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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믿음으로 말미암아(갈3:19-29) 2019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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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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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9-04-09 17:59 조회 11,821 댓글 0
 
                     믿음으로 말미암아(갈3:19-29)        2019. 4. 7


주일이면 수만 명이 출석하는 큰 교회의 담임 목사가 종합검사를 했다. “고혈압, 고지혈, 지방 간, 코레스테롤, 당뇨” 등등 어느 것 하나 안정된 상태가 아니니 날마다 일정하게 운동을 하여야 한다고 주의를 받았다. 담당 의사는 그 목사에게 수영을 권했다. 새벽 기도 후에 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배우기로 했다. 막내 딸 정도 나이의 체육대학생인 수영 코치가 자신에게 수영을 코치해 주었다. 

수영이란 것이 수영을 잘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수영처럼 쉽고 좋은 운동이 없다. 그러나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물이 두렵고 수영 자체가 어렵기 그지없는 운동이다. 

그 목사는 전혀 수영을 못하는 솜씨는 아니었다. 그러나 수영 코치가 기대하는 것은 개헤엄이 아니라 접영 즉 나비가 날듯이 물속에서 사뿐 사뿐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수영 동작을 코치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목사는 자꾸만 물에 가라앉고 허우적거렸다.

“아버님 믿음을 가지세요.”코치가 말했다. “아니 무슨 믿음을 가지란 말이요. 나도 믿음이 있소.”, “무슨 믿음이요.”, “나도 예수 믿는단 말이요. ”, “아뇨 아버님 그런 믿음 말고 사람이 아무리 몸무게가 많이 나가도 물에 들어가면 누구나 몸이 물에 뜬다는 믿음을 가지시라고요.”

여러분. 믿음이 무엇인가. 갈라디아서는 어떤 믿음, 무슨 믿음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는가.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와 성도들은 율법에 의해 구원 받는 다는 ‘다른 복음’, 할례를 받아야 구원 받는 다는 ‘다른 복음’ 전파자들의 꼬임에 빠져서 은혜 생활, 복음을 믿는 진리에 혼란을 갖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 때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를 편지함으로써 “우리가 믿는 믿음이라 과연 무엇인가.”, “복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갈라디아서 3장은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시작된다. “너희 바보들, 갈라다아 사람들아”이런 말이다. 누가 이런 편지를 받아 들고 좋아 하겠나.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 적지 않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은혜 생활, 복음 생활에 있어서 바보가 되어 있었다. 율법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의 율법 강조와 할례 강조에 의해서 판단의 혼란을 갖고 영의 분별력이 마비된 바보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책망하였다. 그리고 예를 든 인물이 아브라함이었다. 아브라함은 그 아버지 데라와 그 조상 대대로 우상을 숭배하던 가정이었다. 그런데 아브라함 나이 75세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그리고 그에게 언약하셨다. 그 언약(言約)을 믿는 믿음이 생겼을 때에 이를 그의 의(義)로 여기셨다.(창15:6)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들은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된 자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의 언약은 모세 때의 율법보다 앞서 주어진 약속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신앙으로 살아가느냐 혹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신앙으로 살아가느냐는 것은 선택의 문제이며 분별해야 하는 신앙의 과제이다. 

갈라디아서 3장 19절부터를 본문으로 읽었으나 3장 전체를 잠시 개관해 보자. 성경을 보라.

3장 7절과 9절에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것이다. 

3장 11절에는‘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라고 했다. 언약도 하나님의 주신 것이고, 율법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율법은 언약의 자녀가 언약을 이루는 자녀로 살아가게 하려는 방편에 불과 하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할 뿐 죄를 사(赦)하는 권세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보내 주신 것이다. 

14절에 보시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갈3:13)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갈3:14)을 받는 자 되게 해 주셨다.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복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제목의 묵상을 계속하자. 


약속(約束) 안에서 의(義)롭다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子女)가 되었다.
19절과 22절에 ‘약속’이란 표현이 있다. 약속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사람과 하신 약속을 언약이라고 한다.  15절에 보면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고 했다. 맞다. 우리가 결혼 서약할 때 보면 “하나님이 짝 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라고 선언하지 않나. 그게 15절에서 말하는‘사람의 약속’이다.

이번에 55살,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CEO가 48살, 아내 메킨지와 25년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이혼하는데 아내 메킨지가 받는 위자료가 40조라고 하지 않나. 아마존 지분의 25%라고 한다.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서로 간에 위자료가 그럴 수도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언약에도 그런 정도의 힘이 있거늘 하물며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신 언약이랴. 오늘 19절부터 읽었는데 18절을 잠시 보면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는 말씀이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4천 년 전에 75세였던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언약하셨다. 약속하셨다. 지난 4천년 동안의 아브라함의 후손과 하나님과의 언약의 역사가 성경 창세기 12장 이후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본문에 돌아 와서 “그런즉 율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답을 찾아 가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이다. 그런데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와 성도들은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의 복음 훼방으로 말미암아 신앙이 병들고 복음에서 떠나고 모세의 율법으로 인하여 분별력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이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것이다. 

