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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여(시130:1-8) 2018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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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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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08-13 00:56 조회 13,802 댓글 0
 
                              여호와여(시130:1-8)          2018. 8. 12


외교적으로 강하고 경제와 군사 면에서 든든한 나라의 국민으로 평안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 모른다. 나라가 혼란에 빠지면 그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고난을 겪게 된다. 

지금 예맨의 적지 않은 난민들이 제주도에 와서 난민 신청을 하며 받아들여지기를 애원하는 것처럼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안타까운 신세가 되고 만다. 2015년에 시작된 예맨 내전으로 1만 명 이상이 죽었다. 27만명 이상이 난민으로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다. 예맨은 1000만 명 이상이 죽음의 위기에 방치된 채 식량은커녕 마실 물조차 구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재외동포 740만 명들은 지구상의 그 어느 나라에선가 받아들여지고 보호를 받았기에 그들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 온 것을 생각하면 난민에 대한 우리의 정책을 재고할 필요성이 높다. 베들레헴에 갓 태어난 아기 예수도 난민이었다. 헤롯의 칼을 피하여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안고 애굽으로 피신하였었다. 나중에 고향 마을인 이스라엘의 나사렛에 들어가 살았다. 

법무부 통계 자료에 의하면 1994년 이후 지난해까지 우리나라에 난민 신청을 한 32,733명 중에서 난민으로 신분을 인정받은 이들은 2. 1%인 706명에 불과하다. 

이번 수요일인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73주년이 되는 날이다. 해방둥이로 태어난 이들은 올해 73살이다. 만약에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가 해방되지 못하고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상상해 보라. 일제 식민지 당시에 우리나라의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평생을 몸 바쳐 희생하고 죽어간 애국지사들의 일화가 넘쳐난다. 친일파로 분류되는 그 당시의 인사들의 명단이 책으로 공개되었다. 저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 가운데 만감이 교차되는 역사의 구비 구비를 대하게 된다. 애국자와 친일파의 차이가 무엇인가. 

생각하여 보라. 우리나라에 어떻게 해방이 찾아 왔는가. 어떻게 광복의 날이 찾아 왔는가. “해방이다.”마을마다 골목마다 도시 농촌, 어촌, 산촌, 섬 마을 할 것 없이 해방의 기쁨과 감격을 목청 높여 외쳐 대던 그 날이 어떻게 찾아 왔는가. 
우리나라는 고려 시대 때에 오랜 기간 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1259년 이후로는 고려의 왕을 몽골이 책봉하였다. 고려의 체재를 인정받는 대신에 매년 막대한 금과 인삼과 목재와 식량 등의 조공을 바쳐야 했다. 공녀제도를 통해서 고려의 어린 10대의 딸들을 공녀로 끌어갔다. 그러하다 보니 일찍 결혼 시키는 조혼 풍습이 생겨났다. 삼별초란 이후 고려는 몽골이 지배하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어 화친을 맺게 되었다. 부마국이란 사위의 나라가 된다는 뜻이다. 고려의 왕이 원나라의 공주와 결혼을 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고려는 과거 황제의 나라에서 신하의 나라인 제후국이 되어 일일이 몽골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되었다. 고려왕의 이름에 충렬왕, 충혜왕, 충정왕 등 충성 ‘충’(忠) 자를 넣은 것은 몽골에 충성을 맹세한다는 의미였다. 창피하게도 고려시대 상류층의 지배 계층 사람들이 앞장서서 몽골 풍을 따랐다. 두루마기를 입는 다든지 만두를 빚어 먹고 소주를 담가 마시는 풍습이 다 몽골의 영향이었다. 결혼을 하는 신부가 얼굴에 연지 곤지를 찍고 머리에 족두리를 하는 것도 몽골에서 건너온 풍속이다. 

