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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새의 줄기에서 태어난 아기(사11:1-5) 2018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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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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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12-28 23:11 조회 13,360 댓글 0
 
             이새의 줄기에서 태어난 아기(사11:1-5)     2018. 12. 23


우리나라는 지난 2017년 통계로 264,500쌍이 한 해 동안에 결혼하였다. 이는 2016년에 281,700가정이 결혼한 것과 비교하면 17,200가정이나 더 적게 결혼한 통계이다. 그렇게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부부들 중에서 자녀를 낳아 키우는 부모의 기대는 한결같다. 아들딸이 건강하게 자라날 뿐만 아니라 공부와 예체능에도 재능을 보여서 그야말로 “품행이 단정하고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다재다능한 인재”를 키워 내고 싶어 하는 소원은 어느 부모나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들딸이 역사적인 인물로 성장하길 원하지 않는 부모가 이 세상 그 어디에 있겠는가. 지난해인 2017년 한 해 동안 태어난 신생아 수는 357,000명이다. 그 이전 해인 2016년의 406,000명보다 49000명이 적게 태어났다. 이런 현상은 점점 급속해 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인구가 점점 줄어드는 통계이다. 

물론 다 모세, 여호수아, 갈렙, 기드온, 사무엘, 다윗처럼 키워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가정마다 딸들이 모두 다 드보라나 에스더처럼 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 탄생하는 모든 아기들은 그 한 명 한명을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와 예정과 섭리가 분명히 있다. 

예수보다 육 개월 먼저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세례 요한의 생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수태될 것을 전하였다. 그 때에 제사장 사가랴의 가정에 그의 아내인 엘리사벳에게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육 개월 전에 세례 요한이 잉태된 것을 언급해 주었다. 

이처럼 이 땅에 태어나는 동서고금의 모든 생명의 잉태와 탄생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분명히 계신 것이다. 

메시아의 탄생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예언이 바로 그런 내용들을 입증해 준다. 예수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으로 나셨다. 예수는 이새의 뿌리에서 한 가지로 나서 결실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새가 누구인가. 룻이 베들레헴에서 만난 그 곳의 대 지주 총각 보아스를 통해서 가정을 이루고 낳은 아들이 오벳이다. 그 오벳이 낳은 아들이 이새이다. 그러므로 이새는 보아스의 손자이며 다윗의 아버지이다. 이새는 여덟 명의 아들들을 낳았다. 그 중에서 막내로 태어나 자란 인물이 다윗이다. 이새의 가정은 참으로 평범한 가정이었다. 베들레헴에서 밀과 보리를 조상 대대로 농사하며 양을 치며 살던 가정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이새의 가정에서 다윗과 같은 역사적인 인물이 태어나게 하셨다. 아버지 이새는 여덟 번째로 태어난 막내아들 다윗의 역사에 그렇게 유명하고 뛰어난 왕이 될지 상상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는 태어나긴 베들레헴에서 났으나 애굽으로 피신 한 후에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성장하였다. 마을 사람들 조차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몰라 봤다. 그래서 마을 어귀 낭떨어지로 끌어다가 밀쳐 죽여 버리려고 까지 했다. 나사렛 마을 사람들은“네가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하면서 예수가 요셉의 손길 아래 컸지만 정작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정작 몰라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새의 줄기에서 태어난 아기>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묵상하며 은혜 나누길 원한다. 


여호와의 영(靈)이 임한 아기.
예수는 여호와의 영이 임한 아기로 잉태되었고 탄생하였다. 예수의 성장기와 예수의 생애는 여호와의 영 즉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이룩하신 생을 사신 구세주이시다.

이는 성도들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호와의 영 즉 성령의 충만을 덧입는 생활을 하여야만 한다. 

태어난 아들딸들에게 어려서부터 이것저것 잘 가르치고 잘 배우게 하는 것 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도록, 성령 받도록 키워낼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 모르고도 명문대학 졸업하고 부자가 되고 권력을 누리고 성공하고 출세한 이들이 얼마든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을 아는 인생, 여호와의 영에 붙들린 자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를 깨닫고 믿고 따르고 선포하는 그런 인생들로 살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김일성(1912-1994)의 아버지인 김형직은 선교사들이 평양에 세운 숭실학교를 졸업했다. 나중에는 기독교 학교인 명신학교에서 교편생활도 하였다. 김일성의 어머니 이름은 강반석이다. 베드로란 이름 뜻인 반석이란 이름을 가졌다. 이처럼 김일성의 부모는 기독교 초기 선교의 영향을 받고 살았다. 그러나 아들 김일성은 항일운동을 시작으로 북조선인민위원회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그 최고 책임자인 위원장에 올랐다. 소련을 등에 업은 그는 공산주의 이념에 사로 잡혔고 6. 25 전쟁을 일으키는 등 되 돌이킬 수 없는 대한민국 현대 역사에 역행하는 인물이 되었다. 소년 김일성이 성령 받고 청년 김일성이 여호와의 영에 사로잡혔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김일성이 여호와의 영을 받고 은혜 받고 성령 받았다면 오늘 날의 북한과 같은 체제가 3대를 이어 올 수 있었겠나. 

