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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이제부터 너희는(엡4:17-24) 2015.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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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5-12-17 13:56 조회 20,006 댓글 0
 
                      이제부터 너희는(엡4:17-24)           2015. 12. 13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성도의 변화되기 이전의 모습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새로워진 모습에 대하여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에베소서 2장에도 보면, “그 때에, 전에는”이라고 하였고 “이제는,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이라는 말씀으로 예수 만나기 이전과 예수 만나 변화 받고 은혜를 아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나중에 대하여 비교해서 말씀하였다.
 
예수 만나면 사람이 달라진다. 예수 만나면 인생이 변한다. 예수가 모든 것의 대답이다. 예수 만난 인생, 예수 만난 가정, 예수를 영접한 부족, 예수를 영접한 마을, 예수 만난 민족의 운명이 달라진 것은 지난 2000년 교회의 역사가 증명한다.
 
바울 자신도 한 때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메시아로 보내셔서 이룩하신 십자가의 구원 역사와 부활의 복음을 모르고 배척하던 율법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몰라서 핍박하고 박해하고 살기 등등(殺氣騰騰)하게 출입하던 지난날을 뒤로 하고 변화 받았다. 사도행전 9장의 다메섹 체험은 핍박자 사울이 바울 사도로 변화 받는 과정을 자세하게 증언하고 있다.
 
사도 바울 자신이 변화 받고 보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거듭난 성도의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지고 존귀한가를 절절히 실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모양만 기독교인인체 하지 말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라고 강조하고 있다.
 
에베소서 4장 17절의 “이제부터 너희는”이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고 달라진 신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라는 권고가 아닌가.
 

하나님의 생명에 붙어 있으라.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생명’에 붙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범죄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하고 나니까 두려운 마음에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숲 사이에 들어가 숨어 버렸다. 범죄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거니시는 에덴동산이었지만 하나님의 눈길을 피하고 숨고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아담의 아내인 하와가 범죄하고 남편인 아담도 따라서 범죄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뱀의 유혹에 빠지고 나니까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나간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면 범죄하므로 죄와 악과 두려움과 저주와 사망의 심판을 받게 된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 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고 하나님의 생명에 붙어 있는 자로 거듭나야만 한다.
 
요한복음 1장의 시작이 무엇인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다. 그 분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 생명은 곧 사람들의 빛이시다.” 이렇게 시작되는 그 생명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곧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던 생명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하여 그 생명이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는 빛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것이 성탄이다.
 
에덴동산에는 각종 나무들 중에 ‘생명나무’도 있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다. 그런데 교만하고 어리석은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음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심어 놓으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성 어거스틴은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라고 말했다. 잔 칼뱅은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생명나무는 예수를 묘사하는 생명의 상징이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인간의 몸이 음식을 먹어야 살듯이 인간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산다. 성서 주일을 맞아 오늘만 하나님의 말씀의 소중함을 깨닫고 다시 또 성경을 덮어 놓고 지내지 말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나의 영의 양식으로 공급받으며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어느 제약 회사에서 한 달에 한번 투약으로 당뇨병 치료가 가능한 좋은 약을 개발하였다. 그 약을 프랑스에 수출하는데 5조원에 계약하였다고 한다. 약 한 가지만 잘 개발하여도 어느 분야의 환자들에게 희소식이 되지 않나. 어느 제약 회사의 어느 누가 개발한 약 한 알로 우리 몸의 별의 별 암이 다 녹아내리고 건강하고 새로운 세포가 활성화 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고 좋은 소식이겠는가. 천사가 나타나서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2:10)이라고 전해 주었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온 백성에게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가. 천사가 말했다. “I bring you good news of great joy.”
 
오늘 예배 시간에 교회 학교 어린이들이 성경 암송 대회를 한다고 한다. 아름답고 귀하다. 10대 초반에 이런 경험이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계속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왜인가. 말씀 운동은 곧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던 인생이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돌아오는 영생의 회복 운동이니까 그러하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어른 아이, 청년 노인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상태이다. 곧 죽음의 생태이다.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적인 설명이다. 살아 있으나 실상은 산자가 아니란 말이다. 충격적이지 않나. 분명히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는데 성경은 그런 자들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죽은 자라고 선언한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방인의 허망한 상태에 머물러 허망한 일들을 행하며 살아간다. 그들의 마음에는 구원의 빛이 떠나고 총명이 어두워진 심판이 깃들여 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자들의 마음은 무지한 상태이다. 아무리 세상 학문을 통달한 석박사라 해도 그렇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그들의 마음은 돌처럼 굳어져 있다. ‘허망하다’는 말은 ‘헛되고 어리석고 거짓되다’는 말이다. 특히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는 내용은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가는 이교도들의 불경건한 종교의 타락상을 지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인생의 마음에는 어둠이 자리 잡고 만다. 그래서 그들의 총명이 어둠에 가리고 만다. 그런 인생들의 일과는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게 된다.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상태를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도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고 하였다.
 