조선 시대 때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해서 일본의 조선 침략 야욕이 온 나라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정유재란 병자호란 때 조선의 딸들이 끌려 갔다. 오랑캐의 노리갯감이 되었다. 어렵게 풀려나거나 도망쳐 조선으로 돌아 왔다. 그들을 화냥녀라고 했다. 환향녀(還鄕女)란 뜻이다. ‘화낭’(花娘)이란 중국에서 기생을 부르는 말이다. 인조 임금은 저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환향녀라고 해서 이혼당하는 일이 없도록 제도로 정해서 막았다. 일본 식민지 시대에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이 땅의 소녀들이 수도 없이 전쟁의 성노리갯감으로 끌려 갔던 비운의 역사처럼 침략 당한 민족의 슬픈 역사가 반복되어 온 것이다.  

1592년 4월, 임진년에 일본이 조선에 쳐들어 온 전쟁을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7년간 계속되어서 ‘7년전쟁’이라고도 한다. 일본군 선봉대가 부산포로 쳐들어와 상륙해서 서울인 한양을 향한 북진을 계속했다. 2개월도 채 못 되어 전 국토가 유린되었다. 그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와 세자는 평양으로 피난하였다. 1597년 1월에 일본군 14만 명이 다시 조선에 쳐들어 왔다. 중국 명나라의 군대 5만 5000명의 지원을 받은 조선의 군대는 고작 3만명이었다. 육지에서는 권율 장군과 권응수, 곽재우, 이복남, 이시언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맞섰다. 8월 초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재 임명된 이순신 장군은 1597년 9월 16일에 12척의 함선을 이끌고 출동하여 서해로 향하는 300여 척의 일본전선을 명량에서 대파했다. 이 승리로 일본군의 수륙병진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조선수군은 다시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명량해전’이다. 

그 다음 해인 1598년 8월, 마침내 도요토미가 죽자 일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때 육지에서는 명나라 지원군의 유정이 일본군의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고 명나라 군대를 갑자기 철수시킴으로써 일본군을 섬멸하지 못했다. 한편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진린(陳璘) 지휘하의 명 수군과 함께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서 추위가 찾아오는 11월에 노량에서 일본 군대 300여 척과 해전을 벌였다. 노량해전에서 일본의 함선을 200여 척이나 격침시키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안타깝게도 이순신 장군은 전사하고 말았다. 이 ‘노량해전’을 끝으로 임진년에 시작된 7년에 걸친 일본의 조선 침략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1910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식민지가 36년간 계속되어 왔다. 

우리는 오늘 참회시 중의 한 편인 시편 130편을 읽었다. 누가 언제 썼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시를 읽다가 보면 다윗의 시편 69편이 생각나서 아마도 다윗의 시가 아닐까하고 여기진다. 다윗은 오늘날부터 3000년 전의 인물이다. 그가 태어나 성장하고 나라의 임금으로 있던 당시의 이스라엘은 늘 불안정한 격동기였다. 이웃인 블레셋의 침공으로 인한 전쟁의 불안이 끊임이 없었다. 다윗 자신이 소년 시절에 전국에 알려진 이름이 된 것도 전쟁 때문이었다. 소년 다윗이 블레셋의 적장 골리앗을 물맷돌 한 개로 처단함으로 인해서 사울 왕 당시에 국가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사위가 되었다. 그러나 임금 사울은 언제부터인가 다윗을 정적으로 여기고 그를 죽여 없애려고 하였다. 다윗은 십 수 년의 긴긴 세월을 엔게디 광야에서 피신하며 지내야 했고 막벨라 동굴과 같은 동굴 속에서 짐승처럼 숨어서 지내야 했다. 

우리는 이 시편의 내용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온 민족이 고난과 시련 앞에서 하나님의 속량과 구원을 기다리는 기도의 내용을 대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마도 바벨론 포로 시대의 그 누군가의 고백이 아닐까하고 여겨지게 된다. 우리는 시편 130편에서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던 믿음의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절절한 기도와 믿음을 엿볼 수 있다.  

