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받은 사람들(행2:43-47) 2018. 5. 20 성령강림주일
1700년대에 영국 교회에 청교도 설교가요 목사요 신학자요 저술가인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 1620-1686)의 책 중에 <회개>라는 제목의 책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죄가 회개의 눈물에 익사하지 않으면 그의 영혼이 심판의 불에 타서 죽는다.”
그렇다. 회개의 필요성을 이처럼 분명하게 교훈한 글도 흔하지 않다.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의 설교 내용의 강조도 이것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8) 진정으로 자신의 죄악 된 삶을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을 때에 성령이 임하는 것이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영국 성공회 출신의 존 웨슬리는 51살에 병들어 죽음을 준비하면서 이런 묘비명을 미리 써 놓았다.
“하나님 이 무익한 종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회개의 기도를 드린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존 웨슬리를 병에서 건지셨고 37년을 더 살면서 복음 전도자로 쓰임 받다가 88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영국 런던의 웨슬리 채플의 곁에 있는 목사관에서 20여명의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으며 그가 두 차례 반복하여 말한 유언으로 남긴 말은 이것이다.
“모든 것들 중에서 최고의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그렇다. 280년 전인 1738년 5월 24일 밤 8시 45분경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런던 시내의 모라비안 교도들의 수요 예배처에 참석했다. 그 예배에서는 마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함께 묵상하는 예배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 밤에 존 웨슬리의 마음속에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그의 나이 35살 때의 일이다. 그와 같은 한 사람의 체험은 오늘 날 감리교회가 탄생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말씀을 듣고 있던 중에 이상하게 그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회심을 체험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하셨으면 죄와 사망에서 자신을 건져 주신 것을 믿는 믿음이 분명해졌다.
성령 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 오늘은 성령 감림주일이다. 사도행전 2장의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교회가 탄생하였다. ‘에클레시아’ 즉 “교회(敎會)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모임, 집단, 회중, 무리”를 일컫는 말이다. 희랍어의 '안에서 밖으로(out of)'를 의미하는 전치사 '에크'와, '부르다(to call)'를 의미하는 동사 ‘칼레오’가 합해진 합성어로 풀이해서 ‘세상 밖으로 불러낸다’는 뜻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즉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구원 받은 무리들의 모임이 교회이다.
그러나 교회(church)라는 ‘에클레시아’가 히브리어에서의 ‘카할’이란 단어가 ‘모임, 집회, 회중, 무리’등을 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한 무리, 회중’이란 뜻으로 설명되는 것이 옳다. 종교 개혁가인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교회’(kirche)라는 단어 보다는 ‘공동체’(共同體)라는 표현을 쓰기를 더욱 즐겼다. 따라서 독일어권에서는 ‘주님께 속한 공동체’라는 의미로 쓰는 표현이 곧 교회를 말하는 것으로 자리 잡았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이 땅에 40일을 더 계셨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던 120여명의 성도들이 모두 다 성령을 받았다. 기도하던 120여 성도들이 오순절 날을 맞았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하였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였다. 그 불의 혀와 같은 것들이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었다. 기도하던 그들의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에는 오순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각 나라에서 와서 있었다. 저들이 한 결 같이 성령 강림의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저들은 다 같인 놀라워하고 신기해하고 당황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말하며 조롱하기도 하였다.
그 때에 베드로 사도가 일어나서 큰 소리로 복음을 전하였다.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죽은 지 사흘 만에 무덤 속에서 다시 살리셨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다. 우리는 예수 부활의 증인이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셨다. 예수는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이와 같은 말씀을 증거할 때에 그 말씀을 듣고 있던 무리들이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반응하였다. 그 때에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행2:38-39) 하고 다시 또 여러 말로 확증하였다. 그 때에 그 말씀을 받은 이들이 세례를 받았다. 그 날에 세례 받은 신도의 수가 3천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었다. 열심히 기도하기를 힘썼다. 이것이 예루살렘에 교회가 탄생한 첫 장면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다. 돈 많은 부자가 개인적으로 예배당을 건축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교회의 건물이 교회로서의 기능을 다하려면 그 건물 안에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어야만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승천과 더불어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던 무리들이 성령 받은 후에 탄생한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 날의 교회의 참 모습이 어떠해야 하나를 들여다보자.
나타나는 기사와 표적.
예수 부활과 승천 후에 성령 받고 방언하며 기도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고 사랑으로 떡을 떼며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서로 서로 집에 모이면 함께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모습을 대하는 세상 사람들의 반응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라는 말씀은 그런 표현이다. 이는 성령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을 믿는 이들로 구성된 공동체의 모습에 권위와 존경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는 모세 시대의 광야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이전부터 주변에 펴져 나가는 소문에 저들을 향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과 같다.
