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사람 루디아(행16:11-15) 2018. 7. 15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철에도 대개의 사람들은 날마다 쉼이 없이 출근하고 일하고 장사하고 사업하며 살아간다.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다. 어떻게 일주일이 지나는지 모른다. 물론 명퇴를 당하였거나 실직 혹은 실업자가 된 이들을 생각하면 내개 일정하게 날마다 할 일이 주어진 다는 것처럼 소중하고 보람된 경우는 없다.
시원한 에어컨을 틀고 쾌적한 환경에서 일하는 이들도 있지만 어떤 이들은 이 뙤약볕 아래서 도로 보수 공사를 하거나 고층 건물을 짓는 공사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거나 용광로 앞에서 일하는 이들도 있다. 식당과 레스토랑의 주방에서 늘 불을 사용해야 하는 이들의 수고 또한 만만하지 않다.
TV 프로그램 중에 ‘극한작업’이란 프로그램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주물공장에서 일하는 이들이다. 혹은 유리 세공업을 하는 이들이다. 전수되어 오는 남다른 기술을 익혀서 일하는 이들이다. 일일이 수작업을 거쳐야 하는 일들이기에 아무나 하는 일도 아니다. 500도의 펄펄 끓는 아연을 녹여 부어서 단추, 지퍼, 구두 장식, 허리띠를 만드는 작업은 일일이 수작업으로 한다. 그 현장의 기술자들이 그 일을 해서 버는 돈은 한 달에 200만원이 못된다.
올해 33살인 김동석 청년은 일 년 반 전 까지만 해도 500도의 액체 아연을 국자로 퍼서 금형 틀에 붓는 작업을 하루 종일하였다. 20대 초반부터 성수동 지하 작업실에서 그 일만 10년을 했다. 그의 최종 학력은 중학교 1년 중퇴이다. 그런 그가 몇 년 전부터 낮에는 주물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판을 두드려서 글을 써 왔다. 그 글들 중에서 SBS 라디오 <오후 두시 컬 투 쇼>에 보낸 글에 대한 평이 대단히 높았다. 뽑혀서 상도 받았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그의 짧게 쓴 소설들을 언 라인에 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맞춤법도 엉망이었다. 댓글에 실린 내용들을 선생님의 특강이라고 여기며 자세히 읽었다. 언라인에서 ‘글 잘 쓰는 법’을 찾아 읽고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 틈틈이 독학해서 중졸, 고졸 검정고시도 마쳤다. 지금은 그가 살고 있는 반 지하 방에서 전문 소설가로 날마다 소설을 쓰고 있다.
평균 이삼일에 한 편씩 1년 6개월 동안 350여 편의 짧은 소설을 썼다. 원고지 1만장 분량, 장편 소설 10권 분량을 쓴 것이다. 그의 인터넷 독자 중에 현대소설 전공자인 한 작가가 그를 출판사에 소개하였다. 출판사의 대표는 그의 책 <회색인간>, <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 <13일의 김남우>를 출판하였다. 두 달 만에 5쇄를 찍었고 2만부가 팔려 나갔다. 아버지 없이 엄마 하고 어린 시절을 지내던 부산 출신 청년이 대구 PC에서 잠자면서 한 달에 60만원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서울 성수동 아연 주물 공장에서 160만원을 벌며 연습 삼아 쓰기 시작한 소설이 그를 소설가로 만든 것이다. 그는 글 쓰는 솜씨를 학교 교실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하며 배워왔다고 말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안식일에도 강가에 나가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풍경이 나온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고 로마의 식민지였다. 바울과 선교일행은 그 곳에 도착해서 며칠을 지내던 중에 안식일을 맞았다. 그 곳에 유대인의 회당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어디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여야하겠다 하고 숙소 밖의 강가를 찾아 간 것이다. 그런데 그 곳에는 안식일이지만 안식일에 대하여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사는 빌립보 도성의 성민들 중에서 여인들이 강가에 나와 앉아 있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두아디라 시에 사는 자색 옷감 장사인 루디아란 이름의 여성이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 내용을 귀 기울여 경청하고 있었다.
루디아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 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있었다. 영어 성경 NIV에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는 표현을 “She was a worshiper of God"라고 했다. 루디아는 비롯 안식에도 안식하지 못하고 강가에서 자색 옷감을 파는 장사를 하며 지냈지만 그녀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worshiper)였다. 루디아는 비롯 안식일에 회장을 찾아 예배하는 예배자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에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을 갖고 살아가고 있었다.
