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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디도서(딛1:1-9) 2019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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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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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9-02-25 15:43 조회 12,501 댓글 0
 
                         다시 읽는 디도서(딛1:1-9)      2019. 2. 24


빛의 삼원색은 빨강색, 초록색, 파랑색이다. 무지개의 색은 일곱 가지이다. 빛은 더 자세하게 세분하면 형형색색의 아름답고 눈이 부시고 영롱한 빛들이 연출된다. 그렇게 보여 지는 것이다. 어제 토요일 날씨는 봄의 기운이 완연하였다. 공기도 그런대로 맑았다. 햇살도 곱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봄이 오고 있다. 지난겨울은 참으로 가물었다. 겨울이 춥고 눈도 적당히 와서 강설량이 좋아야 그 해 농사가 잘 된다는데 지난겨울은 눈도 비도 별로 내리지 않고 무척 가물었다. 우리 영혼도 가물면 좋지 않다. 해갈될만한 양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최근에 내린 비로 땅이 적당이 적어 있어서 흙먼지가 사라졌다.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택을 덧입고 살아가야 한다. 1

83장 찬송 ‘빈들에 마른 풀 같이’의 2절 가사는 이렇다. 

“반가운 빗소리 들려 산천이 춤을 추네 
봄비로 내리는 성령 내게도 주옵소서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

다가올 봄과 함께 이런 성령의 은혜가 임하는 나날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별의 별 일들을 다 겪으며 살아간다. 그야말로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을 겪으며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언제나 항상 날마다 좋은 일만 계속되는 이도 없고 그렇다가 어렵고 험한 일만 계속되는 이들도 없다. 중동 사람들의 속담 중에는 “날마다 햇볕만 내려 쪼이면 주변이 모두 사막이 되고 만다.”는 말이 있다. 그렇지 않나.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일들을 겪는 것이 인생살이가 아닌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조차도 이 땅에서 별의 별 일들을 다 겪으셨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께서 고향 나사렛에 방문하셨다. 예수는 고향에서 맞이한 안식일에 나사렛의 회당에서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읽고 강론하셨다. 예수의 말씀을 전해  들은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힘을 모아서 예수를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서 죽이려고 한 적이 있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어려차례 이곳저곳에서 배척도 당하시고 무시 받고 따돌림 당하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결국 예수는 그를 대적하는 가야바 대제사장이 앞장서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가세한 상태에서 체포되었다. 그날 아침 유대 지역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us, 재임 AD26-36)에게 넘겨져서 사형 언도를 받고 십자가에 처형되셨다.

그러한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보내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초대교회가 탄생하였다. 그 시작은 11제자들을 포함한 120여명의 성도들이었다. 그 후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교회는 3천명, 5천명 그 이상의 수 만 명의 무리들로 부흥하였다. 믿는 자의 수가 점점 더해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 믿는 이들을 몹시 핍박하고 박해하던 사울이 변해서 사도 바울이 된 것은 주님의 크나 큰 구원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부름을 받았다. 사도 바울에 의해 쓰인 13편의 서신들은 그가 복음을 전했던 혹은 전하고 싶었던 지역과 도시의 성도들에게 편지한 것들이다. 

