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이렇게 살아가라(고후5:17-6:10) 2018. 2. 18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소설이 있다. 영국의 로버트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1850-1894)의 작품이다. 그의 소설 <보물섬>과 함께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지킬박사와 하이드>는 130년 전인 1886년에 발표되었다. 그 당시에 나온 소설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상력이 풍부한 작품이다. 런던이 발칵 뒤집히는 살인사건이 발생하는데 경찰은 범인 하이드에 대해 수사를 진행한다. 주변에서는 하이드를 아는 사람도 없고 가족도 찾지 못하는데 그의 사진 장도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범인인 하이드의 실체는 선하고 자비로운 의사이며 박사로 학식 높고 도덕심이 강한 헨리 지킬 박사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게 된다. 헨리 지킬 박사는 자기가 발명한 약을 먹고 하이드가 되어 악행을 저질렀지만 다시 약을 먹어 착한사람인 헨리 지킬 박사가 되어 버젓이 사회생활을 하고는 했다. 작가 소설의 주인공을 통해서 이런 말을 했다.
"지금까지 나는 언제나 악한 성격을 숨기고 착한 성격만 나타내려고 노력했다. 나의 악한 쪽인 하이드는 선한 쪽인 헨리 지킬보다 훨씬 몸집이 작고 약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나."
영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태어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그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대학에서 공학,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다. 그러나 폐병으로 인해 요양 생활을 하다가 문필 활동을 시작하였다. 미국 켈리포니아에서 열 살 연상인 남편과 별거 중이던 미국 여성 파니오스본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가 이혼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와 결혼한다. 파니오스본의 아이를 위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이야기가 그의 소설 <보물섬>의 시초가 된다. 그의 아내인 파니를 보면 연상에 체격도 좋아 그들이 부부인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를 아내로 보지 않고 어머니로 착각하곤 했다.
페병 요양을 위해서 사모아제도에 있는 우풀라 섬에 가서 가족들과 6년간 생활을 한다. 1894년 그가 숨을 거두고 가족들은 영국 국기를 내려 그의 무덤에 덮어 주었다고 한다.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집필할 당시 심한 불면증에 걸려 괴로워하다 아편을 먹고 잠이 들었다. 어떤 사람이 약물을 먹고 모습이 바뀌는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나 사흘동안꼬박 소설을 쓰게 되었다. 아내가 이건 괴기소설이니 우화적으로 고치는 게 어떠냐고 말을 하자그녀의 말을 듣고 다시 고쳐 쓴 것이 <지킬박사와 하이드> 라는 소설이다.
어떤 직분이 주어지는 것보다 더 어렵고 쉽지 않은 것은 그 주어진 직분을 제대로 잘 감당하는 일이다. 어느 분야의 자격시험에 합격해서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지만 그 직분을 잘 감당할 뿐만 아니라 훌륭하게 감당하고 존경 받기란 더욱 쉽지 않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뿐만 아니라 어느 분야에서 뛰어나고 이름이 나고 그 기량과 역량을 인정받아서 지도자가 되고 그 분야에 앞장서고 국내외적으로 유명해지고 하는 것 다 좋지만 구설수에 오르거나 루머, 스캔들, 불륜설에 휘말려서 추락하는 이들을 보면 그 뒷맛이 너무나 씁쓸하지 않나.
가령 유치원, 어린이집으로부터 시작해서, 초중고 교사가 되거나 대학의 교수가 되는 길이 쉽지 않지만 존경 받는 선생님이 되기란 그리 쉬운게 아니다. 더군다나 존경 받기 위해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 말고 그 인품이나 됨됨이나 자질이나 역량을 비롯한 사람됨이 훈훈하지 않으면 어떻게 존경받을 수 있겠나.
