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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2:12-17) 2018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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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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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03-15 17:07 조회 15,277 댓글 0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2:12-17)       2018. 3. 4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 체험을 한 이후에 이방 사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 전파에 매진하였다. 뒤를 돌아보면 그 모든 것들이 그를 복음 전파자로 사용해 오신 하나님의 뜻이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성령께서 사도 바울의 가는 길을 제한하였다. 바울은 아시아 선교를 원했으나 성령께서 더 이상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 바울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을 거쳐서 무시아 앞에 이르렀다. 비두니아로 가려고 애썼다. 그러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셨다. 바울은 무시아를 지나서 드로아로 내려갔다.  그런데 그 밤에 환상을 보았다. 지금의 유럽을 말하는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였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바울은 그러한 환상을 체험한 후에 하나님이 유럽 선교를 위해서 바울과 그의 선교단 일행을 부르신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바울 선교 일행은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떠나서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그 이튿날 네압볼리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렀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다. 사도 바울과 그의 선교 일행들은 로마의 식민지였던 빌립보에서 여러 날을 머물렀다. 안식일을 맞았지만 마땅히 기도할 곳조차 찾을 수 없는 낯설은 도시였다. 강가에 나가서 그곳에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 무리들 중에서 두아디라 시에 사는 자주 옷감 장사를 하는 루디아라는 여인이 복음의 말씀을 받아 들였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여성이었다. 그날 그전도 현장에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여셔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 들이게 하셨다.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았다. 루디아는 바울의 선교단 일행을 자기 집에 초청하였고 강권하면서 자기 집에 머물려 빌립보 전도를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것이 빌립보 교회가 탄생하는 계기였다. 바울과 선교단 일행은 루디아의 집에 머물면서 시내에 드나들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러다가 만난 이가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이었다. 그 귀신 들린 여인이 바울과 실라를 보고 소리쳤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들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다.”그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은 바울과 실라를 만날 때 마다 똑 같은 말을 반복하였다. 하루는 바울이 그 귀신에게 명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그 때에 귀신이 즉시 떠나갔다. 여종의 주인은 그 여종에게서 귀신이 떠나간 것을 알고 돈을 벌던 수입원이 끊기자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다가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고 갔다. 그리고 상관들 앞에 가서 말했다.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고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서 고발하였다.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명령하였다.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많이 맞고 옥에 갇혔다. 간수들은 밤새 옥문을 든든히 지키고 있었다. 바울과 실라는 깊은 감옥에 갇혔다. 그들의 발목에는 차꼬가 든든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한 밤 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그 기도 소리와 찬송 소리가 다른 죄수들에게 들렸다. 그런데 갑자가 큰 지진이 나고 옥터가 움직이고 굳게 닫혀 있던 옥문이 다 열렸다. 차꼬에 매여 있던 모든 죄수들이 그 매임에서 다 벗어졌다. 잠에게 깨어난 간수는 깨어 보니 옥문이 열려 있는 것을 알고 죄수들이 그 밤에 다 도망 간줄로 알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하였다. 그 때에 바울이 크게 소리질렀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간수는 등불을 챙겨 들고 뛰어 들어가서 무서워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는 죄수로 가두고 지키던 바울과 실라 앞에서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하고 물었다. 그 때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고 말하고 주의 말씀을 그 간수와 간수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간수는 그 밤그 시각에 바울과 실라를 데려다가 낮에 매 맞아 아픈 곳을 씻어 주고 자기와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았다.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크게 기뻐하였다. 날이 밝아 오자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고 전했다. 간수는 상관들이 너희들을 놓아 주라고 했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고 말했다.  
   
그 때에 사도 바울은“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고 대답하였다. 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자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찾아 왔다. 그리고 권하면서 데리고 나가면서 제발 빌립보 성에서 떠나달라고 간청하였다. 바울과 실라는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빌립보 성을 떠나갔다.  


