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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복음의 광채(고후4:3-6) 2018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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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02-12 11:01 조회 15,062 댓글 0
 
 복음의 광채(고후4:3-6)         2018. 2. 11

예수를 잘 믿는 신자들의 얼굴 표정과 세상의 온갖 풍습과 욕망에 찌들어 살아가는 이들의 표정은 분명히 다르다. 그 얼굴의 표정이란 결국은 그 사람 자체의 내면의 생각과 삶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허구헌 날 밤낮 없이 술과 담배에 쩔어있는 이들은 그 풍기는 냄새조차도 다르다. 어떤 때에 엘리베이터에 타 보면 방금 전에 엘리베이터를 사용 한 이의 냄새가 남아 있다. 향기로운 향수 냄새가 남아 있기도 하고 혹은 역겨운 술 냄새와 쾌쾌하게 찌들은 냄새가 남이 있기도 하다.
 
사람은 몸에서 풍기는 냄새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됨됨이 자체도 그러하다.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의 상태는 어둠이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수면 위에 운행하고 있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하고 말씀하시자 빛이 창조되었다. 하나님이 그 창조하신 빛을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은 혼돈과 공허함과 흑암 가운데 빛을 창조하신 것으로 부터였다.
 
지구상의 230여 국가들 중에서 복음이 들어간 나라마다 그 빛이 다르다. 개개인의 얼굴빛이 다를 뿐만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가정 안에서 서로에게 비추이는 빛도 다르다. 심지어는 나라 전체를 보아도 그렇다. 우주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 중에 우리나라 남북한을 찍은 야경 사진이 있다. 북한은 깜깜하고 남한은 대낮같이 환하다. 중국만 해도 다르다. 왜인가. 전기 소비량이 달라서인가. 맞다. 그러나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여겨지나. 복음이 제대로 받아들여진 땅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핍박하는 땅은 야경도 다르고 삶의 질도 다르고 시민들의 얼굴 표정도 다르다.
 
영국 BBC방송이 북한을 취재한 TV방송 장면 중에 북한의 굶주린 어린이들의 사진이 있다. 이런 사진과 남한의 남자 세 쌍둥이인 ‘대한, 민국, 만세’삼형제의 성장하는 모습을 비교해 보라. 차이가 뭔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두 번째 편지를 쓸 그 당시에 고린도 도시 안에는 “도대체 복음을 깨달을 수도 없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리가 어렵다. 못 알아듣겠고 받아들여지지 않고 믿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특히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애매모호하여 이해 할 수 없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저들의 비난에 대하여 침착하게 대답하는 내용이 본문이다. 무엇을 말씀하고 있나.

불신자들의 혼미한 마음.
고린도 교회의 거짓 교사들 중에는 복음의 진리 안에 율법과 유대주의 전통과 할례등을 강조함으로써 복음 전파를 혼란하게 하고 있었다. 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라는 설명을 한다. 이는 당시 바울을 비난하는 이들이 바울을 그렇게 공박하였기 때문이다. ‘혼잡하게’라는 말은 불순물을 섞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다메섹 체험 이후에 그가 신봉하던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믿고 전파하였다. 바울은 그러한 자신의 일상의 모습을 2절에서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라고 변증하였다. 그렇다. 우리 교회가 영유아부, 유치부, 유초등부, 중고등부, 청년부, 장년부의 모든 부서의 각각의 예배마다 ‘오직 진리’가 선포되고 묵상되고 나누어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3절의 ‘복음이 가리었으면’이라는 말씀 중에 나오는‘가리어졌다.’는 의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지 않나. 앞을 못 보는 분들은 아무리 태양이 중천에 떠 있는 한 낮이라도 그 빛을 전혀 볼 수가 없다.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은혜를 받았다. 거듭났다." 는 말을 할 때는 그 영적 상태가 복음으로부터 가리어진 상태에서 복음의 광채를 깨달아 발견한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3절에서 격앙된 어조로 분명하게 말한다. “만일 우리에게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고 규정한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다.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깨달아 알고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나의 선택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나를 자녀 삼으시는 하나님의 선택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나를 자녀삼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 받을 수 있는 인생이란 단 한 사람도 없다.
 