이번에 사고를 당한 강릉의 민박 집은 겉보기에는 새 집이고 겉보기에는 묵어 갈만한 숙소로 여겨졌다. 그런 민박집에서 아까운 고 3학생들 여럿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났다. 왜 그랬나. 일산화탄소가 방 안으로 새어 들어 간 것이 원인이라고 하지 않나. 일산화탄소(CO)가 무엇인가.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는데 일산화탄소를 호흡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우리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맑은 공기 깨끗한 공기 건강에 좋은 공기를 마셔야 하는 이유가 뭔가. 잘못된 공기를 잘 못 호흡하면 몇 분 내로 사람이 목숨을 잃고 죽을 수도 있다. 

영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대에 이단과 사이비가 얼마나 판을 치나.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는 얼마나 많나. 기독교 이외에 구원이 있나.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타종교에도 구원이 가능한가. 예수 믿지 않고도 구원 받을 수 있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였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맞다. 그 어느 시대에나 천하의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만이 구원 받을 수 있다. 

주변에 굿하고 점치며 살아가는 박수나 무당들 중에는 신이 내려서 그걸 직업처럼 하며 사는 이들이 있다. 무속인들은 선배 무속인에게 배워서 그 일을 직업으로 하는 학습무(學習巫)가 있다. 반면에 신이 내려서, 신이 임해서 무속인 생활을 하는 강신무(降神巫)가 있다. 
지난 가을에 우리 지방에 와서 집회를 인도한 서철 목사는 상동교회의 담임목사이다. 그가 강화도에서 목회 초년병 시절에 시골 마을에서 개척교회를 하였다. 도시도 어려운데 완고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시골 마을에서 개척교회를 세우고 전도해서 믿는 신자가 생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는 마을의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인사하고 전도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권면하고 기도하고 하는 생활을 계속하였다. 한번은 새해를 맞은 연 초에 마을의 집집마다 새해 인사를 다니는데 마을 안에 사는 무당 집을 찾아갔다. 나인 든 무당이 젊은 목사에게 “목사님 올해도 하시는 일이 잘 되고 자녀 손손 같은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하고 새해 인사를 먼저 건네 왔다. 그 때 서철 목사도 “무당 선생님도 올 해 하시는 일이 잘 되고 아들 딸 모두 아버지와 같은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하고 인사했더니 그런 인사를 취소해달라고 하더란다. “나야 신이 내려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무당 생활 하며 살지만 내 아들딸들도 이 길을 가는 것은 절대로 반대한다.,”고 말하더란다. 

예수 때에 어떤 이들은 귀신에 들려서 무덤 사이에서 지냈다. 물 가운데 불 가운데 뛰어 들기도 하였다. 그런 아들딸을 고쳐 달라고 예수께 찾아 와서 간청하는 어머니나 아버지도 있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께서 12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만을 데리고 변화산 위에 올라가셨던 적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변화산 위에서 변형되셨다.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 그 자리에는 모세와 엘리야도 함께 하였다. 베드로는 감격스러운 장면을 지켜 보며 초막 셋을 지어서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거처로 드리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런 말을 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을 그들을 덮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이 말을 들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땅에 엎드려 심히 두려워 하였다. 그 때 예수께서 저들 가까이 다가 가셔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니 모세와 엘리야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예수께서 홀로 그들 곁에 서 계셨다. 그 날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는 장차 자신이 죽임을 당하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에 대하여 미리 말씀해 주셨다.  

예수와 세 제자가 산 아래로 내려 왔을 때에 무리를 만났다. 그들 중에서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그는 자기 아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예수께 애원하였다. 그의 아들은 간질로 고생하고 있는데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는 중한 상태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변화산 위에 올라가 계신 동안에 산 아래에 있던 아홉 명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지만 고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아버지는 간질로 고생해 온 아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귀신을 향하여 꾸짖으시자 귀신이 그 아이에게서 나가고 그 때부터 깨끗해 졌다. 그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 곁에 모여서 여쭈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 내지 못하였나니까.” 그 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여호와의 영(靈)이 무엇인가.
지혜(智慧)와 총명(聰明)의 영이요
모략(謀略)과 재능(才能)의 영이요
지식(智識)과 여호와를 경외(敬畏)하는 영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성도들은 예수께서 그리하신 것처럼 여호와의 영,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음악을 해도 성령 받아야 사탄 숭배하는 음악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여호와의 영을 받은 사람, 성령을 받은 성도는 시나 소설을 써도 다르다. 외설스럽지 않다. 미술을 해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예술 분야가 다 그렇다. 우리나라의 어느 저명한 학자의 딸이 옷을 완전히 벗고 돼지우리에 돼지 곁에 쭈그리거나 엎드려 찍은 여러 편의 사진에 세상에 공개된 적이 있다. 옷을 입지 않은 채 사막의 낙타 곁에 드러눕고 철길 위를 걷는 장면이 세상에 공개 된 적이 있다. 벌거벗은 채로 굴뚝 위에 쭈그리고 앉은 사진을 세상에 공개하기도 하였다. 

