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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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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주님을 따라가려거든(막8:31-38) 202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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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2-25 19:36 조회 2,374 댓글 0
 

                      주님을 따라가려거든(막8:31-38)         2024. 2. 25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읽지 않은 그 앞 부분에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 지역의 여러 마을에 가신 적이 있다. 그 곳의 원래 지명은 ‘파니아스’(paneas)이다. 오늘 날도‘바니아스’(Baniyas)라고 불리는 곳이다. 헐몬산 남서쪽 기슭에 위치한 그 곳은 무척 비옥한 땅이었고 전략적 요충지였다. 헐몬산의 눈 녹은 물과 이슬이 모여서 큰 물줄기를 이루었다. 그 물이 흘러 내려 바다 같은 갈릴리 호수를 이룬다. 


주전 20년에 로마의 황제 아구스도는 그곳을 헤롯 왕에게 주었다. 헤롯은 그곳에 대리석 궁전을 지어서 황제 앞에 바쳤다. 주전 4년에 헤롯 왕이 죽은 후에 아들 빌립이 대를 이어서 그곳을 다스렸다. 빌립은 궁전을 더욱 확장하고 더욱 아름답게 꾸민 후에 황제 가이사의 이름과 자기 이름을 합쳐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불렀다. <개역개정 성경> 에서는 빌립보 가이사랴로 기록되었다. 그곳의 주민들은 대개가 헬라 로마의 영향권에 있던 이방인들이었다. 그런 곳에서 예수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셨다.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때 “너희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다시 물으셨다. 베드로가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같은 본문인 마태복음 16장 16절에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복이 있다고 축복하시며 반석을 의미하는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 그 이전까지 그의 이름은 시몬이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네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라는 축복의 말씀도 해 주셨다. 예수께서는 그 날의 대화 내용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입단속을 시키셨다. 아직 예수의 때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분부를 하신 것이다. 


오늘 본문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장차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였다. 32절의 ‘붙들고’라는 단어는 ‘잡아 흔들고 당기며’라는 표현이다. 당황하고 실망한 베드르는 예수를 잡아 흔들며 항변하였다. <새번역 성경>에 보면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었다.”(마16:22) 라고 설명해 놓았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바라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으셨다. 그 꾸지람하신 말씀 속에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가르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그 주어진 사명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주님을 따라가려 하는 자는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다. 여기 ‘사탄’이란 책망은 베드로가 사탄이란 말씀이 아니다. 그 순간 베드로의 생각과 판단을 사탄이 지배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그렇지 않나. 그 상황의 베드로나 오늘날의 우리 각 사람이 다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간다고 하지만 매 순간 우리의 판단이나 결정이나 생각을 사탄이 유혹한다. 사탄이 미혹한다. 사탄이 분별력이 흐리게 한다. 믿음으로 판단하지 않고 세속적인 욕망으로 판단하게 한다. 과거에“순간의 결정이 10년을 좌우한다”라는 세탁기 광고가 있었다. 신앙생활은 순간의 판단과 결정이 평생을 좌우한다. 아니 영원을 좌우한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순간 일마다 때마다 사람과 사건과 일 앞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인가 아닌가”를 먼저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는 “주님을 따르는 신앙이란 감정적인 판단, 의지적인 판단, 소비 생활의 우선순위에 대한 신앙적인 판단”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시간과 사람과 사건과 일과 돈과 재물 앞에서 우리는 항상 이런 갈등 속에 살아가게 된다. 예배 생활, 봉사 생활, 전도 생활, 헌신 생활,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 생활 등등 다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고단하고 몸도 편치 않은데“오늘 하루쯤 주일 예배 빠질 수도 있지”라고 스스로가 자신에게 말하고 스스로 대답하고 스스로 결정한다. 교회 가면 언제나 “기도하자, 예배하자, 말씀을 더 가까이 대하자, 봉사하자, 전도하자, 헌신하자, 헌금하자”라고 강조하는 말을 듣는 게 당연하지. 요즘처럼 살기가 팍팍한데 꼭 그렇게 나서서 봉사해야 하나. 전도해야 하나. 헌금 해야 하나. 십일조 못 드릴 수도 있지 요즘 돈 쓸데가 얼마나 많은데 나 한 사람쯤 십일조 안 드린다고 뭐 어떻게 되겠어. 집 장만하랴 자동차 굴리랴 세금 내랴 보험금 내랴 애들 학원비 충당하랴 돈 쓸데가 끝이 없는데 무슨 십일조는 십일조. 하나님도 우리 집 경제 사정 잘 아실텐데 말야. 이러면서 혹시 나는 매사에 한 발짝 비켜서서 신앙생활을 강 건너 남의 불 난 집 구경하듯 하지는 않는가. 마틴 루터는 “거듭난다는 것은 돈 지갑까지도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예수께서는 장차 다가오는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시는데 베드로는 예수의 가는 길과 전혀 딴 길을 생각하고 있었다. 세속적인 성공과 출세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베드로는 12제자 중에서 항상 우월의식이 있었다. 다른 11제자들 보다는 자신이 항상 첫째라고 여겼다. 안드레와 형제지간이지만 자신은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야 하고 자신의 목소리가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여겼다. 자기 의견이 예수께도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를 붙잡아 흔들며 대들면서까지 항변한 것이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을 믿는 믿음, 주님을 따라 가는 믿음의 사람의 모습인가. “과연 이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그 대답을 따라 생활해야만 할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께서 원하시고 기대하시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말씀하는 ‘자기 부인’이란 “자기의 성품이나 죄된 생각이나 악한 습관으로부터 완전히 단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고 다스리고 이기는 것 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 매 순간마다 일어나는 악의 욕망을 다스려 이기는 것을 말한다. 생각하여 보라. 이것이 쉬운 일인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결코 내 힘이나 내 의지나 내 결심이나 내 인내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를 매 순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적인 생활고나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질병이나 대인관계에서 오는 힘겨운 그 무엇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십자가’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성도가 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겪는 피할 수 없는 불편이나 손해나 불평등이나 고난이나 환난이나 고통이나 직면하는 죽음의 위협을 일컫는 말씀이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신사 참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온갖 수모와 고난을 겪어야 했던 신앙 선배들이야 말로‘자기 십자가’를 지고 믿음을 지키려 했던 신앙의 선배들이다. 히브리서 11장 35절 이하에 보면 “심한 고문, 조롱, 채찍질, 결박, 옥에 갇히는 시련, 돌로 치는 것, 톱으로 켜는 것,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이나 염소의 가죽을 입고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서 유리하고 긍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신앙생활 환경에는 더 이상의 핍박은 거의 없다. 물론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가족 관계 속에서 그런 위협을 당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제대로 따라는 첫 시작인 것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등의 신앙을 이야기 하고 또 이야기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저들은 남들과 달랐다. 저들은 자기 앞에 주어진 ‘자기 부인’의 순간과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순간에 비겁하거나 나약해지지 않았다.