주께서는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 내용을 귀 기울여 듣던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루디아는 자신의 집안 식구들 모두다 다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리고 바울 선교 일행을 초청하여 자기 집에 머물면서 빌립보 도성에 드나들며 선교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바울이 쓴 편지 중에 ‘빌립보서’는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이다. 루디아는 그 곳 빌립보 교회의 첫 열매가 되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예배드리는 예배자로 살아가던 루디아를 통하여 빌립보 성에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탄생하도록 역사하셨다.
열린 마음.
대인관계란 아무리 오래 된 관계라도 서로의 속을 잘 내어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은 ‘크레믈린’이라고 하지 않나. 그러나 만난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마음을 확 열어서 꽤 오래된 사이처럼 끈끈해 지는 경우도 있다. 나와 너, 너와 나의 인간관계란 원만한 소통이 될 때에 그 관계가 두터워지고 원만해진다.
신학교 때 교수의 추천 도서로 읽게 된 책 중에 하나가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의 <나와 너> (Ich und Du, 1923)라는 책이다. 1923년 출간이니까 거의 100여 년 전에 출판된 책이다. 마틴 부버는 3살 때에 엄마가 아버지의 곁을 떠났다. 그러하다 보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곁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마틴은 어렸을 적 사라져 버린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에 담고 속으로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는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나중에 그의 사상 ‘나와 너’의 철학 기반이 되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신과의 대화’, ‘사람과의 대화’그리고 ‘자연과의 대화’의 균형을 이룰 때에 참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상대방을 ‘나와 너’의 인격적인 관계로 대하지 않고 ‘나와 그것’의 관계로 대하게 되면 화목해야 할 관계에 금이 가고 상대방을 물질을 대하듯이 나의 그 어떤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게 된다.
‘나와 너’의 만남은 인격적이고 마음과 사랑이 담긴 만남이다. 이와 같은 열린 마음을 가진 인격적인 만남이란 시간과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관계가 점점 더 돈독해진다. 그러나 ‘나와 그것’의 만남이란 필요하여 컵 라면을 먹기 위해서 나무젓가락을 손에 잡았다가 필요가 끝나면 쓰리기 통에 버리는 그런 식의 만남이다. 어린이의 글 중에 “엄마는 맛있는 것도 해 주고 냉장고의 문을 열면 맛있는 것이 넘쳐 나는데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이쯤 되면 가정과 가족 안에서 아빠라는 존재의 위기가 오는 것이 아닌가.
새벽 같이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고 어쩌다가 애들과 아빠가 함께 집에 있는 날이면 잔소리나 하고 늘 피곤에 쩔어서 잠만 자는 그런 아빠에게서 생기는 어린이들의 오해는 시대적인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아빠는 절대로 가족들을 위해서 돈이나 벌어다 주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정은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가족들 간의 열린 마음의 삶의 공간이 되어야만 한다.
이런 면에서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낯 설은 복음 전도자가 강가에서 복음을 전파하는데 그 시끌벅적한 시장의 큰 소리 가운데 섞여서 들려오는 복음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마음의 문이 열린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이 루디아이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루디아 스스로가 복음 앞에 마음 문을 연 것이 아니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신 것이다. 우리가 예배 시간에 10분 아니 5분이라도 미리 와서 예배가 시작되길 기다리며 기도하고 그 날의 성경 본문을 미리 찾아 읽어 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경우와는 예배자의 태도에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우리 교회가 공동체를 형성한지 3년 여 만에 오늘 우리가 예배하는 이와 같은 예배의 공간을 건축하고 예배자들로 연합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의 성도들이 담임 목사를 중심으로 서로 가에 ‘열린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닫힌 마음에는 은혜가 자리 잡을 마음의 공간이 없다. 굳게 닫힌 마음에는 진리의 말씀과 그 누군가의 간증이 자리 잡을 마음의 빈 공간이 없다.
청춘남녀가 늘 만나서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고 음식도 먹고 영화도 보러 가고 산책도 하고 그렇게 하면서 장래를 서로 이야기 해 나갈 때에 때가 되면 청혼도 하고 결혼 약속도 하고 결혼 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이 상대방에 대하여 마음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벽을 대하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 인기 특강 강사 중에 여성은 김미경 남성은 김창옥 강사를 꼽는다. 물론 그들 외에도 인기 스타 급 강사들이 적지 않다. 제주도 출신의 김창옥은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청각 장애를 갖고 계셨다. 그의 어머니는 그런 그의 남편을 평생토록 ‘인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저 인간, 그 인간, 이 인간’그래서 아들 김창옥은 어렸을 적이 세상 모든 엄마들이 남편을 부르는 호칭은 한결같이 ‘저 인간, 그 인간, 이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착각하고 자랐다고 한다.
