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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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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일꾼(골1:24-29) 2017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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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07-05 00:13 조회 18,692 댓글 0
 
교회의 일꾼(골1:24-29)        2017. 7. 2  맥추 감사 주일

오늘은 교회력으로 하면 칠칠절이다. 칠칠절(七七節)은 유대교의 3대 절기인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중의 하나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과 율법을 받으면서 이 세 절기가 제정되었다.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오순절이라고도 하였다. 오순절[히. 샤부옷 שבועות]은 칠칠절, 맥추절로도 불린다. 오순절은 보리를 추수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날로서 맥추절이라고도 한다. 유월절 후 7일이 일곱 번 지난 다음 날이어서 칠칠절이라고도 한다. 50일이 지났다고 해서 오순절이라고 한다. 유월절은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바로 임금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오순절은 기독교의 역사와도 중요한 관련이 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수의 제자들을 비롯한 120여명의 신자들이 모두 모여 기도하였다. 성령이 이들에게 임하였는데 이날이 오순절 날이다. 

마침 헐몬산 새벽 기도회를 시작으로 지난 3주째 주일 마다 골로새서를 묵상해 가고 있다. 골로새서는 교회란 무엇인가. 예수는 누구신가. 왜 성령이어야 하는가 등에 대답하는 사도 바울의 소중한 말씀이 담겨 있다. 돌아보면 감사하지 않나. 맥추감사절이 무엇인가. 절기 신앙으로 생각하면 이 절기라는 것이 내 생애에 마지막 일수도 있다. 그러면 모든 날이 숙연해지고 모든 절기가 진심을 담은 감사 신앙의 절기가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보면 감사요 돌아보면 감사요 기억해 보면 모든 것이 감사요 모든 것이 은혜요 모든 것이 축복이요 모든 것이 주님의 도우심이 아닌가. 여기서 생각이 벗어나면 교만한 것이고 어리석인 것이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해 주신 농사 잘 된 부자의 비유처럼 올 해 농사가 잘되었으니 창고 늘리고 몇 해 동안 땀 흘려 수고하지 않고도 잘 먹고 잘 입고 먹고 마시고 놀자 이런 생각할 때에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부르시면 네 가진 소유가 다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이것이 예수의 질문이 아니신가.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 이 모든 것이 은혜라네”

이런 신앙 가운데 살아간다면 맥추절이든 추수절이든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택이 감사하고 범사가 감사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우린 모든 것이 그분의 공급해 주시는 선물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니 그러하다. 
23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복음의 일꾼”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바울은 복음의 일꾼 맞다. 그는 복음을 대적하고 방해하고 박해하던 자였다. 그러나 다메섹 체험 후에 복음 전파자로 바뀌었다. 그를 복음 전파의 일꾼 되게 하신 것이 주님의 은혜가 아닌가. 현대인의 성경에 보면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꾼”이라고 했다. 그렇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이다. 늘 말하지만 넌 기쁜데 난 안 기쁘고 그 집은 기쁜데 우리 집은 부럽기만 하고 배가 아프면 그건 기쁨 소식, 복음이 아니다. 너도 기쁘지만 나도 기쁘고 너에게도 기쁜 소식이지만 나에게도 기쁜 소식이며 우리 모두에게 기쁜 소식인 그것이어야 복음이다. 2천 년 전에도 그랬고 동서고금에 이 소식을 듣는 모두에게 복음인 그것이 복음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사신 부활의 이 기쁜 소식이 복음이란 말이다. 이 복음을 믿음으로 죄 사함 받고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하고 천국 백성이 되는 것 이것이 복음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본문은 무엇을 말씀하나.
바울은 25절에서 자신을 “교회의 일꾼”이라고 했다. 고린도후서 3장 6절에서는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도 했다. 그렇다. 바울은 교회의 일꾼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며 살다가 주님 앞으로 간 복음의 일꾼이며 새 언약의 일꾼이다. 나라의 일꾼으로 역할을 잘 하면 후대에 그를 위해 기념비를 세워주고, 동상을 건립하고 기념관을 세우고 도서관을 세우고 연구 학회가 계속되고 한다. 그러나 나라의 왕을 지냈어도 나라의 일꾼답게 살지 못하면 감옥에 갇히고 만다. 

천국과 지옥이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이들이 요즘 신문과 인터넷과 라디오, TV에 도배를 하지 않나. 

사도 바울은 자신을 “교회의 일꾼”이라고 했다. 좀 더 자세하게 말씀을 보자. 
 

