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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자(요2서1:1-13) 201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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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6-07-10 22:10 조회 19,436 댓글 0
 
서로 사랑하자(요2서1:1-13)         2016. 7. 10



5절의 “서로 사랑하자”라는 부탁과 분부 앞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10절 말씀에 보면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을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 하는 자임이라.”고 했다. 11절에서 말씀하는 ‘그 악한 일’이란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않고 미혹하는 자들을 언급한 것이다. 7절에서 말씀하는 ‘미혹하는 자’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7절 끝에 보면 이런 자들은 ‘적그리스도’라고 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 땅에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육신의 몸을 입고 탄생하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과는 더 이상의 교제를 끊으라는 것이다. 

요한 1, 2, 3서를 쓴 이는 요한 사도이다. 요한복음과 요한 계시록을 쓴 같은 인물이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이며 야고보의 형제이다. 그런 그가 요한 2서와 3서의 편지 서두에 자신을 ‘장로’라고 했다. “장로인 나는”이라고 하였다. 그가 자기 자신을 ‘장로’라고 표현한 ‘호 프레스뷔테로스’라는 헬라어의 뜻은 “자신이 나이가 꽤 많은 원로가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존경 받을 만한 자로서, 그 당시 초대 교회의 모든 교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이단의 거짓된 교리를 전하는데 대하여 진리를 가르칠 만한 영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자임을 스스로 드러낸 표현이다. 

그의 이 짧은 편지인 요한 2서를 받아 읽는 수신자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이라고 했다.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부녀’란 교회를 상징하고, ‘자녀들’이란 교회 안에 있는 믿는 자 즉 성도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상징적인 해석일 뿐이다. 그냥 말씀 그대로 하면 그 당시에 택함을 받아 예수를 믿던 어떤 부녀와 그의 자녀들을 의미한다고 해도 큰 무리가 없다. 

요한 사도는 그의 첫 편지인 요한 1서에서 반복해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강조하고 또 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들 가운데 거하시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1서4:19)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보이는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하는 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당연히 형제자매를 사랑하게 되어 있다. 사랑하다가 중간에 그 사랑을 접어 버리거나 포기하는 것은 진정으로 상대방을 사랑해 온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개나 고양이 등등 애완동물을 키우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반려 동물'(companion animal)이란 용어를 쓴다. 우리가 배우자를 말할 때에 ‘반려자’라고 하지 않나. 동물들에도 그 같은 표현을 쓴다. ‘반려 동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언제는 집안에 들여서 먹이고 재우고 목욕 시켜 주고 산책 시켜 주고 예방 접종도 시켜 주고 미용도 해 주고 아프고 병들면 동물 병원에 안고 다니고 하던 그 반려 동물을 아무데나 버려 버리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틀 전에 발표된 신문 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안에서 아무데나 버려지는 반려 동물의 숫자가 매달 평균 8,300마리가 넘는다고 한다. 왜 버릴까. 언제는 좋다고 집 안에 들이고, 침대 속에 들이고, 입을 맞추고, 예쁜 조끼도 마련해 입히고, 안고 품고 다니고, 귀하게 여기던 반려 동물인데 왜 아무데나 버릴까. 버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건 애완동물로 키우던 개나 고양이의 이야기이다. 그러니 개나 고양이 이야기 하지 말고 사람 이야기를 해 보자. 

사도 요한이 두 번째 편지에서 강조하는 바도 여전히 “서로 사랑하자”는 말씀이다. 5절에 보면, “내가 네게 이제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고 하였다.

자, 그러면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은혜, 긍휼, 평강과 진리 가운데서 서로 사랑하라.
사도 요한은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인사하며 편지를 시작하였다. 이 같은 인사법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 13편에서 대개는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며 편지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특별히 디모데 전 후서에서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기도한 내용을 대하게 된다. 사도 요한도 그의 두 번째 편지인 요한 2서에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강조한 편지를 썼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특별히 더 강조한 표현이 있다. 그것은 ‘진리’(眞理)라는 것이다. 

