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눅5:1-11) 2019. 2. 10
하나님은 부르심을 통해서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순종하며 따르길 원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선택하여 사용하신다. 노아는 홍수 시대를 준비하기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인물이다. 아브라함은 사천년 전 중동 지역의 양과 염소와 소와 약대를 목축하던 수많은 족장들 중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였고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갔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자신이 번제단 위에 제물로 결박당해야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그 현장을 벗어나 도망치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기 위해 칼을 뽑아 든 아브라함의 이름을 천사를 동원해서 크게 두 번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나님은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번제로 드리려 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순종의 현장에서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역사는 부르심에 순종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무엇을 의미하나. 하나님은 저들을 한 사람씩 부르셔서 그 시대마다 역사적인 인물로 사용하셨다.
이는 야곱의 열 두 아들들 중에서 요셉을 향하신 부르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요셉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환난과 고난의 땅 야굽의 노예 환경에서 연단하시고 시험하신 하나님이 그를 역사적으로 존귀하게 붙잡아 쓰신 것이다.
이는 모세도 마찬가지, 여호수아나 갈렙도 마찬가지, 기드온이나 드보라나 사무엘이나 다윗이나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다니엘이나 에스더나 느헤미야나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
기독교는 부르심의 종교이다. 예수는 이 땅에서 열 두 제자들을 부르셨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이렇게 이어지는 열 두 제자의 부르심이 이 땅에서 이루시길 원하신 구원 사역의 시작이셨다.
예수께서 하루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가까이 가셨다. 게네사렛이란 갈릴리 호수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다. 그의 주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르려는 무리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호숫가에는 두 척의 배가 있었는데 밤새 고기를 잡기 위해 수고한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는 그 중의 한 배에 오르셨다. 그 배의 주인은 시몬이었다. 예수는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원하셨고 육지를 향하여 배 위에서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셨다.
말씀을 마치신 예수께서는 배의 주인인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청하셨다. 밤새 수고 하였지만 잡힌 물고기가 없어 허탈하게 빈 그물을 씻던 어부 시몬은 “선생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 물속에 그물을 펼쳐 넣었다. 그런데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엄청난 물고기가 그물에 걸려들었다. 마침 곁에 있는 동료 어부들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잡힌 물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실어 올렸다.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그 때 어부 시몬은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렸다. 그리고 하는 말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예수의 말씀대로 그물을 내렸을 때 엄청난 물고기를 잡아 올린 이와 같은 체험은 어부인 시몬과 그 곁의 야고보나 요한에게도 상식에서 벗어난 놀라운 기적이었다.
그 때에 예수는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이 날 시몬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배를 육지에 대고 그물과 잡아 오를 그 많은 물고기와 배 안에 있는 어획 장비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부르심’이란 제목의 본문 말씀을 좀 더 나누길 원한다.
무리 중에서 부르심.
하나님은 무리를 부르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셨다. 신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일일이 개인적인 부르심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그가 언약 안의 그 누구이든 제사장이든 선지자이든 왕이든 그 어떤 부르심이든 늘 개인적인 부르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택하여 쓰셨다.
이는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던 사천 년 전이나 베들레헴의 이새의 여덟 아들들 중에서 막내아들인 다윗은 왕으로 기름 부어 부르시던 삼천년 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본문의 장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해서 예수를 찾아 나선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서 한 사람, 한 사람씩 택하여 부르셔서 제자가 되게 하셨다.
이는 과거나 오늘 날이나 마찬가지이다. 무리 속에 섞여 있는 그 상태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다. 오늘 지금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시는 그 부르심을 깨닫고 그 부르심에 구체적으로 응답하는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지 아니하면 신앙의 변화와 진보란 없는 법이다.
134년 전에 미국의 기독교계는 수많은 선교의 열정을 가진 젊은이들로 넘쳐 났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지도를 펼쳐 들고 아시아 동쪽 끝 거대한 중국 땅의 한 귀퉁이에 반도 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조선이란 나라를 찾아 나선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감리교의 헨리 아펜젤러 부부이고 장로교의 호레스 언더우드가 아닌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새벽 제물포 항에 도착한 배에 함께 타고 온 저들 세 사람은 오늘 날 대한민국의 복음화가 거대한 겨자나무로 자라나도록 작은 겨자씨와 같은 복음의 열정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선교의 사람들이었다.
우리 예수 사랑교회의 탄생도 마찬가지이다. 2009년 그 당시 이미 27년째 한국과 미국과 그리고 다시 돌아 온 한국에서 안정되게 사역을 계속하던 나 자신이 이런 고난의 길, 이런 개척자의 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겠나. 사연이야 어떠하든 그 누구를 통한 연유이든 2009년 11월 말 그 때에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 광야 길에 감히 무슨 용기를 갖고 나설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대답이 없고 안개 속과 같이 앞이 보이지 않는 이 길을 감히 어느 누가 함께 나설 수 있었겠나.
