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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이 마음을 품으라(빌2:1-11) 2017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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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7-10-03 22:14 조회 15,977 댓글 0
 
 이 마음을 품으라(빌2:1-11)              2017. 10. 1 세계성찬주일
 
 
오늘은 세계 성찬 주일이다. 성찬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주 안에 하나 됨을 고백하는 거룩한 예식이다. 성찬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마지막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 교훈해 주신 죄 사함의 은혜를 기념하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성찬에 참여함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다. 죄 사함을 받은 성도들이 죄 사함의 은총을 감사하며 주님의 구원의 은혜와 권능을 높이며 경배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성찬의 의미를 기념하고 마음 깊이 되새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생명의 구주로 믿고 따르는 증거 중의 하나가 성찬에 참여 하는 것이다.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쓴 사도 바울은 다메섹 체험 이전까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 때에도 그는 마땅히 돌아 맞아 죽어도 좋다고 여겼다. 변화되기 전의 사울은 살기등등한 율법주의자였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으나 그의 마음에 평화란 없었다. 그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딤전1:13) 그는 그렇게 함부로 행동할 때의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으라”고 자신의 악을 시인하였다. 그런 그가 다메섹 체험을 통해서 완전히 새 사람으로 변화 받았다. 핍박자 사울이 위대한 복음 전도자 바울로 바뀌었다. 복음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의 본문에서 말씀하는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권면의 말씀은 곧 자기 자신이 늘 믿고 준행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했던 신앙의 태도를 빌립보 성도들에게 전한 것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되신 예수의 마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그런 사실을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다”고 규정해 주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의 본체시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부분적으로 하나님이신 분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와 같은 설명은 7절의 ‘종의 형체’라는 말씀과 비교되는 예수님의 절대적인 모습이다. 예수님은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완전한 본체이시다. 그런 예수님께서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또한 7절의 ‘종’이란 표현은 11절의 ‘주’이신 예수님의 모습과 극에서 극을 이루는 표현으로 과연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설명하는 말씀들 중의 하나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그는 하나님의 본체 즉 곧 하나님이셨다. 물론 예수께서 이 땅에 몸을 입고 계신 동안에도 하나님 아버지는 높고 높은 하늘 보좌에 계셨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시간가 공간을 초월하여 형체와 모든 행함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하나이시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계셨다고 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됨이 제한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적으로 분리되시는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한분이시다.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시기 위해서는 7절의 ‘자기를 비워’라고 설명하는 ‘비움’을 통해서 오신 것이다. 여기서 ‘비운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권능을 비우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낮고 천하다. 아담 이후로 타락한 인간은 죄 가운데 나서 죄를 일삼고 죄 가운데 살다가 죄 가운데 영원히 멸망하는 심판을 벗어 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용서해 주시므로 회개하고 죄 사함 받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선물해 주셨다.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였다. 아담과 하와는 인간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존재로 인간을 지으셨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어떤 외모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지 않나. 지정의(知情意)로 인간됨을 구별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 인간 안에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그 사랑의 성품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 됨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은혜와 진리를 깨달은 사도 바울의 권면은 분명하다. 본문 빌립보서 2장 1-4절까지의 강조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라고 되어 있지만 원 뜻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면”(united with Christ)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조인가.
 
무슨 권면을 하거나
사랑으로부터 무슨 위로를 하거나
성령으로부터 무슨 교제를 하거나
무슨 긍휼이나 자비를 행한다고 하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답게 행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권면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살아가라고 했나.
같은 마음
같은 사랑
뜻을 합한 마음
한 마음
겸손한 마음
남을 돌보는 마음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은 자의 마음이란 말이다.
 
겸손한 마음이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는 마음이다.
겸손한 마음이란 각각 자기보다 남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겸손한 마음이란 각각 자기 일을 돌아 볼 뿐만 아니라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는 마음이다.
사도 바울은 그런 소식을 들을 때에 자기의 마음에 기쁨이 충만해 진다고 했다.

