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롬8:12-17) 2018. 5. 27삼위일체주일
삼위일체라는 표현은 성경에 없다. 단지 삼위일체(Trinity)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보내신바 된 성령님을 일컫는 표현이다. 예수께서 나사렛을 떠나 요단강에 도착하셨다.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셨다. 그 때에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예수의 머리 위에 임하였다.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 위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그 장면에 보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한 장면이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다.
교회력으로는 지난 주일이 성령강림주일이었다.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로 지킨다. 신앙생활이란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몰라서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던 혈기 등등한 유대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다메섹의 부르심과 더불어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의 위대한 사도의 삶을 살았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이 시작되는 첫 구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으라”고 선언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의 모습은 그러하여야 한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성도라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성령을 받은 성도라면 더 이상 육신의 욕망에 지배를 받지 않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가? 우리가 성령 받고 은혜 받고 복음을 알고 주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완전하게 육신의 욕망을 벗어난 삶을 저절로 살아 갈 수 있는가. 그런 능력이 우리에게 쉽게 주어지나.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하루에도 백번 천 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인하여 봄바람에 버들가지가 흔들리듯이 흔들리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로마서 8장 5절 이하에 보면, “육신을 따르는 자는,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읽은 로마서 8장 12-13절에도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씀하였다. 그렇다. 신앙생활이란 매일 매 순간마다 육신의 욕망대로 살려고 하는 몸의 행실을 죽이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과 다스리심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신앙생활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자녀(子女).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이 세상에 육신의 부모가 없이 태어난 자녀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씀은 믿음으로 인한 영적 사건이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고 했다. 그렇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시인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권세가 자녀의 권세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본문이 말씀하는 대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으로 살아갈 때에라야 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다운 삶을 살아가는 영적 상태를 말한다.
이는 마치도 로마서 12장 2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순복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다 꾸려 가지고 수도원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아무리 변화산 꼭대기의 신령한 은혜 체험이 귀해도 산 아래로 내려 와야 한다. 예수께서는 산꼭대기에 초막 셋을 짓고 거기서 지내고 싶어 하는 베드로에게 산 아래로 내려가자고 하셨다. 산 아래에 내려 왔을 때에 귀신 들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안타까워하는 아버지를 만났다. 예수께서는 산 아래 남아 있던 아홉 명의 제자들이 힘을 합쳤어도 해결하지 못하던 귀신 들린 아들에게서 귀신을 꾸짖어 내어 쫓아 주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이런 삶을 밤낮 없이 늘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아들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의 모습이다.
14절의 ‘아들’이란 16절의 ‘자녀’라는 단어와 다르다. ‘아들’이란 ‘휘오스’는 ‘자녀’라는 ‘테크논’과 구별된다. 아들이란 갓 태어난 어린 아기가 아니라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감당할만한 상태로 성장하고 성숙한 상태의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갓 태어난 아기와 같은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르심과 사명에 충실하게 살아가면서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넉넉히 살아가는 영적 성숙의 상태를 말한다. 늘 무엇을 더 달라고 징징대는 어린 아기의 상태가 아니다. 딱딱하고 견고한 음식을 넉넉히 소화하며 17절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을 줄 아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으로 의젓하고 믿음직스럽게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말씀하는 것이다.
베드로도 그랬고 사도 바울도 그랬지 않나. 베드로는 삼년 간이나 예수의 제자로서 따라 다녔지만 예수를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 다니고 숨던 나약한 자였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중심에 서서 쓰임 받는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다메섹 변화 이전의 사울은 젊고 유능한 유대학자였다. 그는 바리새파였고 로마의 시민권까지 가진 유대인이었다. 그는 유능했고 예루살렘의 유대주의자들 중에서 주목 받던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교회를 핍박하는 열정도 대단했다. 사도행전 9장 1절에 보면 주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 그런 그가 변화 받고 성령 받고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이방의 뛰어난 전도자가 되었다.
본문 말씀은 세상적으로, 육신적으로 누구의 아들이냐 누구의 딸이냐를 묻는 말씀이 아니다. 우리는 물론 각 사람이 이 세상의 육신의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 없이 태어난 아들딸은 없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세상 육신의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는 질문이다.
양자(養子)의 영(靈).