1620년 8월 14일, 신앙의 자유를 원하는 청교도들이 180톤의 크지 않은 배인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을 떠났다. 저들은 다섯 달 만인 그해 12월 11일에 아메리카 대륙 동부에 도착하였다. 사실은 11월 21일에 케이프 코드라는 곳에 도착했으나 인디언들의 극심한 방해와 공격 때문에 다시 바다에 물러나서 기회를 엿볼 수밖에 없었다. 항해 기간 내내 배의 속도는 시속 2마일정도였다. 걷는 속도보다 더 느린 행해 끝에 117일 만에 아메리카에 도착한 것이다. 폭풍우와 조류에 휩쓸려 고생하던 일행이 당초 목적지로 정했던 버지니아보다는 훨씬 북쪽인 보스턴 남부의 매사추세츠의 플리머스라는 곳에 상륙하게 되었다. 출발할 때에는 146명(일설에는 153명)이었으나 항해 도중에 병약해 죽고, 물에 휩쓸려 죽고 102명이 살아남았다. 남자 78명, 여자 24명이었다. 항해 도중에 큰 돛대가 부러졌으나 천신만고 끝에 아메리카에 도착하게 되었다. 낯선 땅에서 추운 겨울을 나는 동안에 44명이 더 죽었다. 어느 날은 하루에 세 명이나 죽기도 했다. 58명만이 겨우 살아남아 봄을 맞았다. 살아남아 있는 그들마저도 영양실조와 굶주림과 추위를 버틴 허약함 가운데 감기와 결핵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저들은 주변의 인디언들의 위협에 대응해야 했다. 어렵게 상륙을 시도한 저들은 통나무를 베어서 교회를 지었다. 봄을 기다렸다가 밭을 개간하였다.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호박 농사와 옥수수 농사와 감자 농사를 지었다. 집도 짓고 학교도 지으면서 자신들의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갔다. 공동체를 이룬 이 작은 씨앗은 오늘 날 세계 최강국인 미국이라는 나라의 풍성한 장래의 열매를 맺기 위해 썩어져 가는 밀알이 되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브라함을 보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나선 그였지만 그도 부르심에 합당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 까지는 우여곡절과 실패와 실수를 수 없이 겪어야 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의 베델과 아이 사이의 산자락에 장막을 치고 거하였다.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 후 점점 남방을 향해 이주 하며 살던 중에 큰 기근을 만났다.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던 아브람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 애굽의 바로 왕의 고관들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를 취하여 바로왕의 왕궁으로 이끌고 들어갔다. 여호와께서 사래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바로 왕과 그의 집안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
하나님은 무리 중에서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과 장차 믿음의 조상 이삭을 낳을 어미 될 아내 사래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바로 왕과 그의 집안을 재앙으로 다스리셨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나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분명하게 깨닫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생각하고, 합당하게 판단하고, 합당하게 말하고, 합당하게 행동하며 살아 나가야만 할 것이다.
기적 체험 후의 부르심.
말씀으로 천지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는 불가능이란 없으시다. 인간의 편에서 불가능이지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전능자이시다. 사람의 힘으로 노아 시대 홍수 심판을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었겠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노아와 그의 여덟 식구와 쌍쌍이 방주 안에 들어간 각종 새와 동물과 짐승들과 땅에 기는 것들이 일 년이 넘는 긴긴 기간 동안 방주 안에서 뭘 먹고 어떻게 그 많은 배설물들을 처리하며 살아남게 하셨을까. 궁금하지 않나. 하나님은 모든 것의 가능이시고 모든 것의 대답이시다.
430년 애굽의 노예 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 출애굽하게 하신 것이 모세의 전략인가. 전적인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신가. 누가 만나와 메추라기로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배부르게 먹이셨나.
누가 요단 강을 육지처럼 건너게 하셨고 누가 전쟁의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 여리고 성을 무너트리셨나.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 해도 잡은 것이 없이 빈 그물을 씻고 있던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의 곁에 다가가신 예수께서 시몬에서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대로 순종한 시몬 베드로는 큰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물고기가 잡혔다. 두 배에 가득 실을 정도였다. 기 많은 물고기를 실은 두 배가 물에 잠길 정도였다. 그 광경을 지켜 본 모든 사람들이 다 놀라워했다. 9절과 10절에 놀라워했다는 강조가 두 번이나 반복되었다.
맞다. 우리의 삶에 주님이 개입하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올해도 주 안에서 주님이 우리 가운데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오럴 로버츠(Oral Roberts, 1918-2009) 목사는 회중 앞에 설 때마다 그렇게 인사하였다고 한다.
