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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마7:7-11) 201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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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 16-06-26 23:20 조회 20,857 댓글 0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마7:7-11)       2016. 6. 26


성경은 기도의 책이다. 신구약 성경의 곳곳에 기도에 대한 교훈이 가득하다. 하나님이 쓰신 성경의 인물들은 한 결 같이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았다. 단을 쌓았다는 의미는 제사를 드렸다, 예배를 드렸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기도를 드렸다는 말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 다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던 아브라함의 기도를 기억한다.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하나님은 패역하고 타락한 도성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결심을 하셨다. 하나님은 소돔 성읍 안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 성을 용서하시겠다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혹시 오십 명이 못 되고 사십 오명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하고 기도하였다. 하나님은 “내가 거기서 사십 오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다시 또 기도하였다.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사십 명만 되도 멸하지 아니하겠다.”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삼십 명 만 찾아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의 기도는 계속되었다. “이십 명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 노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번만 더 아뢰겠습니다. 혹시 소돔 성에서 의인 열 명이라도 찾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소돔 성에 의인 열 명만 있다고 해도 멸하지 아니하겠다.” 이와 같은 기도 중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더 이상 대화하지 않으시고 떠나 가셨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다.

본문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대한 교훈이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 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고 설명해 주셨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생활에 대한 이 교훈은, 간절히 기도하라. 응답될 때까지 계속하여 기도하라. 반드시 응답해 주실 줄로 믿고 확신을 갖고 기도하라는 말씀이시다.


나는 무엇을 구하고 있나.
예수님께서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라고 가르쳐 주셨다. 기도 생활을 “구하라”고 가르치신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대개 “구하면 주신다. 구하면 받게 된다.”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생각할 때 무슨 생각을 하나. 적지 않은 이들의 기도의 대부분은 “무엇 주세요. 무엇 주세요.” 하고 구하는 기도가 아닌가. 

맞다. 성경의 인물들도 그랬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한나는 아들 낳기를 기도하였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기도하여 이삭을 낳았다. 한나는 기도하여 사무엘을 낳았다. 
자기 스스로 낳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면 주께서 들어 주신다. 오래도록 기도하고 평생 기도하였으나 들어 주시지 않았다면 들어 주시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쓴 잔을 위하여 밤새 기도하셨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때로는 죽음도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 사십 살이 된 이삭의 결혼 문제를 놓고 기도하였다. 나이 많은 늙은 종을 라반의 집에 보내어 며느리 감을 구하여 오도록 하였다. 창세기 24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의 모든 소유를 맡아서 살림하는 늙은 종에게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라고 부탁하며 “가나안 여성들 중에서 며느리 감을 찾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고 부탁하였다.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란 아브라함의 표현이 우리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아브라함은 오늘날로부터 사천년 전의 인물이다. 당시에 그는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그렇다. 하나님은 위로 하늘과 아래로는 땅의 하나님이시다. 상천하지(上天下地)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전능자이시며 섭리자이시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아브라함은 그런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며느리 감을 구하였다. 주인의 심부름을 떠난 늙은 종의기도 또한 진지하다. 그는 낙타 열 마리에 선물을 잔뜩 싣고 떠났다. 나홀 성에 도착한 그는 낙타들을 성 밖 우물곁에 꿇리고 여인들이 물 길러 나올 시간에 이런 기도를 드렸다.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주인 여호와여 원하건데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창24:12)

하나님은 늙은 종에게 리브가를 만나는 복을 주셨다. 리브가는 이삭의 아내가 되었고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이처럼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러 저러한 것을 구하며 응답 받기를 기도한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는 예수님의 말씀은 기도의 대원칙이다. 

예수님의 동생인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남편 요셉을 통하여 낳은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1:6-7)라고 교훈하였다. 우리가 기도 제목을 갖고 기도할 때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기도할지라도 응답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야고보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3)고 하였다. “정욕으로 쓰려고” 라는 말씀이 무엇일까. “불효,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탐심”등의 악한 목적을 가지고 무엇을 구하면 하나님이 그런 기도를 들어 주시겠나. 