요즘 문학계, 연극계, 검찰부를 비롯한 사법부와 정치계, 학계, 군대, 의학계, 심지어는 종교계 안에서도 부끄럽고 민망한 이야기들이 연이어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든 분야가 다 그렇다. 성경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씀한다.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아니하고”(고후6:3)
요즘은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교단이 인정하는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여야 한다. 과거에는 신학대학 4년을 마치고 목사가 되기 위한 진급 시험을 1년차, 2년차, 3년차 치루고 신구약 성경, 신학 전반, 매해 진급 논문, 자격성품심사 등의 과정을 거쳐서 본인이 소속한 연회나 노회에서 그 해에 그 곳에 참석한 자격이 있는 연회의 회원이나 노회의 회원들의 동의를 받아야 안수 받고 목사가 될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는 정부의 문교부가 인정하는 공인된 대학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교단에서 인정하는 군소 신학교나 성경 학원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도 목사 안수 받는 길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목사가 되는 길이 예전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소위 스카이 대학이라고 말하는 명문대학을 졸업한 이들 중에서도 신학대학원 입학시험에 떨어져서 재수 삼수 사수 오수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특히 성경 시험에서 일정한 점수를 받지 못해서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법을 모르고 사법 시험을 치룰 수 없고, 의학 전문 지식이 없이 의사 시험을 치룰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법이나 의학은 일정한 학업 능력을 인정받으면 그 분야의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공부는 입학하는 첫 조건 중에 이미 일정한 수준의 신구약 66권의 성경 지식을 갖고, 요구하는 수준의 점수를 받지 못하면 다른 일반 과목의 성정이 우수해도 신학대학 혹은 신학대학원에서 받아 주질 않는다.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왜 이런 예를 드는가 하면 지금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에 대하여 몹시 위협을 받고 있다. 심지어는 사도직에 대하여 비방을 받고 있었다. 특히 고린도교회의 성도들 중에서 사도 바울의 사도권에 의심을 품는 이들이 많았다. 많을 뿐만 아니라 대놓고 비난하고 비방하였다. 그래서인지 바울은 그의 편지 13편의 모든 서두마다 자신의 사도권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으로 편지를 시작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1장 1절에 보면“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여러 차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겠다고 약속만 해 놓고 결국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서 한 번도 방문하지 못한 채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이 첫 불씨가 되었다. “오겠다고 했으면 와야지 약속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이가 무슨 사도냐”고 비난하는 이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 적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후서 5장의 본문 이전에 속하는 적지 않은 분량의 편지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는 내용을 다양하게 수록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교회의 핍박자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던 바리새파 율법주의자였던 사울이 변화 받은 것은 다멕섹 체험에 의해서였다.
사도행전 9장에 자세하게 그 내용이 나온다.“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사울은 예수로부터 이 말씀을 듣기 전에 이미 홀연히 비추는 강한 빛으로 인해서 땅에 엎드러졌다.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한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죽어 마땅한 일로 여기며 살기가 등등하게 대제사장을 통해서 다메섹의 여러 회당을 방문할 공문을 받아 가지고 나선 상태였다. 다메섹 성에 가서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자들을 만나면 남녀를 불문하고 색출해서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겠다고 장담하고 나선 길이었다. 그런 사울이 다메섹 성 가까이 가던 길에서 강하게 비치는 빛으로 인해서 땅에 엎드러진 것이다. 땅에 엎드러졌던 사울이 일어섰으나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도움을 받아 다메섹 성 안으로 들어 간 그는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사흘을 보냈다.
그 때에 주께서는 그에게 다메섹의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에 머무는 사울을 찾아 가서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고 하셨다. 아나니아는 평소에 소문에 들은 대로 사울이 교회를 핍박하는 악한 이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당황스러워하며 “예수 믿는 성도들을 박해하고 다니는 사울은 대제사장에게서 권한을 받아가지고 다니는 교회 핍박자인데요.”하고 반문하였다. 그 때에 주께서 차근차근 말씀해 주셨다. 사도행전 9장 15-16절에 나오는 말씀이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그렇게 시작된 사울의 변화는 이방땅의 곳곳을 넘나들며 온갖 고난을 극복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을 증거하는 이방의 사도가 되게 하셨다. 그런데 지금 고린도교회로부터 사도권에 대하여 비난과 비방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위협과 도전 앞에 있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변증하고 있는가. 본문은 그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을“너희는 이렇게 살아가라.”고 정한 것이다.