당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something good is going to happen to you)
1000명 이상이 들어가는 대형 천막을 싣고 미국의 처처의 도시를 방문해서 순회 부흥 설교가요 방송 설교가로 활동하던 그는 1963년 기도의 응답으로 털사, 오클라호마에 그의 이름을 딴 기독교 명문 오럴 로버츠 대학교를 설립하였다. 입학생들은 금주, 금연, 순결한 생활 서약을 하고 학교 생활을 시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학교 정문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도하는 두 손을 모은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날마다 새 일을 행하시고 순간마다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새롭다. 하나님은 날마다 순간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 하나님은 특히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체험하게 하시기를 원하신다.
두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풍성한 물고기를 잡은 기적을 체험한 시몬이지만 그는 그 축복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주를 따라 나섰다. 그렇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 안에서 수많은 기적과 축복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축복의 자리에 둘러 앉아 꿀물을 빨아 먹는 것으로 자족해 하지 말고 다시 앞으로 새롭게 나아갈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신앙이다.
예수로 인한 풍어의 기적을 체험한 시몬 베드로는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였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배와 그물과 그렇게 풍성하게 잡힌 그 많은 물고기를 다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 나섰다.
직장이 귀하고 직업이 귀하고 사업이 귀하고 장사가 귀하고 내 삶의 기반이 귀하지만 주님께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정들여 쌓아 놓은 업적들과 자랑스러운 실적에 눈이 가리어져서 그 화려한 과거의 경력에 마냥 젖어 살면 안 된다. 앞으로 나아갈 줄 알아야 한다. 실패는 실패대로 성공은 성공대로 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갈 줄 알아야 한다.
승리와 성공의 영웅담에 너무 도취해 지내는 것은 주님의 기대하심이 아니다. 아무리 큰 기적과 아무리 놀라운 이적이라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그런 결단의 사람들을 통하여 주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
그 동안 성공적인 생을 살아 왔는가. 지금까지 살아 온 그 삶이 장차 나를 통해서 새로운 일을 행하실 주님께 다시 집중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대단한 학력이든, 화려한 인기이든, 굉장한 부와 그 어떤 업적이든 그 무엇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참 믿음의 사람이라면 부르심에 합당하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믿는 자들에게 늘 새롭게 더해 주실 것이다. 상업, 사업, 혹은 무역의 능력, 재물을 관리하고 부동산을 관리하는 능력, 사회적인 지위나 역량이나 권력이나 명성 등 그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왜 그런가. 돌아보면 그 모든 것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총이며 주님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제자로의 부르심.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그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와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예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순간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주일 날 교회에 다니는 정도의 교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어야만 한다.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주일 예배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따른 생각만 하거나 잡념에 사로잡힌다면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찬송을 불러도 부르는 등 마는 등 입만 벙긋거리는 영혼이 떠난 자와 같이 찬송한다든지 전혀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생각에 사로 잡혀 예배를 대강 대강 지루하게 드리고 교회 문을 나선다면 얼마나 스스로 불행한 일인가.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삶의 모습을 제자로서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스스로 자신에게 질문하여 보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그렇지 못한가.”
우리가 일대일 제자 양육에 열심을 내던 당시에 필독서로 읽었던 책들 중에 하나가 데이빗 왓슨의 <제자도>라는 책이다.
그는 책에서 제자란 누구인가에 대하여 서론에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그토록 많은 수의 신도와 복음이라는 엄청난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왜 교회는 이토록 무능력한가.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무시해 왔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제자는 도제(徒弟)와 같은 의미에서의 제자이다. 예수께서는 항상 그분과 함께하며 그분께 순종하여 그 분을 섬기며 주님과 함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증참할 만한 자로서의 제자를 부르고 계신다.”
그는 도제(徒弟)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가령 전통 한옥을 지으려면 그 전통 목수의 기술을 전수 받아 온 스승에게서 일일이 배우는 도제(徒弟)가 되어야 한다. 도제(徒弟)란 사전에 찾아보면 “어려서부터 스승에게서 특정 직업에 필요한 지식이나 기능을 배우는 직공을 말한다.”고 설명해 놓았다. 그렇다. 고려 청자나 이조 백자를 재현하기 위해서 도제의 길을 걷는 이들이 있다. 우리 전통의 활을 제작한다든지, 우리 가락의 전통 노래 법인 창(唱)을 배운다든지, 한국화(漢國華)를 배운다든지, 닥나무 껍질을 재료로 하여 만드는 우리 고유의 기술인 한지(韓紙)를 만드는 법을 배운다든지, 나전칠기(螺鈿漆器)를 만드는 법을 배운다든지 하려면 그 전문 기술을 전수 받고 평생을 지켜온 스승에게서 제대로 하나씩 하나씩 꼼꼼히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날 어느 순간에 은혜 받는 것 귀하다. 성령 체험이 귀하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제자답게 다듬어져야 한다. 베드로도 예수의 제자로서 삼년을 예수의 곁을 떠난 적이 없는 제자였다. 그러나 정작 예수께서 붙잡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시던 그 날 예수를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가 버리지 않았나. 왜 그랬나. 평소에 얼마나 큰 소리 치던 제자인데 왜 예수를 버리고 도망가 버렸나.