“좋은 학교 가게 해 주세요, 어려운 시험 합격하게 해 주세요, 건강하게 해 주세요, 사업 잘 되게 해 주세요, 취직 되게 해 주세요, 진급하게 해 주세요.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는 우상 앞에 비는 이들도 기도한다. 하나님 앞에 그런 기도 한 번도 드린 적이 없이 살아도 성공하고 출세하고 잘 나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믿고 구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서로의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문제 해결을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된 삶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1장에는 강청하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어느 날 밤늦게 친구가 찾아 왔다. 내 집에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데 친구가 너무 배가 고파 잠을 잘 수 없겠다고 했다. 그 때에 이 집 주인이 이웃에 사는 친구에게 찾아 가서 먹을 것을 좀 달라고 청하였다. 그 이웃 집 친구는 문도 열지 않고 대답했다.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다. 애들과 함께 이미 침소에 누웠는데 왜 귀찮게 하느냐고 했다. 그러나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친구가 계속하며 문을 두드리며 간청하면 그 간청함으로 인하여서라도 문을 열고 먹을 것을 주는 것 아니겠느냐고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해 주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 낼 것이요.”

맞다. 구하고 찾으면 길이 열린다.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에 가셨을 때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고쳐 달라고 찾아온 여인을 만나셨다.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마가복음 7장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그 가나안 여인은 자기의 귀신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찾아가서 구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그 여인은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려서 간구하였다. 사랑의 예수님께서 평소와 다르게 반응하셨다. “자녀로 먼저 배 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 때에 그 여인이 대답하였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에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여기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말을 하였으니”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그 가나안 여인이 말한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는 지혜로운 믿음의 대답을 들으시고 감동하신 것이다. 여인이 자기 집에 돌아가 보니 더러운 귀신에 들렸던 어린 딸에게서 귀신이 떠나가고 고침 받은 딸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었다. 할렐루야.

그러면 성도된 우리는 무엇을 구하며 살아가야 할까.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라는 예수님의 교훈의 의도가 무엇일까.

성도된 우리는 성령(聖靈) 받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은혜(恩惠) 받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믿음이 점점 더 깊어지길 구하여야 할 것이다. 
넓은 마음을 갖기를 구하여야 할 것이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은사를 받도록 구하여야 할 것이다.
용서(容恕)하며 살고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살도록 구하여야 할 것이다.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고 베풀며 살고 섬기며 살고 나누며 살아갈 수 있기를 구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생활 속에 구체적인 것들을 구하며 살아가야 한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구하였다.
이삭은 새 우물을 구하였다.
야곱은 장자권과 축복권을 구하였다.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길 구하였다.
라헬은 언니 레아처럼 아들 낳기를 구하였다.
야곱의 노예 시장에 팔려간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집에서 채색 옷 입고 살 때에 꾸었던 소년의 때의 꿈이 이루어 질 날을 구하였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쓰실 날을 기다리며 간구하였다. 드디어 때가 왔고 모세는 나이 팔십 세에 호렙 산 떨기나무의 불이 붙는 것 같은 환상 가운데서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았다.
모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여호수아는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구하였다.
연세 많은 갈렙은 헤브론이라도 점령할 용기를 구하였다. 
사사 삼갈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였다. 하나님은 삼갈로 하여금 소 모는 막대기로 여호와의 백성을 조롱하는 블레셋 사람 600명을 이겼다. 