19절과 20절의 ‘중보자’란 모세를 말한다. 모세를 중보자로 세우셔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약속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맞다. 율법이란 약속하신 자손인 그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만 유효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태복음 5장 17절의 말씀처럼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22-23절에 보면 약속하신 자가 오시기 전 까지는 죄 아래 가두어져 있었다.(22절)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어 있었다.(23절) “율법이 무엇이냐”하면 24-25절 말씀처럼‘초등교사’와 같은 것이다. 옛 성경에는 ‘몽학선생’이라고 했다. 저들은 헬라 문화권 시대에 종들 중에서 학문과 덕을 갖춘 이들로서 주인의 아들딸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돌보고 가르치는 자들이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유치원, 어린이집, 초등학교 저학년 교사들의 역할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기본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떤 고등학문을 가르치고 대단한 분야의 학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미국 목사 로버트 풀검(Robert Fulghum, 1937-)의 책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I Really Need to Know I Learned in Kindergarten)의 내용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나 IBM 세일즈맨, 카우보이, 아마추어 로데오선수, 화가, 조각가, 음악가, 카운슬러, 바텐더 그리고 나중에는 목사로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왔다. 

신학대학원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20여 년간 퍼시픽 노스웨스트 어느 교회에서 목사로 봉직하며 삶의 진리와 묘미에 대해 글을 써왔다. 그중 ‘내가 유치원에서 배운 것’이라는 이야기가 점점 확산되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면서 마침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가 탄생했다.
 
이 책은 1988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래 34주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으며 무려 97주간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랐다. 전 세계 103개국에서 31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1,700만 부가 팔리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복음을 깨달아 알고 믿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깨닫고 의롭다 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런 정도의 깨달음과 교훈과 차원이 다른 경이로운 것이요 영원한 상급이요 축복이요 권세인 것이다. 

22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
24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6절,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you are all children of God)이 되었으니”

이 모든 말씀들이 깨닫고 보면 얼마나 귀하고 감격스럽고 영광스러운 말씀인가 말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언약인 약속 안에서 의롭다 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할렐루야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
바울은 세례를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맞다. 세례란 일화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신앙의 고백 위에 행해지는 예식이기 때문이다. 세례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한 예식이란 말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합해져서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는 고백 위에 행해지는 것이 세례다. 그러므로 물 세례는 성령 세례를 동반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 문이 열렸다. 하늘에서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예수께 임했다. 하늘 위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자여 내 기뻐하는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요한복음 3장 5절에 보면 “네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이는 예수를 만나러 왔던 바리새인 지도자 니고데모에게 교훈하신 말씀이다. 맞다. 물세례가 귀하듯이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 다른 것을 잘 알아듣다가도 성령 이야기 하면 갑자기 먹먹해지고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고 그러면 곤란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은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살아가는 생활이다. 이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계속되는 삶의 모습이다. 

옷은 그 사람을 말한다. 복장은 그 사람의 신분, 직업, 지위, 성별, 문화, 취향, 빈부격차 등을 나타낸다. 

노숙인의 옷차림과 왕의 옷차림이 다르다. 서울 역 주변에 가면 노숙인이 많다. 물론 저들에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어제 구파발 역 지하도 입구에서 전도하다가 노숙인을 한 사람 만났다. 완전 겨울 복장이었다. 언제 세탁해 입었는지 알 수 없는 복장이었다. 소련군처럼 두꺼운 누비바지를 입기는 했는데 여러 차례 바지에 소변을 보고 마르고를 반복한 표시가 역력한 악취가 풍기는 복장이었다. 어떤 어머니가 품 안에서 사랑으로 젖을 먹여 키워 낸 아들의 나중 모습이 그런 나날이 되길 선택하였겠나. 어떤 아버지가 사랑으로 키워 낸 아들이 나중에 그런 생을 살길 원하였겠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를 옷 입혀진 자를 말한다. 

왕의 옷차림과 다리 밑에서 생활하는 거지의 옷차림이 다르다. 왕의 옷차림과 신하의 옷차림이 다르다. 왕의 옷차림이 다르고 왕실의 정문을 지키는 문지기의 옷차림이 다르다. 남자의 옷차림과 여성의 옷차림이 다르다. 장군의 복장이 다르고 사병의 복장이 다르다. 육군공군해군의 복장이 다르다. 야구선수의 복장이 다르고 수영 선수의 복장이 다르다. 옷차림은 그 사람의 신분, 지위, 직업, 남녀 성별, 소속 등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그 일상생활이 숨김없이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답게 드러나고 증거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사용하는 옷 입는 다는 표현은 세상적인 정욕과 불신의 옷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의 옷을 입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옷입다’는 ‘엔뒤오’(ενδυω)는 원래 군인이 군인의 옷을 입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이런 표현을 즐겨 썼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 하지 말라.”(롬13:14) 