길지 않은 분량의 편지인 요한 2서의 내용을 자세히 보라. 1절에서 ‘진리를 아는 모든 자’라고 했다. 2절에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라고 했다. 3절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의 진리’를 강조하였다.  4절에서는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5절과 6절에서는 ‘계명’을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진리’가 무엇인가를 더욱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새 계명 혹은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계명, 그 계명, 처음부터 우리가 들은 계명”이라고 설명하는 그 ‘계명’이 곧 진리이다. 또한 9절과 10절에서 말씀하는 ‘교훈’또한 ‘진리’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9절에서는 그냥 교훈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교훈’이라고 하였다. 맞다. 그리스도의 교훈이 곧 진리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롬8:32)는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진리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계명이 완성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라고 했다. 그러면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란 무엇인가. 그와 같은 덕목들은 주를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한국 신학계의 원로인 유동식(1922-  )박사와의 대담 기사가 일간 신문에 전면 기사로 실렸다. 1922년생이니 올해 만 94살이다. 그는 평생 신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쳐 온 한국 신학계의 최고 원로 신학자 중의 한 분이시다. 그가 대담 기사에서 강조한 바는 바로 ‘은혜’라는 것이다. 그는 1943년에 일본 도쿄 동부 신학교에 입학했다. 세계 제 2차 대전의 막바지였는데 학도병으로 징집 되었다. 6개월간 군사훈련을 받은 뒤 배치된 곳이 일본 규슈 가고시마 해안에 있던 부대였다. 그가 맡은 역할은 해안에 구멍을 파고 숨어 있다가 미군 탱크가 오면 지뢰를 안고 탱크로 돌격하는 거였다. 그런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떨어지면서 전쟁이 끝나고 해방을 맞았다. 미군 탱크를 향하여 폭탄을 안고 뛰어 들어 자폭하는 것이 임무였는데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았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이다. 그는 대담 중에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저를 위해, 민족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주님이 구해주셨어요. 복음이라는 게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그때 복음이 뭔지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는 것,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것, 그게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은혜’(恩惠)란 무엇인가. 나를 구원해 주시는 주님의 그 사랑과 복음의 은총을 깨달아 알고 믿고 증거하며 살아가는 것이 ‘은혜’가 아닌가. 그렇다. ‘은혜’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들에게 거저 주시를 선물인 사랑이다. 성도인 우리는 그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나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고 하였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다. 샴쌍둥이를 알지 않나. 더러 분리 수술에 성공하기도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채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두 사람인데 머리 둘과 두 몸의 일부가 붙어 있는 채로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세상에는 별의 별 장애와 별의 별 질병이 다 많다. 선천적인 장애도 있고 후천적으로 장애나 상해를 입는 경우도 있다. 별의 별 불행이 다 닥쳐온다. 성도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러므로 생각하여 보라.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된 우리들이 고백하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란 하루하루 순간순간 경험하며 살아가는 간증이 아닐 수 없다. 이 험한 세상에서 그 은혜, 그 긍휼, 그 평강, 그 사랑을 깨달아 알고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믿음이란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 

‘긍휼’(矜恤)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며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3:5-7)

그렇다. 이런 긍휼과 은혜를 깨달아 알고 믿으며 누리는 성도의 삶이 곧 ‘평강’이 아닌가. 

사도 요한은 강조한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뿐만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깨달고 그 진리를 행하며 살아가는 성도들 간에 서로 사랑하는 사랑이 얼마나 귀한 사랑인가 말이다. 


미혹하는 적그리스도를 경계하며 바른 교훈 안에 거하라. 
당시나 오늘 날이나 세상에는 영적으로 미혹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예수님이 이 땅에 육체로 오셨고 육체로 사셨고 육체로 고난 당하셨고 육체로 죽으셨고 육체로 장사 지낸바 되었고 육체로 살아나신 부활과 승천을 부인하는 것이 ‘미혹(迷惑)’이다. 국어사전에 보면 ‘미혹’이란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진리를 왜곡하고 미혹하는 자들은 ‘적그리스도’이다. 7절 끝과 8절 앞에 분명히 말했다.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왜 삼가야 하나. 무엇을 삼가란 말인가. 적그리스도의 미혹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오늘 날도 얼마나 많은 이단들이 판을 치나. 그런 이단과 사이비의 미혹으로부터 분별력을 갖고 스스로 삼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도 구원 받고, 가정도 지켜지고, 가족들도 영, 혼, 육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달아 알아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1절의 말씀처럼 ‘진리를 아는 모든 자’ 중에 내가 포함 되어야 한다. 진리를 모르면 아무리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였다고 할지라도 불행한 자이다. 진리를 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 깨달아 알고 믿게 된 진리를 행하여야 한다. 사도 요한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보니 심히 기쁘도다.”라고 했다. 진리를 깨달아 알고 믿고 행하는 자는 시간 사용, 재물 사용, 은사 사용, 돈 사용, 취미와 출입이 다르다. 달라야만 한다. 아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수를 만나고, 진리를 깨닫고, 은혜와 긍휼과 평강과 주님의 날 구원하신 십자가의 그 사랑을 체험하였는데도 여전히 옛 사람의 모습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스스로 거짓말 하는 자이다. 