예수님을 찾아 온 열 명의 한센병 환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병 낫기를 구하였다.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장면이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로 지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데 한 마을에서 열 명의 한센병 환자를 만나셨다. 저들은 큰 소리를 예수님을 불렀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그들은 제사장을 만나러 가는 중에 병이 나았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리고 그 사람 혼자서 예수님을 다시 찾아 왔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서 감사하였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 온 자가 없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느니라.”고 축복해 주셨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것을 구하며 살아갈 지라도 정작은 응답 받고 축복 받은 후에는 마치도 제가 잘 나서 응답받고 제가 잘 나서 형통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다음 주일은 맥추 감사 주일이다. 우리는 보리농사, 밀농사, 쌀농사 하는 농부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택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가 아닌가. 그러므로 정성을 다하여 맥추 감사절도 지키고 추수 감사절도 지켜야 할 것이다. 무교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인 추수감사절은 유대인의 세 가지 절기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맥추절은 지켜도 좋고 안 지켜도 그만인 절기가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한다. 

무교절을 지키며 맨 손으로 애굽에서 나온 것을 기념하라 하셨다. 맥추절을 지키며 수고하며 밭에 뿌린 씨앗의 첫 열매를 감사하라고 하셨다. 수장절인 추수 감사절을 지키며 거두어 들인 것에서 쌓아 놓고 먹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하라고 하셨다.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찌니라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 씩 주 여호와께 보일찌니라.” (출23:14-17) 맥추절은 초실절 혹은 칠칠절이라고 한다. 절기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절기는 우리가 날마다 달마다 하나님께 구하며 살아가던 중에 누리게 하시는 열매의 축복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때이다. 

사사기에 보면 여호와께서 기드온을 불렀을 때에 기드온은 포도주 틀 사이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다. 미디안 사람이 두려워서 숨어서 먹을거리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심약하던 미디안을 불러서 역사적인 인물로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여호와의 방문을 받은 기드온은 볼멘소리로 탄식하며 말하였다.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주셨나이다.”(삿6:13) 미디안의 침략과 위협 가운데 두려움에 가득찬 나날을 보내던 기드온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 힘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그러자 기드온이 하나님께 대답하였다.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그 때에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기드온은 용기를 내어 하나님께 질문하였다.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그리고 기드온이 하나님께 말씀드렸다. “하나님 제가 예물을 가지고 와서 이 곳에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기 까지 이 곳을 떠나지 말고 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내가 너 돌아 올 때까지 머무르겠다.”

기드온은 가서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준비 하였다. 고운 가루 한 에바로 무교병도 만들었다. 고기를 소쿠리에 담았다. 국을 양푼에 담아 가지고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기드온을 기다리시던 하나님께 가져다가 드렸다. 그 때에 천사가 말하였다.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 기드온이 그대로 순종하였다. 그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병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않았다. 기드온은 그 때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말하였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여호와 살롬”이라고 하였다.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였다. 그런데 기드온은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였다. 다음 날이 되었다. 그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까 바알의 제단이 파괴되었고 그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제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린 것을 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놀랍기도 하고 궁금하여 서로 물었다. “이것이 누구의 소행인가” 나중에 기드온의 소행인 것이 밝혀졌다. 성읍 사람들이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에게 찾아 갔다.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이는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고 그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이 말이 무슨 말인가.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는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를 버리고 아들 기드온 이상으로 하나님 신앙에 불붙기 시작하였다.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불렀다. 그 뜻은 “그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였으므로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는 의미였다. 하나님은 기드온은 이렇게 불러내어 준비시키시고 기적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기드온과 그 곁의 300명 용사들을 통하여 거대한 미디안 군대를 넉넉하게 이기도록 역사하셨다. 

우리는 누구에게 구하는 자들인가. 성도들은 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 앞에 구하는 자들이 아니다. 성도된 믿음의 사람들은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자들이다. 

사무엘은 여호와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날을 구하였다.
사무엘은 여호와의 뜻을 벗어난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 왕이 하나님에 겸손하게 돌아오기를 구하였다. 
다윗은 성전 짓기를 구하였다.
솔로몬은 부귀나 장수를 구하지 않고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로운 마음을 구하였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들은 먹고 마시고 입고 살아갈 문제만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구할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인이 모두 다 되어야 할 것이다. 
바벨론 포로의 땅에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발 강가에서 슬퍼하며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날을 구하고 구하였다. 구하면 들어 주신다. 