에스겔 47장의 에스겔에게 보여 주신 환상이 바로 그러하지 않나. 어느 날 하나님이 에스겔을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셨다. 성전의 앞면이 동쪽으로 향하였다.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오는데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의 남쪽으로 흘러 내렸다. 하나님이 그를 다시 북문으로 데리고 나가셨다. 바깥 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문에 이르셨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오른 쪽에서 물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그가 손에 줄을 잡고 일 천척을 측량하였다. 물이 발목에 올랐다. 다시 천척을 측량하였다. 물이 무릎에 차올랐다. 다시 또 천척을 측량하였다. 물이 허리에 까지 닿았다. 다시 한 번 천척을 측량한 후에 물의 깊이를 재었더니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깊은 강물이 되어 흘러가고 있었다. 그 물은 “헤엄칠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겔47:5)고 하였다. 그 강물 좌 우가에는 나무가 심히 많았다.
 
그가 에스겔에게 말하였다.
“그 물은 아라바로 흘러서 바다로 흘러갈 것이다. 그 물이 흘러 들어가는 곳은 바다 물이라도 되살아날 것이다. 그 강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모든 생물들이 번성하여 되 살아 날 것이다. 물고기도 심히 많아지고 이 강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 것이다.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살 것이다. 처처마다 그물을 치고 풍성한 물고기를 거두어 올릴 것이다. 물고기가 종류대로 바다의 물고기처럼 심이 많아질 것이다. 강 좌 우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랄 것이다. 그 잎사귀도 시들지 않게 될 것이다. 열매가 끊어지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오기 때문이다.”,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겔47:12)고 하였다.
 
이와 같은 환상을 보여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성전의 문지방 밑에서 스며 나오는 물이 온 세상을 풍성하게 살리는 생명수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명을 전파하는 말씀운동이다. 그런 교회가 되길 원한다. 그런 교회로 우뚝 세워가자. 하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생명이다.
 
조창희 작사, 이천진 작곡의 찬송인 203장의 1절 가사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라 광야 같은 세상에 길 잃고 방황할 때
절망 중에 빠진 이 몸 하나님 보호하사 생명 샘이 솟아나니 새 힘이 넘칩니다.”
 
고 고백하였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 말씀에 보면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꼭 붙어 있는 가지가 되어야 포도 열매를 풍성하게 맺힐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농부이신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포도나무의 줄기이신 예수님께 꼭 붙어 있는 가지로 살아 갈 때에 ‘하나님의 생명’을 영원히 공급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성탄일을 기다리는 대강절기에 ‘하나님의 생명’에 꼭 붙어 살아갈 것을 결단하는 송년의 나날 되기를 소망한다.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배우라.
신앙생활을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우는 생활이다. 맞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 속에 그 어떤 교리적인 부분을 배우거나 예수가 누구신가에 대하여 대답할 말한 지식을 배우는 정도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인격적으로 배우고 삶으로 배워야 한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 가운데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고 기억하는 비유 말씀이 누가복음 10장에 나온다. 어느 날 한 율법교사가 예수를 시험하려고 찾아 왔다. 그는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물었다. 그 때 예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되 물으셨다. 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 때 그 율법교사가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하고 물었다. 그 때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비유 내용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이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 만나 거반 죽게 된 사람이 있었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겼고 때려 거의 죽은 줄로 알고 버려두고 사라져 버렸다. 그 현장을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보고도 그냥 피하여 가 버렸다. 그런데 나중에 그 현장을 지나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불쌍히 여겨 가까이 다가갔다. 기름과 포도주를 그의 상처에 붓고 정성스럽게 싸매어 주었다. 자기 짐승에 태워서 가까운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돌보아 주었다. 다음 날 아침에 그는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부탁하였다. “ 이 불쌍한 환자를 잘 돌보아 주세요. 비용이 더 들면 일을 마치고 돌아  오는 길에 둘러서 갚아 드리겠습니다.”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하신 예수께서 그 율법교사에게 질문하셨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 때 율법 교사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 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경고하였다. 왜 그랬을까. 당시에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 형편이 그러하였다. 물론 다는 아니지만 몸만 교회 안에 들어 와 있을 뿐 예수님을 믿는 자 다운 덕스러운 모습을 성도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비추지 못하였다.
 