디도서는 그레데 섬에서 목회하던 디도에게 편지한 사도 바울의 목회 서신이다. 그레데 섬은 그리스 남부의 지중해 한 편에 있는 큰 섬이다. 주로 산악으로 이루어진 그리스의 에게 해 남쪽을 가로질러 지중해에 놓여 있는 그레데 섬은 동서의 길이가 250km인 무척 큰 섬이다. 섬의 넓이는 11~56km로 다양하다. 제주도 크기의 4배반이나 되는 큰 섬이다. 그런데 그레데 사람들은 지중해 지역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역사학자 에피메니데스(BC 600년)는 그들을 "거짓말쟁이, 악한 짐승,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불렀다. 바울은 역사적인 그런 소문을 디도서 1장 12절에서 인용하였다. 주전 5세기의 레오니데스(BC 488년)는 "그레데 사람들은 항상 도적질하고 노략지라며 불의하다”고도 말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인 AD 1세기경에도 그레데인들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레데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말은 ‘거짓말쟁이'란 뜻으로 사용될 정도였다.
디도서는 바울 곁에서 동역자로 쓰임 받았던 디도에게 보낸 목회 서신이다. 그 당시 디도는 그레데 섬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그레데 섬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 가운데 30여명은 일 년 전 즈음에 주일 오후 시간마다 모여서 ‘커피 브레이크’ 말씀 묵상 분량으로 디도서를 대한 적이 있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을 ‘다시 읽는 디도서’라고 정한 것이다. 디도서의 시작 부분인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사도(使徒)인 바울.
디도서의 시작은 누가 쓴 편지인가를 소개하고 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종이다. 종이 어떤 존재인가. 주인이 따로 있고 그 주인의 명령에 따라서 출입하고 행하며 사는 자가 종이다. 종은 주인의 소유이다. 종은 그의 모든 삶을 통하여 주인을 만족하게 하고 주인을 기쁘게 하고 주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하였다.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자’라는 의미이다. 보냄을 받은 자는 그를 보낸 자에게서 부여 받은 사명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제 맘대로, 제 멋대로, 제 고집대로, 제 좋은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면 안 된다. 사도의 삶이란 마치도 대사와 같은 것이다. 상대국가에 파견된 대사는 그를 상대국에 대사로 임명하여 보낸 자기 국가의 통치자에게서 위임 받은 외교적인 소임에 충실한 일상을 살아가야만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각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하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각자 다 다른 가정 형편 가운데서 태어났다. 서로 다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성장 환경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직업이 다르고 관심 분야가 다르다. 서로 다른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살아가는 환경과 수준도 서로 다 다르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은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자기 스스로 대답을 찾아가야만 하는 한 가지가 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나는 누구인가. 반대로 내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내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나는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존재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만 할까.
바울은 자기 자신이 사도된 부르심에 대하여 풀어 설명해 주고 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위하여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다.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을 위하여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도 했다.
영생의 소망을 위해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씀도 했다.

영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영생이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왜 구태여 하나님을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라고 하였을까. 맞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성실하시고 흠과 티가 없으시고 죄가 없으시며 진리이신 분이시다. 영생이란 그러하신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영원 전부터 약속해 주신 약속이시란 강조이다. 

3절 말씀을 <새번역성경>으로 읽으면 이런 내용이다. 

“하나님께서는 제 때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사도들의 선포를 통하여 드러내셨습니다. 나는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것을 선포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사도된 바울은 자신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 오늘 날 우리들 각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가져야 하는 사명은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직업이 다 다르고 하는 일이 다 다르지만 우리의 교회 안과 밖에서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점점 전파되어 가도록 하는데 충실하여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묵상하는 월간 묵상집인 <생명의 삶> 2월 호 130면에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에 사는 김경수 성도의 이런 간증이 실려 있다. 

철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셨다. 퇴근하시면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서 윷놀이를 하고 막걸리를 드셨다. 어린 내가 술에 취해 잠이 들어 버린 아버지를 손수레에 실어 집에까지 모셔 온 적도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아버지는 대학병원에서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으셨다. 근 1년간을 꼼짝을 못한 채로 병원에 계셔야 했다. 퇴원 후에도 차도가 별로 없어서 1년 정도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대하면서 나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장남으로서 동생들에게 모범이 되고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공부도 열심히 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대 기업에 입사해서 능력을 인정받고 승진을 계속하였다. 주일마다 교회에 가긴 했지만 하나님보다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까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에 대한 관심이 컸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주식 투자에 열을 올렸다. 심지어는 부모님의 돈, 동생들의 돈, 친척들의 돈까지 빌려다가 주식 투자를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강남의 그 비싼 대형 아파트 두 채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나는 이미 주식 투자에 중독 상태였다. 헤어나기가 쉽질 않았다.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고 회사에서는 명예퇴직 대상으로 분류되어 퇴직하고 말았다. 

