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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성도의 부모 공경(행1:21-26) 20240512 어버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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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05-12 21:15 조회 1,705 댓글 0
 

                      성도의 부모 공경(행1:21-26)            2024. 5. 12 어버이주일

 

 

효도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부모께 어떻게 대하는 것이 부모 공경이라고 여기는가. 성경은 십계명을 통해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라고 약속하셨다.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장수하리라”(엡6:1-3)라고 교훈하였다. 

 

부모를 자주 찾아 뵙고, 부모에게 용돈 잘 드리고, 부모에게 맛있는 것 사드리고, 부모에게 보약 챙겨드리고, 부모 모시고 효도 관광 다니고 하는 것 다 좋다. 그러나 자녀가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과연 부모를 공경하는 길이며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일까.

 

열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빈 자리에 제비 뽑혀 보충된 사도 맛디아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맛디아는 원래 예수의 12제자 중의 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배반하고 떠나가 버린 가롯 유다의 빈 자리에 충원된 12사도 중의 한 사람이다. 맛디아는 ‘마티디아스’란 말인데 ‘여호와의 선물’이란 뜻의 아름다운 이름이다. 그는 나중에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 지역 선교 중에 순교했다는 설과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했다는 설이 전해져 온다.

 

사도(使徒)란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는“왕이나 권세자의 권한을 위임 받아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파송 받은 자”를 뜻한다. 모세나 다윗이나 엘리야나 엘리사와 같은 인물들이 그러하다. 성경은 예수의 12제자와 바울을 사도라고 한다. 그 외에 예수의 아우인 야고보나 바나바도 사도라고 불려졌다.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갈1:19)라고 하였다. 사도행전 14장 14절에 보면 바나바와 바울을 사도라고 하였다. 

 

부모는 아들딸이 이러저러한 인물이 되기를 기대하고 양육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에 대하여 어떤 기대를 갖는다고 해서 그 기대나 소원이 꼭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 나눈 대로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아들딸은 그 하나 하나가 주 안에서 독립된 인격으로 태어나서 한 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성경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가르치는 것은 부모와 자녀의 마땅한 도리이고 윤리이다. 그러나 과연 아들딸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길일까. 평생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고 부모의 곁에서 그림자처럼 부모를 모시는 것일까. 그렇게 하는 것만을 부모 공경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부모 인생은 부모 인생, 아들딸 인생은 아들딸 인생이다. 각 사람에게 사명이 있다. 더군다나 성도인 우리들에게는 부모 공경은 기본이고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부르심과 사명에 충실하는 것이 곧 부모 공경의 첩경이 될 것이다. 

 

사실 성경이 말씀하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교훈은 부모를 대하는 태도, 부모를 대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을 말씀한다. 삼강오륜(三綱五倫)에서는 ‘부자유친’(父子有親) 이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하고 진정으로 섬기는 것”을 뜻한다. 

 

성경은 맛디아의 부모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에게‘여호와의 선물’이란 이름을 지어 부른 것을 보면 하나님을 잘 섬기며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던 가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제비 뽑히지 못한 유스도라는 별명을 가진 바사바 요셉도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유스도’란 ‘의로운 자’란 뜻을 가진 로마식 별명이다. 그의 이름인 바사바란 ‘안식일의 아들’이란 뜻이다. 이름만 보아도 얼마나 경건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하였나를 익히 알 수 있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은 ‘요셉’이다. 요셉이란 ‘여호와께서 더하신다’라는 이름 뜻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신앙적인 배경에서 신앙적인 이름으로 불려지며 성장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자들 중에서 한 사람이 제비 뽑혔다. 그의 이름이 맛디아이다. 

 

어떤가. 우리는 아들딸이 사회적으로 알려진 어떤 자리에 등용되면 기뻐한다. 그러나 맛디아는 처음부터 12제자 중의 하나는 아니었지만 나중에 가롯 유다로 인하여 빈 자리인 12번째 제자로 충원된 자이다. 사도행전은 1장에서 맛디아의 선택 받은 내용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며칠 전인 5월 9일, 목요일은 예수 승천 기념일이었다. 다음 주일인 5월 19일은 성령 강림 주일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맛디아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을 제비 뽑혔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성령 강림의 현장에 함께 하였다. 맛디아도 성령을 충만하게 받고 충성된 사도의 삶을 살아갔다. 성경 학자들은 그는 아마도 70명의 예수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맛디아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생존해 있었다면 아들 맛디아가 예수의 12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선택된 것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였을 것이다. ‘여호와의 선물’이란 이름을 가진 맛디아는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생각하는 중의 맞이한 어버이 주일 말씀 묵상에 은혜가 있기를 축원한다. 

