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 중에 흩어진 자들(행11:19-21) 2018. 2. 4
하나님이 사용하신 성경의 인물들과 지난 이천년 교회 역사의 주인공들은 대개가 정든 삶의 처소를 떠나 흩어진 자의 생을 살았던 이들의 역사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다윗,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엘리야, 엘리사, 세례 요한, 사도 바울, 베드로를 비롯한 12사도 모두 다 마찬가지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로마제국의 10명의 황제가 모두 다 기독교를 핍박했다. 기독교인들을 잡아 굶주린 사자의 먹잇감으로 던져 버렸다. 나무에 달아 기름을 붓고 횃불로 태우기도 했다. 네로 황제로부터 근 300년 간 로마 제국은 지독하게 교회를 핍박하고 교인들을 처형했다. 그러나 이후에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고 로마 통치아래 있는 모든 나라들이 예수님을 믿는 나라들로 변화됐다. 환난과 핍박이 극심하였으나 믿음의 선조들은 최후 승리를 체험하며 순교자의 길을 갔다.
우리나라도 대원군 시대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6명이 순교를 당했다. 강화도에 가면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쌓았던 성곽과 돈대가 해변 길을 따라서 즐비하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일가친척까지 처형했다. 일만 여 명의 기독교인들이 처형을 당했다. 그 후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은 36년 동안 200여 교회를 폐쇄하고 2,000여 명의 성도들을 투옥시키고 죽였다. 유관순은 17살 나이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숨졌다. 시인 윤동주는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1945년 2월 16일, 27살에 눈을 감았다. 북한 공산당은 북한에 있는 교회를 불태우고 30여 만 명의 교인들을 죽이고 교회를 핍박했다. 그러나 오늘 날 오히려 5만 교회와 10만 목회자와 1,000만의 성도의 교회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하였다. 이처럼 기독교는 그 어떤 환난과 핍박과 고통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믿음이 더욱 굳세어져서 전 세계로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환난과 고통이 올 때 도전하지 않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주저앉아 버리면 마귀에게 패배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18절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하였다.
야곱의 11번째로 태어난 아들 요셉은 열 명의 배 다른 형들의 미움을 받아 도단 성 가까이의 들판에서 옷이 모두 다 벗겨진 채 17살 나이에 애굽의 노예 시장으로 팔리어 갔다. 요셉은 극복하기 어려운 크나큰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노예였던 요셉은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게 되었다. 우여 곡절을 거친 요셉이 30살이 되어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애굽의 제 2인자가 되었다.
모세가 태어나던 때의 애굽에서의 히브리 남자 아이들의 운명은 참담했다. 태어나는 히브리 남자아이들마다 죽여여 했으니 말이다. 바로 임금의 이런 명령을 어기고 삼 개월을 숨겨 키우던 아기 모세의 부모는 어린 모세를 갈대 상자에 역청을 발라 그 속에 담아 나일 강에 떠내려 보냈다. 모세는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흩어진 자의 운명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런 아기 모세를 임금 바로의 딸인 공주의 손길에 거두게 하셨다. 모세는 40년을 애굽의 왕궁에서 왕자로 받아들여진 은혜를 입고 살았다. 그런 그가 살인의 현장에 연루되었다. 결국 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하나님은 40년 세월이 흘러간 때에 나이 80이 된 모세를 호렙산에서 부르셨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그의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의 땅 애굽에서 430년 만에 출애굽시켜 내시는 지도자로 사용하셨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일정한 땅에 머문 적이 별로 없이 언제나 흩어진 자의 경로를 따리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또 나아가는 고난과 시련과 환난을 극복하며 도전하는 세월을 살아야 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은 나치 독일의 히틀러의 미치광이와 같은 핍박 가운데 600여만 명이 죽임을 당하였다. 