들이다. 그는 11살에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웹옷에서 3-4시간 거리에 있는 런던의 차터 하우스에 유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깊었고 명석하였고 노력하였다. 17살에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21살에 인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2살에 영국 성공회의 목사가 되었다. 4대째 목사가 된 것이다. 24살에 옥스퍼드 대학교의 조교수가 되었다. 26살에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몇몇이 학교 안에서 Holy Club을 조직하였다. 늘 모이면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서로 신앙적인 토론을 하였다. 32살에 동생과 함께 미국 사바나 죠지아 주로 선교사로 떠났다. 대서양을 건너가던 배가 풍랑을 만났다. 자신은 불안하고 초조한데 풍랑이는 배 안에서 둘러 앉아 평안하게 기도하는 한 무리를 보았다. 그들은 모라비안 교도들이었다. 저들이나 자신이나 다 같이 예수님을 믿는데 왜 자신의 마음은 불안하고 초조한데 저들은 평안하게 둘러 앉아 기도할 수 있는 걸까. 그런 의심이 생겼다. 도대체 자신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기에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한 것일까 하고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실망스러운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런 그는 미국 죠지아에서 2년여 동안 선교에 매진하였으나 별 열매가 없었다. 착잡한 마음으로 영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 연말에 겨울을 지내며 늘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었다. 그러나 마음에 별 변화가 없었다. 그러던 그가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밤에 런던 시내의 올더 스케잇의 밤거리를 걷다가 수요 예배가 시작된 예배당에 들어가 예배를 드렸다. 그 자리에서 목사도 없이 어느 신도가 앞에 서서 읽어 내려가는 “마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의 내용을 귀 기울여 듣던 중에 그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일기에서 “strangely warmed"라고 썼다.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했다. 그날 일기의 전문은 이렇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9시 15분경에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을 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strangely warmed)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다고 느꼈으며 구원을 위해 다만 그리스도만 믿고 있음과 그 위에 주께서 나의 죄를, 아니 나의 죄까지도,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 주셨음을 믿는 확신이 나에게 주어졌다.” 

요한 웨슬리는 그날 밤 그곳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그 믿음은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에 대한 확신(칭의, 稱義)과 영생의 사람으로 새사람이 되게 하는 확신(중생, 重生)이었다. 이 체험은 요한 웨슬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 인류를 위해 큰일을 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 체험은 기독교 역사와 신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로 인해서 요한 웨슬리는 오늘 날의 감리교회를 일으키는 영적인 변화를 경험한 것이다. 

이 때 그의 나이는 35살이었다. 그리고 4년 후인 1742년에 브리스톨에서 조직하여 시작한 것이 우리의 속회 운동이다. 그는 88살에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까지 53년 동안 그 마음이 식지 않는 열정을 갖고 보혜사 성령님 안에서 늘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 가운데 모든 사역을 감당해 나갔다. 그는 지구 10바퀴를 돌만큼의 거리를 말을 타고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설교하였다. 그는 말을 타고 하루 평균 32킬로  미터를 이동하였다. 평생 40만 킬로미터 이상을 늘 말을 타고 다니며 선교하였다. 

그는 날마다 일기를 쓰고 늘 설교 원고를 정리하여 남기고 글을 썼다. 그가 남긴 책은 200권에 이른다. 그는 날마다 새벽 4시면 일어나서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 말씀을 준비하고는 하였다. 그는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525곡의 찬송가를 만들었다. 한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한 보혜사 성령의 임재 체험이 지난 279년 동안 이와 같은 놀라운 열매를 거두어 온 것이다.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임재와 동행하심이 우리 각 사람에게 체험되어지고 고백되고 증거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본문 17절에 “그는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다.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진리가 곧 성령이냐’ 혹은 ‘성령은 곧 진리이냐’라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5장 26-27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이 각 사람에게 찾아오시면 “성령은 성도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요16:13) 논리 가운데 빠져 들면 안 된다. 

요한 사도는 요한 1서  5장 6절에서 “성령은 진리니라”고 말씀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였다.

진리를 알아야 자유해 진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반대로 말하면 “성령을 알지니 성령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은 예수께서 육체로 계시다가 고난 죽음 부활 승천 하신 후에 약속하신 진리의 영으로 보내주신 영이시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 안에서 진리이신 성령님을 만나야 한다. 17절의 말씀대로 하면 세상은 진리이신 성령에 대하여 받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그러나 성령님은 그를 믿고 환영하고 영접하는 성도들의 믿음 안에 오셔서 성도와 함께 영원히 거하시고 성도들의 마음 속에 계신 영이시다. 

