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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자(시91:1-16) 2017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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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7-07-30 17:46 조회 17,415 댓글 0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자(시91:1-16)       2017. 7. 30
 
요즘처럼 습도가 높고 계속하여 폭염이 계속되는 여름에는 잠시 잠간 동안만이라도 그늘이 좋다. 요즘 구청마다 앞장서서 시민들을 위해서 배려하는 그늘 막을 설치하고 있다고 한다. 건널목이나 시내의 곳곳에 햇볕을 가릴 수 있는 가림 막을 설치 해 놓았다. 햇볕에서의 온도와 그늘에서의 기온 차가 평균 4도 차가 난다고 한다. 바람이라도 선선하게 부는 날에는 그늘에 들어서는 그 느낌은 경험한 분들은 누구나 다 안다.
 
옛날 시골에서는 마을 입구의 커다란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 평상을 만들어 놓고 한 여름 낮에 그 곳에 모여서 더위를 식히고는 하였다. 노인들이 그늘 아래서 장기도 두고 낮잠도 자고는 하였다. 요즘이나 농촌 마을에도 마을마다 ‘마을 회관’이란 시설이 있어서 그런 공간의 배려를 받지만 말이다.
 
뙤약볕 아래서는 양산만 써도 훨씬 시원하고, 밀짚모자만 써도 훨씬 낫다. 그늘에 거하게 되었는데 바람 까지 불어 주면 더 좋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분이시고 교회는 그런 곳이어야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8-30)
 
그렇다. 예수께로 가면, 진정으로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게 되면 주 안에서 누리는 안식과 평화란 세상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이 전능자로서 그를 믿고 의지하는 인생들에게 그늘이 되어 주신다. 그늘이란 보호하시고 감싸시고 인도하시고 동행하시고 울타리 되어 주시는 구체적인 주님의 은총을 표현하는 말이 아닌가.
 
우리가 어려서 부르던 동요 중에 <산 바람 강바람>이란 제목의 노래를 기억하는가.
윤석중 작사 박태현 작곡의 동요이다.
“산위에서 부는 바람 서늘한 바람
그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준데요
한 여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하다가 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땀을 식히려고 한다. 그런데 마침 바람까지 불어 주면 아무리 더운 여름이지만 그늘에서 느끼는 바람의 맛은 얼마나 시원하고 좋은가.
 
하나님은 모세의 광야 시대 40년 동안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다. 시편 91편은 누가 언제 쓴 시편인지에 대하여 알 수 없다. 그러나 내용 중에 보면 마치도 다윗이 즐겨 쓰던 표현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아서 아마도 다윗의 시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2절의“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하는 표현 말이다.
 
여하튼 시편 91편에서 눈에 띄는 표현은 “그늘”이란 표현이다. 나보다 힘이 있고 나보다 능력 있고 나보다 권세 있는 그 누군가가 나의 그늘이 되어 주기만 해도 힘이 되고 의지가 되고 때로는 으스대며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하물며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고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서 살아가는 자라면 어찌 세상 인생의 보호를 받으며 그 그늘에 거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세상 그늘이란 것은 고작해야 선지자 요나가 경험하였던 박 넝쿨 그늘 정도가 아닌가. 선지자 엘리야가 지치고 피곤한 몸을 로뎀 나무 그늘 아래 피하려고 했던 그런 정도의 그늘이 아닌가.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제자 빌립의 친구 나다니엘은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 있을 때에 이미 예수께서 그를 주목하여 보셨다.  예수의 초청을 받게 된 나다니엘은 무화과나무 그늘 정도가 아니라 평생, 영원히 12제자의 반열에 오른 은총의 주인공이 되었다.
 
