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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사는 의인(합2:1-4) 2016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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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6-10-31 04:16 조회 17,556 댓글 0
 
믿음으로 사는 의인(합2:1-4)            2016. 10. 30 마틴 루터 종교개혁 499주년 기념주일


“의인(義人)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는 말씀은 로마서 1장 17절에 인용되어 있다. 이 말씀은 499년 전인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의 불을 붙인 마틴 루터의 신앙의 바탕을 이룬 말씀이다. 이는 또한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의 마음을 뜨겁게 한 말씀이기도 하다. 1738년 5월 31일 밤 8시 45분 영국 런던의 올데스케이트에 위치한 예배당에서 수요일 밤 예배 시간에 예배인도자가 마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말씀을 들으며 그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다고 한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 63살 임종)는 누구인가. 그는 독일의 아이스레벤에서 1483년에 칠남매 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살에 대학에 들어갔고 그 다음해에 대학을 졸업하였다. 22살 때에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인생의 허무를 깨닫고 수도사의 길을 결심하였다. 24살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수도원에서 교리사, 교회사, 조직신학 등의 신학 수업을 비롯해서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였던 비엘을 통해 옥캄의 유명론 철학을 공부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주권을 강조하면서도 스스로의 구원을 위한 인간의 능력을 또한 강조하였다. 인간은 성화된 생활과 선한 행실 즉 온전한 공로에 기초하여 구원을 얻게 된다고 믿었다. 루터는 금욕적이고 경건한 수도생활에 최선을 다하고 고해성사를 드려도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번민하였다. 스타우피츠 교수(J. Staupitz)는 루터를 뛰어난 지력과 종교적 열심을 갖춘 유능함을 인정하고 비텐베르크대학의 교수로 추천하여 25살 때부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29살 때에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정식으로 교수가 되었다. 이때부터 성경 연구를 계속하면서 복음적 진리 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루터에게 있어서 신앙 변화의 전환점은 로마서 1장 17절인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다. 그 근거는 본문인 하박국 2장 4절 말씀에서 비롯되었다. 마틴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을 주해하면서, “‘하나님의 의’가 수동적인 의로움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주시는 ‘덧입는 의’(imputed grace)임을 깨닫게 되었다.” 의인이 되는 것은 인간의 선행이나 특별한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히 여겨 주심에 의한 것이란 말씀이다. 이 깨달음을 얻게 된 루터는 마치 새롭게 태어난 것과 같은 감격을 체험하였다. 그는 “나는 천국으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그 때의 심경을 전하였다.

오늘 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믿으며 살아가고 있나. 마틴 루터 당시 교황 레오 10세(Leo X, 재위 1513-1521, 45세때 말라리아에 걸려 선종)는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증축을 위해 전임 교황이었던 율리우스 2세(1503-1513)때 공포된 면죄부(免罪符) 판매령을 이어 받아 1515년부터 면죄부 판매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로마 교황청의 이단적이고 비성경적인 강압 앞에 많은 사람들은 침묵하며 끌려가듯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틴 루터는 면죄부 판매의 문제점과 부당함과 그 심각성 등에 대하여 신학적인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는 종교개혁문 95개조 조항을 대자보에 적어서 비덴베르크 성당의 문 앞에 크게 내어 붙였다. 1517년 10월 31일의 일이다. 라틴어로 작성된 95개조의 내용은 면죄부를 구매하는 행위는 신자의 영혼 구원과 성화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는 지적하였다. 그는 진실로 회개하는 자에게는 면죄부를 구입하지 않아도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신다는 점을 분명하게 언급하였다. 비텐베르크 도시는 오늘 날, 마틴 루터의 흔적을 찾아오는 세계의 관광객들로 인하여 먹고 사는 도시처럼 보인다. 또한 그것이 사실이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문 안에서 크게 문제 삼은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 원하는 규모의 베드로 대 성당을 지을 정도의 부와 재물을 갖고 있는 당시의 로마 바티칸이며 교황인데 왜 독일과 같이 먼 나라에 사는 백성들에게 로마에 있는 베드로 성당 지을 비용을 요구하는가. 성전이란 마음의 전, 그리고 내가 속한 곳의 성전 중심이어야 한다. 

둘째, 천국과 지옥은 오직 하나님의 판단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에게 사죄권이 있다거나 교황이 죽은 자를 연옥으로 보낼 수 있다는 등의 주장은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셋째, 면죄부의 판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함으로 죄 사함 받는다.”는 가르침에 위배되는 내용이다. 교황도 죄 아래 있는 하나의 인간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황이 면죄부 판매를 통하여 죄 사함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예수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잘못된 가르침이다. 