이런 면에서는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첫 아담의 타락을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께서 회복시켜 주신 것이 구원이고 중생이고 죄 사함이고 영생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배반자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시고 갈릴리의 새벽 해변에 찾아 가셨다. 그리고 베드로와 함께 해변에서 떡과 물고기를 구워서 조반을 함께 잡수셨다. 그 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는 사랑을 확증하는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물으시고 대답을 들으셨다. 예수님의 그러한 질문은 베드로를 성령 받는 자리에 120 성도들과 함께 머물러 간절히 기도하는 제자로 회복시켜 주셨다. 주님의 그 사랑이 도망 다니고 숨고 비겁하게 행동하던 베드로를 역사적인 초대교회의 위대한 사도로 택하여 쓰신 계기가 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사람과 같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우주선을 타고 오시거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비행물체를 타고 오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께서 나사렛의 동정녀 마리아의 태를 빌려 이 땅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게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의 성정을 갖고 사셨다. 예수께서는 너무 고단하여 뱃고물을 베고 깊이 잠이 드신 적도 있으셨다. 예수님도 배가 고파서 아침나절에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따서 잡수시려 하신 적도 있으시다. 예수께서는 너무나 시장하고 목이 말라서 수가 성 우물가에 물을 길러 나온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 좀 달라고 청하신 적도 있으시다.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은 소식을 듣고 우시기도 하셨다. 예수님은 세리나 창기도 멀리 하지 않으시고 저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아야할 이들로 여겨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님은 누구하고라도 어울려서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천국을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러나 때로는 손에 채찍을 드시고 성전의 돈 바꾸는 자들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상과 괘를 뒤 엎으시며 변질되고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청소하시고 분노하셨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안수해 달라고 어린 아기들을 안고 오는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의 어린 자녀들을 일일이 안수하고 사랑으로 축복해 주셨다.
 
예수님은 언제나 오성급 호텔에서만 식사하시고 누가 문을 열어 주어야만 승용차에 타고 내리고 누군가가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집안에도 들고 나지 않는 그런 분이 아니셨다. 예수님은 누가 따로 우산을 씌워 주길 바라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사는 분이 아니셨다. 예수님은 참으로 인간적이고 너무나도 인간적인 분이셨다. 예수님은 너무나 고상하고 너무나 고매하여 감히 그의 곁에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는 그런 분이 아니셨다.
 
예수님은 유대 남자들이 신는 샌들을 신고 흙먼지 나는 갈릴리 주변의 마을과 회당을 일일이 찾아다니시던 땀내 나는 유대인과 똑 같은 옷을 걸치고 생활하신 매우 서민적인 분이셨다. 예수님의 곁에는 그를 통해서 고침 받고 치유 받기 원하는 각색 병자들로 넘쳐 났다. 앞을 못 보는 이들,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이들, 손이 마른 이들, 걷지 못하는 이들, 나병인 한센 병에 걸린 이들, 12해 동안이나 혈루병으로 고생하는 여인, 심지어는 38년된 병자도 예수님을 만나니 깨끗함을 입고 악취 나는 자기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은혜를 입었다. 심지어는 죽은 자도 살아났다. 귀신이 떠나가고 새 사람이 되는 기쁨은 귀신 들렸던 본인과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모두 다 회복의 기쁨을 함께 하였다.
 
예수님은 여리고 성민들이 모두 다 싫어하는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친히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셔서 음식도 대접 받으시고 그의 집에서 묵어가길 원하셨다. 그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 앞에 여리고의 키 작은 부자 삭개오가 마음이 움직였고 경제적인 탐심을 내려놓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을 고백하는 삭개오에게 구원 받는 온전한 믿음을 축복해 주셨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친구처럼 대하셨고 이웃집 사촌처럼 대하셨다. 예수님은 어른 아이 청년과 노인,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자, 건강한 자와 병든 자, 권력이 대단히 높은 자와 압제 받는 자를 구별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필요하시면 상대방의 지위나 권력에 구애 받지 않으시고 악은 악이라고 지적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셨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화가 있을 것이라”고 듣기 어려운 쓴 소리도 말해야 할 때는 담대하게 말씀하시는 선지자이셨다. 사도 바울의 강조는 분명하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죄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죄가 없으시지만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시며 구원을 완성해 가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다운 성도가 되자는 권면이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의 마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와서 사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셨다. 십자가 처형은 강도를 처형하는 최악의 처형 방법이다. 그런데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왜 그런 처참한 십자가 처형을 받으셔야만 했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하라 하신 사명을 온전히 다 순종하셨다.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신 것은 완전한 복종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을 피하기 위해서 도망가시거나 숨으시거나 하늘에서 천군천사를 동원하셔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로마 병정들을 심판하지 않으셨다.
 