전능자의 그늘, 시편 91편 1절은 하나님을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지존자, 전능자’라고 하였다. 그렇다. 이 세상에 지체 높고 큰 사람의 그늘도 좋지만 세월이 지나면 세상 권력, 세상 재물, 세상 인기, 세상 지위의 그늘이란 것은 요나가 경험한 박 넝쿨 그늘처럼 별 볼일 없이 시들어 사라지는 그늘이 되고 만다. 그러나 전능하신 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하심 가운데 살아가면 그 그늘은 큰 그늘이요 시원한 그늘이요 안전한 그늘이요 만족스러운 그늘이요 자자손손 영원한 구원의 그늘이 되신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자가 믿고 의지하고 섬기며 따르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건지시는 하나님.
시편의 고백자는 하나님을 멀리 계신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는다. 인생의 그늘이 되어 주시는 전능자이신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은 머리로는 안다. 다른 믿음의 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사랑의 그늘을 실감나게 체험하고 매 순간마다 그 은혜를 깨달아 알고 누리고 전하고 산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그늘 아래 활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건만 나는 무덤덤하고 냉랭하고 아무 체험도 없고 아무 실감도 나지 않는다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그런데 시편 91편의 기록자는 다르다. 그는 분명하게 고백하고 또 고백한다. 그가 믿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3절 말씀대로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 건져 주시고 심한 전염병으로부터 건져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14절에 보면,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고 하셨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마치도 어미 새가 새끼 새를 커다란 날개 깃 아래 보호하듯이 보호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4절에서 말씀하는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하는 말씀은 어미 새와 같으신 전능자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할 수 있도록 보호하신 다는 말씀이시다.
 
하나님의 진실하심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신다. 그렇다. 전능하신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방패가 되어 주신다. 적의 화살과 창과 칼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죽음의 위기에서 건지시되 완벽하게 보존하시고 막아 주시는 능력의 방패가 되시는 주님이시다.
 
다윗의 생애가 그랬다. 다윗을 사울의 창과 칼로부터 보호하시고 건져 주신 분은 전능하신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다윗은 그를 잡아 죽여 없애려는 사울의 군대가 새 사냥꾼의 올무처럼 그의 광야 생활을 숨 막히도록 추격해 왔다. 다윗의 십년이 훨씬 넘는 광야 생활, 동굴 생활, 이웃 나라에 망명해서 미친 자처럼 거품을 물며 쓰러지는 연기를 해 가며 목숨을 지켜 가기 원할 때에 그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그 때 그 때마다 건져 주신 분은 전능하신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다윗은 고단할 때마다 하나님이 그의 그늘이 되어 주셨다. 다윗은 위기의 순간  순간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섬세하신 손길로 그를 대적들의 위협으로부터 막으시고 건져 주셨다.
 
다윗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이 아니었다면 5-6절의 고백처럼 “밤에 찾아 드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  오는 재앙의 두려움”으로부터 그를 지킬 힘이란 없었다.
 
70장 찬송 “피난처 있으니”라는 찬송의 3절 가사처럼
 
“만유 주 하나님 우리를 도우니 피난처요
세상의 난리를 그치게 하시니 세상의 창검이 쓸데없네”
 
이런 믿음, 이런 신앙이 우리 각 사람의 신앙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요청을 받아 들여 사라의 여종인 하갈을 통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다. 나이 들어가고 자식 없을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다리다 지친 아내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에게 간청하여 낳게 된 몸종 하갈을 통한 자식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말씀으로 불러내신 지 25년 만에 사라를 통하여 아들을 낳게 하셨다. 그 아들이 이삭이다. 그런데 어느 날 사라가 장막 밖을 내다보니까 이스마엘이 이제 갓 젖을 뗀 어린 이삭을 놀리고 괴롭히고 있었다. 생각해 보라. 사라가 90살에 낳은 아들 이삭이니 그 아들을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겠나. 그런데 배 다른 형제인 14살 위인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자기 아들 이삭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날부터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안에서 내어 쫓으라고 성화가 불같았다.
 