사랑이신 보혜사.
성령은 또한 사랑의 영이시다. 예수는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고 하셨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과 주를 믿는 성도들은 사랑 안에 하나이다. 이것을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20절에 이렇게 표현하셨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On that day you will realize that I am in my Father, and you are in me, and I am in you.)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예수는 사랑이시다. 사랑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그를 만나러 나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드러내 주셨다. 각색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 귀신이 물러가고 깨끗해졌다. 광야의 배 고픈 무리를 배 부르게 하셨다. 풍랑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셨다. 죽은 자를 살리셨다. 사랑이신 예수님은 모든 것의 대답이셨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예수의 힘은 사랑이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요14:15)고 하셨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 드러난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 분이 곧 예수시다.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하게 된다. 예수의 강조는 분명하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4:35)고 하셨다. 

이 세상에 사랑만큼 위대한 것은 없다. 자신, 가족, 교회, 성도, 나라, 민족, 열방, 자연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다. 예수는 사랑으로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외동딸과 죽은 지 나흘이나 되고 장례가 끝 난 나사로를 살려 주셨다. 사랑해 주면 말라 가고 시들어 가고 죽어가던 식물도 살아난다. 화분의 화초가 새 기운을 얻고 생기를 회복한다. 외면하고 몰라라 하고 버려두면 죽는다. 그러나 사랑을 기울여 주면 비실비실하던 화분의 화초들이 새 기운을 얻고 살아나기 시작한다. 

동물도 사랑해 주면 제 주인을 안다. 하물며 사람을 동물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가정에, 가족 간에 가장 많아야 하는 것이 사랑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김장환 목사의 <큐티 365>에 보면 이런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한 선교사 부부는 결혼을 한 후 인도에 정착하여 교회 뒤뜰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세 자녀를 낳아 기르며 나환자 병원과 교회 일을 해오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남편과 두 아들은 성경연구 캠프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힌두교 광신도로 보이는 폭도들이 캠프를 덮쳐 이들이 자고 있던 차에 불을 질렀고, 그들이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폭도들은 곧 쫓겨났지만 그들은 새까만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집에 머무르고 있던 선교사의 아내는 이 소식을 듣고 딸을 안으며 절망이 가득한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돌보던 나환자들과 그곳의 원주민들은 종교에 상관없이 장례식에 참가하여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인도를 떠나지 않고 남편이 생전에 몸 받쳤던 나환자를 돌보기 위해 남은 인생을 다 바치겠노라고 다짐하며 말했습니다. “매우 힘들고 혼란스러웠지만 남편을 죽인 이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편과 아이들이 천국에 있다는 생각에 감사하지요. 남편은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했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적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원수마저 용서해야 하는 사랑의 향기를 지녀야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전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은 모든 허물과 죄를 덮을 수 있습니다. 원수가 있다면 용서하며 기도하십시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재임시절 자신을 비판해온 여기자 모린 도드가 있었습니다. 그 기자는 아버지 부시 대통령 때부터 백악관 출입 기자였으며, 주로 대통령과 교황 등의 권력층에 정면 비판을 해 명성을 날린 여기자입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르윈스키 스캔들을 다룬 기사로 1999년 논설 부문의 퓰리처상을 타기도 했던 그녀는 딕 체니 부통령을 ‘총잡이’로 묘사하며 비판했고, 부시대통령까지 ‘허풍쟁이’로 불렀습니다. 그야말로 백악관에겐 골칫거리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부시 대통령의 해외 순방 때 취재 기자로 함께 갔는데 처음으로 방문한 이스라엘에서 심한 배탈이 났습니다. 백악관 측은 대통령의 주치의에게 치료를 받으라고 권유했지만 그녀가 거부했습니다. 이어서 쿠웨이트를 거쳐 바레인으로 가자 증세가 더욱 심해져 뉴욕타임즈의 정기 칼럼조차 쓸 수 없는 상황이 됐고, 그제야 그녀는 같은 호텔에 있던 주치의에게 응급치료를 받았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바레인을 떠나면서 그녀를 대통령 전용기에 타도록 했으며 착륙 때까지 극진한 치료를 받도록 배려했다고 합니다. 도드 기자는 이후 부시 대통령에 대해 “부시 대통령은 정말 멋지고 인정이 많다”라고 말하며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힘의 우위나 권력, 완벽한 논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끝없는 호의와 배려로 다가가는 사랑입니다. 짧지만 적용하기 힘든 이 한 말씀을 오늘부터 용기로 도전하십시오.”

사랑은 이론이 아니다. 사랑은 실천이다. 진심이 담긴 사랑의 손길은 기적을 일으킨다. 예수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허락하셨다. 그는 죽으셨으나 부활 승천하셨다. 그는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과 함께 그를 믿는 자들 안에 늘 함께 하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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