사단(Satan)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마음을 혼미하게 하려고 한다. 4절에서 말씀한 ‘이 세상의 신들’(The god of this age)이란 사단을 말하는 것이다. 사단을 요한복음 12장 31절에서는 ‘이 세상 임금’이라고 하였다. 에베소서 2장 2절에서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하였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는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하였다.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든지 혹은 사단에게 종속되어 있든지 두 가지 영적 상태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 중간 상태란 없다. 사람이 사단의 지배를 받게 되면 그 마음이 혼미해 지고 만다. 4절의 ‘혼미하게’라는 말은 ‘맹인’의 상태를 말한다. 영어 성경인 NIV에 보면, 'blind'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즉 영적인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다.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으면 세상의 밝고 아름다운 것들을 하나도 볼 수 없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영의 눈 즉 영안이 멀게 되면 영적인 세계를 구분하지 못한다.
 
사단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 세상 사람들 중에서 그 누구라도 그의 영혼에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the light of the gospel of the glory of Christ)가 비치지 못하게 하려고 방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을 비롯해서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자녀들과 부모들과 주변의 친구들과 선후배 동료들의 영혼이 사단의 지배를 받는 혼미한 상태에서 벗어나고 복음의 광채 안으로 들어와 구원 받는 백성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여야만 할 것이다.
 

우리 마음에 비추인 하나님의 영광의 빛.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였다. 성령을 받았다.”는 상태는 그 마음에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4절 앞부분에서 설명한 대로 사단의 지배를 받아서 마음이 혼미한 상태에서 벗어나 영적으로 거듭난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어둠에서 빛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나면 내 마음에 그리스도의 구원의 환한 광채가 비추이기 시작한다. 이것은 4절에서 말씀하는 복음의 광채이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아들딸의 삶을 살아가면 그 마음에 그런 평화가 임한다. 기쁘고 감사하고 소망이 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어른이든 청년이든 청소년이든 어린 아이이든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 그 마음에 복음이 들어가면 그 삶을 어둠에서 구출해 내는 복음의 능력이 그 삶에 강하고 영원한 광채를 비추기 시작한다.
 
그런 인생은 얼굴빛도 다르다. 주변에 보라. 술에 쩔어 살고 알콜에 중독되어 살면 그 일상생활이 술에 쩔어서 스스로 벗어나길 원해도 술이 자기를 사로잡고 만다. 술이란 것이 그렇지 않나. 그래서 하는 말 중에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시게 된다.”고 하지 않나. 술에 찌들어 살게 되면 나중에는 술로 인해서 인생을 망치고 만다. 3절에, ‘망하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가리어진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것은 예를 드는 것이다. 술, 담배, 마약, 놀음, 타락한 생활, 도둑질, 횡령, 사기 등등 다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온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삶의 주인으로 오셔서 나를 지배하고 주장하고 다스리시는 삶을 매 순간마다 살아 갈 수 있어야 한다. 이번 주의 성회 수요일로부터 시작되는 올 해의 사순절이 그런 기도와 말씀 묵상의 절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날마다 씻고 닦으며 생활하는 이들의 모습과 길거리에서 눕고 일어나며 언제 씻는지 언제 닦는지 모르게 살아가는 노숙인들의 모습이 다르지 않나. 사람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양치질을 하고 하룻밤 몇 시간을 잠자고 일어나도 입 안이 쾌쾌하지 않나. 그처럼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이다. 날마다의 영의 양식을 먹고 날마다 순간마다 기도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만 한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란 말이 있다. ‘날로 새롭고 또 날로 새롭다’는 말이다. 주 안에 사는 성도들의 삶은 그래야 한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 보다는 내일이 주 안에서 더욱 더 새로워야 한다. 작년 보다는 올해가, 올해 보다는 내년이 더욱 더 새로워야 한다.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얼굴의 광채 안에서 날마다 활력이 넘치는 복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한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31)라고 말씀하였다.
 
성도는 참새처럼 살다 끝나는 생이 아니다. 주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독수리처럼 창공을 날개 치며 올라가는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딸들이다.
 