오늘 본문의 12-13절의 배경이 되는 선교 여정이 방금 전에 설명 나눈 사도행전 16장의 내용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하여 드로아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복음 전파의 문이 열렸다. 그러나 바울은 아쉽게도 만나 보길 원했던 형제 디도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는 마음이 편하지 못하였다. 결국 바울은 드로아에서 만났던 이들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떠났다. 그렇게 시작된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의 강가에서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와 그 집안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다. 날마다 빌립보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매 맞고 옥에 갇혔으나 결국은 간수와 간수의 가족들이 복음을 받아 들이고 그 가족들도 다 세례 받게 되었다. 귀신에 들려서 길거리에서 점을 치던 여종도 바울을 통해서 귀신이 떠나가고 새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복음에는 한 개인과 한 가정과 온 가족들을 변화시켜 나가는 능력이 있다. 
그 동안 고린도 후서에서 대해 온대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하여 의심하고 쑥덕거리고 반기를 들던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14절부터 본격적으로 복음의 영향력에 대하여 침착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고 정한 것이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무엇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것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이기는 사람들.
14절의,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라는 말씀은 내가 스스로 이기는 것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주님 안에 살고, 하나님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령 안에서 살아갈 때에 날마다 순간마다 항상 이기게 해 주신다는 강조이다. 내가 내 노력, 내 수양, 내 철학, 내 의지로 내 삶을 이기는 자로 늘 살수는 없다. 섰다하는 자는 넘어지고 만다. 매 순간마다 ‘그리스도 안에서’살아가는 자의 겸손한 고백이 아니면 어느 순간에 미끄러지고 어느 순간에 넘어질지 모른다. 

생각하여 보라. 베드로가 신앙 고백한 경험이 없어서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고 배반하고 도망갔나. 가롯 유다가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를 팔아 버렸나. 대 제사장 가야바나 그의 장인 안나스가 모세의 율법을 몰라서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 사형 언도 받게 하였나. 

내가 스스로 나를 이기며 살 수 있나. 
공부를 많이 했으니 내 마음이 스스로 다스려 지나.
권력을 갖고 재물을 많이 가졌으니 내 마음을 내가 지배 할 수 있나.
세상을 살 만큼 오래 살았으니 성인군자가 되나.
아니지 않나.

성경, 잠언 16장 32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성경 말씀이 맞다. 그렇지 않나.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마음과 욕망을 자유롭게 다스릴 수 있다면 요즘처럼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겠는가. 요즘 신문이나 라디오나 TV이나 인터넷에 도배를 하는 사건들을 보라. 인간의 약하고 추하고 부끄러운 모습들이 사회의 각 분야마다에서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지 않나. 왜 그런가. 

노벨 문학상을 탈 수 있을 것처럼 시를 잘 쓰니 시인인가. 
연기를 뛰어나게 잘하니 배우이고 스타인가.
국가를 대표하는 정도로 연극을 잘하고 연출을 잘하니 대단한가.
양 어깨에 별을 여러 개 달았으니 역시 장군은 장군인가.
대 기업의 총수이니 남들이 저절로 존경하나.
평생 권력을 휘둘렀으니 누가 그를 대단하다고 알아주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이거나 교사이니 학생들이 저절로 고개 숙이며 존귀한 스승이라 여기나.
종교인의 엄숙해 보이는 남다른 옷을 입고 생활하니 한 인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모든 죄와 악이 다 사라지고 성인이 되어 있고 성자가 되어 있나.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죄와 악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 그런 능력이 인간 안에서 스스로 생겨나질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여야 하는 것은 매 순간마다 항상 어떻게 하여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는 자의 삶을 살 수 있을까를 묻고 그 대답을 찾아 가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군대가 적군과 싸워 승리하고 돌아오면 적장과 적군들을 포로로 결박하여 끌고 들어오며 개선장군의 개가를 부르며 카피톨리누스(Capitolinus)라는 산 위에 있는 쥬피터(Jupiter) 신전에까지 행진하면서 퍼레이드를 벌이는 것을 보았다. 전쟁에 이긴 자와 전쟁에서 패배한 군대의 차이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백하는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는 고백은 얼마나 겸허하고 겸손하고 진솔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리스도 안에 늘 거하기를 구하는 복음의 사람의 모습인지 모른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주일마다 이렇게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세상에 나서면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주일간의 날마다의 매 순간 순간의 전쟁터와 같지 않나. 언제 적의 화살이 나의 심장을 꽤 뚫을지 아무도 모른다. 언제 적의 창이 내 옆구리를 관통할지 누가 알겠나. 언제 적의 칼이 내 어깨를 쳐 내릴지 어찌 알 수 있나.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여 영생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딸 다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 늘 세상 욕망과 세상 욕심과 세상 욕정과 탐심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원망과 불평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진흙탕 인생으로 살면서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삶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찬송 342장, “너 시험을 당해”의 3절 가사는 이렇다. 

“잘 이기는 자는 상 받으리니 너 낙심치 말고 늘 전진하라 
네 구세주 예수 힘 주시리니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우리 구주의 힘과 그의 위로를 빌라 주님 네 편에 서서 항상 도우시리.”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향기인 사람들.
로마의 군대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면 쥬피터 신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며 제사하였다. 그러면 그 향기가 온 시내에 퍼져 나갔다. 멀리서 그 제사 장면을 보지 못하는 시민들도 제물을 드리는 희생 제사 향내를 맡게 되면 자기편의 군대가 전쟁에 나가서 승리하고 돌아온 사실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에 이긴 로마의 군대는 희생 제물을 드려 향기가 퍼져 가게 할 뿐만 아니라 포로로 붙잡아 온 적의 우두머리를 처형하였다. 