괴로움과 고난을 극복하는 일꾼.
바울은 복음 전파하는 복음의 일꾼이요 교회의 일꾼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괴로움도 기쁨으로 감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고난의 삶을 달게 받아 들이며 살아갔다. 

생각해 보라. 가정의 아들딸을 키우는 부모의 심정, 손자손녀를 돌보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심정을 생각해 보라. 한 생명의 탄생과 함께 그 자라나는 성장기에 부모와 가족들이 얼마나 애를 쓰고 수고하나. 새벽 2-3시에 한창 고단하게 잠을 자는데 아기기 깨어 일어나 울면 그냥 내 버려두고 잘 수 있나. 아무리 고단하지만 깨어 일어나서 아기를 돌보고 보살피고 아기와 함께 깨어 일어나서 그 아기에게 시간을 쓰고 정성을 기울이고 최선을 다하지 않나.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고”가 무언가. 우리가 다 그런 사랑을 받고 오늘 날에 이른 것이 아닌가. 부모가 아들딸 낳아 기를 때에 고생이라고 여기나.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고난을 고난이라고 여기지 않고 키우는게 정상이 아닌가. 사도 바울이 그랬다.

우리 교회 가까이에 국가적인 건물이 지어지고 있다. “국립고전 번역원”이다. 내년이면 완공될 것이다. 150여명의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건물이 지어지고 있다. 고전 번역이 무엇인가. 누군가가 어려운 공부해서 그런 분야에 헌신하는게 아닌가. 교회도 그런 곳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손에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아벨을 만나고 에녹을 만나고 노아를 만나고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과 기드온과 삼손과 드보라를 만난다. 성경을 통해서 사무엘과 사울 왕과 다윗과 솔로몬을 만난다. 성경에서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엘리야와 에리사와 에스겔과 다니엘과 느헤미야를 만난다. 아니 우리는 성경의 인물들과 지난 2천년의 교회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난다. 

그 시대마다 괴로움과 고난은 언제라도 있었고 어디라도 있었다. 그러나 그 고난을 고난으로만 대하지 않고 고난을 극복하고 괴로움을 즐거움을 소화해 내는 능력을 공급받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29절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는 네델란드의 평범한 개신교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4살 어린 동생과 평생 형제처럼 지냈다. 그의 그림 중에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교회 그림도 있다. 그는 늘 가난했다. 물감 살 형편도 안 됐다. 동생에게서 경제적으로 도움도 많이 받았다. 그는 화상을 하는 삼촌을 따라 런던으로 파리로 다녔다. 거기서 그림에 눈을 떴다. 그가 좋아하는 화가는 렘브란트였다. 그의 그림의 소재는 왕궁이나 신데릴라의 예쁜 구두가 아니었다. 평범함 서민들의 일상이었다. 모델을 구할 돈이 없어 주로 자화상을 많이 그렸고 주변의 일상을 그림에 남겼다. 하이덱거는 반 고호의 신발 그림을 “예술 작품의 근원”이라고 극찬하였다. 반짝 반짝 빛나게 잘 닦은 구두가 아니라 다 떨어진 구두 짝은 고단한 인생살이가 담겨 있는 그런 작품이다. 그는 늘 동생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고호는 고갱을 만나 함께 지낸 적도 있다. 반 고호는 신학을 공부하고 탄광촌에 들어가 서설교하며 목회 한 적도 있었다. 반 고호는 내성적이고 격정적이고 의리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 그와 고갱이 성격이 달랐다. 고갱은 외향적이고 인습을 비웃는 냉소주의자였다. 결국 서로는 오래 가지 못하고 결별하였다. 고호의 2000여 작품들은 그가 살아 있을 당시에 빛을 보지 못했다. 그는 ‘측두엽 기능 장애’로 정신질환도 앓았다. 한쪽 귀도 잘라냈다. 37살에 아쉽게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그의 생을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입었고 그의 작품들과 동생과 나눈 편지들과 글들은 그 누구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만의 작품 세계를 남겼다. 그가 세상을 떠난 10여년 후부터 그의 작품들을 세계가 급하게 알아주는 작가가 되었다. 그의 작품 중에는 세계 10대 경매에 붙여진 작품도 있다. 

1987년 3월 30일에 반 고흐의 그림 '아이리스'가 뉴욕의 소더비즈에서 5390만 달러에 팔렸다. 1990년에 그의 '가셰 박사의 초상'(첫째판)이 크리스티즈에서 8,250만 달러에 팔렸다. 우리 돈으로 948억이다. 일본의 다이쇼와제지 명예회장 사이토 료에이(당시 74세)가 사 들였다. 이후 '가셰 박사의 초상'은 미국의 수집가에게 다시 팔렸다.