하나님과 화목하라.
우리가 잘 아는대로 사울은 하나님과 불화하던 유대주의자였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열심과 정열이 있었으나 그것은 모세의 율법을 알고 실천하는 율법주의자로서의 자기 열심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이룩하신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승천의 권능 있는 복음의 역사에 대하여 무지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의 사울이 변화 받아서 복음 전도자인 사도가 된 것이다. 그런 자기 변증 가운데 한 유명한 표현이 바로 고린도 후서 5장 17절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지금의 바울은 예전의 사울이 아니라는 변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어 있는데 지나간 과거의 사울의 모습을 붙들고 그렇다 아니다 라고 왈가왈부하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답답한 마음에서 18절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다.”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모든 것’이란 우주삼라만상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된 결과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17절의 ‘그런즉 누구든지’라는 표현 속에는 바울 자신이 “ 나 같은 포악했던 복음과 교회에 대한 훼방자요 핍박자라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는 간증과 고백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변화 받기 이전의 사울은 하나님과 불화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불화하던 어리석은 자였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하셔서 사도로 삼으신 것이다. 그의 사도됨은 ‘화목’(和睦)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를 믿는 성도된 우리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누군가에게 화목을 증거하고 전파하는 직분을 맡기신 것이다. 본문을 자세하게 보라.
사도 바울은 18절에서, ‘화목하게 하는 직분’, 19절에서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주셨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렇다. 성도는 누구나 다 그러하여야 한다. 우리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된 자녀의 권세를 은혜로 덧입은 자들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도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고후 5:18)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고후5:19) 이것은 인간에게 있는 죄의 문제를 인간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결하신 죄 사함의 은총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사도 바울이나 오늘날의 우리들은 모두가 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된 것이다. 여기서 사신이란 본래 로마 시대의 황제의 대사를 언급하는 표현이다. 이런 표현은 본문과 에베소서에 단 두 번 나온다. 에베소서 6장 20절에 보면“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使臣)이 된 것은”이라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비방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사도직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입증하는 표현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으로서의 사도된 바울의 권면과 간청은 무엇인가.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선언이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하나님과 화목한데 인간관계에 불화할 수 있나. 그럴 수는 없다. 아담과 하와가 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뱀의 유혹에 넘어 갔나. 뱀 앞에서의 하와나 하와의 말을 듣고 그대로 따른 아담은 각자가 그 순간에 하나님과의 화목을 떠났기 때문이 아닌가. 가인이 왜 동생 아벨을 죽였나.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그 순간에 가인은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였다.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에서는 죄와 악이 스며 들 수 없다. 20절의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말씀의 ‘화목하라’의 원래의 표현은 ‘화목되어라’는 수동태 명령어이다. 하나님께서 화목하게 해 주신 화목의 선물, 화목의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명령이다. 하나님의 골고다 언덕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이룩하신 그 놀라우신 구원의 사랑을 ‘아멘’하고 믿고 받아들이란 말씀이다. 이를 통해서 이룩하신 하나님의 업적이 무엇인가. 21절에 그 설명이 나온다.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508장 찬송,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라는 찬송가의 후렴은 이렇다.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어떤가. 여러분의 가정에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 화목이 아닌가. 잠언 17장 1절에 보면,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아무리 넓은 집에 살면 뭘하고 아무리 비싸고 좋은 차를 타면 뭘하나. 아무리 집안에 금은보화가 넘쳐 나면 뭘하나. 내외간에 불화하고 부모 자식 간에 불화하고 형제자매 간에 불화하고 동서간에 불화하고 고부간에 불화하고 시누이와 올케 간에 불화하다면 아무리 왕궁과 같은 고대광실에서 살면 무엇하나. 555m높이에 123층 빌딩인 ‘잠실 롯데 워드 타워’ 100층에 있는 시그니얼 서울 호텔 로얄스위트룸의 하룻밤 대실료는 2,000만원이라고 한다. 생수 2병 이외의 모든 냉장고 음료수와 생필품도 따로 사용료를 추가로 내야 한다. 하룻 밤 소비 수준을 그 정도로 누리며 살면 인생이 만족할 것 같은가.