그 당시의 그와 같은 전쟁 풍습을 지켜 본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이 말씀한 것이다. 온 도시를 진동하는 향기는 전쟁에 이긴 승리의 상징이었다. 성도의 신앙 생활이 그러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전쟁에 패배하고 나면 희생 제물의 향을 피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에 승리하면 구원 받은 자의 그 감격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로 전해진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성도들을 통해서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구원 받지 못하고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누구에게나 전해지는 것이다. 에베소서 5장 2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하였다. 빌립보서 4장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전도자인 자신을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에바브로디도 편에 돌보아 준 내용을 언급하였다. 그러면서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왜 같은 냄새, 같은 향기인데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고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되게 되는 것일까. 로마의 군대가 전쟁에 이기고 돌아와서 쥬피터 신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릴 때에 그 냄새와 향기가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는 포로들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아닌가. 그러나 전쟁에 이긴 기쁨과 감격과 승리의 영광스러움을 갖고 희생 제사를 드리는 승리한 군대들에게는 그 냄새가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맞다. 전쟁에 승리한 군대와 전쟁에서 패배하고 포로가 된 군대의 그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와 같다. 

밝아오는 새 봄에 올 해의 계획과 설계마다 주 안에서 승리하여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복된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지난 3월 1일에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3.1절 노래를 합창하고 만세 삼창도 부리고 강원도 홍천의 한서 교회와 남궁억 기념관을 거쳐서 강릉까지 갔다. 강릉중앙 교회는 1901년에 하디 선교사에 의해서 시작된 117년이 되는 역사적인 교회이다. 교회가 겪은 시련기의 우여곡절을 그 교회의 담임목사로부터 자세하게 간증으로 들었다. 

지금이야 6,000평이 넘는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한 그림 같은 환경의 아름답고 큰 교회로 부흥했지만 시내의 역사 깊은 예배당 터를 매각 한 후에 매입 한 회사가 부도가 나고 어려움에 휩싸이면서 여러 해 동안 해법이 보이지 않는 시련과 격동기를 지내야 했다. 그러나 역전하시는 하나님은 지금 아름답고 멋있는 예배당을 건축하게 하셨고 개발되지 않을 것 같던 뒷산의 쓰레기 매립장에 평창 동계 올림픽의 실내 경기장들이 속속히 들어서도록 역사해 주셨다. 피겨스케이팅, 아이스 스케이팅, 아이스하키, 컬링 경기장 등의 경기장 건물이 교회 뒤편으로 빽빽이 들어섰다. 그 과정에 매여 있던 교회 뒤 산 자락이 개발 허가를 받게 되면서 예배당에 이어서 교회용의 농구, 테니스, 탁구 등의 경기를 할 수 있는 대형 실내 체육관을 건축할 기회를 마련하였다. 그러하다 보니 젊은 세대들과 청소년, 청년, 어린이 세대들이 교회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사면초가고 막혀 있던 교회의 위기를 뛰어 넘고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한 강릉중앙교회의 생생한 간증이 은혜와 도전이 되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주를 믿는 성도들로 하여금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 내셔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게 하시는 전능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순전하게 말하는 사람들.
17절의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나하고’라는 말은 상업하는 이들에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고객에게 폭리를 취하려고 ‘술에 물을 타는 식’의 상술을 비유로 표현한 것이다. 그 당시에 고린도 교회에는 거짓 교사들이 나서서 교회를 어지럽혔다. 그들은 하나님을 말씀을 순전하게 전하지 아니하고 왜곡하여 잘 못 전하였다. 그 당시나 오늘 날이나 이단과 사이비의 세력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우리는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 하였다. 
다음 주부터 주일 오후에 경험하게 될 디도서와 빌레몬서의 커피 브레이크 성경 사역은 우리들에게 그런 경험을 새롭게 해 줄 것이다. 

본문의 ‘순전함’이란 단어는 ‘태양 빛’이란 단어와 ‘ 구별하다, 판단하다’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무슨 말인가. 태양 빛 앞에서 밝히 구별하고 판단하듯 하는 것이 ‘순전함’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가감해서는 안 되는 순전한 말씀이다. 99.9%의 순도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100%의 순도를 말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흠과 티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해석 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말씀에서 말씀으로’ 이것이면 족하다. “성경을 성경으로”이것이면 충분하다. 우리교회의 성도들이 어른 아이 청년 노인 누구나 다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깨닫고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복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증거하고 전파하는 그런 성도들의 거룩하고 힘 있는 연합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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