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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복음 전파자의 태도(살전2:1-8) 2023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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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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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11-05 12:22 조회 3,017 댓글 0
 

                           복음 전파자의 태도(살전2:1-8)             2023. 11. 5

 

 

지난 주일에 묵상한 대로 빌립보 교회는 바울 사도와 실라에 의해서 구라파에 세워진 첫 교회이다. 빌립보 지역의 핍박과 유대인들의 훼방을 피하여 도착한 곳이 데살로니가였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과 실라 즉 실루아노에 의해서 세워진 두 번째 교회이다. 세월이 흘렀고 지금 바울은 고린도에 머물면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믿음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수고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는 저들의 신앙 생활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의 처처에 좋은 소문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데살로니가 전서 1장 8절에서 말하는 마게도냐란 지금의 그리스의 북부지방이고 아가야는 그리스의 남부 지방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반도 국가인 그리스를 지금의 남북한으로 비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신앙 생활을 잘 하는 은혜로운 소식이 함경도와 평안도에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까지 골고루 좋은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나. 좋은 소문이든 나쁜 소문이든 소문은 멀리 멀리 퍼져 가게 마련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속담도 있지 않나. 더군다나 요즘과 같은 실시간 뉴스 시대에는 지구 저편의 소식이 동시간 대로 지구 이편에 까지 전해진다. 사람은 소문 속에 사는 것이다. 

 

사도 바울을 직접 데살로니가에 가서 그 곳의 성도들을 만나 보고 싶었으나 쉽게 기회가 주어지질 않았다. 그래서 디모데를 대신 보내었다. 바울은 디모데를 통해서 전해 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감사하고 칭찬하는 편지를 쓰고 있다. 지난 주일에 대한 1장 내용이 그러한 것이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지난 날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 되게 하신 일들을 회상하며 편지를 쓰고 있다. 

 

바울은 복음 전파를 반대하고 핍박하던 자였다. 그런 그가 다메섹의 변화 체험 후에 하나님의 복음 전파의 선봉에 서는 이방 선교의 제 일인자가 되었다. 바울은 자신이 해 온 일이 사람을 위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일이었음을 회상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복음’이란 표현을 2절과 8절에서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장 전체는 복음 전파자로 살아 온 바울 자신의 자세와 태도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1절, 헛되지 않았다.

2절,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다. 

2절, 많은 싸움 중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3절, 간사함이나 부정이나 속임수로 하지 않았다.

4절,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하지 않았다.

5절, 아첨의 말을 하지 않았다.

5절,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

6절,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7절, 유모가 자녀를 기르는 것과 같이 하였다.

8절, 목숨이라도 주기를 기뻐하였다.

 

이 편지를 쓰던 당시에 고린도에 머물던 바울 곁에는 실루아노 즉 실라와 디모데가 그의 곁에 있었다. 1장 1절이 그러한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그렇지 않나. 어제, 2023년 11월 4일 오후 2시부터 두 시간이 넘도록 예수사랑교회의 미카엘과 호산나 성가대원들 거의 모든 이들은 수색교회에 있었다. 이미 오전부터 모여서 찬양 연습에 몰두하고 함께 점심 식사도 하였다. 2019년 이맘 때에 우리 교회에서 은평 지방 찬양제가 열렸다. 우리 교회가 건축 된 이후로 여선 교회 은평 지방 연합회의 찬양제는 두어 차례 우리 교회에서 열린 적이 있다. 그러나 청장년부 주관의 찬양제는 4년 전 이맘 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몇 주 후인 2019년 11월 말,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 환자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해가 바뀐 2020년 2월부터 주변 국가와 전 섹계가 코로나 19의 확산 두려움에 갇혀 지내야 했다. 그리고 마스크를 벗고 지낸 이후로 처음 찬양제가 열린 것이다. 우리 교회는 탄생 초기에 반대와 핍박과 조롱을 비롯한 우여곡절을 수도 없이 겪었다. 교회 설립을 반대하는 이들이 교회 안과 밖으로 우겨 싸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겨 싸이지 않게 하셨다. 답답했던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박해도 받야야 했고 우리를 거꾸러트려 없애 버리려는 세력도 있었다. 그러나 지내 놓고 보니 그 때 그 때마다 하나님은 감당하게 하셨고 이겨 내게 하셨다. 

 

고린도후서 4장 8-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도 그랬다. 우리가 겪은 일들이 바울의 때에 바울 사도가 겪던 그런 일들과 유사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때 그 때마다 이 일들이 하나님의 일인 것이 입증되게 하셨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살전2:2, 8, 9)이란 표현을 반복하는 것이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 해온 복음 전파자로서의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를 비롯한 저들의 태도가 어떠하였는가를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자. 