신명기 11장 25절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그런 영적 권위를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밟는 모든 땅 사람들에게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 그렇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이 곳에 세워진 예수사랑교회와 이 곳에 들며 날며 예배하고 기도 생활하고 서로 교제하는 성도들이 지역 주민과 세상 사람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영적 권위가 점점 세워지는 공동체로 나날이 자리매김 하게 해 주실 것이다.
성령 받은 무리들은 점점 그 영적 권위가 세워졌다. 뿐만 아니라 사도들로 인해서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 하나님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는 전능하신 여호와이시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43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였다. 그 긴긴 세월동안 저들은 하나님께서 저들을 버리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우리가 창세기에서 대하는 대로 하나님은 각 개개인의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시고 동행하셨다. 가령 요셉의 생애를 보라. 저는 팔리어 갔고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저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 팔리어 갔으나 형통하게 하셨다. 노예가 되었으나 형통한 자가 되게 하셨다. 옥에 갇혔으나 형통한 자가 되게 하셨다.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은 그런 백성들을 통해서 홍해를 건너는 출애굽이 가능하게 역사하셨다. 하나님은 택한 무리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로 먹이시고 메추라기로 배부르게 하셨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 그 때 그 때마다 반석에서 생수가 나게 하셨다. 마라의 쓴 물이 단 물이 되게 하셔서 배불리 마시게 하셨다. 엘림의 물 샘 열둘과 칠십 그루의 종려나무 숲을 만나게 하셔서 쉼을 얻게 하셨다.
광야 백성들의 중심에 성막을 건축하게 하셨다. 그 중심에 법궤를 모시게 하였다. 하나님은 성막 중심의 백성들로 광야 생활 40년을 한 결 같이 인도하셨다. 못 감당할 것 같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기게 하셨다.
하나님은 모세 이후에 여호수아를 세우셨다.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들은 요단 강을 육지처럼 건넜다. 여리고성을 말씀대로 순종하여 무너지게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택한 사람들을 통해서 기사와 표적을 끊임없이 행하시는 전능자이시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각색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귀신을 내어 쫓아 주셨다. 죽은 자들도 살려 주셨다. 바람과 파도도 잔잔하게 해 주셨다. 가나 혼인 잔치집에서는 물로 좋은 극상품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다. 벳세다 광야에서 배고파하는 무리들에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는 무리들을 배부르게 먹게 하셨고 열두 광주리가 남게 해 주셨다.
성령 받은 초대 교회도 그러하였다.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계속되게 하셨다. 베드로와 요한은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기도하려고 올라가고 있었다. 성전 미문에서 만난 구걸하는 걷지 못하는 걸인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의 이름’으로 명하여 일어나 걷고 뛰게 해 주었다. 주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그런 기적을 일으켜 주신 것이다. 열두 제자의 한 자리인 빈자리에 충원된 맛디아를 비롯한 열 두 사도들은 가는 곳마다에서 각종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다. 이는 늦게 부름 받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교회가 지난 팔년 동안 하나님이 보여 주신 각종 기사와 표적 가운데 여기 까지 나아왔다. 올해도 앞으로도 계속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각색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는 교회가 될 줄로 믿는다. 성도 여러분의 개인, 가정, 범사에 주께서 구체적으로 기사와 표적을 선물해 주시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은 기사와 표적을 행하시는 전능자이시다. 믿고 구하고 따르는 자에게 그런 표적을 주신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고 따르는 부활 신앙의 주인공들에게 끊임 없이 기사와 ㅍ표적이 많이 나타나도록 역사하실 것이다. 올해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점점 주께서 우리 가운데 많은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 보여 주시길 축원한다. 우리의 당 대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자손들의 대에 자자 손손 기사와 표적으로 채워 주시길 간구한다.
기쁨으로 찬미하며 나누고 돌봄.
예수를 믿는 성도들의 특징은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 재산과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는 공동체 생활이 가능해 졌다. 이와 같은 환상적인 공동체 생활이 가능해졌다. 그렇다고 그들 중에는 놀고 거져 먹는 이들이 없었다. 서로 자기 분야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소득을 창출하고 그 수입을 갖고 서로 사랑의 떡을 떼며 심지어는 재산과 소유를 가지고 공동체의 많이 가진 자와 덜 가진 자의 유무상통이 이루어졌다.
교회는 그런 곳이어야 한다. 내 주변 사람이나 내 신앙생활의 이웃을 악 이용하는 불 신앙적인 태도가 아니라면 서로 서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삶을 공유하는 공동체 생활이 가능해져야 하는 것이다.