실의에 빠진 나는 3년을 백수로 지냈다. 취업도 쉽질 않았다.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시작하였다. 무거운 철근을 들고 뙤약볕 아래서 일하면서 회한의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중에서도 그 때 날마다 하던 일과 중의 하나가 ‘성경 말씀 아침 QT’였다. 잠언 말씀을 묵상하다가 잠언 28장 20절에서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보았다.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는 말씀도 깨닫게 되었다.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잘못된 길을 걸어 왔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내와 자녀들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새로운 직장을 잡게 되었다. 과거에 대 기업에 다닐 때에 비하면 급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세상 권세를 누릴 수 있는 화려한 자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에 평화가 임하고 이전에 경험해 본 적이 없던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성공과 부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나니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가족과 함께 예배드리는 일상의 소중함이 너무나도 감사하였다. 과거에 크게 잃어버린 돈과 젊은 날의 시간이 아깝게 느껴질 때면 다시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그 때 내 삶이 그렇게 된 근본 원인이 내 욕심과 죄에 있었음을 다시금 기억하고는 한다. 

내 힘으로는 좋은 남편과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없지만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에 주변 사람들에게 사람의 본분을 가르치고 구원의 길에 앞장 설수 있게 되었다. 전도서 12장 13절에 보면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는 말씀이 있다. 남은 인생,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에 충실하며 겸손히 행하는 종이 되고 싶다.

사도 바울처럼“오늘 날 나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하는 질문 앞에서 진지하게 대답을 찾아가는 신앙생활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참아들된 디도. 
사도 바울이 위대한 복음 전도자요 선교사요 목회자였다면 디도 또한 바울에 버금가는 훌륭한 복음의 사람이었다. 사도 바울은 디도에 대하여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된 디도”라고 인정하는 표현을 서두에 담고 있다. 

여기 “같은 믿음”이란 이 표현이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렇지 않나. ‘koinen pistin' 즉 ‘같은 믿음’이란 이와 같은 표현은 성경에 이 곳에 단 한 번 나오는 너무나도 소중한 표현이다. 이와 같은 표현은 그 당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 자신과 디도 간의 주님을 향한 믿음이 얼마나 두텁고 돈독하였는가를 짐작하기에 충분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 당시나 오늘날이나 우리 모두에게 주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이처럼 서로 간에 ‘같은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와 비슷한 내용의 신앙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였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조금 더 보면 이렇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4-16)

이제 새 학년이 시작되는 때이다.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진학하는 주간이다. 생각하여 보라. 우리가 어렸을 적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옷핀으로 손수건을 길게 접어서 왼쪽 앞 가슴에 달도록 하였다. 담임선생님은 한 줄로 반 어린이들을 데리고 다니셨다. 요즘처럼 급수 시설이 열악하던 때에 어디가 우물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인지, 어디가 화장실인지, 화장실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선생님들이 근무하시는 교무실은 어디인지, 교장 선생님 사무실은 어디인지를 자세하게 안내하여 주었다. 그렇게 시작해서 자기 이름도 제대로 못쓰던 어린 아이들이 커서 청년이 되고 군대에도 가고 산업의 전선에 나서고 지난 50년 동안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손꼽던 가난하고 못 살던 나라에서 세계 10대 강국으로 발전시켜 왔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언제까지나 어린아이의 믿음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행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까지 자라나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의 신앙이 무럭무럭 자라나게 도우며 서로를 세워 나가야 한다.

디도는 디모데와 함께 사도 바울의 총애를 받던 동역자들이었다. 나이는 한 세대 차이가 났지만 디도는 젊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주목 받던 사역자였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디도에 대하여 ‘나의 참아들’이라고 말하였다. 바울 사도와 디도의 관계가 아름답지 않나. 디도의 이름은 사도행전에 직접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디모데 후서 등에 12번 언급된다. 디도는 헬라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디도는 사도 바울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되어 주었다. 고린도후서 8장에 보면 고린도교회가 여러 가지 분쟁에 휩싸여 성도들간에 큰 갈등을 겪을 때에 사도 바울의 편지를 직접 받아 들고 고린도교회를 방문한 인물이 디도였다. 이처럼 디도는 단순히 고린도교회에 사도 바울의 편지만 전달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교회의 혼란을 수습하는 평화의 사도로 보냄을 받았던 것이다. 디도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격려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후원하는 일에 마음을 쏟도록 했던 탁월한 행정가요 목회자였다. 실로 디도는 사도 바울에게 기쁨을 안겨준  믿음의 동역자였다. 고린도후서 7장 6절과 13-14절에 보면 디도는 사도 바울과 주변의 성도들에게 위로와 기쁨과 안식을 주는 자랑스러운 믿음의 동역자였다. 그렇지 않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생활을 함께 하고 신앙생활을 함께 하다 보면 매사에 힘이 되고 격려가 되고 위안이 되고 기쁨이 되는 성도들이 있다. 사도 바울도 그랬다. 고린도전서 16장에 보면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 아굴라, 브리스가’와 같은 신도들의 이름이 나온다. 저들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사역의 열매요 기쁨이요 자랑이었다. 그들 중에 부부였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의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어 놓을 정도의 충성된 동역자들이였다. 