주께 부르짖음.
사람이 평소에는 주께 부르짖지 않는다. 평안하고 건강하고 형통하고 살만한데 허구헌 날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살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이런 날도 만나고 저런 날도 만나게 된다. 이런 일도 겪고 저런 일도 겪게 된다. 그런데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다. 왜일까. 시편 130편 1절에서 고백한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여기서 고백하는 ‘깊은 곳’이 어디일까. ‘깊은 곳’이란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바닥 속과 같은 깊은 심연을 말한다. 인생의 극심한 고통과 고난과 두려움과 억압과 압박감을 표현한 것이다. 

시편 69편에도 보면 다윗은 이와 비슷한 고백을 하고 있다. 2절에서는“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14절에서는“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라고 고백하였다. 그 시편 69편의 시작인 1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라고 기도하고 있다. 사람이 살면서 불길에 휩싸여서 죽는 죽음, 교통사고로 죽는 죽음, 전쟁으로 죽는 죽음, 전염병으로 죽는 죽음 등 별의 별 죽음이 다 많지만 깊고 깊은 물속에 빠져서 숨을 거두는 죽음을 상상하여 보라. 그런데 시편 130편 1절에 보면 온 백성, 온 민족, 모두가 다 깊은 곳에 빠져 있는 듯한 위기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그렇지 않나. 한 가정이 무너지면 그 가족이 모두 다 위기를 겪는다. 한 기업이 문을 닫으면 모든 회사원이 뿔뿔이 흩어진다. 한 나라가 망하면 그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다 불행해 진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우리나라의 형편은 깊은 물속에 가라앉고 있는 죽음의 땅, 죽음의 백성 같았다. 

우리나라에 기독교 복음을 전파한 감리교 헨리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 선교사는 44살에 서해의 밤바다에서 수장되었다. 그러나 그의 영혼 사랑하는 선교열정은 배재 학당과 수많은 복음 전도 현장에 세워진 이 땅의 영혼들을 통해서 큰 겨자나무처럼 자라나고 열매 맺고 있지 않나. 1902년 6월 11일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자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충청도 서천군 앞바다에서 그가 탄 배와 일본 상선이 충돌하여 한 밤중에 주께로 돌아갔다. 고등학교 때 수영 선수였던 그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조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자신의 목숨을 결국 구하지 못하였다. 나중에 그의 큰아들은 배재학교 교장을 지냈고 큰딸은 이화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시편기자는 그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대적하고 죽이려 하고 못 마땅하는 사면초가와 같은 환경 속에서 늘 하나님께 부르짖고 간구하였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시130:2) 

다윗의 소원을 따라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하던 솔로몬은 이렇게 기도하였다. “나의 하나님이여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소서.”(대하6:40)

육신의 부모도 자식이 부르짖으면 듣는다.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인생들이 부르짖는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지 않겠나.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그 앞 절의 말씀은 이렇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렘33:2) 이스라엘 백성들은 끌려간 포로의 땅에서 울며 탄식하며 기도하고 부르짖고 간구하고 하소연하고 탄식하며 여호와의 도우심과 구원의 손길을 구하고 또 구하였다. 

우리가 그렇게 찬송하지 않나. 

“사랑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 사랑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 
내 부르짖음 들으시고 감싸 주시는 영원히 주 찬양합니다. 내 삶을 다해”


여호와를 기다림.
사명의 사람을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요즘 우리는 생명의 삶 말씀 분량을 따라서 사도행전의 후반부 말씀을 새벽마다 묵상하고 있다. 11년 만에 선교지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간 사도 바울을 죽이려는 자들이 40명이 무장을 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달려들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천부장을 동원하시고 470명의 무장한 로마의 군대를 동원하셔서 바울의 목숨을 보존하고 계시다. 그 이유는 장차 바울을 통해서 로마에도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려는 섭리였다. 맞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섭리와 경륜이 분명히 있으시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오늘, 지금, 나를,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응답하는 행위가 예배인 것이다. 