성령 받고 은혜 받고 부활 복음에 붙잡힌 성도들의 연합이라면 그래야 한다. 내 아이와 네 아이를 비교하는 경쟁심이나 시기심에 마음이 흐려지면 안 된다. 앞서가는 사람이 뒤쳐지는 사람을 손 붙잡아 주고 격려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유능한 사람이 좀 부족한 사람을 챙길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식견 있고 뛰어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힘이 되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모두 다 필리핀의 박 누가 의사나 그의 부인처럼은 살지 못한다고 하여도 성령 받고 은혜 받은 우리들이라고 하면 최소한 신앙생활의 기본은 달라야 한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주를 향한 우리 각 사람의 마음가짐에는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부활 복음을 영접한 믿음의 사람이라면 그 삶이 구체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은혜 받고 구원의 감격을 체험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날마다의 삶의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나. 당신은 어떤가. 예수를 제대로 믿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시간 시용이 다르고 재물 사용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관심이 다르고 출입이 다르고 앉고 서는 곳이 다르고 만나는 사람들이 다르고 목적하는 바가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는 말이다.
우리 교회가 지난 팔년 동안 걸어 온 길이 그러하지 않나. 물론 우리 가운데 구경꾼처럼 섞여 지낸 이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개의 성도들은 받은 은혜와 부르심과 사명감으로 충성하고 헌신하고 마음을 쏟고 식지 않는 열정으로 달려 와서 오늘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닌가.
첫 사랑, 첫 열심, 첫 정열, 첫 부르심, 첫 감격, 첫 결단, 첫 사명을 다시 붙잡고 아니 그 첫 부르심에 다시 붙잡혀서 푯대를 향하여 매진해 나가는 그런 교회, 그런 성령 충만한 성도들의 연합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남들이 어떻게 하겠지 하는 막연한 태도가 아니어야 한다. 예배, 기도, 봉사, 전도, 섬김 그 모든 구석구석에서 내 몸 드려, 내 재물 바쳐, 내 시간 드려, 내 은사를 따라, 내게 주어진 직분에 걸맞게 열심을 다하다 보면 주께서 우리 가운데 주를 믿는 자의 그런 감격과 간증과 보람과 은혜가 샘솟게 해 주실 것이다.
박석고개 언덕에 주유소 옆에 있던 드라이브 쓰르(drive through) 맥도날드 가게를 버거킹이 인수하여 리모델링 중이다. 우리가 살던 벤살렘에도 교회에서 멀지 않은 큰 대로 변에 맥도널드도 있었고 버거킹도 있었다. 한번은 버거킹 가게 큰 길거의 대형 유리창에 ‘Want To CREW'라고 써 붙인 것을 본 기억이 생생하다. 여기 ‘crew’란 배나 비행기나 열차의 승무원을 말한다. 전문적인 직업의식을 분명히 가지고 온갖 허드렛일을 묵묵히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이들을 말한다.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려 하지 않고 손끝을 톡톡 터는 그런 식의 태도로는 ‘crew'가 될 수 없다.
한 번은 3000-4000명의 여행객들을 태우고 세계를 유람하는 21세기 최고의 호화 여객선이 운행되는 그 뒷이야기들을 다룬 다큐멘타리 특집 방송을 본 적이 있다. 선장과 기관장과 그 거대한 축구장 몇 배 크기의 어마 어마한 호화 여객선에 탄 승객들의 만족스러운 여행을 위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이들을 보았다.
예수는 마치도 이 거대한 지구와 이 지구상에 살아가는 70억이 넘는 인구의 사람들 가운데서 거대한 유람선을 진두지휘하는 선장과도 같다. 예수는 성령을 보내셔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인 승무원(crew)들로 하여금 자기의 본분을 잘 감당하고 그 일상생활 중에서 보람과 만족을 누리며 찬송하며 서로를 돌보며 섬기며 살아가기를 기대하시는 것이다. 본문에 보면 주목해 보아야 할 초대 교회 성령 받은 성도들의 특징이 있다.
다 함께 있어
필요를 따라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이것이 교회다. 이것이 바람직한 성도들의 연합이다. 그런 가운데 찬송하고 기도하며 서로를 돌보고 서로를 섬기며 서로를 향하여 열린 마음을 갖고 한 마음 한 뜻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교회이다.
그렇지 않나.