가난한 화가의 그림 한 점에도 수 백 억의 가치를 투자하는 이들이 있지 않나. 우리는 그런 정도와 비교하면 안 된다. 우리가 알고 믿고 따르며 전파하는 복음은 그런 정도와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것이다.

여러분의 어린 자녀를 천하를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여러분의 귀한 아들딸을 세상이 1000억을 준들, 1000조를 준들 그 무엇과 바꾸겠나. 생각해 보라. 주님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을 이기는 권세 있는 복음을 우리 각 사람에게 선물해 주셨다. 이것은 천하에 하늘과 땅의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영원한 선물이다. 

바울은 이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후에 그가 자랑하던 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다. 오직 복음, 오직 예수, 오직 복음 전파를 위해서 살았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면 괴로움을 기쁨으로 여겼다. 고난을 육체에 채우며 주를 섬겼다. 우리는 오해하면 안된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표현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은 고난의 완성인데 무슨 남은 고난이 있다는 말인가 하고 오해하면 안 된다. 이미 그리스도께서는 온갖 고난을 그의 몸에 다 짊어지시고 단번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영원한 부활 생명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러면 바울이 말씀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무엇일까. 교회 역사 2000년 동안 세계만방에 복음이 전파되기 위하여 부름 받은 수많은 주의 백성들이 이 땅에 복음 전파와 그리스도의 몸 된 성도들의 믿음을 지켜 가기 위해서 당한 환난과 고난이 적지 않다. 바울 자신이 그런 인물들 중에서 대표적이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간증하는 그대로이다. 

“23.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30.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23-30)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 가는 일꾼.
“직분을 따라”라는 말씀을 예전의 개역 한글 성경에서는“경륜을 따라”라고 하였다. 공동 번역이나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사명을 따라”라고 하였다. “by the commission”이라고 했다. 그렇다. 사도 바울은 분명한 경륜과 부르심과 사명을 따라 주어진 직분을 제대로 잘 감당한 생을 살다가 주님 앞으로 돌아간 사도이다.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하지 않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나. 

바울은 하나님이 경륜을 따라 사명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 전파와 말씀 성취의 사명으로 불이 붙던 사도였다. 바울의 사명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는 복음 안에 사는 성도라면 누구나 다 마찬가지여야 한다. 그 때나 오늘 날이나 다 마찬가지다.

시급이 6,470원이냐 10,000원이냐에 목숨을 걸면 되겠나. 이런 말 함부로하면 적이 생기겠지만 그렇지 않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시급이 얼마냐, 월급이 얼마냐, 연봉이 얼마냐, 재산이 얼마냐, 주식이 얼마냐, 땅이 얼마나 있느냐, 금은 보화가 얼마나 있느냐 그것이 나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성경이 사도 바울의 재산을 말하나. 지난 기독교 2000년의 역사가 성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나 마틴 루터나 잔 칼뱅이나 요한 웨슬리나 아펜젤러나 언더우드나 손양원, 주기철, 안창호, 김구의 재산이나 유산의 규모를 말하나. 아니지 않나. 

우리가 복음을 알고 복음의 일꾼으로 살아가고 교회의 일꾼으로 살아간다면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일을 위해서 주어진 직분과 사명과 하나님의 경륜 앞에 응답하고 엄숙하게 반응하면 평생을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우리 교회의 어른, 젊은이,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그런 사명과 그런 직분 앞에 부르심을 따라 충성되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한다.

어제 남태준 학생과 함께 방송실 주일 예배 PPT 작업을 마무리 했다. 그동안 태준이가 컴퓨터 공부도 하고 자격 시험도 합격하고 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최근에 교회 사역에 변화와 긴장이 생기면서 마음속에 태준이가 방송실에 어떤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기대 이상이었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재주, 은사, 역량, 경험, 능력, 실력, 경제력, 재력, 사회 지위와 신분 등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모든 것들을 총 망라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부름 받은 나의 직분을 제대로 충성되게 잘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들어 알지 않나.
로마 성 바울 성당이 한창 건축되고 있었다. 감독관이 석공들에게 물었다. 
“지금 무엇하고 있소”
대답이 각각이었다.
“보면 모릅니까 돌을 다듬고 있소이다.”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고 있습니다.”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이런 질문이 주어진다면 어떤 대답을 하겠는가. 