어제 연신내 지하철 내부에 내려가서 전도하는데 거기 설치된 휴게 장소 앞에 켜져 있는 TV에서 ‘덕유산’을 소개하는 영상이 나왔다. 충청남도와 전라북도를 경계로 하여 자리 잡은 거대한 소백산맥 자락의 웅장한 산인 덕유산의 그 이름 뜻은 “여유롭고 덕스러워 보이는 지세”에 어울리는 이름으로 붙여졌노라고 역사적인 이름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을 들어 보았다.  산도 여유로워 보이고 덕스러워 보이는 산이 있다. 이처럼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에베소서 4장 25절 이하에 보면 에베소 교회의 구성원들 간에는 여러 가지 세속적인 문제들과 영적으로 타락한 문제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거짓을 버리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는 말아라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아라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라.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 하지 말아라.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아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라.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려라.
 
왜 이런 내용들을 이렇게 까지 자세하게 언급하였을까. 당시에 에베소 교회의 구성원들 중에 이런 모습을 가진 거듭나지 못하고 세상적이고 세속적이고 육신적이며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불끈 불끈 화 잘 내고, 분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거짓말하고 더러운 말 하고 떠들고 남을 비방하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남의 물건 도둑질 하는 자들도 있었다. 악독하고 악의적인 이들이 뒤섞여 있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자들이 교인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작심하고 하기 어려운 말을 일일이 기록해서 이런 심각한 내용들을 편지로 ㅇ너급한 것이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다. 교회라고 다 교회가 아니다. 교인이라고 다 교인이 아니다. 십자가가 달려 있고 십자가 첨탑이 있으니 교회 건물로 보이는 것이지 교회의 구성원인 교인들이 주 안에서 거듭난 성도의 믿음을 갖고 그 생각과 입의 말과 행실을 바르게 하지 못하며 결국은 에베소 교회가 받은 지적과 책망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강절기가 되고 교회 안과 밖에 성탄절을 알리는 번쩍거리는 크리스마스  트리에 불을 밝히고 촛대에 불을 밝히고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고 하는 들뜬 마음으로 이 때를 보내는 것만으로 만족하게 여겨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주를 믿는 성도요 하나님의 자녀요 성령의 충만함과 인도하심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달라야 한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하라”고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을 갖고 세상에 나아가서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살아가야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날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시던 자리에서 일어 나셨다. 겉옷을 벗으신 후에 밖에 나가셔서 대야에 물을 떠다가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 주셨다. 그리고 수건으로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닦아 주셨다. 그리고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의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4-15)고 교훈해 주셨다.
 
그렇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배우라”는 말씀이 이것이다. 예수는 섬김을 받으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 각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으로 섬기고, 재물로 섬기고, 재주로 섬기고, 은사로 섬기고, 능력을 따라 섬기고, 경험에 기초하여 섬기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고, 감사한 마음으로 섬기고, 덕을 세우기 위하여 섬기고, 나를 들어 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기 위하여 겸손하게 섬기는 삶이 거듭난 성도의 섬김이어야만 한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겨야 한다.
능력 있는 자가 부족한 자를 섬겨야 한다.
유능한 자가 무능한 자를 섬겨야 한다.
지혜로운 자가 어리석은 자를 섬겨야 한다.
가진 자가 부족한 자를 섬겨야 한다.
남들보다 더 배우고 더 아는 자가 나보다 무지한 자를 섬겨야 한다.
 
교회 안에서는 의료 상담, 세무 상담, 법률 상담, 진학 상담, 부부 상담, 심리 상담, 결혼 상담, 투자 상담 등등의 갖가지 상담을 손쉽게 친절하게 받을 수 있다. 세상에서 유능한 전문직종에서 생활하는 전문가들이 교회 안에서 주일 날 틈을 내어서 많은 성도들을 골고루 만나 주며 무료로 섬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분부하심을 따라서 섬기는 것이 아닌가.
 
“가서 너도 이와 같이하라.”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너희도 행하게 하려고 본을 보였노라”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세상과 성도들을 섬겨 나가는 성도다운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금번에 김장도 나누고 이번 성탄절에 즈음해서 일 년 간 강단 꽃꽂이를 대신하여 모은 기금으로 사랑의 쌀을 준비해서 교회 주변의 필요한 불쌍한 이웃들에게 전달하려고 한다. 많든지 적든지 주님이 기뻐하시고 기억해 주실 일이 아닌가.
 