이번 평창 동계 올림픽에 출전한 각국의 선수들 중에는 별의 별 인간 승리의 미담이 쏟아져 나온다.‘노르딕복합’(Nordic Combined)에 출전하는 미국의 브라이언 플레처는 세살 때부터 백혈병을 앓았고, 이후 7년 동안 항암치료를 받았다. 항암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이 빠진 그는 유치원에 입학하면서 아예 머리를 초록색으로 칠하고 ‘닌자 거북이’ 옷을 입을 정도로 긍정적이었다. 여섯 살 되던 해에 ‘노르딕 복합’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노르딕 복합경기란 설원의 마라톤이라는 10km의 크로스컨트리 스키와 스키의 꽃으로 불리는 스키점프가 접목된 종목이다. 노먼 힐은 90m, 라지힐은 120m 높이에서 점프 한 후에 10km를 크로스컨트리 스키로 달리는 경기이다. 스피드와 정신력은 물론 점프 기술 등 스키의 다양한 능력을 펼쳐야 하는 매우 힘겨운 종목이다. 따라서 이 경기의 우승자를 흔히 최고의 스키 선수로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5년 전인 2013년에야 이 팀이 처음으로 구성되었다. 이번 대회의 대표 선수는 박제언, 시정헌 두 선수뿐이다.
 
그는 노르딕복합 경기의 유망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2009년 국제스키연맹(FIS) 월드컵 시리즈에 데뷔한 뒤로는 꾸준하게 상위권에 올랐다. 2014 소치 올림픽에도 출전했다. 지난 2017년 12월 말에는 미국 노르딕복합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는 당당히 1위에 올랐다. 브라이언 플레처는 이번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 미국을 대표하는 선수로 출전 티켓을 따냈다. 그의 동생 테일러 플레처도 4위에 올라 평창에서 형제 올림픽 출전의 꿈을 이뤘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암으로 고생하는 어린이들을 돕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올해 31살인 그는 28살이던 2015년에 이미 어린이 암환자들을 위한 구호단체 ‘ccThrive(Thriving after Childhood Cancer)’를 만들었다. 지난날의 자신의 처지와 같이 어려서부터 소아암으로 고통당하는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기 위해서였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나 하나 겨우 예수 믿고 구원의 신앙을 유지하며 사는데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누군가에게 내가 깨달아 알고 믿는 이 복음의 광채가  증거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그리할 때에 개인과 가정과 우리의 일터와 직장과 교회 생활이 물댄 동산과 같은 복이 넘쳐흐르게 될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종.
예수를 믿는 우리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비추이면 그 삶은 온전히 달라지게 마련이다. 사도 바울은 5절 말씀에서 분명하게 말하였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을 전파한다. 또한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한다.”고 하였다.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목회자이든 임원이든 성도들 모두가 다 어른, 청년, 어린이 할 것 없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파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 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김익두 목사 이야기를 또 나누자. 길거리의 깡패 김익두(1874-1950)의 마음에 이 복음의 광채가 비추이자 그는 평생토록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로 살았다. 그는 신유의 은사를 받아 전국의 많은 집회에서 1만 명 이상의 환자가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당시 동아일보는 1920년, 58호 신문에 “김익두목사의 이적”이란 제목으로 이런 기사를 실었다.
“황해도 신천군 읍내 교회목사 김익두씨는 지난 5월 17일에 부산진교회에서 안수 기도로써 앉은뱅이를 걷게 했다. 그 병고침을 받은 자는 부산진 좌천동 446번지 김낙언의 8살 된 아들 두수(斗秀)이다. 그는 나은지 8개월 만에 앉은뱅이가 되어 8년간 걷지 못하다가, 안수기도 즉시 일어나서 걷게 되었으므로 칭송이 자자하다. 이번 남방집회에서 밀양군 교회에서는 18세 여자 벙어리가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번 각 지방에서 병 고친 수효가 22명이라 한다.”
 
그는 부흥회 인도 776회, 설교 28,000여회, 연집회 인원 150만명, 새신자 288,000명, 새교회 건축 150여처, 증축 140여처, 유치원 신설 120여처, 병자 치유 10,000여명의 기적의 중심에서 쓰임 받았다. 그를 통해 주님을 믿고 목사된 이가 258명이다.
 