그 당시 세계에 흩어져 있던 900여만 명의 유대인들 중에서 삼분의 이인 600여만 명이 학살을 당하였다. 그러나 오늘 날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은 여전히 각 분야마다에서 미국과 세계 역사의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 는 인류의 문명 발전을 그의 책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에서“도전에 대한 응전”( for the challenge)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렇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개인이든 민족이든 고난과 핍박과 환난과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흩어진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번성하게 하시고 창성하게 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성령의 임재와 교회의 탄생은 얼마 후에 예루살렘을 벗어나서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지난 1월 한 달 동안 주일마다대한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를 보라. 가이사랴 지역의 주둔군이었던 이달리야 부대의 백부장 고넬료와 그의 친척과 친구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다. 이것은 성령이 이스라엘 밖에 사는 이방인들에게도 임한 역사적인 일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에 임한 핍박은 사도들 이외의 주를 믿는 성도들을 온 유대와 사마리아의 모든 땅으로 흩어지게 하였다. 유대인들 중에 장로와 서기관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첫 일곱 집사들 중의 한 사람인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였다. 이 일을 전후로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있었다. 사울은 그 당시에 교회를 잔멸하며 각 집에 들어가서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던 바리새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핍박과 환난 가운데 흩어진 신자들이 처처마다에서 복음을 전파하게 되자 복음의 불길은 열방을 향해서 점점 활활 타오르게 되었다.
지난 8년 전에 겪었던 환난이 아니었다면 우리 예수사랑교회가 이곳에 탄생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과거에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교회의 대 부흥기를 경험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와 6.25전쟁을 겪는 중에 평양의 신실한 믿음을 지켜 오던 신앙의 선조들이 핍박을 피하여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들 중에서 남쪽으로 내려와서 서울에 정착하며 빈손으로 낯 설은 도시에서 삶을 개척해 가며 신앙 생활하던 이들이 모여서 가마니와 거적때기를 깔고 시작한 교회가 남산 자락의 필동 언덕에 우뚝 선 영락교회가 아닌가. 그 개척 초창기와 번성기의 중심에는 한경직 목사가 있었다.
지난 17세기 초에 영국과 유럽 여러 나라에서 복음적인 신앙과 성경적인 믿음을 지켜 내려 하던 이들이 순수한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해서 대서양을 건너 찾아 나선 곳이 미국이었다. 400여년이 지난 오늘 날 세계에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하고 가장 큰 선교의 몫을 여전히 담당하는 나라는 역시 미국이다. 그 시작과 출발은 미미하고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오늘 날의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지만 그 시작은 102명의 청교도들이 영국의 플리머스 항구를 출발하면서였다. 1620년 9월 16일에 출발한 102명은 66일간의 항해 끝에 11월 21일, 오늘 날 보스톤 남부의 낚시 바늘 모양으로 생긴 케에프코드의 프로빈스 항구에 도착하였다. 그 곳의 기후는 이미 겨울 날씨였다. 그 동안 이미 절반의 인원이 추위와 괴혈병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혹독한 겨울의 추위를 견뎌내며 살아남은 자들에게 이듬해 봄이 찾아 왔다. 그들을 싣고 갔던 영국 선박은 그 이듬해 4월에 영국으로 돌아갔다. 저들의 항해에 도움을 준 메이플라워라는 배는 그 당시에 영국에서 프랑스, 노르웨이, 독일, 스페인 등을 오가던 화물선이었다. 길이가 30미터, 폭이 7미터 정도 되는 180톤 규모의 범선이었다.
그 후로 계속된 청교도들의 이주와 유럽과 세계 각국에서 몰려드는 이민자들의 연합으로 오늘 날의 미합중국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날의 그 화려한 발전의 이면에는 수많은 이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죽기를 각오하며 낯 설은 땅을 찾아 대서양을 건넜던 고난과 고통과 역경과 환난의 역사를 뒤로 하고 있다.