아브라함은 여러 날 동안 몹시 답답하고 난처한 마음으로 근심하며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 언약의 자손은 이삭이니 너무 근심하지 말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보내라고 하셨다.“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말씀도 해 주셨다. 창세기 21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다음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난 아브라함은 떡과 가죽 부대에 담은 물을 하갈의 어깨에 메어 주고 아들 이스마엘을 데리고 떠나가게 하였다. 작별의 순간이 찾아 온 것이다. 성경은 그 상황을 담백하게 기록하고 말지만 그 순간에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하였겠나. 16살쯤 된 아들 이스마엘의 손을 잡고 어깨에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메고 브엘세바 광야로 나서던 하갈의 심정이 어땠겠나. 낮에 뜨거운 뙤약볕이 내려 쪼이고 밤이면 기온이 뚝뚝 떨어지는 브엘 세바 광야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창세기 21장 14절에 보면 ‘방황’이란 표현이 나온다.
 
안철호 작사 작곡의 <세상에서 방황할 때> 라는 복음성가가 있다. 1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내 맘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네
예수여 이 죄인도 용서 받을 수 있나요
벌레 만도 못한 내가 용서 받을 수 있나요”

그렇지 않나. 인생이 하나님 모르고 예수 모르며 살면 세상에서 끝 없이 고단한 인생길을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거리며 방황하며 살게 되지 않나.
 
하갈은 이스마엘을 복중에 가진 채로 쫓겨 난 적도 있었다. 하갈은 바깥 주인 아브라함의 씨가 자기 태중에 자라나고 배가 불러 오자 여주인 사라를 멸시하고 깔보기 시작하였다. 생각해 보라. 아무리 사라 할머니가 자식 없이 연세 들어가기로 가만히 있겠는가. 멸시 받은 사라 할머니가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그 때 사라의 나이가 76살이었다. 성경이니까 한두 줄로 젊잖게 지나갔지 아브라함의 장막이 조용했겠는가. “너 이 무엄한 계집아.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네까짓 년이 나를 무시하고 멸시 해. 이 고약한 것아.”허구 헌 날 난리가 나지 않았겠나.
 
며칠 전 큰 길 건너 아파트 단지 2차선에서 사차선 한 가운데 거리 중앙에 승용차를 세워 두고 운전석 문을 열어 제치어 둔 채로 50대 초반의 부인이 길을 건너던 60대 초반의 오른 팔에 기브스를 한 여성과 말다툼을 하는 현장 뒤에 갇혀서 오도 가도 못한 채 두 부인의 욕설이 난무하는 싸움의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하였다. 짖궂은 시민이라면 핸드폰 동영상에 담았을 것이다. 얼굴과 얼굴을 5센티거리로 좁히고 코와 코가 맞닿을 정도로 얼굴을 맞대며 입에 거품을 물고 큰 소리를 싸우는 두 부인의 모습을 보면서 사납지 않는 부인과 사는 것을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주여 저런 여자가 내 집안에 없는 것으로 인하여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나이다.”
 
결국 하갈은 여 주인과 싸움 한번 시원하게 하지 못하고 만삭이 되어 가던 무거운 몸을 이끌고 광야로 도망치고 말았다. 그 때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술 길 샘 곁에서 하갈을 만나 주셨다. 그리고 위로해 주셨다. “네 주인의 집으로 돌아 가라. 장차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해라. 네가 낳을 아들의 후손의 씨를 내가 번성하게 해주겠다. 네가 낳을 아들은 사람들 중에 들 나귀같이 될 것이다.” 하갈은 광야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기 앞의 우물 샘을 “브엘라헤로이”라고 이름지었다.“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우물”이란 뜻이다. 다시 용기를 내어 주인의 집으로 돌아간 하갈은 시간이 지나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하갈은 아들과 함께 다시 광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삭막한 브엘세바 광야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죽음으로 몰아가지 않으시고 건져 주신 분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그 장면의 절정은 창세기 21장 15절이다.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은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하갈은 저 만치 거리에서 아들을 바라다보며 마주 앉아 울고 있었다. 관목 덤불 아래서 이스마엘은 이스마엘대로 울고 하갈은 하갈대로 저 만치에서 울고 있었다. 그 때 하나님이 하갈에서 천사를 보내셨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 일어나 네 손으로 아들을 붙들어 일으켜라.” 그리고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광야에서 하갈에게 말씀하셨다.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21:18)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하갈의 눈을 밝히셨다. 그 때 하갈의 눈에 샘물이 보였다. 목이 타 들어 가던 하갈은 달려가서 샘물의 물을 가죽부대에 담았다.  그리고 아들 이스마엘에게 마시게 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마엘과 함께 하셨다. 이스마엘은 장성하여 광야에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다. 
 