그런가. 맞나. 나에게 있어서 너는 누구인가. 빌립보 도성의 강가에서 안식일에도 장사하기 위해서 자주옷감을 펼쳐 놓고 있던 루디아에게 다가 간 한 사람의 복음 전도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이 바울이다. 주께서는 그날 그 시간, 그 현장에서 ‘바울과 루디아’, ‘루디아와 바울’의 관계를 ‘너와 나’, ‘나와 너’의 인격적인 관계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받아들여지고, 깨달아지는 신앙적인 관계로 만나게 하셨다.
이처럼 복음의 말씀이 받아 들여져서 마음 문이 열리게 된 영적 경험의 배후에는 주님의 부르심과 성령의 역사와 섭리가 있다. 루디아는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에 마음 문이 열려 있던 여인이었다. 그런 그가 낯 설은 복음 전도자 바울이 전파하는 복음의 말씀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것이다.
교회는 그런 곳이어야 한다. 누구나 주님이 역사하시면 이곳 예배당 문을 열고 예배당에 들어서고 예배당의 계단을 걸어 오르거나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고 예배당을 향하여 오르게 된다. 예배자들 사이에 섞여 앉게 된다. 그리고 열린 마음을 갖고 주변의 성도들과 함께 찬송하고 함께 기도드리고 함께 설교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예배드리는 것은 내 스스로의 결정이 아니다. 주께서 내 마음을 열어 주를 향한 예배자로 살아가게 하시는 초청이신 것이다.
요한 계시록 3장 20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나.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가족 구원.
주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나 한사람 겨우 복음을 받아 들이고 나 혼자만 예수 믿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주님께서는 나와 나의 가족이 모두 다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
사도행전 8장에 에디오피아 여와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내시가 수레를 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리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때에 주께서 집사 빌립에게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향하는 남쪽 길로 가라.”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가서 보니 그 곳을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가 수레를 타고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읽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 때에 성령께서 말씀하셨다. “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그렇게 만나게 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이사야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아 예언 말씀을 풀어 설명해 줄 때에 그의 마음 문이 열려져서 말씀을 받아들이고 마음이 뜨거워졌다. 마침 곁에 물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물로 세례를 받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그 후로 에디오피아는 이미 2000년 전인 초대 교회 시절부터 국가적으로 복음화가 이루어졌다. 그 시작은 여왕 간다게의 국고 맡은 내시 한 사람의 복음 영접으로 인한 것이다.
그렇지 않나. 여러분의 가정에 누가 복음의 효시가 되었나. 누가 제일 먼저 복음을 받아 들였나. 그 작은 시작이 온 집안 식구를 구원하게 한 것이 아닌가.
지난 주 목요일 헐몬산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아침 시간에 연회의 실행부 회의가 열렸다. 나에게도 주어진 직임이 있어서 아침 일찍이 회의장에 도착하였다. 곁에 함께 앉아 예배드리고 회의에 함께 참여한 목사와는 늘 인사는 하고 지냈지만 긴 대화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예배 시작 10분 쯤 전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의 집안이 예수를 믿게 된지 100년이 되는 해라고 했다. 나는 우리 집안은 110년이라고 말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손이 없었다. 한경직 목사 곁에서 영락교회의 개척기에 동사 목사와 성가대 지휘자등으로 활동하던 중에 새문안 교회의 담임 목사로 부임하여 25년 동안 목회하신 강신명 목사의 선친인 강병주 장로가 경북 영주에 고을마다 찾아다니며 순회 전도하였다. 강병주 장로는 나중에 평양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 자신도 어렵게 하나님이 주셔서 뒤 늦게 낳은 아들 강신명을 나중에 한국 교회의 유명한 목사로 배출하였다. 강병주 장로는 내 곁에 앉았던 최병현 목사의 할아버지의 질문을 받았다. “예수 믿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소.” “그렇소. 아브라함이란 이도 4천 년 전에 없던 아들을 100살에 낳았다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이신다오.”그렇게 해서 최병현 목사의 할아버지가 예수를 영접하였다. 그 후에 아들이 태어났고 내 옆에 앉았던 최병현 목사는 자기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예수 영접하고 기도하여 태어난 아들인데 목사가 되었다고 했다. 그 후에 자기도 목사가 되고 지금은 자기 아들도 목사가 되어서 3대 째 목사가 되었다고 소개하였다.