 

 

부활 신앙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자.

22절을 보라. 맛디아를 선택하는 11사도들의 마음 가짐은 분명하였다. 평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라고 하였다. 맞다.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은 어쩌다가 함께 하는 척 하고 또 어떤 때에는 공동체에서 잠수 타고 그러는 이들이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밤이나 낮이나 늘 성도들과 함께 하고 믿음의 사람들과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 하면서 주의 일에 힘쓰는 자여야 주님의 제자다운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할만한 믿음의 사람이어야 한다. 다른 주제의 이야기는 잘 하는데 예수 부활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꼭 다문다면 그런 정도의 신앙으로 예수의 제자가 될 수는 없다. 

 

예수 사랑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어른과 아이, 노인과 젊은이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분명한 신앙 고백 가운데서 성령 충만함을 받고 주변의 성도들과 함께 동행하며 주님의 부활을 분명하고 담대하게 증언할 수 있는 전도자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세상에 나아가서 자신이 예수의 사람인 것을 드러내고 살아가는 예수의 부활의 증인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1883-1950. 10. 18)은 평안도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의 교육자·기독교인·언론인·시민사회지도자·정치인이다. 6살에 시작하여 13살에 한문 공부를 마쳤다. 13살 때에 부모의 권유로 2살 위인 박씨 부인과 결혼하였다. 2번이나 아내와 사별하고 세 번째 부인을 맞는 등 가정 생활이 평탄칠 못했다. 15살에 포목상을 경영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는 이미 십대 후반에 술 잘 마시고 돈 잘 쓰는 청년 사업가로 자리 잡았다. 술과 담배를 가까이 하며 청년기를 탕진하던 그는 러일 전쟁으로 장사가 어렵게 되던 때인 22살 때에 평양 장대현교회에 친구 전도를 받아 참석하였다. 1,500여명이 모여 주일 예배 드리는 광경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우렁찬 찬송 소리와 기도 소리에 정신이 번쩍 났다. 그 날 이후 그는 기독교에 심취하였다. 23살 때에 부모를 설득해서 숭실 중학교에 입학했다.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을 만나 그들에게서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숭실 중학교에 다니며 금주 금연을 결심하고 죽을 때까지 술과 담배를 멀리하였다. 일제 시대 때에 실력을 키워야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여기고 일본에 유학하였다. 1908년에 시작된 일본 유학 중에 영어와 수학을 열심히 공부하다가 우연히 인도의 간디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그는 인도 간디의 무저항 비폭력주의에 눈을 떴다. 메이지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동경한인교회에서 영수가 되었다. 기독청년회인 YMCA운동에도 앞장섰다. 31살에 귀국 후에 오산 학교 교사로 섬겼다. 교장이 되어 8년 동안 후학을 양성했다. 

 

3.1 운동에 앞장 서다가 붙잡혔다. 1년 형을 선고받고 평양 감옥에 수감되었다. 아버지 조경학은 아들이 형무소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졸도하였다. 인사불성으로 누워서 지내던 아버지 조경학은 하나님의 은혜로 병석에서 일어났다.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아들이 수감된 평양형무소를 찾아가서 형무소 울타리를 날마다 한바퀴씩 돌았다. 외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정성을 본 주변 사람들은 그의 정성에 감복하였다.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 조만식을 면회하기 위해 형무소를 찾아가서 옥중 간수에게 취사장의 위치를 물었다. 간수의 안내를 받아 취사장으로 갔다. 형무소 취사장에서 아버지 조경학은 수수와 콩으로 지어진 밥을 한 움쿰 먹어 보고는 “뭐, 이만하면 견딜만 하겠다” 라고 말하며 아들을 면회하였다. 아버지 조경학은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염려의 기색을 숨긴 채 태연하게 아들의 안부를 묻고는 이 정도의 식사면 굶어서 죽지는 않을터이니 잘 이겨내라며 “나라를 구하려는 사내에게 이런 고생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참고 견디라고 격려하였다. 