김익두목사는 1874년 1월 3일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에서 농부 김응선의 독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입신양명을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16세에 과거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매관매직이 판을 치고 있던 때라, 돈 없고 배경 없던 김익두에게 과거급제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17세가 되자 장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사업도 여의치 않아 곧 망하게 되었다. 연속되는 실패와 좌절로 인해 인생에 낙담한 그는 술독에 빠지고 말았다. 김익두는 술만 즐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패기와 힘이 넘쳐서, 한다하는 싸움꾼도 한 주먹에 쓰러뜨리곤 했다. 술집이건, 국밥집이건, 냉면집이건 그에게 외상을 주지 않은 집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말 그대로 무전취식자였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하루가 시작될 때마다 이렇게 빌었다고 한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김익두 만나지 않고 무사히 보내게 해주옵소서”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우연히 소안련 선교사의 집회를 지나치게 되었다. “사람은 죄 지은 대로 보응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지옥으로, 의인은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죄라는 말이 김익두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죄라면 누구보다도 많이 지은 사람이 바로 자신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부흥회 장소의 앞자리에 나아가서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였다.
 
기독교인이 된 김익두는 10개월 동안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자신의 생활과 습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무려 성경을 100독 하였다고 한다. 그가 세례를 준비하며 성경을 읽고 있을 때 평소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찾아왔다. “이 사람아, 방구석에서 무슨 청승인가? 우리 주막에 가서 대포나 한잔 하세.” “내가 요새 약을 복용중이서 술을 못먹겠네 그려.” “그 약이 무슨 약인데?” “응, 지금 구약과 신약을 먹고 있거든. 술은 절대 금물이라는 처방이 있어서 안되겠네 그려”
 
1901년 1월, 김익두는 그의 나이 27살에 소안련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매서인(賣書人)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전도하기 이르렀다. 황해도 안악군의 소문난 주먹이던 그도 이 때 많은 조롱도 당했고 돌질도 맞아 피도 흘렸다. 그러나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며 겸손히 참고 전도에 임했다.
 
이렇듯 열심인 김익두를 보고 소안련선교사는 그에게 신천교회의 개척을 맡겼다. 헌신과 기도로 교회에 봉사하니 신천교회는 곧 수 십 여명의 신도들이 모였다. 그리고 그 후로도 날로 부흥 발전하게 되었다. 김익두는 1906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 3회로 졸업했고, 평생 신천교회 강단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한 교회를 섬겼다. 그 신천교회에서만 11명의 목회자를 배출하였다.
 
1919년 10월, 평안남도 한 교회에서 집회를 마친 다음 그는 동료목사와 마가복음 16장 17-18절의 말씀을 가지고 토론을 하고 있었다. “믿는 자에게는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방언을 말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그 때 김익두 목사의 마음속에서는 ‘이 말씀은 오늘 나에게도 유효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김 목사 옆에 걷지 못하는 장애인 한 사람이 있었는데, 김 목사는 대뜸 그에게로 다가가 이렇게 외쳤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서 걸어라.” 그러나 아무리 손에 힘을 주어 일으키려 해도 그는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그길로 자신에게 그런 기적의 믿음과 능력을 주시길 기도하는데 전념했다. 1919년 12월, 김 목사가 경북 달성의 현풍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수백의 성도 중에 병자 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의 이름은 박수진(朴壽眞)이었는데, 10년 전부터 아래턱이 빠져 갖은 방법을 다해도 고칠 수가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볼 마음으로 예수라도 믿어 보겠다고 집회에 참석한 것이었다. 김 목사의 마음에 사랑의 마음이 불 일 듯 했다. 김익두 목사는 3일간을 금식하며 기도한 후 박수진을 붙잡고 외쳤다. “믿사오니, 이 소자의 떨어진 턱을 붙여 주시옵소서” 떨거덕. 그 순간 놀랍게도 턱이 정상이 되었다.
 
등이 굽은 곱사병자, 한센병 환자, 폐병 환자, 혈루병자 등 무려 1만여 명의 병자들이 김익두 목사의 집회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았다.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세파는 거세게 몰아쳤다. 신사참배 반대문제로 일본 경찰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아야 했다.  해방된 후에는 여러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겪어야 했던 공산주의자들의 횡포를 고스란히 다 당해야 했다.
 
1950년 6․25가 일어났다. 그는 섬기는 제단을 지키며 지내던 그해 10월 14일 새벽, 신천교회에 공산군이 교회당 안으로 난입하였다. 새벽기도를 드리던 김 목사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고 새벽 예배자들을 향해서도 무참히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임성근 전도사를 비롯하여 청년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총을 맞은 김익두 목사는 그 날 새벽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순교자가 되었다.
 
바울 사도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을 전파하는 복음 전파의 종들이다. 복음의 광채가 이 땅에 가득하길 간절히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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