생각해 보라. 강신명 목사의 아버지 강병주 장로가 100년 전에 마을마다 찾아다니며 영주, 순풍, 풍기, 청풍, 단양 등지의 처처에 믿는 사람들을 얻게 되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의 할아버지이고 지금은 형제자매 줄줄이 예수를 잘 믿는 믿음의 가정이 되었노라고 간증하였다.
아브라함 링컨의 친 어머니는 상한 우유를 먹고 병이 들어 회복하지 못하고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던 어머니의 신앙은 새 엄마의 하나님 신앙으로 이어져서 아들 링컨은 친 어머니와 새 어머니의 신앙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자라났다. 한 사람의 믿음, 한 사람의 신앙이 가정을 세우고 가족을 믿음으로 세워가는 것이다.
오늘 주보에 실린 새 가족들은 어머니가 하늘나라에 가시며 교회 안에 예배자들로 세워 놓고 떠났다. 지난주일 예배 후에 작성한 새 가족 등록 카드에 형제가 나란히 내외간에 자신들을 전도한 분이 이미 하늘나라의 천국에 입성하신 어머니라고 어머니의 이름을 써 넣은 것을 보고 마음이 뭉클하였다.
맞다. 이 땅에 곁에 아버지가 계시지만 지난 7년 동안 외롭게 고통스럽게 투병생활하면서 주님의 손을 붙잡고 주님이 손 붙잡아 주기시기를 원하며 묵묵히 기도하고 기도하던 어머니의 기도가 지금 어머니가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신 후에 열매로 맺힌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그러나 시작이 중요하다. 강가에서 안식일인데도 일만하고 장사만 하고 지내던 루디아의 마음 문이 열리고 그가 온 집안 식구들을 다 세례 받고 믿음의 가정이 되도록 세워 나간 것처럼 한 가정, 한 가정이 굳건한 믿음의 가정으로 든든하게 세워지기를 소원한다.
강권하는 섬김.
루디아는 팔을 걷어 올리고 자주 옷감 장사를 할 정도로 세상에 나가서 경제활동을 하던 활발한 생활력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런 그가 마음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의 부활 복음과 성령의 역사를 의지하며 가족 모두를 권면하여 가족이 다 같이 세례 받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의 선교단 일행을 집 안에 강권하여 모셔 들이고 자기 집에 머물면서 빌립보 도시 선교에 매진하도록 숙소와 음식과 선교비를 충당하였다.
루디아의 믿음은 마음으로 생각만 하다 말고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그런 소극적인 신앙인이 아니었다. 그는 받은 은혜와 깨달은 말씀과 마음의 감동을 갖고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주의 거룩한 선교 사역에 동참하는 열정이 있었다. 그 때나 오늘 날이나 마찬가지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예배 시간에 함께 예배드리며 은혜를 받아도 어떤 이들은 자기가 받은 은혜와 감동을 갖고 열린 마음으로 가족과 함께 신앙생활의 연합을 이루며 주의 선한 사역에 앞장 서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은혜는 은혜대로만 받고 섬기고 나누고 돌보고 베풀고 봉사하고 충성하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일에는 뒷짐을 집고 한 발자국 물러서서 구경만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개인이든, 가정이든, 기업이든, 국가이든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이들에 의해서 변화되고 발전하고 부흥되고 성장되는 경우란 절대 없다.
교회는 더욱 더 그러하다. 누군가의 강권하는 믿음, 헌신 적인 믿음, 희생적인 믿음이 없이 선교의 지평을 넓혀 가고 영혼 구원의 큰 열매를 거두는 경우란 없다.
올 2018년 4월 어느 날, 서울 서초동 소년 법정에서 일어난 재판이다. 서울 도심에서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훔쳐 달아난 혐의로 구속된 16살 된 소녀는 방청석에 홀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한 법정 안에 중년의 여성 부장판사가 입장하였다. 조귀옥 부장 판사는 무거운 보호처분을 예상하고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던 소녀를 향하여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날 따라 힘차게 외쳐 보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게 생겼다.”
예상치 못한 재판장의 요구에 잠시 머뭇거리던 소녀는 나지막하게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재판장을 따라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더 큰소리로 따라 하라고 요구하였다.
"나는 이 세상이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수 있다.”