이듬해 1월 도미니칸 수도회 총회에서 106개조에 달하는 항목으로 루터를 정죄하고 이단으로 몰아 교황에게 파문을 요청키로 결의하였다. 그 같은 해 8월 7일, 로마교황청은 마틴 루터를 로마 교황청의 법정에 출두시켜 화형에 처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마틴 루터가 서슬이 시퍼런 로마 교황청의 압력을 견디고 살아남아 종교 개혁자의 길을 걸어 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였다. 
 
1521년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받은 루터는 복음을 불경건한 자들의 조소거리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4월 17일 제국회의에 출석하였다. 마틴 루터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갖고 확신에 찬 고백과 대답을 이어 나갔다.  1521년 5월 26일 ‘보름스 칙령’에 의해 루터는 정죄되었다. 그러나 구라파 전역에서 마틴 루터를 향한 직·간접적인 지원과 후원이 계속되었다. 지식인과 농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지속적인 지지를 얻었다.

루터는 그를 지지했던 선제후 프레데리히의 도움으로 바르트부르크성으로 도피하였고 그 곳에서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내는 대사업을 이룩하였다. 바르트부르크성이 위치한 아이제나흐는 요한 세바스챤 바흐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 동안 그가 속해 있던 비텐베르크에서는 급진적인 개혁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복음적인 예배 의식과 함께 미사의 즉각적인 폐지를 주장하였다. 성상(聖像)의 사용이나 독신제의 서원을 정죄하였다. ‘쯔비카우의 예언자’들은 성령의 새로운 계시를 강조하였고 기록된 말씀보다는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역사하는 성령을 열망하고 있었다. 이에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와 과격주의자들의 잘못된 개혁운동의 실상을 보면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였고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였다. 루터는 복음, 계시, 이신칭의 등의 복음의 본질과 예배의식이나 수도원 입단을 위한 서원과 예수상, 마리아 상등 성상 숭배 등을 삼가게 하였다. 14-15세기의 큰 두 가지 변화는 대서양을 넘어서 낯 설은 대륙을 탐험하고 발견한 일과 1450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와 인쇄술의 발명이다.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문 95개 조항은 당시에 발전해 가던 인쇄술의 도움을 입었다. 마틴 루터에게 배우던 학생들은 라틴어의 개혁문을 독일말로 번역하고 인쇄하여 독일 전역에 2주 만에 보급하였고 두 달 만에 전 구라파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1524년에 마틴 루터가 발간한 복음적인 소책자들은 100만부 이상씩 인쇄되어 유럽 전역으로 배포되었다.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과 함께 인쇄술의 발전은 하나님께서 시대적으로 절묘하게 불 붙여 주신 선물이었다. 

마틴 루터와 그를 잇는 종교 개혁가들의 강조점은 다섯 가지이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a Deo Gloria

이 다섯 가지 신앙 정신이 마틴 루터로 하여금 그 당시 거대하고 막강하던 종교조직이었던 로마 가톨릭을 향하여 항거하게 한 힘이었다. 수도자였던 마틴 루터는 성경 말씀을 제대로 깨닫고 보니 그 동안 교황청에서 강조해 온 것들과 교황의 칙령들에 얼마나 오류와 부정이 많았는지를 절절히 체감하게 되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란 신앙정신은 그 개인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오늘 날 모든 믿는 자들을 향한 거룩한 초청이요 거룩한 부담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의 하박국서는 하박국이 하나님께 하소연하고 하나님께서 그 내용에 대답하시는 형식이 두 차례 반복된다. 그리고 3장에는 하박국의 기도가 담겨 있다. 