사도 바울은 말한다.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여기 ‘오이코노미아’라는 말은 ‘집을 다스리는 것’ 즉 청지기를 말한다. 청지가가 무엇인가. 다섯, 둘, 한 달란트를 주인이 종들에게 맡기고 먼 나라에 갔다고 왔다. 와서 보니 그 결과가 서로 달랐다. 다섯을 열, 둘을 넷 남긴 종들을 칭찬했다. 갑절 남겨서 칭찬받은 것이 아니지 않나. 그 태도, 그 자세, 그 마음가짐, 일과 시간 앞에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갑자기 주인이 와서 계산하자 할 때에 늘 수고하고 성실하게 일하던 그 상황을 주인에게 말한 것이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더 큰 일을 맡기리라.”

요즘 어떤가. 인색함으로, 게으름으로, 무관심으로, 되는대로, 별 성의 없이 그렇게 예수를 믿어 주는 듯이 교회를 다녀 주는 듯이 하지는 않나. 한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 두었던 종이 받은 책망이 무엇인가. 무엇이 그의 문제였나. 주인의 책망의 내용이 무엇인가.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25:26-30) 왜 땅 속에 그냥 묻어 두었는가. 왜 이자라도 늘리지 못하였는가 하고 꾸중 듣고 책망 받지 않았는가. 

미국의 39대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Jimmy Carter, 1914~)는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썼다. 그 책에서 밝힌 이야기이다. 그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서 전도훈련을 받았다. 그는 그 훈련을 통해서 배운 그대로 실천했다. 그는 매년 10가정씩, 14년에 걸쳐서 140가정을 전도해서 교회로 인도했다. 카터 자신도 그 결과를 대단하게 생각하면서 늘 기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일에 대해서 간증을 했다. 그가 조지아주 지사로 입후보하게 되었을 때였다. 그는 3개월 동안 선거운동을 하면서 무려 30만 명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악수를 하면서, 입에서 신물이 날 정도로 자기의 정책을 계속해서 말하고 또 말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자서전을 쓰면서 그 통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주를 위해서는 고작 1년에 10가정, 14년 동안 140가정을 전도하고서도 그것을 대단한 일로 생각하면서 자랑했다. 그런데 자기의 육신을 위해서는 불과 3개월 동안에 30만 명을 만났던 것이다. 그는 그 두 사실을 비교해 보면서 그 뒤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도 부끄러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퇴임 후에도 세계평화와 복지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전 미국대통령 지미 카터의 해군사관 생도시절 이야기다. 그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에 임관 되기 전 어느 날 그 당시 해군제독인 '릭 오버'와 면담 시간이 주어졌다. 젊은 장교인 카터에게 전술과 전략에서부터 군인의 자세에 이르기까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러다가 화제를 돌려서 해군사관학교 시절에 어떻게 지냈고 성적은 어땠느냐고 물었다. 카터는 성적에는 자신이 있어 등수를 대답했다. “820명중 59등입니다.” 그 때 제독이 다시 물었다. "그 성적이 자네가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 카터는 식은땀을 흘리며  "글쎄요. 최선을 다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요.”그 때 제독은 매섭게 카터를 쏘아 보며 되물었다. "Why not the best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이런 질문 앞에 자신이 넘치고 온전히 자신을 드러낼 사람은 우리 중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하려는 진심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일을 위해서라면 교회의 일꾼이요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직분을 제대로 잘 감당하려는 마음가짐에서 어느 한 순간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해서 받는 괴로움을 기쁨으로 여기고 고난을 육체에 채우며 굳굳하게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어진 직분을 귀하게 여기며 내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져 가는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각 사람이 되기를 축원한다.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 가는 일꾼.
바울은 이 복음을 ‘비밀’이라고 말한다. 이 비밀은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뜻이 성도들에게 나타난 것이다. ‘성도’라는 표현도 여기 26절에 나온다. 하나님은 성도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들 가운데도 풍성하게 전파되게 하셨다. 130년 전에 우리 한 반도의 조선 땅에도 그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 비밀이 무엇인가. 바울은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7)고 하였다. 성도들은 각 사람 안에 계신 영광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각각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하야야 할 사명과 직분이 주어져 있다. 유모가 정성을 다하여 한 아기에게 사랑을 쏟고 한 생명을 양육하듯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28절의 강조를 보라.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그렇다. 각 사람에게 각각 그렇게 하는 것이다. 두리 뭉수리가 아니다. 각 사람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다. 주일 날 예배 시간에 선포되고 묵상되는 말씀도 그런 마음 가짐으로 대해야 한다. 나를 향한 말씀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이 나 한 사람을 주님 앞에 앉혀 놓고 나 읽으라고 보내신 편지로 읽고, 나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으로 경청하며 살아가야 한다. 28절을 다 같이 한 번 읽자.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