이전 보다는 좀 더 큰 목소리로 따라하던 소녀는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라고 외칠 때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재판정은 울음 바다가 되고 말았다. 소녀는 작년 가을부터 14건의 절도, 폭행 등의 범죄를 저질러 소년 법정에 섰었다. 이번에도 동일한 수법을 계속하다가 붙잡혔기 때문에 무거운 형벌을 받게 될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서 전혀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판사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이 소녀가 작년 초까지만 해도 어려운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장래 에 간호사를 꿈꾸던 발랄한 학생이던 그 소녀는 작년 초 밤중에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남학생 여러 명에게 끌려가 집단 성폭행을 당하게 되면서 일상 생활이 완전히 변하고 말았다.
소녀는 그 당시의 후유증으로 병원의 치료를 받기도했다. 그 충격으로 홀어머니는 신체 일부가 마비되기까지 하였다. 소녀는 지난 해 가을 이후로 학교를 겉돌았고 심지어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 10 대 남학생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기를 6-7개월 만에 전과 14범의 절도와 폭행범이 되고 말았다.
판사는 그의 재판을 지켜보던 참관인들 앞에서 말을 이어 갔다. "이 소녀는 가해자로 재판에 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삶이 망가진 것을 알면 누가 이 소녀를 가해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아이의 잘못의 책임은 여기에 앉아있는 여러분과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 소녀가 다시 이 세상에서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잃어버린 자존심을 우리가 다시 찾아주는 길입니다.”
그리고 눈시울이 붉어진 판사는 눈물이 범벅이 된 소녀을 법대 앞으로 불러세워 놓고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중요할까. 그건 바로 너 자신이야. 이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그리고는 판사는 두 손을 쭉 뻗어 법대 앞에 서서 울고 있는 소녀의 손을 잡아주면서 이렇게 말을 이어 갔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너를 꼭 안아주고 싶지만
너와 나 사이에는 이 법대가 가로막혀 있어
이정도 밖에 할 수 없어 미안하구나.”
이날 서울 서초동 법원청사 소년 법정에서는 16세 소녀에게 서울 가정법원 김귀옥 부장판사가 판결을 내렸다. 판결은 ‘불처분 결정’이었다. 이 판결로 참여관 및 실무관 그리고 방청인들 모두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김귀옥 부장 판사는 하나님을 믿는 신자이다. 그 재판정에서 불처분 결정을 받은 16살 소녀가 그 은덕을 힘입고 자신의 생을 잘 일으켜 세워 가면 미국의 오프라 윈프리 같은 인물이 되지 말란 법이 있나.
우리가 신앙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 중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할까. 빌립보의 자주 장사 루디아는 왜 사도 바울과 그의 선교단을 강권하여 자기 집에 모시고 공궤한 것일까. 이 일로 인하여 날마다 빌립보 성 안에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던 사도 바울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깨끗케 고쳐 주었다. 바울은 그 귀신을 향하여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그 때에 귀신이 그 여종에게서 나가고 깨끗해 졌다. 이 일로 수익이 끊긴 여종의 주인은 사도 바울과 실라를 시장의 관리들에게 끌고 갔다. 상관들에게 끌려간 바울과 실라는 옷 벗김을 당하고 매를 몹시 맞고 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런데 그 밤에 찬송하고 기도하던 가운데 큰 지진이 일어나서 옥터가 흔들리고 차꼬가 풀리고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깜짝 놀라 깨어 일어나서 죄수가 도망친줄로 착각하고 자결하려 하였다. 그 때 바울이 소리쳤다.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다.” 등불을 달라고 말하며 간수가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하는 말이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하고 말했다. 어제 밤에는 몹쓸 죄인 취급하며 쇠고랑에 매어 감옥에 가두고 지키던 간수인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서 ‘선생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그 때에 사도 바울이 한 유명한 복음 초청의 말씀이 이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루디아 한 사람의 열린 마음과 가족과 함께 세례 받고 바울과 실라를 비롯한 선교단 일행을 강권하여 섬긴 시작이 빌립보 도성 안에 이처럼 처처에 점점 믿는 자를 더해가도록 기적이 일어나고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도 이 여름과 다가올 가을 그리고 한 해가 다 가고 또 새 해를 맞기 까지 날마다 주마다 달마다 연부년 믿는 자의 수를 점점 허다하게 더해가며 왕성하게 부흥해 가는 우리의 복음 전파 사역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주께서 마음 문을 여시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의 염원하는 전도와 선교의 열매가 점점 풍성하게 결실되게 될 줄로 믿는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