본문의 시편 기자는 기도의 사람이요 예배의 사람이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라는 고백이 무엇인가. 왜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나. 무엇이 아쉬워서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나. 그는 깨달아 알았다. 그의 모든 기다림의 대답이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고백한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130:6)

다니엘이 그랬고 그이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그랬다. 저들은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포로의 땅에서 하나님 신앙을 지켜 갔다. 

군대 생활해 본 이들은 안다. 휴전선 경계 부대에서 밤새도록 추운 겨울에 보초를 서면 온 몸이 얼어 오고 양 다리와 발이 얼음덩어리처럼 된다. 기다려도 또 기다려도 동이 터오는 아침, 어둠이 걷히는 새벽이 그렇게 쉽게 금방 찾아오질 않는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경험해서 알고 있다. 들판에서 양을 치며 밤을 들에서 지내면 동이 트는 새벽을 기다리는 기다림이란 고단하고 지루하다. 다윗은 20대의 긴긴 세월을 광야와 동굴 속에 숨어 다니며 피신하며 지냈다. 끝도 보이지 않고 대답도 없는 세월을 여호와가 그를 인생의 깊은 수렁에서 건지시고 낭떠러지에서 손 붙잡아 주시길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손길이 임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가 오시길,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임하시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스라엘 민족은 기다리는 민족으로 살아 왔다. 그러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이고 나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언약하신 언약의 아들이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기다리다 지쳐서 아내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라고 하셨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을 기다려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아들이 아니라고 하셨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아브라함은 나중에 언약으로 나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다. 그 아들 이삭이 40에 장가들고 60에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의 생애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 장가든 야곱도 기다림 속에서 살아갔다. 믿음 생활이 무엇인가. 내 삶을 통해서 일하고 섭리하시고 역사하시는 여호와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맞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이처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그렇지 않나. 우리가 얼마나 병 낫기를 기다리나. 얼마나 가정에 평안이 임하길 기다리나. 얼마나 우리의 기도하는 제목이 응답되기를 기다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종살이 가운데서 430년을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바벨론 포로의 땅에서 풀려나기를 70년간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리고 그 포로의 땅에서 죽어갔고 새 생명이 태어났다. 바벨론이 무너지고 메대, 바사 제국이 건설되도록 흩어진 땅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요즘 당신은 무엇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나.
누구를 기다리며 생활하고 있나.
요즘 당신의 마음 속에 가득 찬 기다림은 무엇인가.

시편 기자는 자신이 경외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통하여 사유의 은총이 임하고 죄악에서 용서 받은 주의 인자와 모든 죄악의 속량이 풍성하게 임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 타국에 갔던 둘째 아들은 빈털터리가 된 채로 돼지우리에 누워서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했다. 아버지의 집에서는 품꾼도 자기의 신세보다는 더 나으리라고 여겼다. 기다림이란 그런 것이다.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 집 떠났던 둘째 아들이 스스로 목욕물을 데우고 스스로 새 옷을 마련해 입고 스스로 새 신을 사서 신고 스스로 금가락지를 마련해서 손가락에 끼었고 스스로 송아지를 마련해서 잡고 동네 사람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벌였나. 아니다. 주색잡기를 즐기고 허랑방탕하게 살던 둘째 아들이지만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고 아버지의 옛 사랑을 다시 받을 날이 올 수 있을까 하고 기다리던 중에 꿈과 같은 순간이 찾아 온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자에게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애굽에서 노예로 고난을 겪던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출애굽의 순간이 찾아 왔다. 어느 순간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홍해가 육지처럼 갈라졌다. 요단강물이 갈라서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 바닥을 육지처럼 건넜다. 어느 순간에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렸다.
어느 순간에 바벨론 땅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무너진 솔로몬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는 스룹바벨 성전시대가 시작되었다. 어느 순간에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곽을 중건하는 느헤미야의 기적의 날이 찾아 왔다. 그렇다. 맞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내 안에 철옹성벽처럼 막막하게 가로 막고 서 있는 장벽 앞에서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부르는 105장의 강림절 찬송의 가사가 무엇인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주님 강림하셔서 
죄에 매인 백성들을 자유하게 하시네
주는 우리 소망이요 힘과 위로 되시니 
오래 기다리던 백성 많은 복을 받겠네”