나는 무엇을 찾고 있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 낼 것이요, 찾는 이가 찾아 낼 것이요.”라고 교훈해 주셨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신 찾으라는 교훈은 무엇을 찾으라는 말씀일까. 우리는 부요와 성공과 출세와 권력과 세상의 명예와 세상 유행과 세상열락만을 찾아 나서지 말고 평화를 찾고, 행복을 찾고, 기쁨을 찾고, 감사를 찾고, 은혜를 찾고, 보람을 찾아야 한다. 

노아 시대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운 외모에 취해서 시집가고 장가가는 나날을 살았다. 인간의 외모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육체의 아름다움에만 빠져 살고 영혼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세대가 되고 만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죄악이 가득하였고 그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들이 항상 악할 뿐이었다. 급기야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셨고 근심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악하고 타락해 가던 세상이었지만 노아는 달랐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죄를 찾아다니며 범하고 악을 찾아다니며 행할 때에 노아는 달랐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恩惠)를 입은 사람이었다. 노아는 의인이요 그 당시에 여호와 보시기에 완전한 자의 믿음 생활을 지켜 가며 늘 하나님과 동행하고 여호와의 은혜를 찾던 자였다. 

간절히 소원한다. 금번 제  7회 헐몬산 새벽 기도회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고 찾는 그런 새벽 기도 순례의 기간이 되기를 소원한다. “은혜로다”라는 찬양을 부르고 또 부르며 기도하고 또 기도하여 각 사람의 영혼에 주님의 은혜가 철철 넘쳐흐르는 여름, 그런 한해, 그런 평생이 되기를 소원하자. 