 

 

하나님을 힘입자.

바울 사도는 가는 곳마다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고난 때문에 주저앉거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포기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바울 사도는 고난과 능욕을 당할 때마다 분명하게 깨닫고 체험하였다. 하나님이 그에게 힘이 되어 주시고 보호자가 되어 주시고 인도하고 계시다는 분명한 임재의 체험 속에 살아 가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2절을 보자.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 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그렇다. 우리는 사도행전 16장의 내용을 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혔다. 매를 많이 맞고 실라와 함께 빌립보 감옥에 갇혔다. 그 밤에 바울과 실라는 찬송하며 기도하였다. 저녁도 못 먹고 많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그 밤에 저들은 찬송하고 기도하였다. 그런데 그 밤에 기적이 일어났다.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고 모든 죄수들을 매고 있던 차꼬가 풀려 나갔다. 잠들어 있던 간수들이 놀라서 깨어 났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했다. 그 때에 바울은“우리 한 사람도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있으니 당신들의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크게 소리쳤다. 간수 한 사람이 등불을 켜 들고 바울과 실라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말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그러자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대답해 주었다. 간수는 그 밤에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갔다. 매 맞은 환부를 치료해 주었다. 온 가족이 그 밤에 세례를 받았다. 그 밤 중에 음식을 차려서 대접하고 온 집안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며 하나님을 영접하였다. 

 

날이 샜다. 상관들은 부하를 감옥에 보내서 바울과 실라를 풀어 주라고 명령하였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인데 어찌 이렇게 함부로 대하느냐고 항변하였다. 간수는 급하게 이 사실을 상관에게 보고하였다. 상관들은 바울이 로마의 시민권자라는 사실을 전해 듣고 크게 두려워하였다. 그래서는 찾아 와서 “제발 빌립보 성에서 떠나가 달라”고 간청하였다. 바울 사도는 마음을 삭히고 실라와 함께 루디아의 집으로 가서 그 동안 복음을 전파하며 만났던 형제들을 만나서 신앙 생활을 잘 하라고 위로하고 저들 곁을 떠나갔다. 그리고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도착한 곳이 데살로니가였다. 

 

바울은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미 하나님은 자신을 이방 전도자로 사용하고 계시며 그 때 그 때마다 필요한 힘을 공급해 주시며 보호하고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힘 입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지키시고 하나님이 은혜 주시고 하나님이 생명을 보존하시고 하나님이 지혜와 권능을 주셔야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법이다. 그렇지 않나. 내가 내 생명의 주인인가. 요즘 지구 저편에서 전쟁으로 죽어 가는 이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보라. 어린 아기들의 죽음, 부녀자들의 죽음의 소식을 접한다. 전쟁 중인 군인들의 죽음은 물론이다. 이 세상에 자기 생명, 자기 목숨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죽음의 순간이 일 순간에 찾아 온다.

 

“시간 중에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이고 사람 중에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내 곁에, 내 앞에 있는 사람이라”라는 말이 있지 않나. 요즘 우리가 손경민의 <은혜>라는 찬양을 자주 부른다. 그 가사의 내용이 무엇인가. 그렇다. 내가 누려 왔던 그 모든 것들이 은혜 아닌 것이 단 하나도 없다. 모태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태어나는 순간, 자라나는 모든 날들, 살아 온 모든 날들이 은혜 아닌 것이 단 하나도 없다. 숨 쉬며 살고, 내 몸에 맑은 피가 흐르고, 먹고 마시고 앉고 서고 눕고 일어나고 들고 나는 매 순간과 하루 하루가 다 은혜이다. 

 

내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 사극을 좋아하는 이들은 한명회(韓明澮, 1415-1487)가 누군지 잘 안다. 조선 초기 제 4대 세조부터 제 9대 성종 시대까지 여섯 왕이 바뀌도록 조선 시대 초기에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의 호(號)는 그 유명한 압구정의 압구(狎鷗)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한강 남쪽의 강변에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자신의 호를 붙여 불렀다. 딸 넷이 있었다. 셋째 딸이 예종의 왕비인 장순 왕후(章順王后, 1445~1461)이다. 17살에 죽었다. 넷째 딸이 성종의 왕비인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1474)이다. 19살에 죽었다. 두 왕비는 모두 자녀를 낳기 전에 죽고 말았다. 생각해 보라. 왕비가 되는 일이 쉬운 일인가. 그런데 17살, 19살에 죽고 말았다. 내 생명, 내 목숨이 내 것이 아니다. 내 건강, 내 출입하는 크고 작은 일들이 내 힘으로, 내 지혜로, 내 판단으로 하는 것 같지만 내 것이 아니다. 나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일찍이 다윗은 알았다. 그래서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18:1)라는 고백을 한 것이다. 지금 어떤 형편, 어떤 상황, 어떤 여건 가운데 있을지라도 오늘, 지금 나에게 생명을 허락하신 주의 은혜에 감사하며 나의 힘의 공급자이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자.