요즘 주 안에서 기다리는 기다림의 기도 제목들마다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응답되고 간증되는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민족의 앞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주의 말씀을 바람.
신앙생활이란 여호와를 바라고 주의 말씀을 바라며 살아가는 생활이다. 시편 130편의 기록자는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 도다.”(시130:5)고 고백하였다. 7절에서는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고 선포하였다. ‘바란다’는 말은 ‘소망’을 둔다는 말이다. 영어 성경에도 보면 “in his word I put my hope.”,"O Israel, put your hope in the LORD.”라고 하였다. 그렇다. 신앙  생활이란 소망을 누구에게 향하고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엘리야 때에 바알을 숭배하고 앗세라를 숭배하는 이들은 바알 신상 앞에 소망을 두고 살았다. 그러나 엘리야는 달랐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우상숭배와 탐심과 세상 욕망에서 벗어나서 여호와 하나님과 주의 말씀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인생과 민족이 되길 원하시는 것이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하여야 했나.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졌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증거는 무엇인가. 나를 향하신 주의 말씀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루스 광야에 돌베개를 베고 누웠던 야곱이 광야에서 체험한 하나님의 임재 체험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 밤에 야곱에게 무슨 말씀을 해 주셨나. 야곱이 광야에서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말씀을 그의 아들 이삭에게 똑 같이 반복하셨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늘 하시던 말씀을 다시 야곱에게 반복하셨다.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생활이다. 

야곱이 얍복강변에서 밤새 주의 천사와 씨름하면서 응답받기 원했던 기도 제목이 바로 그것이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32:26) 이런 태도 이런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이미 루스 광야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말씀하셨다. 그 말씀들을 지금 다윗은 가슴에 품고 주께 기도드리고 있다. 사무엘하 7장에 보면 나단 선지자와 다윗 왕의 대화 내용이 나온다. 다윗은 하나님의 집을 잘 건축하여 봉헌하고 싶어 하였다. 자신은 백향목으로 지은 왕궁에 살면서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모셔져 있는 것이 늘 송구스러웠다. 그런데 그 밤에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너와 네 자손으로 왕을 삼고 그 왕위를 견고하게 하겠다. 만일 죄를 범하면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겠다. 그러나 네 집과 네 나라가 나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게 하겠다.”

이 같은 주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던 다윗에게도 범죄도 있었고 실수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가면 불행해 진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고 소망하며 살아가면 주의 말씀이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신다. 

예수는 이 땅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께서 가시는 마을마다 도성마다 치유와 회복의 기적이 일어났다.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이 떠나가고 배고픈 무리가 배 불리 먹고 죽은 자가 살아났다. 예수는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을 선포하셨다. 세례 요한과 예수의 첫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다. 신앙생활 은 곧 말씀생활이다. 말씀 생활의 바탕은 회개하고 주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천국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만나서 그 안에 일곱 귀신이 떠나가고 새 삶을 살았다. 어부였던 갈릴리의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모두 그들을 부르시는 예수의 말씀을 따라 살아서 초대 교회의 위대한 사도들이 되었다. 

오직 주의 말씀만이 진리이다.“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예수가 진리다. 예수 안에 자유가 있다. 예수 안에 복음 안에 부활 신앙 안에서 살아 갈 때에라야만 진정한 삶의 자유와 행복과 영원한 기쁨과 만족이 주어진다. 주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야만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릴 수 가 있기 때문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이런 은혜와 축복과 간증이 넘쳐나는 주인공으로 살아가길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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