예술은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니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술이 외설(猥褻)로 흘러가면 아름다워 보이기는커녕 추해 보일 수도 있다. 여호와의 영은 질서의 영이요 아름다움의 영이요 화목의 영이요 평강과 평안과 평화의 영이요 회복의 영이요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영이시다. 

우리가 심각하게 여기는 동성애자들의 모습을 보라. 저들이 시청 앞 광장에서 백주 대낮에 벌이는 부끄러운 모습들을 보라. 과연 여호와의 영이 임한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는 평생토록 여호와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서 사셨다. 예수의 잉태와 탄생과 성장기와 공생애의 전부가 그러하였다. 우리가 한 순간도 맑은 공기를 마시지 못하면 병들고 약해지고 죽을 수도 있듯이 믿음의 사람인 성도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여호와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늘 사모하고 늘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한다.


여호와를 경외(敬畏)하는 아기.
예수의 평생은“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는”나날이었다. 여기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라는 ‘즐거움’이란 원 단어는 ‘숨을 쉬다’는 뜻의‘루아흐’(רוּח)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그의 호흡처럼 여기셨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곧 자신의 생명처럼 여기는 삶을 사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는 경건한 삶으로 일관하셨다. 그렇지 않나. 요한복음 17장에 실려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기도를 보라. “아버지께서 내개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 

요한복음 17장 21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이루기를 원하셨던 세상 구원을 향한 예수의 마음이 절절이 배어나는 기도를 접하게 된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예수는 눈에 보이는 대로 혹은 귀에 들리는 대로 세상을 심판하거나 인생들을 판단하는 분이 아니셨다. 세상의 판단은 얼마나 주관적이고 오류가 많은가. 우리는 특히 권력자들에게서 대대로 그런 모습들을 보고 실망하지 않나. 설마 그랬을까. 설마 그럴까 하고 실망스러워하면서 세상의 지도자들을 대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일정한 권력의 임기가 끝나면 하늘 꼭대기에서 땅 속 깊은 곳까지 꺼져 가는 권력의 무상함을 이 시대에 우리의 눈으로 똑똑히 보고 우리의 귀로 분명하게 들으며 살아가지 않는가. 왜 그런가. 세상의 소위 지도자란 사람들이 제 눈에 보이는 대로 보고 심판하고 제 귀에 들리는 대로 듣고 판단하려 하기 때문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고 인생들을 판단하는 기준은 대제사장들과 달랐고 서기관들과 달랐다. 바리새인들과도 달랐고 그 이전의 그 어떤 선지자들과도 달랐다. 예수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나온 여인과 그에게 돌을 던져 돌로 쳐 죽이려는 유대 남자들을 대하는 판단의 기준이 다르셨다.

예수는 어린 아기들을 안고 예수 가까이로 모여드는 이들을 대하는 태도와 판단이 제자들과 다르셨다. 예수는 노하고 화내는 것에 대하여 혹은 나를 고발하려고 달려 다는 자들에 대하여 대하는 태도와 판단이 다르셨다. 예수는 함부로 맹세해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세상을 바라보는 판단과 심판 기준이 다르셨다. 그래서 예수는 산상수훈의 그 많은 내용들을 통해서 자세하게 교훈하고 가르침을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악한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원수는 어떻게 상대하여야 할지에 대해서도 그 이전의 그 어떤 선지자들의 가르침이나 그 어떤 랍비의 지혜로운 교훈들과 그 판단과 심판의 기준이 다르셨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려 하지 말고 차라리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는 겉옷까지도 거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39-42)고 가르쳐 주셨다.

아브라함의 후손 모세의 후손들 중에 예수처럼 이런 판단과 이런 심판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말씀을 전해 준 그 어떤 선지자도 없었고 그 어떤 바리새인들도 없었다.