이번 여름의 각 부서의 사역도 그렇게 준비되고 그렇게 진행되기를 원한다. 한 영혼이 귀하다. 각 사람이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다. 각 사람에게 전파되는 복음의 말씀은 모든 지혜로 하여야 하는 말씀이다. 9절 말씀처럼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라는 말씀이 절절이 각 사람의 마음에 와서 그의 심령을 꿈틀대게 하여야 한다. 바울 자신이 그러한 태도와 마음가짐을 갖고 복음의 일꾼이요 교회의 일꾼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괴로움과 고난을 기뻐하며 당하는 고난을 육체에 채우며 교회를 위한 거룩한 염려 가운데 붙잡혀 살았다. 바울은 말한다.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8)

그래서 바울은 다시 말한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9)

마틴 루터가 10개월간 갇혀 있으면서 신약 성경을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해 낸 바르트부르크 성을 둘러보고 산꼭대기에서 내려 와서 자그마한 마을에서 점심을 먹었다. 햇감자를 통째로 찌고 소시지 한쪽과 삶은 고기 몇 점과 함께  작은 접시에 한 끼 음식을 소박하게 담아내는 고풍스러운 소박한 식당이었다. 거기서 걸어서 시장과 연립 주택가를 지나 나지막한 언덕에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를 기념하는 박물관과 기념 공원과 동상을 둘러보았다. 시간이 없어서 생가 안에 까지 둘러 볼 여유가 없었다.  ‘음악의 아버지'라고 하며 "모든 음악은 바흐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무인 우주선 보이저 호를 쏘아 올릴때 외계인에 보내는 인류의 메시지를 싣고 간 것이 바흐의 음악이었다고 한다. 아이제나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라이프치히 중간 지점에 있는 중세의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작은 도시다. 그곳에서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1685년에 태어났지요. 아버지는 거리의 악사였다. 사촌형 요한 크리스토프는 바흐가 세례를 받은 성 게오르그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였다. 바흐는 9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그 다음 해에 돌아가셨다. 100리 떨어진 큰형에게 가서 살게 되었는데 큰형은 그 당시에 유능한 음악가였다. 소년 바흐에게 오르간 연주와 작곡에 대하여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형이 가지고 있는 악보를 보여주지 않아서 바흐는 매일 밤 몰래 형의 악보를 훔쳐서 달빛 아래에서 베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미카엘 음악학교를 다닌 후궁 정 악사로,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작곡을 하면서 아른슈타트, 뮐하우젠, 바이마르, 괴텐 등 여러 지역을 거쳐서 1723년에 성토마스 교회의 합창장 겸 감독으로 생의 마지막 27년을 지낸 라이프치히에서 65살에 눈을 감았다. 말년에는 뇌졸중에 시력도 잘 보이지 않게 되었고 체력은 점점 소진해졌다.라이프치히에 바흐 동상과 박물관이 있고 성 토마스 교회에는 그의 묘가 있는데 바흐가 태어나 10여년을 지낸 고향 아이제나흐에 바흐의 동상과 바흐의 생가를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제 2차 대전 때 폭격을 받아서 불바다가 되었다. 후에 다시 복원한 것이 지금의 모습인데 세계의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그의 신앙은 돈독했다.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고 나면 뒤에 'S D G' 즉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르간 곡 작곡이 끝나면 'I N J' 즉 "In Nomime Jesus”(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썼다. 그의 생은 고 난의 연속이었다. 첫 아내는 7명의 자녀를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둘 째 부인을 통해서 태어난 아이들 중에서 11명이 일찍 죽었다. 한 아이는 정신 박약아였다. 그러나 그는 마음 속 깊은 곳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70년이 다 되지만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은 넘쳐난다. 그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난과 슬픔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으로 승화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한 사람을 통한 음악이 각 사람의 영혼에 파고드는 감동, 스미어드는 감동이 크듯 복음이란 그런 것이다. 바울의 교훈처럼 “각 사람을 권하고 가르치고 완전한 자로 세워 나가려고 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것이다.”이런 은혜의 역사가 우리 각 가정과 각 부모와 각 사역의 현장과 각 사람을 통하여 계속되어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게 하는데 쓰임 받는 교회의 일꾼 복음의 일꾼이 모두 다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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