하나님의 아들은 더 이상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는 자여야 한다. 여기서 말씀하는 종의 영이란 ‘사탄의 영’, ‘죄의 영’을 말씀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 나온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8:34-37)
종은 아무리 충성되고 아무리 유능하고 아무리 주인의 인정을 받고 아무리 주인에서 사랑을 받아도 여전히 종일뿐이다. 그러나 아들은 종과 다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되었는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이시고 장사지낸바 되었으나 사흘 만에 부활하시므로 이를 믿는 우리에게 죄 사함과 영생을 선물해 주셨다. 그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이것을 바울은 ‘양자의 영’을 받은 상태로 설명해 준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의 비유 말씀이다. 그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가지고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면서 주색잡기를 즐기며 살다가 그 많은 유산을 다 말아 먹고 빈털터리 거지가 되어 돌아 왔다. 신분적으로는 아들이 맞지만 아들 되기를 포기하고 아버지의 품을 떠나 세상 죄악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살던 아들이다. 그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 돌아올 때의 마음이 어떠하였나. 남의 나라에서 거지가 되어 빈털터리로 돼지우리에 누워 있던 아들이 속으로 생각하였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그리고 결심하고 일어나서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마을, 아버지가 살아계신 집을 향하여 가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 나타는 몰골이 말이 아닌 남루한 복장의 거지 행색의 그 아들을 먼저 알아 본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로 달려갔다. 측은히 여기고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 때에 아들이 감격하여 회개하는 고백을 한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종들에게 말하였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이 장면은 아버지의 아들로 살아간다는 것,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 하나님의 양자의 영을 받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다.
양자가 된다는 것은 아들이 아닌데 아들로서의 사랑을 받고 아들의 권세를 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런 자격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 타락했던 아들은 자신을 아버지의 집의 품꾼의 하나로 라도 받아들여지기를 원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 아들을 사랑스러운 아들로 다시 받아 들이셨다. 그리고 그 아들과 더불어 즐거워하고 기뻐하셨다. 이것은 양자됨의 축복이며 은총이다.
그 아들이 아버지를 향하여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압바 호 파테르’라는 이 말 중에 ‘압바’란 예수께서 쓰시던 아람 어로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이다. 우리와 너무나 발음도 비슷하다. 마가복음에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아빠 아버지여”(막14:36)라고 기도하신 장면이 나온다.
<나를 지으신 주님>이란 복음 성가를 부르자.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내가 어딜 가든지
날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by Tommy Walker
1. I have a Maker
He formed my heart
Before even time began
My life was in his hands
He knows my name
He knows my every thought
He sees each tear that falls
And He hears me when I call
2. I have a Father
He calls me His own
He'll never leave me
No matter where I go
He knows my name
He knows my every thought
He sees each tear that falls
And He hears me when I call
갑질이 심한 기업인들 중에 좋은 평을 받는 기업인이 있다. 73세의 길지 않은 생을 마친 LG 구본무(1945-2018) 회장의 생애 중의 마음 훈훈하게 하는 일화들이 회자(膾炙)된다. 딸만 둘이던 구본무 회장은 아들을 선호하는 구씨 집안의 내력을 따라서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아들인 조카 ‘구광모’(LG 전자 상무)를 양자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양자됨이란 그런 것이다.
훌륭한 기업인의 양자만 되어도 그 후광과 영광이 대단하다. 그러나 생각하여 보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양자됨이란 얼마나 영광스럽고 존귀한 것인가.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된 것을 증언해 주신다고 했다. 아버지의 아들딸이 아니라면 그 누가 아버지를 높이고 아버지를 찬양하고 아버지를 경배하겠나. 양자된 자녀의 권세와 특권은 언제 어디서나 아버지께 기도하고 찬양한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의 그 끝이 없는 무한대한 사랑을 받으며 살아간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모신 자녀의 영광 양자됨의 축복이며 권세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상속자(相續者).
우리는 동서고금에 상속자의 영광의 무엇인지를 안다. 우리나라에도 거대 기업의 가업을 이어가는 상속자의 영광을 보게 된다. 그렇지 않나. 그 아버지의 그 아들, 그 아버지의 그 딸이라는 신분 관계로 인해서 주어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상속자의 영광이 있다.