은혜로다 주와 함께 거함이 은혜로다 
은혜로다 주와 함께 거함이 은혜로다
은혜로다 주와 함께 거함이 은혜로다
은혜로다 주와 함께 거함이 은혜로다

주가 계신 지성소에서 주를 찬송함이
내 영혼에 부어주신 주의 큰 은혜로다
은혜로다 주와 함께 거함이 은혜로다
은혜로다 주와 함께 거함이 은혜로다

은혜로다 주와 함께 거함이 은혜로다
은혜로다 주와 함께 거함이 은혜로다
주가 계신 지성소에서 주를 찬송함이
내 영혼에 부어주신 주의 큰 은혜로다

아브라함은 75살에 하나님을 만났다. 그 후로 늘 하나님의 은혜를 찾는 생활을 계속하였다. 아브라함의 그런 믿음은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에게 이어졌다. 성경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믿음”을 반복하여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저들도 문제는 있고 실수도 있고 약점도 있고 부족함도 많았다. 그러나 저들은 자자손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찾는 생활을 계속해 왔다. 지난 사천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들이 살아 온 유대인의 역사가 이를 입증하지 않나. 그러므로 성도 된 우리들은 세상 것만 구하지 말고 주 안에 은혜를 찾고, 소망을 찾고, 사랑과 믿음과 화평과 화목과 복음과 진리를 찾아 나서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어린이 동화 중에 <파랑새>라는 동화는 원래 6막  12장의 희곡으로 쓴 것이다. 벨기에 출신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가 1906년에 발표한 희곡을 각색하여 어린이 동화로 많이 알려져 있다. 2년 뒤 <파랑새>는 러시아 연극계의 거장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의 연출로 모스크바 예술 극장 무대에 올려 져 큰 성공을 거두면서 세상에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그 당시에 스타니슬랍스키는 “현대연기론”을 정립하여 연기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그의 <배우수업>을 읽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파랑새>의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날 밤 초라한 오두막집에 사는 틸틸과 미틸 남매를 찾아온 요술쟁이 할머니는 아픈 딸이 파랑새를 보고 싶어 한다면서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남매는 할머니가 건네준 다이아몬드가 달린 마법의 모자를 쓰고 파랑새를 찾아다녔다. ‘추억의 나라’, ‘밤의 궁전’, ‘미래의 나라’ 등 남매는 사람들을 꿈에서나 볼 수 있는 환상의 세계로 안내했다. 가는 곳마다 우여곡절 끝에 파랑새를 만나게 되지만 파랑새들은 날아가 버리거나, 색깔이 변하거나 심지어는 죽어 버렸다. 결국 남매는 파랑새를 손에 넣지 못하고 실망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남매는 그렇게 찾아 헤매던 파랑새가 자기 집 새장에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결국 파랑새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일상의 가까운 곳에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는 동화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분복(分福)을 누리며 살만한 은혜를 주셨다. 문제는 그 크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얼마나 깨달아 알고 누리냐는 것이다. 빠른 기차를 타고 가면 목적지에 빠른 시간 안에 갈 수 있다. 그러나 느린 기차를 탔을 때에 볼 수 있는 풍경을 볼 수는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다 마찬가지 이치이다. 남들보다 더 빨리 달려가고 더 높게 되려는 의지만 가지고 경쟁 사회에서 쉼이 없이 달려가는 이들이 있다. 그런 경우에 성공하고 출세는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정작은 천천히 느리게 살면서 보고 누리는 이들의 평범한 것 같지만 작은 행복들은 놓치고 만다. 어떤 아들은 세계의 아들, 어떤 아들은 국가의 아들, 어떤 아들은 장모의 아들이란 말이 무엇인가. 오히려 못 생긴 나무가 동산을 지키는 법이다. 그렇다고 일부러 못 생길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최근에 미국의 아버지 부시 대통령 부부는 결혼 71주년을 맞았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92살, 부인 바버라 부시는 91살이다. 그리고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내외는 결혼 70주년을 맞았다. 카터 대통령은 91살이고 부인 로잘린 여사는 88살이다. 21살 총각과 18살 처녀가 만나서 70년을 살아 왔다. 뇌에 까지 퍼진 종양 수술도 받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주 안에서 살아가는 자의 여유와 평화가 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고향은 조지아 주 섬터 카운티 플레인스 시골의 농촌마을이다. 조지아 공과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해군에 들어가 전함·원자력·잠수함의 승무원으로 일하였다. 1953년 미국 해군 대위 예편하였다. 그 후 땅콩과 면화 등을 가꿔 많은 돈을 벌었다. 그의 별명은 "땅콩 농부" (Peanut Farmer)이다. 그는 민주당 출신으로 1976년에 포드 대통령과 경합하여 대통령이 되었고 미국 제 39대 대통령으로 섬겼다. 그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대통령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젊어서나 오늘 날이나 여전히 고향 마을의 침례교회에서 교회학교 교사로 섬긴다. 그 동안 청바지를 입고 집짓기 운동인 헤비타트 운동에 앞장서 왔다. 그는 그의 책, <나이 드는 것의 미덕>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무얼 먹고 살지 지나치게 근심하지만 정작 무얼 위해 살지 별로 걱정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말을 한다. 그렇다. 사명의 사람들은 구하는 것이 다르고 찾는 것이 다르다. 아니 달라야만 한다. 언제까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런 걱정만 해서야 되겠는가. 

어제 오전에 한 시간 반 동안 산행을 좀 하였다. 어떤 사람이 혼자 나무 그늘에 앉아서 술을 마시는 것을 보았다. 외로워 보였다. 하산 길에 80대 노 부부를 만났다.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르신 내외분 뵙기에 참 좋아 보이십니다.” “혹시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팔십이 넘으셨나요.” 부인께서 웃으시면서 대답하였다. “훨씬 더 됐지요” 그렇게 대답하는 부인 뒤에서 ‘씩’하고 미소를 짓는 영감님의 얼굴 표정이 너무나도 평안해 보였다. 당신은 요즘 무엇을 찾고 있는가. 