부산의 의사 장기려 장로, 원주의 의사 문창모 장로, 전남 광주의 이현필 원장 등은 서로 사랑하자는 사도 요한의 말씀을 몸소 평생 실천하며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최근에 장로교 신학대학교에서는 전남 광주의 고아원 ‘동광원’의 설립자였던 ‘이현필’원장의 사랑 실천을 되짚어 보는 세미나가 열렸다. 이현필 원장은 29살 때부터 전북 남원 지리산 자락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함께 농사를 지었다. 수도 공동체 생활의 시작이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추종자가 생겼다. 산에서 부인·소년·소녀들이 움막을 짓고 조악한 먹거리로 끼니를 때우며 함께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수도의 삶을 살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수도 공동체였다. 1948년 여수·순천 사건으로 많은 고아가 발생했다. 이현필 원장은 1949년부터 화순 도암에서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1950년 광주에 고아들을 돌보기 위한 '동광원'이라는 고아원을 시작하여 섬겼다. 100여명의 전쟁고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며 키웠다. 먹을거리도 부족하고 땔감도 부족하고 이브자리도 부족했다. 한 끼 한 끼의 먹을거리를 해결하고 하루 밤 하루 밤을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기적과 같던 때의 일이다. 

계명이란 곧 사랑의 실천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그리고 그 사랑의 계명을 자기 자신도 실천하고 자녀들에게도 부지런히 행하도록 가르치며 살아가는 것이 ‘들으라’는 쉐마의 말씀 신앙이다. 


진리 안에 서로를 사랑하며 그 기쁨을 누리라.
성도의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다른 것이다. 4절에서 말씀하는 “심히 기쁘도다”고 말하는 기쁨과 12절이 말씀하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는 그 기쁨의 근원은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알고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나니 그 사랑으로 인하여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중에 누리는 기쁨이다.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알고 믿고 따르며 살아가는 성도는 적그리스도의 악한 궤계에 미혹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누리는 기쁨은 이 세상에서 찾고 구하는 그 어떤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다. “마음의 즐거움(기쁨)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 1632-1677)는 유대인이면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던 철학자이다. 17세기 네델란드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철학계의 그리스도’라는 별명을 얻은 포르투갈 계 유대인이었던 그가 남긴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들에게 뭐가 제일 좋으냐고 물으면 부귀, 명성, 쾌락의 세 가지로 귀결된다. 사람은 이 세 가지에 너무 집중하기 때문에 다른 더 좋은 것은 거의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다른 더 좋은 것”이란 무엇일까. 주님을 믿는 성도인 나에게 있어서  ‘다른 더 좋은 것’이란 무엇일까.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체험하고, 진리를 깨닫고, 은혜를 받고, 구원의 체험을 갖고, 성령의 충만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면 사도 바울처럼 이 전에 좋고 자랑스럽던 것을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게 된다. 점점 “오직 예수”의 신앙으로 살아가게 된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이란 314장 찬송의 가사 2절은 이렇다. 

“이 전엔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런 찬송을 남들 곁에서 함께 따라 부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찬송을 가슴으로 부르고 온 맘과 온 몸과 온 정성과 온 힘과 온 뜻을 다하여 부를 수 있는 이들의 영적 기쁨을 시늉 내는 것으로 누릴 수는 없는 법이다. 


미국의 세계적인 가수였던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1958-2009)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는 무대에 설 때마다 신적 존재로 열광을 받은 대스타였다. 그의 음반은 매년 2,000만장 이상씩 팔려 나갔다. 매년 불어나는 그 수입금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는 무대에 설 때마다 신들린 사람처럼 관중을 열광시켰다. 그러나 공연이 끝나고 관객이 떠나버린 빈 무대에 서서 그는 고독한 눈물을 한 없이 흘리고는 하였다. 한 번은 그가 무대 뒤에 대기실에서 흐느끼며 울고 있을 때 무대의 청소를 담당하는 흑인 청소부가 그에게로 다가가서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돈과 인기와 명예로는 참 소망이 되지 못해요. 진정코 당신이 참 기쁨을 얻기를 원한다면 주 예수를 당신의 구주로 영접하세요.”

그 청소부는 늘 휘파람을 불면서 무대 뒷정리를 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관객이 모두 사라진 빈 무대를 청소하고 정돈하고는 하였다. 마이클 잭슨은 여러 가지 말들이 많이 따라다니긴 하였지만 그는 나중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게 내 삶의 목표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마이클 잭슨이 27살이던 1985년 아프리카의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며 미국의 뮤지션 45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저들은 아프리카에 식량, 의약품, 생필품, 구호물자를 공급하는 일에 앞장서자고 마음을 모았다. 그리고 마이클 잭슨과 라이오넬 리치는 서로의 집을 나흘동안 오가며 새 노래의 멜로디 초안을 잡았다. 그리고 나중 2시간 반 동안 한 방에 쳐 박혀서 역사적인 노래의 가사를 쓰고 곡을 다듬었다. 역시 천재적인 음악인들의 모습이다. 