예수는 그를 결박하는 자들 앞에 스스로 결박 당하셨다. 그의 옷을 벗겨서 그가 보는 앞에서 제비 뽑는 자들 앞에서 침묵하셨다. 예수는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치고 그의 따귀를 때리며 그의 이마에 가시관을 씌우는 자들에게 저주의 말을 쏟지 않으셨다. 예수는 그의 양손과 양 발목에 대 못을 박고 높은 십자가에 매어 다는 이들 앞에서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는 십자가의 좌편 강도가 그렇게 그를 조롱하고 저주할 때에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는 그의 타들어가는 입술에 신 포도주를 발라 주는 이들과 그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는 이들 앞에서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시옵소서.”하는 넉넉한 기도를 드리시며 운명해 가셨다. 예수는 그 길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자신을 통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는 길이라면 끝까지 그 고통과 괴로움을 그의 한 몸으로 담당하시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참고 견디며 인내하는 ‘고난 당하는 종’의 모습으로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셨다. 

공의(公義)와 정직(正直)과 성실(誠實)로 심판하실 아기.
공의와 정직과 성실은 예수께서 세상을 살아가는 근본이었다. 씨줄과 날줄로 비단이 지어지듯이 예수는 공의와 정직과 성실함으로 세상을 대하며 마지막 가는 길을 골고다 언덕길을 향하여 십자가를 지고 끌려 가셨다. 

4절의 예언의 말씀처럼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들과 세상의 겸손한 자들을 대하실 때에 공의와 정직으로 대하셨다. 세상과 인생들을 심판하고 판단하시는 예수의 기준은 언제나 공의와 정직에 근거하였다. 이 일이 공의와 정의의 기준에서 멀어지지 않았나. 예수께서는 이 일이 여호와의 정직하심에서 멀지 아니한가를 언제나 재어 보고 달아 보셨다. 이와 같은 예언의 말씀은 마치도 마태복음 5장의 팔복 말씀을 대하는 듯하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의 그들의 것임이요....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세상을 향한 이사야의 예언은 계속된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라고 예언되었다. 맞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막대기와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셨다. “회칠한 무덤과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라고 일갈(一喝)하셨다. 마태복음 23장  33절에 보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는 말씀도 하신 적이 있으시다. 

예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을지라도 그 문과 그 길이 생명의 문이 아니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아니라면 그런 큰 문으로 들어가거나 그런 넓은 길로 가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셨다. 예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고 선포하셨다.

요즘 날마다 계속하여 역대하의 말씀을 최근까지 묵상해 왔다. 이스라엘의 남과 북이 나뉘었던 시절에 주로 남 유다의 왕을 지낸 역대 왕들을 중심으로 기록된 남유다의 역사와 주변 국가들과의 전쟁의 역사를 다룬다. 

남유다의 제 14대 왕이었던 므낫세는 무려 55년 동안 왕이었다. 그는 12살에 왕위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는 여호와 보시기에 선한 왕이었다. 그러나 므낫세는 달랐다. 아버지 왕 히스기야 때에 치우고 없앤 바알 신상과 아세라 신상과 각종 우상들을 다시 숭배하였다. 아버지 때에 성전을 보수하고 회복했던 번제와 화목제 등 제사를 폐지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에 우상의 제단을 차려놓고 성전의 두 마당에다가 일월성신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그의 아들들인 왕자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였다. 하나님을 믿는 대신에 점치며 사술과 요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였다. “백성이 저울을 속이면 나라가 망한다”는 옛 말이 있다. 그런데 유다의 백성들은 왕의 눈치를 보고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던 므낫세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진노한 하나님은 앗수르 왕의 군대 지휘관들을 통해서 남 유다를 공격하게 하였다. 앗수르의 군대는 므낫세 왕을 사로 잡고 쇠사슬로 결박해서 자기 나라로 끌고 갔다. 정신이 버쩍 난 므낫세 왕은 그제서야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려 납작 엎드린 므낫세 왕을 용서해 주셨다. 앗수르의 군대에 의해 끌려가서 온갖 수모와 챙피와 모욕을 다 겪은 므낫세 왕을 하나님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해 주셨다. 역대하 33장 13절에 보면, “므낫세는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는 말씀이 나온다. 

쇠고랑에 두 손목이 묶인 채로 앗수르에 끌려 갔던 왕 므낫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후에 여호와의 성전에 두고 숭배하던 우상들을 제거하고 예루살렘 성 안에 세웠던 모든 우상의 제단들을 성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영호와의 제단을 보수하고 화목제와 감사제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유다 백성들에게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대하33:16)고 명령하였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고 인생들을 판단하시되 공의로 심판하시고 정직으로 판단하시는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범사를 공의와 정직과 성실하심으로 판단하고 심판하시는 주님이시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이다. 선을 심으면 선을 거두고 악을 심으면 악을 거두게 된다. 예수께서는 산상 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마7:17-20)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호와의 영에 충만하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공의와 정직과 성실의 영에 붙잡혀 살아서 아름답고 복된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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