본문은,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리는 기다림.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남 왕국 유다의 왕은 18대인 여호야김이었다. 영원할 것 같은 앗수르가 바벨론에 망했다. 바벨론은 애굽도 쳐들어갔다. 앗수르의 편에 서서 애굽과 싸우러 나갔던 유다의 선한 왕 요시야는 애굽의 바르느고의 군대에 의해 죽고 말았다. 요시야 왕은 31년간 남 유다를 다스리던 선한 왕이었다.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위를 이었으나 3달 만에 애굽에 의해 죽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서 왕이 된 인물이 여호야김인데 하나님 앞에서 극악한 왕이었다. 그런 시대에 바벨론이 유다에 쳐들어 왔다. 여호야김 왕을 쇠사슬로 묶어 베벨론으로 끌고 가 버렸다. 예루살렘 성전의 성물들도 다 집어 갔다. 이것이 제 1차 바벨론 포로 생활의 시작이다. 이처럼 암담하던 시절에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였다. 하박국서 1장 1절에 보면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고 했다. 하박국은 답답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 까지리이까.”(합1:2)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부르짖고 또 부르짖던 하박국은 파수 하는 곳에 서고 성루에 서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표현은 하박국 자신이 파수꾼이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파수꾼이 파수하는 태도와 심정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바라보았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며 바라보리라.”고 하였다. 그렇다. 기도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에 마음의 귀를 열고 마음의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닌가. 시편 5편 3절에 보면 다윗도 그런 표현을 사용하였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듯이 하나님께 기도한 후에 “주께서 나에게 어떻게 응답하실까.”를 기다린다는 말씀이다. 

미가 선지자도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리시로다.”(미7:7)라고 하였다. 

음식 상 아래 애완견이 주인이 식탁에서 던져 주는 먹을거리를 받아먹기 위해서 계속하여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 계속하여 주인을 쳐다보고 바라보듯이 여호와를 기다리고 바라본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신앙생활이란 끝없는 기다림과 바라봄이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였다. 이사야와 미가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메시아 예언은 800여년을 두고두고 기다리고 기다리는 믿음을 갖게 하였다. 강림절은 기다리는 절기이다. 강림절이 되면 이렇게 찬송한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주님 강림 하셔서 죄에 매인 백성들을 자유 얻게 하시네 주는 우리 소망이요 힘과 위로되시니 오래 기다리던 백성 많은 복을 받겠네.”(105장 1절, 오랫동안 기다리던) 

이상한 별의 이동을 따라 갔던 동방박사들의 기다림처럼, 베들레헴 언덕 자락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처럼, 아기 예수가 순산되는 순간을 기다리던 동정녀 마리아와 그의 남편 요셉의 기다림처럼 신앙생활이란 기다리며 바라보는 생활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아들 이삭이 태어날 날을 기다리고 바라보았다. 

하박국이란 이름의 뜻은 “포옹한다.”는 의미이다. 그가 활동을 시작한 때의 남 왕국 유다의 상황은 암담하였다. 여호야김 왕의 통치가 악하게 전개되자 하나님은 스바냐 선지자를 보내셔서 시대를 책망하셨다. 하나님을 떠난 거짓된 경배와 우상 숭배, 불의와 부정부패가 만연한 시대였다.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였으나 임금과 백성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 때 새롭게 등장한 선지자가 하박국이다. 하박국은 절규하듯 탄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합1:4) 하박국 1장 3절은 그 시대의 타락과 악을 고발한다. 하박국은 “죄악, 패역, 겁탈, 강포, 변론, 분쟁이 일어났나이다.”라고 안타까워하며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은 므낫세 왕 55년 통치 기간의 악행을 묻고 계셨던 것이다. 므낫세 왕은 요시야가 왕이 되기 전전 대의 왕이다. 므낫세 55년 그리고 아몬 왕 2년 동안 남 왕국 유다에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와 불의와 불법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 후에 요시야 왕이 나서서 31년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신앙을 외쳤지만 백성들은 이미 깊은 악과 우상숭배에 젖어 있었다. 그런 시대에 하나님은 스바냐 선지자를 보내셨고 또 이어서 하박국 선지자를 보내서 말씀하시는 말씀이다. 하박국 1장 13절에는 선지자 하박국이 절규하듯 부르짖는 기도의 내용이 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 데로 잠잠하시나이까.”

하박국 선지자는 이처럼 암담하고 암울한 시대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듯이 기다리고 바라보며 “하나님이 내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를 간구하고 있다. 