온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입의 말 뿐인 사랑이 아니라 발로 찾아 가고 손을 수고하고 애를 써서 누군가를 섬기고 무엇인가를 돌보는 그런 사랑의 실천자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입으로만 “배 부르게 하라. 따뜻하게 하라.”고 말만 무성하게 하고 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의 한 달란트 받았던 자처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 받고 말 것이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 나오는 염소와 같은 책망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 이니라”고 말씀하시며 염소처럼 산 자들은 영벌에, 양처럼 선을 행한 자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약속해 주셨다. 물론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의 이 비유의 교훈을 가슴에 품고 실천하며 사랑을 행하며 선을 베풀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심령의 새 옷을 입으라.
하나님의 말씀은 구체적이다. 막연하지 않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습관을 따르는 옛 사람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自己)를 기만(欺瞞)하는 것이다. 자신을 속이는 가증한 행위이다. 옛 사람의 모습을 벗어 버려야 한다. 심령으로 새롭게 변화 받은 새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24절의 “하나님을 따라”라는 것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라는 명령이다. 사람은 씨줄과 날줄로 옷을 지어 입는다. 이처럼 성도들은 하나님을 따라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의 옷을 입고 살아가야 한다. 영어 표현에 보면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라고 하였다. 진실한 의 즉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지어진 옷을 입고 살아가는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옷은 그 사람을 말하지 않나. 경찰, 군인의 육해공군, 특전사, 소방관, 119 구급요원은 그 복장만 보아도 무슨 일을 하는 이들인지 알 수 있지 않나. 24절의 ‘새 사람’이란 22절의 ‘옛 사람’과 대조 되는 표현이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아직 옛 사람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새 사람의 새 옷인 ‘참된 의와 거룩함’의 옷을 입고 살아가고 있는가.
 
변해야 한다. 변화 되어야 만 한다. 옛 사람의 옷을 벗어 버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된 새 사람의 옷을 입어야만 한다.
 
1963년 10월 9일 새벽 2시,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강원도 인제군 남면 어론리 마을에 한 젊은 청년이 손에 도끼를 들고 한 시골집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밤하늘을 가르는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비명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다음 날 신문들은 이 끔찍한 도끼 살인사건을 대문짝만하게 보도했고 사람들은 이 충격적인 사건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도끼 살인사건이 그 악명 높았던 살인마 고재봉 사건이었다. 고재봉은 군대에 있을 때에 군대 대대장이었던 박 모 중령의 사택에 가서 여러 가지 잔일들을 해 주었다. 그는 군대에서 너무 배가 고파서 군대 식당에서 음식을 훔쳐 먹다가 걸려서 군대 형무소에 2개월 다녀왔다. 그 후로 대대장 관사에서 일하다가 애인이 면회 왔다니까 대대장 구두를 닦아 신고 외출을 다녀왔다. 그러던 어느 날 고재봉은 일들을 끝내고 박 중령의 서재에서 나오다가 작은 물건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때 이 장면을 그 집 가정부가 보고 길길이 뛰면서 소리 질렀다. “저번에 네가 대대장님 군화도 훔쳐 갔지.” 졸지에 고재봉은 박 중령 집에서 일어났던 모든 크고 작은 도난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오해 받게 되었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오른 고재봉은 옆에 있던 도끼를 집어 들고 냅다 소리 질렀다. “까불면 너, 죽여 버리겠어.” 그렇게 말하면 위협하였다. 그 사건으로 고재봉은 살인미수혐의로 육군형무소에서 7개월간 복역해야 했다.
 
고재봉은 억울하다는 생각에 출소하면 박 중령을 죽여 버리겠다고 앙심을 품고 지냈다. 실제로 출소 후에 고재봉은 그 이른 새벽에 박 중령이 살았던 시골 마을의 사택으로 찾아가 그토록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그 7개월 동안에 박 중령 가족은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간 후였다. 그 사택에는 새로 부임한 신임 대대장인 이덕주 중령 가족이 살고 있었다. 결국 고재봉이 죽인 가족은 박 중령이 아니라 이덕주 중령 일가족 6명이었다. 살인마 고재봉은 도끼 한 자루를 들고 들어가 새벽 2시에 고단하게 잠을 자고 있던 그의 부부와 자녀 남매와 가정부를 포함해서 모두를 죽였다. 이덕주 중령과 부인 고재옥 교사와 일가족 여섯 명이 모두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덕주 중령은 당시에 감리교회의 권사였다. 27살 고재봉이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군대 감옥에 사형수로 갇혀 지내던 고재봉이 변화 되었다. 고재봉은 배식이 되는 밥도 먹을 생각을 하지 않고 새벽부터 밤까지 날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로 하루 하루를 보냈다. 일주일마다 성경 신구약을 통독하고 또 통독하였다. 그는 눈물로 회개하며 이덕주 중령의 살아계신 어머니께 그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편지를 보내서 용서를 구하고 또 구했다. 새벽이면 단정히 일어나 앉아 찬송가를 불렀다. “인해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고재봉은 오열하며 간증했다. 자기가 어렸을 적에 그의 마을에도 교회가 있었는데 그 어느 누구도 그에게 교회 다니자고 전도하지 않았다. 그가 군대에 입대할 때에도 예수 믿으라고 전도해서 군대에 보내주는 이웃이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부활 예수의 복음을 깨달아 알고 믿게 된 고재봉은 교도소 교무과장 면회를 신청하였다. 그는 심경의 변화의 복음을 영접한 회개의 심정을 밝혔다. 그리고 재소자 1600명 앞에서 간증할 기회를 요청한 것이다. 그는 1600명의 군대 감옥의 죄수들과 200명의 군대 헌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변화를 간증하였다. 자신이 좀 더 일찍이 예수의 복음을 알았더라면 그런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실토하였다.
 