요셉은 애굽의 노예생활 중에 여호와를 찾고 찾았다.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다.
다윗은 블레셋의 골리앗의 큰 소리 칠 때에 엘라 골짜기의 물매 돌 다섯 개를 찾아 들고 나섰다. 다윗에게는 만군의 주 여호와가 함께 하시리라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요즘 새벽마다 묵상해 오고 있는 느헤미야는 몇 달 동안을 금식하며 울며 기도하면서 밤에도 제대로 잠을 자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고 찾았다. 그러던 중에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다. 하나님은 바사 나라의 수산 궁에 있던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셨고 느헤미야의 요구를 차근차근 모두 다 들어 주도록 역사하셨다. 느헤미야 제 1장에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계속했던 느헤미야의 끈질긴 기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잃은 양을 찾아 나서면 찾게 된다. 
집 안에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고 찾으면 찾게 된다. 
유산 받아 가지고 타국에 간 집 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 올 날을 보게 된다. 기다리며 구하고 은혜의 날을 찾고 찾으면 꿈처럼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돌아오는 그런 날을 보게 된다. 이것은 모두 다 예수님께서 친히 비유로 교훈해 주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교훈이요 구하고 찾는 기도 생활에 대한 교훈이기도 하다.


과연 나는 무슨 문을 두드리고 있나.
주 안에 거듭난 성도는 의의 문, 선한 문, 진실한 문, 성실한 문을 두드리며 살아가는 자들이어야 한다. 현대, 삼성, 대우 등 우리나라 조선업은 한 때 세계 제일위였다. 그러나 근래의 조선업은 만만치 않다고 한다. 국내의 세계적인 조선 회사 한 곳이 그걸 말해준다. 물론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대 기업이라고 그 수명이 영원 할 수는 없다. 세계적인 조선업체에 구체적인 수사가 진행 되었다. 그 회사의 차장 한 사람이 회사 돈 180억을 횡령한 사실도 밝혀졌다. 그는 부산 해운대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고급 아파트를 마련하고 내연녀와 초호화 생활을 즐겼다. 그의 내연녀는 고급 시계, 고급 보석, 고급 가방, 고급 옷, 초호화판 해외여행 등을 즐기며 자기들의 불의한 생활이 천 년 만 년 갈 것처럼 떵떵거리며 살아 왔다. 최고급 외제 차를 타고 다녔다. 그렇게 놀아 난 남자는 조선회사 비품 구매 과정에서 허위 문서를 작성하는 방법으로 2700여회에 걸쳐서 불법을 저질렀다. 그는 지난 2012년에 1월부터 10개월 동안에 2700번이나 불의한 방법으로 절대 두드려서는 안 되는 거짓 된 문을 두드리며 세상을 거꾸로 살아 왔다. 그리고 지금 와서 그가 언제 어디에서 무슨 문을 두드리며 살아 왔는지 세상이 다 알게  되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 

문을 두드리면 그 두드리는 소리가 나게 마련이다. 나중에는 그 문 두드리는 소리가 세상을 진동하게 된다.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문을 두드리면 나중에 그 문 두드리는 소리는 점점 커지게 마련이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속담도 있지 않나. 