그렇게 비겁하고 나약하던 제자 베드로가 어떻게 초대 교회의 중심 인물이 될 수 있었나. 성령 받고 나니까 베드로가 어떻게 변했나. 성령을 충만하게 받고 부활 복음의 증거자가 된 베드로가 옥에 갇히기도 하고 풀려 난 후에 또 갇히기도 하였다. 그를 심문하던 대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와 요한과 알렉산더 문중이 힘을 모아서 베드로를 위협하고 협박하였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나서서 예수 부활 복음 전파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였다. 대제사장 문중들은 예수의 제자들을 붙잡아 심문하고 옥에 가두었다. 이틑 날 관리와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모두 다 모여 들었다.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물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며 다그쳤다.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불쌍한 거지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워 걷고 뛰게 한 치유의 기적 이후에 일어난 위협이었다. 그 때 베드로가 나서서 담대하게 대답하였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4장 12절에 나오는 대목이다.
제자란 누구인가. 예수가 삶의 이유인 자들이다. 예수가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답인 이들이어야 예수의 제자이다. 물론 하나님은 한 사람씩 개인을 부르시는 것 맞다. 그러나 성령 강림으로 인하여 탄생된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지는 오늘 날의 교회는 공동체로서의 부르심을 강조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예수의 승천을 목격한 11제자들을 부르시고 빈 자리에 충원된 맛디아를 부르셔서 역사하셨다. 성령 받기를 사모하며 기도하던 120여 성도들을 각각 부르셔서 역사하셨다. 베드로의 성령 충만한 예수 부활을 증거하는 설교를 통해서 3000명을 동시에 부르셨다. 그 3000명은 무리의 부르심이 아니다. 한 사람씩 은혜를 알게 하시고 복음을 알게 하시고 부활 복음을 믿게 하셔서 각 사람을 예수의 증인으로 부르신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행전의 내용이 무엇인가. 베드로를 비롯한 맛디아가 보충된 12제자들의 생이 그러하였다. 일곱 명의 집사들의 삶이 그러하였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성령 충만하게 제자의 길을 걷던 바나바가 밭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사도 행전 5장에 보면 바나바처럼 제자 시늉을 내려 하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절반의 재산을 바치며 전부라고 속이다가 베드로 사도의 책망을 받고 남편과 아내가 차례대로 숨을 거두는 심판을 받고 말았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집사 스데반은 예수의 제자답게 부활 복음을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요한의 형제인 제자 야고보는 헤롯의 칼 앞에서 순교 당하였다. 유대인들이 제자 야고보의 죽음을 좋아하고 기뻐하자 헤롯은 베드로도 죽이려고 붙잡아 옥에 가두었다.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네 패로 감시하며 베드로를 지키게 하였다. 유월절 후에 끌어 내어 죽일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밤에 하나님은 주의 사자를 동원하셔서 옥에 갇혀 두 군인 사이에서 두 쇠사슬에 묶여 있던 베드로를 풀어 내셨다.
그 밤에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합심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사도행전 12장 5절에 보면,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고 하였다. 그렇다. 제자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사는 자들이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비롯한 열 두 제자가 제자들이었듯이 우리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
특전사 복장을 하고 베레모를 쓴다고 특전용사가 될 수 있나. 그에 걸 맞는 특전용사의 훈련을 거쳐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를 위하여 시간, 재물, 돈, 재주, 은사. 경험, 땀, 눈물, 피, 목숨 등 그 무엇이라도 헌신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제자인 것이다.
예수의 제자라면 예배가 다르다. 기도가 다르다.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봉사가 다르고 섬김이 다르고 헌신의 정도가 다르다. 그냥 적당히 눈치껏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그런 정도를 가지고 제자라고 할 수는 없다. 제자는 예수 안에서 예수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삶 전체를 집중해서 드리며 살아가는 자가 제자인 것이다.
교회 다니는 교인 정도를 제자라고 할 수는 없다. 제자는 모든 면에서 달라야 한다. 제자는 모든 면에서 분명히 다르다.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 부인하느냐 예수 위하여 희생을 각오하고 결단하느냐 그것이 차이다. 예수는 우리 각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길 원하신다. “당신은 예수의 제자인가 아니면 그냥 교회에 다니는 교인일 뿐인가.” 대답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