4절의 ‘옳게 여기심’이란 ‘입증하다, 구별하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아무나 쓰지 않으신다. 아브라함 시대에 양과 염소와 소와 낙타를 치던 목축업자가 얼마나 많았겠나. 그 주변의 그 많은 우상 숭배자들 중에서 하나님은 나이 75세의 아브람을 부르셨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으로 살아갈 것을 초대하셨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앞에 응답하였다. 오늘날로부터 4천년 전의 일이다. 그런 아브라함에게서 아들 이삭이 이삭에게서 야곱이 야곱의 열 두 아들들 중에서 요셉과 같은 인물이 탄생한 것이다. 모세는 아브라함의 칠대 후손이다. 다윗 왕은 아브라함의 천년 후손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셨다. 그 내용이 신약 성경의 시작인 마태복음 1장 1절이 아닌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하나님은 불의하고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인생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복음의 사람으로 사용하신다. 바울 사도도 그런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복음 전파를 위해서 하시는 일을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맞다. 하나님의 복음 전파를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게 여기심을 받은 자들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택함 받은 자에게 ‘복음을 위탁’하시기 때문이다. ‘옳게 여기심’이란 연금술사가 금을 연단해서 순금을 정련해 내듯이 하나님은 각 사람을 시험하고 연단하셔서 ‘옳다’고 여겨 지실 때에 택하여 부르시고 복음을 위탁하신다는 말씀이다. 

 

어제 성가대원들과 함께 수색 교회에 다녀 왔다. 1912년에 시작된 교회이다. 그 교회 홈페이지 역사 소개란에 보면, “1912년 7월 5일, 상암동 419번지 김야곱씨댁에서 창천교회 지교회를 노경준 목사에 의해 10여명이 집회를 시작하다. 1918년, 초가건물 12.5평의 최초 교회 임대하다. 1928년~1945년 - 일제의 압박으로 교회문을 닫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런 지난 날을 뒤로 하고 오늘 날 111년의 역사를 지켜온 명실상부한 교회로 성장한 것이다. 

 

맞다. 개인, 가정, 가족, 교회, 민족, 국가 등 다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고 복음을 위탁 받아”살아가는 것이 우리 각 사람의 삶이어야 한다. 세상의 직업이 다 다르다. 삶의 정황이 제 각각이다. 그러나 이렇제 주일을 맞아 예배하는 우리 각 사람은 분명한 고백 속에 살아가야 한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여러해 전에 읽은 내용이다. 미국에 성공한 백인 부부가 플로리다의 그림 같은 해변 가에 아름다운 집을 짓고 노년기를 지낸다. 아침이면 맨발로 모래 사장을 거닌다. 각종 아름다운 조개 껍질들을 몇 개씩 주워서 들고 집으로 돌아 온다. 창가의 문틀에 가지런히 장식한다. 창밖으로 바라다 보이는 바깥 풍경이 아침 저녁으로 변한다. 한마디로 “참으로 아름답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남편이 꿈을 꾸었다. 꿈에 죽음의 순간을 맞게 되었다. 하나님이 꿈에 그에게 말씀하셨다. “세상에서 뭐하다 왔느냐”“네, 하나님 아침마다 아내의 손을 붙잡고 아름다운 해변을 걸으로 새롭게 눈에 띠는 멋있는 조개 껍질을 모으다가 왔습니다.”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게 너의 일과의 전부였니”깜짝 놀라서 깨어 보니 꿈이었다. 그 날 이후로 이 노 부부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일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어떤가. 어떻게 살다가 죽음을 맞는 것이어야 할까. 젊었기 때문에 앞으로 백년을 더 사는 것 아니다. 지금 늙었기 때문에 금방 주님 앞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나의 시간, 나의 건강, 나의 경험, 나의 재주, 나의 능력, 나의 은사, 나의 역량, 나의 재물, 나의 그 모든 것들을 주님께 집중하며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213장 찬송가 <나의 생명 드리니>의 가사를 보라.