예수님도 친히 문을 두드리는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으시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고 하셨다. 이 말씀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이 땅의 모든 인생들에게 다가 가셔서 각 사람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인생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님께서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시는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영생의 구주로 영접하기를 원하신다. 이처럼 예수님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고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나는 어떤가. 나는 요즘 무엇을 위해서 문 두드리고 있는가. 무슨 문을 두드리고 있는가. 지금 내 삶은 그 동안 살아오면서 과거에 두드린 그 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월이 지나고 나면 요즘 문 두드리는 그 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즉 유럽으로 향하는 전도의 문이 열리는 환상 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였고 응답하였다. 오늘 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무엇을 더 먹을까 무엇을 더 마실까 무엇을 더 입을까 그런 인생의 문만 두드리지 말고 부름 받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복음의 문, 사명의 문, 충성의 문, 헌신의 문, 희생의 문을 두드리는 부르심에 합당한 주의 일꾼들이 모두 다 되어야만 할 것이다. 
오늘은 순교자 기념 주일이기도 하다. 지난 날 오늘의 한국 교회와 대한민국이 되기까지 순교자의 길을 걸어간 신앙의 선조들을 기억하며 가정과 가족과 교회와 성도들과 나라와 민족 앞에서 반드시 문을 두드려야만 하는 사명자의 결단과 의지를 갖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내 인생의 앞에 놓인 닫힌 문이 열리기를 소망하며 문을 두드리는 믿음의 사람, 복음의 사람들이 모두 다 되어야만 할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 극장에 <불의 전차>라는 제목의 영화가 상영 중이다. 보지는 못했으나 그 내용은 알고 있다. 주인공인 두 육상 선수들의 일상을 보여 주는 내용이다. 해럴드 에이브러햄은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차별과 편견 가운데 지내야 했다. 에릭 리들(eric riddle, 1902-1945)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 가정에서 태어나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이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육상 선수로 출전하였다. 에릭 리들은 100미터 경기가 주일날로 잡히자 포기하고 대신에 익숙하지 않은 400미터 경주에 출전하였다. 처음에 영국인들은 그를 비난하였다. “너 혼자만 하나님 믿느냐, 왜 혼자 유난 떠느냐, 편협하다, 옹졸하다, 위선자다, 영국의 명예를 배반한 배신자다.”라는 야유가 쏟아졌다. 그러는 그는 1924년 7월 6일 주일에 예정된 100미터 경기를 포기하고 주일 날 예배당을 찾아 가서 평안하게 예배를 드렸다. 그 주일 날 그는 스콧츠 커크(Scats kirk)교회에서 예배드리며 간증도 하였다. 그 후에 그는 200미터 경기에 나가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400미터 경기에 출전하였다. 400미터 경기는 그에게 낯 설은 경기였다. 그가 결승전에 출전할 때 담당 안마사가 그의 손에 작은 쪽지를 건네었다. 

In the old book it says, "He who honours me-I will honour" 
Best wishes always.
 
구약에 이런 글이 있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나도 존중하리라”
최선의 영광이 있기를 빌면서 


그에게 기대를 걸고 기도하던 안마사는 사무엘 상 2장 30절의 말씀을 그의 손에 들려 준 것이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그는 400m 우승의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처음 200m는 제 힘으로 최선을 다했고, 나머지 200m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빨리 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두드린 새로운 문이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영광스럽게 하는 축복과 간증의 문으로 활짝 열리게 된 것이다. 중국말과 영어가 유창했던 그는 그 후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서 평생 복음 전파를 위하여 선교사의 삶을 살았다. 그는 일본이 중국과 전쟁 할 때에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그는 43살에 중국에서 눈을 감았다. 

공부하고 노력하고 땀 흘리고 수고하고 애쓰고 성공하고 출세하고 돈 벌고 재물 얻어서 나 혼자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것 아니라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기 위하여 새로운 사명의 문을 두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자. 공부, 미술, 음악, 예술, 체육, 연구, 사업, 장사, 무역 그 무슨 일이든 세상 재물만 쫒지 말고 복음의 확장을 위하여 닫혀 있는 인생의 새로운 문을 믿음으로 두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악한 아버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안다. 그렇다. 아들이 떡을 달라,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주고 뱀을 잡아 줄 아버지가 있겠는가. 예수님의 말씀이시다. 그렇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는가. 그 좋은 것이란 누가복음에 보면 “성령”을 말씀하셨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성령 받고 은혜 받고 반석과 같은 믿음이 생겨서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충성, 헌신, 희생을 다 해 나가는 천국의 일꾼이 모두 다 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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