성경의 역사, 성경 인물들의 역사는 고독과 고난과 고통과 환난 가운데 주의 뜻을 찾아 가는 인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윗은 블레셋의 골리앗 장수를 물맷돌 한 개롤 처단 한 후에 사울 왕의 총애를 받는 이스라엘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의 세월이 지나지 않아서부터 다윗은 임금 사울의 시기와 살의 가운데 하루 밤도 마음 편이 잠을 청할 수 없는 불안하고 불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엔게디 광야와 막벨라 동굴로 숨고 피하던 다윗의 도피 생활은 10년 이상의 세월을 훌쩍 넘겨야 했다.
솔로몬을 끝으로 사울과 다윗의 대를 이은 120년간의 이스라엘 왕국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누이고 말았다. 두 왕조의 끝은 번성하는듯하였으나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략 앞에 더 이상 왕권을 유지 할 수 없었다. 성경은 그 이유를 하나님을 떠났고 우상을 숭배하였기 때문이라고 교훈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을 통해서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하여야만 했다. 다니엘이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포로 시대 초기에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젊은이들 중의 네 사람들이다.
일제 식민지와 6.25 전쟁을 겪고도 오늘 날 우리나라가 이만큼의 발전을 이룬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133년 전부터 이 땅에 찾아 와 목숨을 걸고 선교한 선교사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는 기독교의 지대한 영향을 받는 나라가 되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는 환난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가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베니게, 구브로, 안디온에 까지 이르러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있었다. 베니게란 레바논 산맥과 지중해 연안의 남북으로 200여km이르는 지역이다. 그 지역에 두로와 시돈이 있다. 예수께서도 두 번이나 그 곳에 방문하신 적이 있었다. 구브로는 지중해 동북부에 위치한 섬으로 오늘 날은 키프러스 혹은 사이프러스(Cyprus)라고 부른다. 사도행전 4장의 바나바가 구브로 출신의 섬사람이다. 안디옥은 예루살렘에서 북서쪽 480km 지점에 위치한 큰 도시이다. 로마 행정상으로는 수리아의 주도였다. 주후 100년경에는 로마와 알렉산더 다음으로 큰 도시로 발전했던 곳이 안디옥이다. 50만 명 이상의 인구가 살았다고 하니 그 당시로는 거대한 도시였다.
환난으로 흩어진 성도들을 통하여 계속된 복음의 확장에 대한 본문이 은혜가 되길 바란다.
헬라인에게 전파된 복음.
유대인들은 유대 땅을 벗어난 후에도 늘 동족들인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고는 하였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구브로와 구레네의 몇 사람들이 안디옥에 이르러 그 곳의 헬라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로는 이것이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대개의 유대인들은 여전히 동족인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던 당시에 이방 사람들인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특별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특별한 선민의식과 배타적인 신앙관에 비추어 보면 동족들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130여 년 전에 이 땅을 찾아 왔던 수많은 선교사들의 헌신을 생각해 보라. 그 당시에 상투를 하고 갓을 썼다. 여성들은 얼굴을 가린 쓰개치마 없이는 집 밖에 절대로 나설 수 없었다. 여성들은 자기 이름 없이 지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청년 이승만이 서양 문물에 눈을 뜨고 상투를 자른 일화가 역사에 전해진다. 그는 보수적인 양반 집안인 이씨 가정의 6대 독자였다. 이승만은 아펜젤러 선교사를 만나고 배재 학당에서 서양 학문을 접하였다. 이승만은 그 당시 의료 선교사로 한양에 와서 활동하던 에비슨 선교사와 긴 시간 상투를 자르는 문제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결심이 선 이승만은 아버지가 출타하신 틈을 타서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들어가 정중하게 절하고 어머니에게 사실을 고한 후에 며칠 간 집을 떠나 있겠다고 전하고 집을 떠나가서 상투를 잘랐다. 아들 이승만을 떠나보내던 어머니는 더 이상 말문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고 한다. 장로교 선교사였던 언더우드의 부인은 <상투쟁이들 틈에서 산 15년>(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이란 책을 쓸 정도였다.