우리가 믿고 따르고 섬기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를 찾고 의지하는 자에게 그늘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멘
 

지켜 주시는 하나님.
7절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지켜 보호하시는 인생을 위하여 그를 대적하는 왼쪽의 천명, 오른 쪽의 만 명의 대적자라도 엎드러지게 하시는 전능자이시다. 이사야 37장에 보면 히스기야 임금 때에 앗수르의 산헤립이 유다를 향해 전쟁을 벌였다. 임금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와 함께 밤 새워 부르짖어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하나님은 다음 날 아침에 앗수르의 군대 185,000명을 송장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보호하기로 작정하신 인생을 위하여 재앙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아 주시는 전능자이시다.
 
왜 우리가 기도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히스기야 임금이 이사야 선지자와 함께 기도할 때에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대하32:20)라고 했다. 임금 히스기야는 “임금의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나아가서 기도하였다. 기도하여야 한다. 겨울에도 기도하고 여름에도 기도하여야 한다. 새벽에도 기도하고 밤중에도 기도하여야 한다. 지난 금요일 밤에도 “깊은 밤중에 드리는 기도”시간에 어른 아이 모두 모여 다 같이 힘차게 찬송하고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맞다. 그렇게 하여야 한다.
 
시편 91편을 다시 보라. 하나님을 지존자로 섬기고, 하나님을 전능자로 모시고 따르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늘이 되어 주신다. 건지시고 지켜 주신다. 신명기 32장 11절의 말씀처럼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날개 위에 얹어 보호하듯이 지켜 보호해 주신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지키시되 마치도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하듯이 보호하시고 지켜 주신다.(사31:5) 하나님은 성도들을 환난에서 지키시되 호위하시고 건지시고 환난과 시험을 뛰어 넘어 구원 받게 하신다. 하나님은 악인들에게는 심판으로 보응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피난처 삼고 지존하신 전능자 하나님 아버지를 거처 삼고 살아가기 원하는 성도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화가 미치지 못하도록 막아 주신다.  하나님은 재앙이 성도들의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신다.(시91:10) 장막이 무엇인가. 말라기 2장 12절의 “야곱의 장막”이란 말씀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보금자리와 삶의 거처가 장막이 아닌가. 하나님은 성도들의 장막에 재앙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지켜 보호하여 주신다. 11절에 보면,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도록 천사의 손으로 붙들어 주신다. 시편 37편 31절에 보면,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있는 인생의 걸음을 실족함이 없도록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만족한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
개인적으로는 시편 91편의 후반부에 있는 14절부터 16절까지의 말씀을 참으로 좋아 한다. 그렇지 않나.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환난과 풍파와 시련과 질병과 고난 가운데 나를 그냥 내버려 두시겠나.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시91:14-16)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니 내가 너를 건져 줄게
네가 내 이름을 알고 경배하니 내가 너를 높여 줄게
네가 내게 간구하니 내가 너에게 응답해 줄게
네가 환난을 당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게
내가 환난을 당할 때에 내가 건져 줄게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해 줄게
내가 너를 장수하게 해줄게
내가 너에게 만족한 구원을 보여 줄게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지존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를 하나님은 주목하시고 환난과 시험으로부터 건지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신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의 앞길을 만족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사랑의 아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주님의 날개 깃 아래서 나의 삶의 영원한 피난처와 요새가 되어 주시며 그늘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와 공급하시는 평강이 만족한 구원을 이루기까지 늘 넘쳐 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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