손양원 목사의 양 손자인 안경선 목사는 양할아버지 손양원 목사의 신앙 정신을 세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 저항정신이다. 

신사 참배에 대한 그의 신앙 정신은 후대에 두고 두고 귀감이 된다.


둘째, 사랑과 용서의 정신이다.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 청년 안재선을 양자로 삼았다. 그도 신학을 했으나 평생 평신도로 살았다. 그의 아들 안경선이 목사가 되었다. 지금은 아프리카 부룬디에서 한센인을 대상으로 선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한센 병 문제가 해결되었다. 세계에 4,500만명 정도의 한센 병자가 있다. 아프리카에는 한센인이 2,500만명이다. 동남아시아에 2,000만명이다. 


셋째, 일사각오의 정신이다. 

6. 25 전쟁이 벌어졌다. 공산당이 여수까지 들이닥쳤다. 손양원 목사는 애양원 성도 1,200여명을 남해와 부산을 피난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성경책 한 권만 들고 애양원에 남아 있는 중증 한센병 환자들 곁을 지켰다. 애양원에 들이닥친 공산당들에게 체포된 손양원 목사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1950년 9월 28일에 총살당했다. 그의 나이 49살 때의 일이다. 그 현장에서 탈출한 김창수 씨의 증언이 역사 속에 전해온다. 손양원 목사의 장례식 때 가장 슬퍼한 것은 부인이 아니라 양자로 받아들인 안재선이었다고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부인하거나 배반하거나 모른다고 하지 말고 자기를 부인하자. 자기 십자가를 지자.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세상을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라고 지적하셨다. “음란하다” 라는 ‘모이칼리스’라는 말은 “배우자가 있는 기혼자가 성적으로 부정한 행동을 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의 영원한 신랑이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세상을 짝하는 우상 숭배와 세속적인 상태를 지적하신 말씀이다. “죄 많은 세대”라는 말씀은 물질에 대한 탐욕과 세속적인 쾌락에 빠져 사는 타락한 상태를 지적하시는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을 부끄러워 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 당시 유대인들은 실제 생활에서 매우 음란하였을 뿐만 아니라 위선과 독선에 가득 차 있었다. 마가복음 3장 14-15절에 보면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라고 했다. 예수를 믿고 주를 따른다는 것은 에수와 함께 지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12명의 제자를 부르셔서 함께 지내셨다. 함께 먹고 함께 지내고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고 모든 시간을 늘 함께 하였다. 생각해 보라. 예수와 늘 함께 하는 생활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불편이 없어야 한다.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곤란한 경우가 없어야 한다. 난처하거나 난감한 경우가 없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의 말씀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생활이다.


평소에 예수와 예수의 말씀을 부끄러워 하면“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하리라.”라고 경고하셨다. 

나는 어떤가. 평소에 일상 생활 중에서 예수를 믿으며 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부끄러운가. 어디 식당에서 식사 전에 기도하려면 주변 사람들의 눈치가 보이는가. 그런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를 보라. 예수께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에 여자 아이가 묻는 질문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예수를 모른다고 했다.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맹세하고 도망가 버렸다. 그런 나약하고 비겁했던 베드로가 회개하고 성령 받은 초대 교회의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예수와 나 사이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예수를 부끄러워 하거나 모른다고 하거나 부인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길이다. 주님 안에서 주님과 더불어 세상과 죄와 나를 이기는 복음의 승리자가 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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