그러나 간혹 그 반대인 경우의 교인들을 대할 때도 없지 않다. 사도 바울의 곁에도 가시와 같은 그런 교인들이 없지 않았다. 디모데후서 4장 14절에 보면 구리세공업자였던 사업가 알렉산더가 바울에게 큰 해를 입히고 떠나 버린 교인들 중에 한 사람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면서 언급한 빌립보서 4장 2절의 ‘유오디아와 순두게’ 이 두 여신도는 빌립보교회의 골칫거리요 사도 바울의 근심이 되는 여성 신도들이기도 하였다. 

그런 바울이 디도에게 편지하며 디도의 인격을 언급하고 있다. “나의 참아들된 디도”라고 하였다. 이 짧은 표현이 얼마나 감동적인가. 우리 이왕 예수 믿는 것 서로에게 그런 끈끈한 신뢰의 관계를 가꾸어 가자. 이런 은혜가 함께 하기를 축원한다.  


그레데 섬에서의 남겨진 사역.
사도 바울은 그처럼 깊은 신뢰 관계를 갖고 지내던 동역자 디도에게 ‘나의 참아들’이라고 말하며 무슨 사역 내용을 구체적으로 분부하고 있나. 

함께 그레데에서 사역하던 당시의 남은 사역들을 잘 정리하라.
평소에 명한대로 그레데의 각 성에 장로(長老)들을 세우라.
장로(長老)될 자들의 신앙적인 조건을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그 당시  5절의 ‘장로’ 혹은 7절의 ‘감독’이란 사도 바울이나 디도에 버금가는 목회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세움 받는 교회의 일꾼들을 언급한 표현들이다. 저들은 모두가 교회와 성도들을 든든하게 세워 나가기 위하여 검증된 지도자들이었다. 장로나 감독의 한결 같은 특징과 공통점은 ‘청지기’여야 한다는 점이다. 7절의 ‘하나님의 청지기’란 표현이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람의 일을 맡아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거룩한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하는 ‘하나님의 청지기’란 말씀이다. 

저들의 자질과 수순과 영적 상태는 어떠하여야 한다고 했나.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한 아내의 남편으로 가정을 잘 세워나가는 자여야 한다.
방탕하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부모여야 한다. 
감독(A church leader)은,
하나님의 집의 일을 잘 맡아서 일하는 ‘청지기’여야 한다.
저들은 책망 받을 일이 없어야 한다.
제 고집대로 하지 않아야 한다.
급히 분내는 자들이어서는 안된다.
술을 즐기지 아니해야 한다.
구타하지 않아야 한다.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
나그네를 잘 대접할 줄 알아야 한다.
선한 행실을 좋아해야 한다.
신중해야 한다.
의롭고 거룩해야 한다.
절제해야 한다.
신실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굳게 잘 지키는 자라야 한다.
9절의 마지막 부분을 <새번역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

“그래야 그는 건전한 교훈으로 권면하고, 
반대자들을 반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본문을 영어 NIV 성경으로 읽다가 보면 ‘must'라는 단어가 무려 여덟 번이나 나온다. 무슨 말인가.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 분명한 강조이다. 올해도 성경 말씀에 기준해서 훌륭한 신앙의 진보를 갖는 충성된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주 안에서 자랑스러운 신자가 되길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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