 

평양교도소에서 석방된 뒤 조만식은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가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1921년 평양 YMCA청년회 총무가 되어 젊은이들에게 예수의 부활 복음과 예수 정신으로 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 후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에 선출되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은 산정현교회에서 장로가 되어 학교의 제자였던 주기철 목사를 담임목사로 모셨다. 산정현교회에서는 예배에 늦으면 교회 문 앞에 서서 예배해야 하였다. 고당 조만식 선생도 어느 날 부득불 예배에 늦은 날이 있었는데 공동체의 규칙을 존중하여 예배가 끝나도록 뒤에 서서 예배했다고 전해진다. 1945년 해방 이후에 평양에 머물던 그는 치안 공백 상태에서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나라가 공산화 되는 것을 막아 보려고 씨름하였다. 그 당시 조만식은 김일성이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할 정도의 정치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런 그는 그 이듬해인 1946년 1월 5일에 김일성에 의해서 고려 호텔에 연금되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앞장서서 조만식 구명 운동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조만식은 1950년 10월 18일, 67살에 공산당에 의해서 총살당하고 말았다. 역사는 그를 ‘조선의 간디’라고 부르고 있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을 붙잡으려고 급급해 하지 말고 분명한 신앙관, 가치관, 인생관을 살자. 믿음의 사람다운 삶을 살아서 주님의 기쁨이 되고 참 효자, 참 효녀의 길을 걸어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한다. 

 

 

주님의 택하심을 받는 자.

삶은 선택이다. 내가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들과 딸로 태어난 것은 나의 선택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나의 탄생도 주님의 택하심이다. 우리는 선택 받으며 살고 선택하며 살아간다. 내가 남자와 여자로 태어난 것은 선택 받은 것이다. 내가 누구의 아들딸로 태어난 것도 선택 받은 것이다. 그러나 학교, 친구, 배우자, 전공, 직업 등등은 나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제비 뽐았다는 것은 인간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선택인 것을 의미한다. 레위기 16장 7절 이하에 보면 제비 뽑기는 하나님이 명하신 방법이다. 모세 때에 아사셀 염소를 속죄 목적으로 뽑을 때 두 마리의 염소 중에서 제비 뽑기의 방법을 하나님이 명하셨다. 여호수아 18장 10절에 보면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에도 지파를 따라서 제비 뽑기를 하였다. 이처럼 제비 뽑기란 사람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선택인 것을 강조하는 행위이다. 

 

24절에 보면, 제비 뽑기 전에 먼저 기도하였다.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의 뜻을 구하였다. 이 사람이냐 저 사람이냐를 고민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구하였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일정한 실력과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하고 수고하고 애를 쓰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선택은 주님의 손길에 맡겨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 각 사람은 택함을 받은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택함 받은 자 다운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지금 나의 가정, 나의 가족, 나의 일터, 나의 직장, 내가 속한 내 나라에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 직장인의 한 사람으로, 가족의 한 사람으로, 교회의 성도의 한 사람으로 나를 택하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씨름하여야만 할 것이다. 요즘 우리는 <예수의 길>이란 찬송을 자주 부른다. 

 

안갯속에서 주님을 보네

아무도 없을 것 같은 그곳에서

손 내미셔서 나를 붙드네

길 잃고 쓰러져가던 그곳에서

주 말씀하시네  내 손 잡으라고

내게 곧 길이요 진리 생명이니

나 그 길을 보네 주 예비하신 곳

다른 길로 돌아서지 않으리

 

예수의 길 그 좁은 길

나는 걷네 주손 잡고

그 무엇도 두렵지 않네

주님 주신 약속 내게 있으니

세상의 길 그 험한 길

승리하네 성령으로

그 무엇도 버리지 않네

저 하늘에 내 소망 있으니

저 하늘에 내 소망 있으니​

 

각 사람이 삶의 현장에서 나를 택하신 주님의 뜻과 기대를 잘 깨닫고 순종하며 충성스러운 청지기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보내심을 받은 자의 사명을 다하는 자.