마이클 잭슨의 노래 “We are the World.”라는 노래가사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의 위대함 앞에서
우리는 하나의 가족입니다.
당신이 진실을 알고 있듯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랑 뿐이랍니다.

우리는 하나의 세계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자손입니다.
우리는 함께 밝은 미래를 만들어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진심으로 베풀어요.
지금이야말로 우리 삶을 구원할 기회입니다.
맞아요, 우린 함께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해요.
바로 당신과 내가 말이에요.

We're all a part of God's great big family
And the truth - you know love is all we need

We are the world, 
we are the children
We are the ones who make a brighter day
so let's start giving 
There's a choice we're making
We're saving our own lives
It's true we'll make a better day 
Just you and me

사도 바울은 기쁨의 사도였다. 오늘 본문인 요한 2서에 보면 요한 사도 또한 기쁨의 사도였다. 기쁨은 주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 예수를 믿는데 늘 슬프다, 늘 우울하다, 늘 생의 의욕이 없다면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종합 검사를 하면 여기 저기 약한 곳과 병의 원인을 찾아 내고 고침 받고 치료 받는 것처럼 예수 안에서 슬픔과 괴로움과 두려움과 어두움의 뿌리를 뽑아 내고 즐거움과 기쁨의 근원을 찾아 나서야 한다. 
다윗은 그의 시편 16편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8-9, 11)

기쁜 일만 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살다 보면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다. 즐거운 일도 있고 괴로운 일도 있다. 감사한 일도 있고 속이 상할 때도 있다. 그러나 한 발자국 물러서서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감사요 모든 것이 은혜요 모든 것이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어느 50 대 사업가가 빈손으로 시작해서 큰돈을 벌었다. 그는 일찍이 아내를 병으로 잃었지만 사랑하는 두 딸을 직접 키워 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건강 검진을 했는데 암이 심각해서 앞으로 일 년 정도 밖에는 살지 못할 것이란 진단을 받았다. 이러려고 그렇게 열심히 일만하고 사업만 하며 달려 왔나 하고 후회도 되었다. 예수 믿다 세상을 일찍 떠난 아내가 고백하던 대로 예수 모르고 살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는 성경 말씀이 생각났다. 그는 암으로 일년 정도 밖에 못 산다는 통지를 받은 후에 시간 사용이 달라졌다. 그는 과거에 청년의 때에 전쟁터에서 함께 사선을 넘으며 전쟁에 참가했던 옛 동료를 찾아 돌아 보기도 하였다. 여러 해 동안 안 만나고 지내던 동생도 찾아가 만나 형제의 사랑을 나누었다. 자기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자기를 키워 준 늙으신 계모도 찾아 가서 그 동안 못다 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였다. 그는 평소에 하지 못하고 지내던 사랑의 실천과 사랑의 나눔을 통해서 생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 가기 시작하였다. 일본 영화 <가세키>의 줄거리이다. 
옛날 아주 오래 전에 미국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 이다. 어느 날 부자 장로님이 목사님께 말했다. 아이 다섯을 키우며 남의 집 빨래와 허드렛 일을 하며 돈을 벌어서 매 주 교회에 5센트의 헌금을 드리는 여집사님의 헌금을 자신이 대신 하겠다는 제안이었다. 그 장로님은 그 여 집사님의 헌금의 40배가 넘는 매주 2불씩을 헌금하고 있었다. 그런 장로님의 의사를 그 여집사님께 전달했다. 그 여집사님은 울면서 말했다. 내가 적게 벌고 다섯 아이들과 함께 어렵게 살지만 매 주일 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헌금 드릴 때의 그 기쁨을 왜 빼앗아 가려고 하십니까. 

그렇다. 버는 기쁨도 있고 쓰는 기쁨도 있고 주님께 헌신하고 헌금 드리고 충성하고 섬기는 기쁨도 있다. 어쩌면 그런 기쁨은 경험해 보지 않는 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기쁨의 충만함이며 즐거움이 아닌가. 

사도 요한의 교훈대로 택하심을 받은 성도답게 서로를 대면하며 성도의 사귐을 갖고 진리를 깨닫고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의 기쁨이 충만한 성도의 삶을 가꾸어 가는 나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남들 형통한 것만 부러워하지 말고 지금 내가 처한 환경에서 진리를 깨달아 알고 서로 사랑하며 주님을 믿는 자다운 기쁨을 갖고 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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