종교 개혁의 선봉에 섰던 마틴 루터의 기도와 간구도 이런 것이었다. 당시 역대의 로마 교황들의 횡포와 악행 앞에서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시대를 기다리고 바라보며 항거하고 개혁의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교만하고 거짓된 바벨론의 종말을 경고.
그 당시 바벨론의 힘은 막강하였다. 하박국 1장에 보면 그런 현실을 놓고 기도하는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 내용과 하나님의 응답 내용을 볼 수 있다. 1장 6절에 보면 바벨론을 갈대아 사람이라고도 하였다. 그들의 침략 세력은 포범보다 빨랐다. 먹이를 향하여 달려가는 저녁 이리보다 사나웠다. 그들의 마병은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와 같았다. 1장 11절에 보면 갈대아 사람 즉 바벨론 사람들은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바벨론 사람들을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걸 알아야 한다. 그 당시에 바벨론이 강하여 유다를 침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강력한 바벨론을 들어서 우상 숭배와 불법을 자행하는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을 연단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묵시를 판에 명백하게 기록하여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하셨다. 비록 지금 바벨론이 강하고 포악하고 그 힘이 막강할 지라도 정한 때가 되면 그 종말이 속히 이를 것이라고 하셨다. 그 푸르던 나뭇잎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서 벌써 이파리가 한 개도 달려 있지 않은 겨울 나목들이 눈에 띄듯이 말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오면 지금 저렇게 표범처럼, 이리처럼, 독수리처럼 강하고 두렵고 사납고  무섭고 당당하게 달려드는 바벨론이라도 그 교만을 꺾으실 날이 있다고 하셨다. 

하박국은 지금 유다 백성들이 당하는 불안과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하소연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대를 위협하는 두려운 세력인 바벨론에 대해서 까지 말씀하시고 계시다. 그 바벨론의 교만과 거짓도 끝날 날이 올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남 왕국 유다의 선한 왕 요시아가 애굽과의 전쟁에서 죽고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으나 그도 애굽의 세력에 의하여 왕이 된지 세 달 만에 죽고 말았다. 이어서 여호야김이 왕이 되었다. 그런 불안하고 초조한 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가 하박국이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구하며 계속하여 기도하고 있다. 

하박국은 희망의 선지자이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계속하여 하나님을 향한 기대와 소망의 끈을 누추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  1장 12절에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라고 기도하고 있다. 같은 절에서 ‘사망, 심판, 경계’를 언급하며 기도하지만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을 연단하기 위한 세력을 세우신 바벨론의 침략과 위협 앞에서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유다 백성들을 구원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 당시의 남 유다의 왕 여호아김은 11년 통치 기간에 온갖 악을 행하였다. 극악한 왕으로 구분되는 왕이다. 여호아김 왕은 사치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백성들로부터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심한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열왕기 하 24장 4절에 보면,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고 하였다. 같은 본문을 다른 역대하 그의 통치 기간 때에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쳐들어 왔다. 당시에 영원할 것 같던 앗수르를 신흥 바벨론 세력이 이겼다. 바벨론의 군대는 애굽에까지 쳐들어갔다. 그 주변 국가 중에서 바벨론을 당할 나라는 더 이상 없게 되었다. 그 때에 유다에 쳐들어 간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은 유다의 여호야김 왕을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가 버렸다. 25살에 왕이 된 여호야김이 왕으로 11년째 되던 36살 때의 일이다. 느브갓네살은 예루살렘 성전의 기구들을 끌어다가 바벨론에 있는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의 신당에 두었다. 

그런 격동기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고 부르짖고 하소연하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를 계속하고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린 것이 하박국서의 내용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해 주셨는가. 유다에 쳐들어가서 왕을 끌어가고 성전의 기물들을 휩쓸어가는 바벨론의 교만과 거짓을 심판하시는 종말의 정한 때도 다가온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 오직 주의 말씀만이 영원할 뿐이다. 권력, 재물, 부, 명예, 힘, 미모, 젊음, 인기, 재주 그 모든 것들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 다 지나간다. 지금 남 유다를 휩쓸고 지나가고 있는 바벨론도 영원하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그러한 묵시를 판에 새겨서 달려가면서라도 읽을 수 있게 하라는 말씀이다. 

지금 유다를 침략하고 있는 바벨론도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압제와 고난의 날이 길지라도, 더딜지라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박국 2장 3절 하반부에 보면 하나님은,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유다 백성들의 모습은 주를 신실하게 잘 섬기는 언약 백성의 모습이다. 이 당시에 이미 주전 722년에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멸망한지 100여년이 지난 이후이다. 

그와 같은 암울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하나님이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에 대답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믿음으로 살아가는 의인.
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나. 성도가 주를 향한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 히브리서 11장에 나열된 성경의 인물들은 한 결 같이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아벨,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등등 거론된 모든 성경 인물들의 이름 앞에 “믿음으로”라는 표현이 붙어 있다. 히브리서 11장 38절에 보면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믿음으로 사는 의인의 모습이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들이어야 한다. 저들은 한결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은” 주인공들이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의 목소리를 외치던 당시에 교황과 그 주변의 인물들은 믿음으로 증거를 받지 못했다. 그들은 성경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와 종교적인 권력과 부를 지켜 가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당시의 부와 명예와 융성한 문화를 즐겼다. 