세상 그 어떤 모임, 그 어떤 단체, 그 어떤 곳에 교회만한 곳이 있나. 세상은 다 끼리 끼리 모인다. 고향 따라 따로 모이고, 출신 따라 따로 모이고, 성씨 따라 따로 모이고, 출신 학교 따라 따로 모이고, 직업과 직급 따라 따로 모이고 이처럼 세상은 다 따로 따로 모인다. 그러나 교회는 다르다. 달라야 한다. 임금과 평민이 함께 모이는 곳이 교회이다.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배운 자와 덜 배운 자, 유능한 자와 부족한 자, 뛰어난 자와 도움과 배려가 필요한 자, 힘이 넘치는 자와 약한 자, 건강한 자와 병든 자, 부자와 가난한 자, 젊은이와 노인, 어른과 어린 아이가 서로 서로 다 함께 같이 더불어 모여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가족과 같은 공동체를 이루는 곳이 교회이다.
성도들이 모여 함께 먹고, 마시고, 웃고, 울고, 돌아보고, 문안하고, 찾아 가 주고, 격려하고, 힘을 얻고, 필요를 채우고, 필요를 나누고, 날마다 성전과 가정과 세상 일터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 교회 즉 성도들의 연합이다.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심.
47절의 ‘하나님을 찬미하고’라는 표현은 초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회중들의 중심이 하나님 중심이었음을 강조하는 매우 소중한 말씀이다.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다. 사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도들을 통하여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다. 그렇게 모여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무리들에 대하여 온 세상 백성들이 칭송하게 되었다. 이것이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이다.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성령 받은 성도들은 교회와 가정과 세상 중에서 칭송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과연 예수 믿는 이들은 달라, 과연 성령 안에 사는 이들은 달라” 이런 평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할 때에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가면 갈수록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실 것이다.
구파발 역 가까이 가면 한 그릇에 3800원 하는 24시간 콩나물 국밥 집이 있다. 깍두기도 맛있다. 밥도 밥솥에서 제 각이 원하는 대로 퍼다가 말아 먹을 수 있다. 콩나물국을 개인별로 질그릇에다가 펄펄 끓여서 내어 준다. 달걀도 한 개씩 직접 넣어서 먹게 한다. 24시간 언제 가든지 사람이 넘쳐난다. 그 주변의 식당들 중에서 그 집이 제일 잘 되는 것 같다.
옛날에는 콩나물도 귀했고 달걀도 귀한 시절이 있었다. 어렸을 적에 시골 집에서는 할머니가 콩나물을 직접 길러 내셨다. 신기하였다. 콩나물시루에 베 보자기를 깔고 그 안에 콩을 넣고 베 보자기로 덮고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는데 몇 날이 지나면 싹이 나기 시작하고 다시 몇 날이 지나면 콩을 담아 두었던 시루에 가득하게 옅은 색의 노란 콩나물이 시루 가득하게 빽빽이 자라 오르는 광경을 보던 기억이 생생하다. 최근에는 연신내 역 가는 곳에 한 그릇에 4000원하는 또 다른 콩나물 국밥집이 생겼다. 신기하다. 콩을 모아 놓고 물을 주는데 콩나물이 자란다.
교회 생활, 은혜 생활,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교회만 다닌다고 다냐, 예배만 다닌다고 다냐, 성경만 읽는다고 다냐, 성경 공부만 한다고 다냐, 속회만 드린다고 다냐, 봉사만 한다고 다냐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아니다. 날마다 시간 마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리고 성경을 읽고 외우고 묵상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을 나누고 서로 서로 돌아보고 문안하고 내가 깨달은 복음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증거하고 삶을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에 성령께서 계속하여 역사하시게 된다.
복음에는 그런 운동력과 전파력이 있다. 조선 땅 팔도강산에 예수를 아는 이들이 한 사람도 없고 성경책 한 권 없고 성령 받은 사람들이 단 한 사람도 없던 우리나라에 선교의 사람들이 배를 타고 왔다. 아펜젤러 부부, 언더우드, 알렌, 스크랜턴을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이 인천, 서울,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이렇게 골고루 찾아다니면서 복음의 씨앗을 뿌려 놓았기 때문에 오늘 날 겨자 나무처럼 큰 복음의 나무로 자라나게 된 것이다.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주께서 필요하셔서 시작되게 하시고 이곳에 자리 잡게 하신 예수사랑교회와 성도들이 날마다 주마다 달마다 해마다 점점 더 하나님을 높이고 찬미하며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게 될 때에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들의 수를 날마다 점점 더하게 하실 것이다. 이와 같은 구원의 역사가 여러분의 가정, 양가, 일가친척, 부모 형제, 세상의 친구와 직장의 선후배와 사업의 현장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번져 가서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