"여러분이 죄를 저질러서 이곳에 왔을 것이지만 나보다 더 큰 죄를 저지르진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나와 무관한 사람 여섯을 도끼로 죽였습니다. 나에게 누명을 씌워 감옥에 보낸 대대장이 전근을 가고 그 대신 예수를 잘 믿는 감리교 권사 대대장 가족을 죽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무고한 사람을 죽인 이유는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성인이 되어 군대에 갈 때까지도 아무도 나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말한 사람이 없었습니다...만일 누군가가 내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고 나에게 예수를 믿게 하였다면, 내가 예수를 믿었다면, 이런 끔찍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내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나는 이제 죽어 천국에 갈 것입니다. " ​ ​
 
교도소 강단은 눈물바다가 되었고 그 안에 있던 모든 죄수들과 모든 군대 헌병들을 포함해서 1800명이 다 같이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비겁하게 숨고 도망 다니던 베드로가 회개하고 성령 받고 설교하니 3000명이 동시에 회개하고 세례 받은 사도행전 2장의 사건처럼 말이다. 사형수 고재봉은 1964년 3월 10일에 군대에서 사형 당하였다. 그는 죽어 가던 날 아침에도 평화롭게 찬송하며 새벽 기도를 드렸고 “인애 하신 구세주여 내가 비오니” 찬송을 4절까지 다 부를 기회를 허락 받아 찬송이 끝 난 후에 처형당했다. 그는 사형 집행관들에 자신이 웃고 있을 때에 죽여 달라고 말하며 평화롭게 죽음의 순간을 받아 들였다. 그는 내가 진작 예수를 알았더라면 이런 불행한 사건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텐데 하고 늘 아쉬워했다.
 
좀 다른 내용이지만 고재봉에게 살해당한 이덕주 중령의 부인 김재옥 교사는 충북 음성 출신이다. 음성 여학교를 졸업하고 충주 사범학교 졸업 후에 음성의 동락초등학교에 부임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5일 전인 1950년 6월 20일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전쟁이 일어났다. 7월 7일에 동락초등학교 운동장에는 북한군 15사단 48연대 병력이 쳐들어 와서 주둔했다. 국군은 후퇴한 상황에서 당시 19살이었던 김재옥 여 교사는 마을과 학교에 남아 있었다. 4킬로미터쯤 후퇴 해 가고 있던 국군 6사단 7연대 2대대장 김종수 소령에게 달려가서 연락하였다. 이 정보를 접수한 국군은 박격포 포격으로 공산당을 가격하였고 북한군 48연대를 섬멸하였다. 이것이 ‘동락전투’이다. 지금은 그 ‘동락초등학교’에 김재옥 교사 현충탑과 6.25 참전용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여 교사 김재옥은 그 전쟁 중에 만난 이덕주 소위와 결혼하였고 나중에 고재봉 도끼 만행 사건으로 희생당하여 아까운 죽음을 맞고 말았다.
 
믿음의 가정, 믿음의 부부 이덕주 권사와 그의 아내 김재옥 집사의 가족이 모두 죽고 부모를 떠나 숙부 가정에서 공부하던 장남만이 살아남았다. 믿음의 사람 이덕주 권사의 부부, 저들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었으나 많은 열매를 맺었다. 살인마 고재봉은 군대 교도소 안에서 변화 되어 수형자와 군대 헌병을 포함한 1800명의 마음에 회개의 바람이 불게 한 전도자로 쓰임을 받게 되었다. 옛 사람의 옷을 벗어 버려야 한다. 새 사람의 새 심령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새 사람 삼으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 승천하셨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라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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