윌 듀랜트는 레오 10세 시대의 로마 바티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당시의 로마는 지성과 지혜의 중심지였다. 학자, 교육자, 시인, 화가, 음악가들이 환영받고 그들에게 숙박을 제공해주는 곳이었다. 위엄 있는 교회의 기능은 물론, 격식 높은 외교적 환영식, 화려한 연회, 극공연과 음악회, 시 낭독, 미술작품 전시 등이 진행되는 곳이 로마 바티칸이었다. 당시 바티칸은 세상에서 가장 세련된 궁정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바티칸의 개량공사와 장식에서, 문학적 혹은 예술적 천재, 그리고 능력 있는 유럽 특사의 모임에서, 교황 니콜라오 5세로부터 레오 10세 자신에 이르기까지의 노력으로 바티칸은 예술뿐 아니라 문학과 르네상스의 찬란함이 절정을 이루었다. 단순히 문화의 양적인 면만을 볼 때도, 역사는 결코 이와 같은 때가 없었다. 심지어 페리클레스 때의 아테네도, 아우구스투스 때의 로마도 그렇지 못하였다.” 한 마디로 하면 로마 바티칸은 화려하고 풍요로웠다. 그 중심에 교황 레오 10세와 그 주변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의인의 모습은 어떠하여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인가. “먹자, 마시자, 즐기자”의 삶은 결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일 수 없다. 그렇다고 고행하며 금욕주의자로만 살자는 말이 아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한 부자가 있었다. 한 해는 농사가 잘되었다. 창고를 늘려 지어야 할 정도였다. 몇 해 동안 더 이상 농사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살아도 될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말하였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리고 예수께서 비유를 마무리하는 말씀을 덧 붙여 해 주셨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21)

예수께서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먹고 마시고 입고 살아가는 의식주에 연연하지 않으셨다. 그는 뱃고물을 베고 잠이 드실 정도로 고단한 일과를 소화해 내셔야만 했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에는 그의 소문을 듣고 몰려오는 각색병자들로 넘쳐났다. 예수께서는 음식을 잡수길 겨를도 없으셨고 잠을 푹 주무실 겨를도 없으셨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새벽 미명에 일어나 기도하셨다. 

예수의 기도의 내용은 한결 같았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의 중심 신앙을 엿볼 수 있다. “아버지여 네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 예수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 일이었고 사명이셨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요17:8)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께 주신 하나님의 말씀들을 그를 믿는 제자와 따르는 자들에게 전파하시는 것이 일이셨다.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아들이심을 참으로 알게 하고 하나님께서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줄을 믿게 하는 것이 날마다 하시는 일이었다. 
믿음으로 사는 의인은 우상 숭배하면 안 된다. 무당에게 묻고 무속인에게 물으면 않된다. 사이비 신앙으로 사람을 혹세무민하는 자에게 미혹 받으면 안 된다. 그러면 왕이라고 망한다.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의 역사가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그것이 아닌가. 

하박국 선지자 시대에 유다에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쳐들어 오고 왕을 쇠사슬에 묶어 바벨론으로 붙잡아 가고 예루살렘 성전의 거룩한 용도의 기구들도 바벨론의 자기들이 믿는 신당으로 다 집어 가기 시작했다. 그 시대 벼경을 기록한 열왕기 하나 역대하에 보면 그 죄악의 뿌리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이유를 무낫세 임금 때의 죄악으로 거슬러 올라가시는 것을 본다. 다 같이 열왕기 하 24장을 찾아보라.  거기 여호야김 왕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하박국은 여호야김 왕 때의 선지자이다. 그런데 그 여호야김이 왕이 된지 11년 만에 바벨론에 쇠사슬로 결박하여 끌고간 이유가 그 자신의 죄와 악도 크지만 “무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왕하24:3)라고 하셨다. 그리고 여호야김 자신 또한 백성들의 피를 많이 흘리게 한 악행 때문에 받는 심판이라고 하셨다. 

한 마디로 여호야김 왕은 하나님 앞과 백성들 앞에서 믿음으로 살았던 왕이 아니다. 열왕기하 23장 36절에 보면, “여호야김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고 지적하고 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악의 편에 서면 안 된다. 마틴 루터는 악을 보며 침묵하던 이들 가운데서 악을 악이라고 외치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길을 선택한 의인이었다. 그래서 그 자신의 마음을 뜨겁게 한 말씀은 하박국서를 인용한 로마서 1장 17절에  붙들린 것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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