1895년 10월 8일, 고종의 비인 명성 황후 시해 사건 이후에 상투를 자르는 삭발령이 내려졌다. 삭발령에 반대하는 이들은 “상투를 자르려거든 차라리 내 목을 자르라.”고 저항하며 덤벼들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단발령을 강조하는 지방관을 왜놈의 앞잡이라고 여기며 처형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청년 운동을 벌리며 단발계몽운동을 벌이는 지식인 청년들을 친일역적의 앞잡이라고 여겨서 집단 살해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반만년 이어온 상투를 어떻게 자르느냐는 반격이 거세게 이어졌다.
그러하던 이 땅에 복음이 받아들여지고 오늘 날처럼 교회의 부흥기를 맞은 것은 환난 가운데 흩어진 자들을 통하여 역사하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들과 함께 하신 주의 손.
그 당시나 오늘 날이나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일은 주님이 함께 하신 증거이다. 여기 21절에서 말씀하는 ‘주의 손’이란 주님의 능력을 말씀하는 것이다. 성경 신구약은 주님의 권능의 손길에 의해서 각종 기사와 이적들이 계속된 수많은 간증들을 싣고 있다.
여호수아를 앞장세우신 하나님은 요단강을 40년 전의 홍해처럼 강의 바닥이 드러나게 하셔서 건너게 하셨다. 요단강에서 올라온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 강 맞은 편 길갈에 진을 쳤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요단 강 바닥에서 가져온 12개의 돌을 길갈에 세웠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수4:24)
모세 시대 때에 바로 왕의 학정을 열 가지 재앙으로 심판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의 땅에서 출애굽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의 손길이셨다. 사무엘 상 5장에 보면 엘리 제사장 때에 이스라엘의 법궤를 블레셋에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였다. 블레셋 사람들을 여호와의 궤를 빼앗아다가 에벤에셀에서 아스돗의 다곤 신전에 두었다. 그런데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가서 보니 다곤 신상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져 있었다. 다시 일으켜 세워 두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보니 또 다시 다곤 신상이 엎드러져 있었고 이번에는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나가고 다곤 신상의 몸뚱이만 남아 있었다.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들에게 엄중히 더하였다. 독한 종기의 재앙이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였다.
여호와의 손이란 죽이기고 하시고 살리시기도 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상징이다.
여호와의 손은 세우기도 하시고 쓰러트리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여호와의 손은 망하게도 하시고 흥하게도 하시는 전능자의 손이다.
이사야 59장 1절에 보면,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인간의 죄악이며 인간의 손에 뭍은 피와 손가락에 뭍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다고 경고하셨다. 하나님은 죄악에 빠진 인간에게 경고하셨다.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사59:3)
사도행전 7장 25절의 스데반의 설교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신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손은 병들게도 하시고 온전히 고침 받게도 하시는 손이시다.
하나님의 손은 사람의 손을 통해서 역사하시기도 하신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3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성전 미문 앞의 걷지 못하던 거지를 고친 사건으로 인해서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 앞에 서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나중에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풀려나자 억울한 일을 당한 소식을 들은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소리를 높여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 기도 내용 가운데 보면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이와 같은 기도가 끝나자 그들이 모여 기도하던 곳이 진동하였다. 기도하던 무리가 다 성령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주께로 돌아 온 수많은 사람들.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는 것은 사람의 힘이나 사람의 지식이나 사람의 설득 능력에 있지 않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오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이다. 주님이 함께 하셔야 한다. 우리 스스로 열심을 갖는 것도 필요하긴 하지만 성령이 역사하셔야 한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이 함께 하셔야 한다.