그렇지 않나. 성가대 가운 입고 ‘버닝 썬’에 드나들 수 있겠나.  성가대 가운 입고 사창가에 드나들고 술집에 드나들고 놀음판에 끼어 앉을 수 있겠나. 성가대 가운 입고 마약할 수 있겠나. 성가대 가운입고 도박하고 살인하고 퇴폐하게 살고 도둑질하고 쑥덕쑥덕 남을 험담 할 수 있겠나. 성가대 가운만 입어도 마음가짐이 달라지거늘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이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 힘과 도전을 주는 말씀인가.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4:24)는 권면도 하였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0절에서는 새사람을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하나님의 누구신지 아는 지식에 있어서도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예수의 비유 중에 둘째 아들이 거지가 되어 돌아 왔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해 준 일 중의 하나가 무엇인가. 남루한 거지 행색의 옷을 벗기고 새 옷을 갈아입게 한 것이다. 돼지우리에 눕던 땀 내나는 더렵혀진 몸을 씻기고 새 옷을 갈아입힌 것이다. 신분의 변화이다. 아들은 자신을 아버지 집의 종들도 지금의 내 신세보다는 더 나은데 라고 남의 나라 돼지우리에 누워서 처량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용기를 갖고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는 아들을 먼저 알아보았다. 아들을 얼싸 안았다. “잃었다가 얻은 아들, 죽었다가 살아 돌아 온 아들”이라고 했다. 풍악을 울리고 송아지를 잡고 목욕을 시키고 가락지를 깨우고 새 옷을 입히고 새 신을 신겨 주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합해지고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살아가는 생활인 것이다. 용기를 내어 아버지의 집에 돌아오고 나니 그 동안의 모든 세상 죄악 가운데서 허덕이던 과거가 지나가고 아버지의 아들의 신분을 순식간에 회복하게 된 것이다. 할렐루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가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구나 다 하나다. 이는 인종, 신분, 남녀의 성별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28절의 말씀이 그것이다. “너희는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는 선언은 얼마나 아름답고 장엄한 구원의 초청이며 선언인지 모른다. 누구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유대인, 헬라인 구분이 없다. 종, 자유인 구분도 없다. 남자 여자 구분도 없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신분지위고하 그런 구분으로 구분받거나 제한 받지 않는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이와 같은 선언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누구든지’라는 선언 안에는 누구다 다 구분이 없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고 성령 안에서 누구나 다 하나이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라는 찬양의 가사 그대로이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널리 전하세
모두 찬양하며 주의 사랑을 전하세
모두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 널리 알리세

하나라는 것이 무엇인가. 29절 말씀대로이다.

성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가 되었다면
누구나 다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소유이다. 그리스도와 합한 자이다.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이다. 


이는 복음을 벗어나서 어리석게 방황하는 갈라디아 인들처럼 율법의 저주 아래로 되돌아가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복음을 깨달아 알고 믿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깨달아 알고 믿게 되면 언약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입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지 고백하고 간증하고 증거하게 될 것이다. 

다니엘 김은 오래 전에 일본 시코쿠 섬에서 선교 집회를 열었다. 저녁 집회 시간이 다가 오는데 그 교회 목사의 얼굴이 어두웠다. 아들이 여자가 되고 싶다고 여자 복장을 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 아들이 그 날 저녁 집회에 참석하겠다고 하니까 목사님이 창피해 하고 불안 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나. 목사 신분을 떠나서 아버지의 마음이 오죽했겠나. 그 때 다니엘 김 강사는 “아들에게 오늘 밤 집회에 참석하라고 하세요. 오늘 밤에 하나님이 아드님을 어떻게 만지실지 모르잖아요.”

그 아들이 그 날 밤 집회 시간 내내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음 날부터 십자가 행진을 시작했다. 십자가를 서로 옮겨지고 30km를 걷는 ‘십자가 행진’이었다. 중간에 그 아들이 “제가 그 십자가를 좀 져 봐도 될까요.”십자가를 지고 가던 그 아들이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십자가 지고 걷기 행진이 끝 난 후에 서로들 간증하기 시작했다. 

“주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가 이렇게 무거운 줄 몰랐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제가 끊으려고 해도 끊어지지 않던 죄의 무게처럼 느껴졌습니다. 십자가에서 제가 치뤄야 할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치루어 지신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으니 이제부터 저는 더 이상 사탄에서 속지 않을 것입니다.”

그 날 이후 그 목사님의 젊은 아들은 여자 복장을 벗어 버리고 남자로서의 정체성을 건강하게 회복하게 되었다. “주님을 만나 죄 사함 받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면 누구나 삶이 변화되게 마련이다. 누구나 주님의 종이요 복음의 증인으로서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게 된다.” 

생명의 삶 4월호, 45페이지에 실린 다니엘 김의 책, <철인>의 내용이다. 

남은 사순절도 모두가 다 같이 갈라디아서 말씀 묵상과 함께 승리하는 나날이 되길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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