옷을 벗기면 벗기는 대로 온갖 부끄러움을 다 당하셨다. 얼굴에 침을 뱉고 따귀를 때리고 주먹으로 치고 이마에 가시관을 씌우고 무서운 채찍으로 때리고 또 때리는 온갖 조롱과 채찍질을 다 당하셨다.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까지 갈만한 기운도 없으셨다. 그래서 넘어지고 쓰러지셨다. 614장, “얼마나 아프셨나”를 부르자.
 
“얼마나 아프셨나 못 박힌 그 손과 발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님
하늘도 산과 들도 초목들도 다 울고
해조차 빛을 잃고 캄캄하게 되었네
오 놀라운 사랑 크시고 끝없도다
오주님 사랑에 구원의 강물 넘치네
나의 죄 너의 죄와 우리의 모든 죄를
모두 다 사하시려 십자가 달리신 주
얼굴과 손과 발에 흐르는 그 귀한 피
골고다 언덕 위를 붉게 물 들이셨네
오 놀라운 사랑 크시고 끝없도다
오주님 사랑에 구원의 강물 넘치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은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의 삶을 살고자 씨름한 것처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온전하고 성숙한 성도의 삶을 초청하고 권면하는 말씀이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전11:1)고 권하였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 이후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역사 가운데 위대한 사도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본받고 예수님의 마음을 마음에 품고 살았던 경건한 복음 전도자였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마음을 내 마음에 품는 것이다. 맞다. 그래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의 모습이요 태도이다. 사람과 사람이 마음이 통하면 서로 친구도 될 수 있고 부부도 될 수 있고 생명도 나눌 수 있다. 장기도 떼어주고 눈도 빼어 주고 내 모든 소유와 가진 것을 모두 다 주고 싶어 한다.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예수님의 이와 같은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다. 이를 분명하게 교훈해 주신 말씀이 로마서 6장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5-11)
 
우리교회가 이런 교회와 이런 성도가 되길 소망하고 고백하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도 바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고 마음에 품고 사는 신앙에로의 초청의 말씀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오늘 성찬과 함께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부활 하신 예수님, 승천하신 예수님, 다시 오실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과 감격이 우리 각 사람의 마음에 함께 하셔서 언제나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 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늘 함께 하시길 축원한다. 
 

하나님이 높여 주신 예수의 마음.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셨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무덤에서 다시 살려 내셨다. 9절 이하의 말씀 그대로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다.
하나님은 부활 하신 예수님께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그렇지 않나. 베들레헴의 마구간에 태어난 아기 예수의 모습과 부활 승천하신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비교하여 보라.
옷을 벗겨 부끄럽게 하고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을 치고 따귀를 때리고 채찍으로 치고 가시관을 씌워 짐승처럼 취급하며 끌고 가던 로마 병정들 앞에 널브러져 계신 예수님이 비참하고 참담한 모습과 부활의 영광과 승천의 신비를 비교하여 보라. 이런 묵상을 하다 보면 “예수 우리 왕이여”라는 38장 찬양이 절로 찬송되지 않나.
 
“예수 우리 왕이여 이곳에 오셔서
우리가 왕께 드리는 영광을 받아주소서
우리는 주님의 백성 주님은 우리 왕이라
왕이신 예수님 오셔서 좌정하사 다스리소서.”
 
맞이한 시월! 깊어가는 가을! 이와 같은 신앙의 고백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 각 사람의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성령 충만한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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