이는 개인, 가족, 가정사, 나라, 민족, 교회의 모든 일들도 다 마찬가지이다. 최근에 우리나라의 최 고위직을 지낸 한 명사가 교회의 간증을 보았다. 그는 지난 100년 동안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와 6.25 전쟁의 아픔과 민주화 과정의 긴긴 고난을 날들을 거쳐서 오늘 날의 국가 발전과 이만한 안정을 얻게 된 배후에는 우리 민족에게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찬양하야야만 한다고 강조하였다. 우리 모두 이의가 없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도우심이요 내려 주신 무한한 복이다.
이는 개인과 범사가 다 그러하다. 우리 각 사람과 우리 교회가 물댄 동산과 같은 복을 누리고 열방을 향하여 선교의 사명을 일정 부분 감당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제단을 통해서 믿고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전능하신 주님의 손길이 함께 하셔야만 한다. 우리 모두가 그런 주의 손길에 붙잡혀 쓰임 받는 주인공이 되기를 간구하고 열망하자.
독일 본(Bonn)에서 살면서 ‘CLW'(Center of the Living Word)인터내셔널 자유교회의 집사인 손영숙 집사의 간증이 언론에 실렸다.(2018. 1. 27. 국민일보) 그녀는 1972년, 22살에 독일에 간호사로 취업되었다. 3년 만에 돌아온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그 곳에서 파독 한인 광부 청년과 만나 가정을 꾸몄다. 독일 북부의 킬이란 곳에서 7명의 한인 간호사들과 함께 근무하였다. 외로움과 스트레스와 향수병을 이기느라 고생도 많이 하였다. 두 딸과 한 아들 삼남매를 낳아 키웠다. 그런데 결혼 7년 만에 남편이 간경화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병든 남편 간호하랴 어린 자녀들 돌보랴 야간 근무하며 간호사 생활하려 온 몸이 녹초가 되고 파김치처럼 되었다. 자신의 몰골도 점점 형편이 없어져만 갔다. 한번은 근무 중에 병원 의자에 앉아 골아 떨어졌다가 호되게 꾸지람을 받기도 하였다. 그런 어느 날 한인 동료 간호사를 통해서 예수를 전하는 전도를 받게 되었다. 예수 믿고 질병에서 고침 받은 간증집과 성경책도 선물로 받았다. 그에게 전도한 동료 간호사를 따라 한인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마음에 고요가 찾아오고 평안이 찾아 들었다. 한번은 꿈을 꾸었다. 아름다운 음악소리와 함께 천국과 같은 아름다운 풍경을 꿈에 보았다. 꿈에 만난 시어머니에게 남편이 이제 병이 다 나았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하기도하였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틈틈이 성경을 읽고 성경을 쓰고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는 생활이 자신의 일과의 전부처럼 되어 있었다. 그의 기도는 간절했다. 남편은 병을 딛고 건강도 회복하였다. 삼남매도 어려서부터 철저한 신앙 훈련 가운데 키워 왔다. 올해 67살인 손영숙 집사의 장남은 독일 은해의 펀드 매니저다. 큰 딸은 우리나라 대기업의 현지 과장이다. 작은 딸은 본 대학의 외과 의사이고 작은 사위는 청소년 사역에 열심을 갖고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미 홍 목사이다. 손영숙 집사는 한국 방문 길에 오랫동안 불교 신자였던 외할머니와 친정어머니와 이모 등을 모두 다 전도하는 열매를 맺었다. “그 동안 질곡 많은 인생을 살아 왔지만 주님을 믿는 지금의 삶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평안하고 은혜가 충만하다.”그의 간증은 이렇게 끝났다. 환난으로 흩어진 무리들의 복음 전파와 구브로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졌던 시몬처럼 구레네 사람 몇이 헬라의 이방인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한 주 예수의 복음은 주님의 손이 함께 하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오는 대 부흥기를 맞게 되었다.
주께서 주님의 손으로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 가운데 물 댄 동산과 같은 그런 간증이 개인마다 가정마다 넘쳐나고 그런 간증이 끊이지 않는 교회로 섬겨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