맛디아는“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 할 자”의 한 사람으로 제비 뽑혔다. 주님은 오늘 날도 주님의 일을 겸손하게 섬겨 나갈 봉사의 사람을 찾고 계신다. 그 뿐만 아니라 보냄을 받은 사도성을 가지고 그 직무를 충실하게 감당할 자를 찾고 계신다. 봉사(奉仕)란 섬김이다. 사도의 직무란 권위를 지닌 선포자를 뜻한다. 생각해 보라. 12명 중의 한 사람인 예수의 제자 즉 사도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사도의 직무란 존경과 권위를 지닌다. 그러나 사도의 직무를 제대로 잘 담당하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을 끊임이 없이 섬겨야 하는 봉사의 의무가 뒤 따르는 것이다. 주어진 직무에 충실하고 봉사의 일에 앞장서는 것이 곧 부모 공경의 첩경이다. 제 앞 가림도 제대로 못한다면 어떻게 효자라고 할 것이며 부모의 기쁨이 되겠는가. 

 

25절에서 언급하는 유다 즉 가롯 유다의 불행과 어리석음은 무엇인가. 그는 그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예수 제자의 부르심을 스스로 버렸다.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다.  결국은 그 귀한 사도의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가고 말았다. “제 곳으로 갔나이다”라는 뜻은 지옥의 심판을 스스로 택했다는 무서운 심판의 말이다. 가롯 유다는 불효자 중의 불효자가 되고 말았다. 

 

성공도 좋고 출세고 좋고 부귀영화 누리며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인기를 누리는 것 다 좋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부르심과 보내심을 받은 사명을 마지막 순간까지 제대로 잘 감당해야만 할 것이다. 

 

요즘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고와 사건 소식을 보라. 눈에 보여지는 세상 것에만 취해 살다가는 효도나 부모 공경은커녕 자신의 불행, 부모의 수치, 가문의 몰락이 되고 말 것이다.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이 그랬다. 탐심에 눈이 가렸던 아이 성 전투 현장의 아간이 그랬다. 이방 여인 드릴라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덧입혀 주신 거룩한 힘의 능력을 경솔하게 발설하던 삼손이 그랬다. 이스라엘 초대 임금 사울 왕은 40년 왕이었지만 그의 나중은 세 명의 왕자와 함께 너무나 불행하고 초라하고 불쌍하게 끝나고 말았다. 왕이냐 평민이냐의 문제가 문제가 아니다. 남자냐 여자냐의 문제도 문제가 아니다. 빈부귀천의 문제도 문제가 아니다.

 

주님은 분명하게 묻고 계시다. 하나님 앞과 부모 앞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봉사의 직임과 사도의 직임을 맛디아처럼 잘 감당하며 살아갈 때에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을 “잘 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하시고 상급을 주실 것이다. 

 

지난 월요일, 속장 워크숍을 다녀 왔다. 60여명의 성도들이 10년간 깎고 다듬어 만든 노아의 방주 전시장을 둘러 보았다. 창세기 5장에 보면,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182세에 아들 노아를 낳았다. 노아의 할아버지는 므두셀라이다. 노아의 증조 할아버지는 에녹이다. 에녹이 65살에 아들 므두셀라를 낳았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300년동안 자녀를 낳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그의 나이 365살 때의 일이다. 

 

라멕은 아들을 낳아 노아라고 이름 짓고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시리라”(창5:29)라고 예언하였다. 아버지 라멕은 홍수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태어난 아들 노아가 역사적인 인물이 된 것이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 노아는 의인이요 그 당대에 완전한 자였다. 노아는 늘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노아는 그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다 준행하였다. 노아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었다. 누가 효자인가. 누가 부모 공경하는 자인가. 노아는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분부에 충성된 자로 살았다. 하나님의 뜻을 사명으로 깨닫고 살아가는 자녀가 효자이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분부에 충성하는 자가 효자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자는 제 부모에게도 기쁨이요 자랑과 만족이 될 것이다.

 

무엇이 참다운 효도이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으로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공경하는 길인가를 깨달아 존귀한 믿음의 가문의 후손답게 살아가는 주님의 은총이 각 사람에게 늘 함께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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