가령 미국 같은 나라에는 존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1937)가문과 은 미국의 은행가로 J. P. 모건 회사를 설립한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 1837-1913)가문이 여전한 두 축이다. 일본의 저널리스트이며 넌픽션작가인 히로세 다카시의 <제 1권력>이란 책을 보면 그런 시대 변화를 섬뜩할 정도로 분석해 내고 있다.
유럽은 로스차일드 가문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가문이란 아직 없다.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Mayer Amschel Rothschild,1744–1812)은 독일의 유태인 은행가였다. 오늘날 유명한 로스차일드 가의 선조다. 그의 다섯 아들과 그 후손이 오늘 날 로스차일드 가문을 이루었다. 현재 로스차일드가의 재산은 계산이 정확하지 않다. <화폐전쟁>의 저자 쑹훙빈은 로스차일드가의 재산을 약 50조 달러로 추정했다. 우리 돈으로는 약 6경원이다. 이 돈은 6만 조원이다. 미국 총생산량(GDP)가 20조 4000억불이라고 하니 그 갑절의 재산이다. 로트실트라는 가문의 이름은 한때 유대인 빈민가에 살던 마이어의 선조들의 집 지붕장식인 빨간색 방패(rot shield)에서 비롯했다. 마이어는 잠시 랍비가 되려는 뜻을 품고 공부했으나 부모가 일찍 죽는 바람에 한 은행에 실습생으로 들어갔다. 뒤에는 헤센카젤의 백작 영주 빌헬름 9세의 궁정에 들어갔다. 바로 이 마이어가 통치가문과 거래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아들을 낳아 여러 해외업무를 맡긴다는 가풍을 세웠는데 이는 다섯 아들들을 통해서 200여 년 동안 그 가풍을 이어 오고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상속자의 영광이란 그런 세상적인 상속 개념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상속자,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의 영광을 말씀하는 것이다. 로버트 슐러 목사가 청년 시절에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 “이 폭포는 내 아버지의것이다.”하고 소리를 치니까 주변의 관광객들이 그를 정신 나간 젊은이 취급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맞다.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 하나님의 양자의 영광, 하나님의 상속자의 영광이란 그런 것이다.
이 은혜를 깨닫고 나면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그 은혜와 축복을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몇 푼을 더 갖고 덜 갖는 소유의 개념이 아니다. 땅 몇 평을 더 갖고 덜 갖는 문제가 아니다. 집 몇 채를 더 갖고 덜 갖는 정도의 문제도 아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ros the Great, 356-323)은 33살에 죽었다. 그가 죽을 때의 지도를 보자. 지내 놓고 보면 별것 아니다. 이것은 진시황(始皇帝, 259-210)도 마찬가지요 몽골의 칭키스칸(Genghis Khan,1155-1227 or 1162/1167-1227)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의 권력과 명예와 재물과 자랑은 다 아침 볕 앞의 안개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는 법이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됨과 그 상속자의 영광만이 영원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자녀의 권세를 누릴 것이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의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 나그네 길에서 누리는 그 정도 가지고 도토리 키 재듯이 하면 안 된다. 그것처럼 어리석은 것 없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과 영광에 참여한 것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상속자의 영광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상속자의 영광인 것이다. 4000년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언약의 말씀을 따라 나섰던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의 이야기 속에 상속자의 고난과 영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7년 자유의 투사로 감옥의 독방에서 지내고 72살에 감옥에서 나온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1918-2013)는 남아공의 대통령을 지냈다. 그의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에서 그는 말한다. 톰 버틀러 보던의 책 에는 50명의 세계적인 각 분야 저명인사를 언급하는 중에 넬슨 만델라를 빼어 놓지 않았다. 코사 부족 템프 추장의 아들로 태어난 넬슨 만델라의 원래 이름은 ‘롤리흘라흘라’이다. ‘말썽꾸러기’라는 뜻이다. 들판과 숲속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가축을 몰고 손에 막대기 하나를 들고 천진난만하게 뛰어 다니던 말썽꾸러기가 역사적인 인물이 된 것이다.
천지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 양자의 영광, 상속자의 영광을 누리고 담대하게 증거할 줄 알아야 한다.
복음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상속자의 삶을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부활 복음 안에서 주의 택하심과 부르심이 우리 각 사람을 통하여 면면히 증거되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