어떤가. 성경은 예수 잘 믿어 명문대학교 가라. 예수 잘 믿어 성공하고 출세해라. 예수 잘 믿어 부자 되라. 예수 잘 믿어 무병장수해라. 예수 잘 믿어 만사형통해라. 예수 잘 믿어 승승장구해라. 예수 잘 믿어 남들이 부러워하는 생활을 하며 살아라.
좋은 집에 살아라. 좋은 차타라. 화화 요트도 가지고 자가용 비행기도 갖고 살아가가. 그렇게 교훈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생활을 무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예수 믿어 쫄쫄 고생만 해라. 거지같이 살아라. 하는 일마다 꼬여라. 예수 믿고 고생만 진탕하여라. 그런 말씀도 아니지 않나. 그러면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말씀이 무엇일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와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한 복음 17장에 보면 예수께서는“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라고 기도하였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신 기도 중에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이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가. 여러분은 요즘 사순절을 맞아 어떤 기도를 드리며 지내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먼저 보낸 첫 편지에서 이렇게 권면하였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신앙생활은 은혜 생활이다. 은혜 받은 경험과 은혜를 누리고 유지하는 은혜의 힘이 아니면 이처럼 끝없는 충성, 끝없는 헌신, 끝없는 희생, 끝없는 열심을 갖고 주를 섬길 수 있겠나. 사도 바울의 사도관은 분명하였다. 그는 고린도후서 6장 1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평소에 사도 바울 자신이 어떤 태도를 갖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알게 해주는 말씀이다. 바울 자신이 스스로 혼자 알아서 판단하고 알아서 결정하고 알아서 처리하며 사역하는 사도직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의 태도가 분명하다. 고린도 전서 3장 9절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라고 말했다. 그렇다. 성도된 우리는 우리끼리 알아서 우리가 일하는 자들이 아니란 말씀이다.
어느 기독교 기업가의 중역 회의실에 가면 수 십 명이 둘러앉는 긴 원형 테이블 중앙의 의자 하나를 늘 비워 둔다고 한다. 거기에는 아무도 앉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기업가의 경영 철학이 배어 있는 중역 회의실이다. 그 의자는 주님의 의자라고 한다. 주님이 그 기업의 최대 주주이시고 주님이 그 기업의 주인이시고 주님의 그 기업의 시작과 과정과 나중이시라는 경영 철학이 배어 있는 장면이 아닌가.
우리는 어떤가. 이런 글을 기억하지 않나.
“주님은 이 집의 주인이시오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오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이시라.”
우리가 주를 믿는 성도가 된 것이 나의 선택이 아니라 그분의 부르심이다. 이걸 깨닫고 나면 모든 것이 감사요 모든 것이 은혜요 모든 것이 간증이요 모든 것이 축복이요 모든 것이 감격이요 모든 것이 주님 안에서 새롭게 주어지는 보람이요 사명이 아닌가. 어디서 이렇게 단정하게 차려 입고 매주 찬송하며 지낼 수 있겠나. 어디서 이렇게 준비된 마음으로 성도들 간에 모여 예배드릴 수 있겠나. 어디서 이렇게 성도들 간에 매 주 모여서 사랑의 음식을 준비하여 둘러 앉아 함께 대화하며 먹고 마실 수 있겠나. 가족이면 그렇게 할 수 있나. 일가친척이 그런 생활이 매주일 가능한가. 우리가 부모형제 일가 천척이라도 일 년에 도대체 몇 번이나 만나서 함께 예배하고 함께 먹고 마시고 함께 기쁨과 즐거움과 슬픔과 고난을 서로 나누며 위로하며 격려하며 돌아보며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겠나.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무어라고 하지만 이 세상 그 어디에 교회만한 곳이 있나. 우리가 성도되어 매 순간, 매 시간 받아 누리는 이 은혜와 이 구원의 은총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하고 감사한 것인가. 왜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화목하게 하는 직분과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야 하나. 깨닫고 보면 이것처럼 귀한 은혜가 어디에 있고 이것처럼 귀한 구원의 감격이 이 세상 그 어디에 있나. 권력이 부럽나. 재벌이 부럽나. 세상 인기와 명예가 부럽나. 물론 좋다.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거기에 눈이 가리우고 거기에 빠져 버리면 나중에 초라해지고 나중에 불행해지고 만다. 사울 임금이 권력이 없고 왕의 지위가 없고 따르는 군사가 없고 병거가 없어서 불행해 졌나. 광야에서 지내며 먹을 것을 조금 구하던 다윗을 무시한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이 그의 몫으로 가진 양과 염소와 소와 약대가 없어서 불행해 졌나. 나발이 가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었나. 야곱의 형 에서가 장남으로 태어나질 못해서 불행해졌나. 장남은 아무나 되나. 에서가 들짐승을 사냥 할 줄 몰라서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받을 축복 기도의 기회를 놓쳤나.
마릴린 몬로가 인물이 남들만 못해서 일찍이 세상을 떠났나. 그녀가 남들처럼 노래를 할 줄 모르고 남들처럼 춤을 출줄 몰라서 불행하게 생을 마쳤나.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아버지를 잘 못 만나서 불행해졌나.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의 가문의 아들들이 아니었나. 솔로몬 왕이 잠언을 몰라서 불행해졌나. 잠언과 전도서의 말씀을 몰라서 이방의 처첩을 거느리고 우상 숭배에 빠졌나. 가롯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12명의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었나. 그 12명 속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었나. 그런데 그 거룩한 부르심의 직분을 왜 경홀히 여겼나.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한다. 그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그런 것이다. 이미 받은 은혜 요즘과 같은 사순절기에 받을 수 있는 은혜, 시시 때때로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으면 안 된다. 은혜 앞에 어리석은 자가 되면 안 된다. 은혜 받는 일에 거룩한 집착, 거룩한 야심, 거룩한 욕망과 거룩한 목마름과 거룩한 허기가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은혜로운 인생으로 쓰임 받을 수 있게 된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에서 말씀하는 ‘지금’이란 시간을 헛되이 여기지 말아라. 역사는 지금 변화되는 것이다. 은혜도 지금, 구원도 지금 받는 것이다. 때를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하였다. 때와 장소를 분별 할 줄 알아야 주님께 인정받고 상급 받고 면류관 받고 잘했다 칭찬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꾼답게 살아가라.
사도 바울은 고난의 사도였다. 그가 예수께 붙들린 이후에 그는 열방을 드나들며 복음을 전파하던 가운데 수 없는 고난과 고생과 환난과 역경을 극복해야만 했다. 그는 모든 고난들을 많이 견뎌야 했다.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는 고단한 나날과 시시 때때로 배불리 먹을 수 없는 배고픈 날들과 굶주림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감당하려 하였다. 바울은 여덟 번이나 채찍에 맞았다. 동족들인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 세 번은 이방인들에게 맞았다. 세 번은 태장으로 맞고 한 번은 돌에 맞았다. 세 번이나 배가 파선해서 일주일 밤낮을 깊은 바다에서 지낸 적도 있었다. 바울은 여러 번 감옥에 갇혔다. 빌립보, 예루살렘, 가이사랴, 로마 등 여러 번 갇히고 또 갇혔다. 5절에서 말씀하는 ‘난동’과 라는 고백은 난폭한 군중들과 폭도들에 의해서 겪었던 수모와 위험들을 추억하며 한 말이다. 이와 같은 어려움과 고난과 고생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고린도 후서 11장에서 더욱 더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나. “강, 강도, 동족, 이방인, 시내, 광야, 바다, 거짓 형제 중에서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6-27)고 간증하였다. 이것은 외적인 고난을 말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것 말고 바울이 고린도 후서 6장 6절 이하에서 고백하는 것에 우리는 주목하여야만 한다. 그는 고난 중에 성숙해진 자신을 변증한다.
6.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주님의 은총 가운데 이런 삶을 사모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