 

1.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 주셔서

세상 살아갈 동안 찬송하게 하소서

2. 손과 발을 드리니 주여 받아 주셔서

주의 일을 위하여 민첩하게 하소서

3. 나의 음성 드리니 주여 받아 주셔서

주의 진리 말씀만 전파하게 하소서

4. 나의 보화 드리니 주여 받아 주셔서

하늘나라 위하여 주 뜻대로 쓰소서

5. 나의 시간 드리니 주여 받아 주셔서

평생토록 주 위해 봉사하게 하소서 아멘

 

이 찬송가의 가사를 지은 프랜시스 리들리 하버갈(F. R. Havergal, 1836~1879)은 42살에 주님께 돌아갔다. 세상을 떠나기 5년 전인 1874년 2월, 영국 우스터셔의 아렐리 하우스(Areley House)를 닷새간 방문했을 때 지은 것이다. 하버갈은 영적 체험을 하게 되고 이 시를 썼다. “아렐리 하우스의 한 기도모임을 방문했는데 그 곳에는 10여명이 있었다. 이들 중에 더러는 아직 예수를 믿지 않아 오랜 기도의 대상이었으며, 더러는 믿기는 믿는데 기쁨이 없었다. 주님께서 ‘주여, 이 집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이 충만하게 해 주옵소서’하고 기도하도록 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기도에 바로 응답해주셨다. 그 집을 떠나기 전 모든 사람들이 은혜와 복을 받게 되었다. 자정쯤에 주인 아주머니가 두 딸에게 가 봐달라고 부탁했다. 두 딸은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둘 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뻐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주를 찬양하며, 헌신을 다짐했다. 그 어린 두 딸이 마음에 남아 노래가 되었다.” 

 

“이 시는 제가 지은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저절로 울려 왔습니다. 마지막 시구 ‘Ever only, all for Thee’(영원히 모든 것을 오직 주님을 위하여)로 끝맺을 때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흘러나왔습니다.”

 

미국의 메인(Hubert Platt Main)이 모차르트 곡과 뮬러의 작품에서 발췌한 곡으로 편곡해서 오늘날까지 불려 지고 있다. 작사가인 프란스시 하버갈의 아버지는 영국성공회의 신부이고, 교회음악에 큰 공헌을 한 윌리엄 헨리 하버갈이다. 그녀는 병약한 몸 때문에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교육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4살 때부터 글을 읽었고, 7살부터 시를 썼다. 또한 라틴어와 헬라어·히브리어에 능통했는데, 시편과 이사야 그리고 대부분의 신약성경을 암송할 정도로 말씀을 사모하며 살았다.

그녀는 오직 하나님만 찬양하기로 작정하고 늘 찬양의 삶을 살았다. 

 

그녀도 사도 바울처럼 건강을 달라고 주께 기도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약한 상태에서 주님의 사람으로 영광돌리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매 순간 감당할만한 힘을 주셨고 찬양으로 주님의 영광을 높이도록 사명을 위탁하셨다. 그녀는 우리 나라의 송명희 자매처럼 연약하고 고통 스러운 중에서 영롱한 찬송시를 써 내려 가고는 하였다. 교회 역사에 그녀의 찬송시 80여편이 전해져 불리고 있다. 이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럽고 은혜로운 일인가. 그녀는 성령께서 자신을 감동시켜야만 찬송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린아이가 글을 쓸 때 한 줄을 받아쓴 후, 다음은 무엇을 쓸지 물어보듯 나는 그렇게 찬송시를 씁니다. 생각과 힘뿐만 아니라 말씀 하나 하나, 그리고 각 운에 이르기까지 주께서 주시는 대로 한 줄 한 줄 받아 적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각을 주시고 선율 하나하나를 말씀해 주시면 그대로 받아쓰고 감사한답니다.”

 

오늘, 지금 자신에게 물어보자. “과연 나는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은 자 답게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말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자.

신앙 생활이 무엇인가. 나의 기쁨 나의 만족만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나고 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삶을 살아 갈 수 있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분명하게 말하였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함이라”(살전2:4)라고 말이다. 사도행전 3-4장에 보면 베드로 사도는 성전 미문 앞에서 늘 구걸하던 못 걷던 사람을 걷게하는 기적을 행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라고 말하며 걸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고 성전 안에 들어가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관원들은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붙잡아 옥에 가두었다.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다 모였다. 예수의 부활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을 저들은 너무 싫어하였다. 앞으로는 절대 예수 부활을 전하지 말라고 다구쳤다.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고 담대하게 대답하였다. 맞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뭔지,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것이 뭔지를 먼저 분별하여야 한다. 내 기쁨 내 기분대로 해서는 않된다. 우리가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라고 찬송하지 않나.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부대가 되게 하여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겸손히 내 마음 드립니다 나의 모든 것 받으소서

나의 맘 깨끗게 씻어주사 주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다윗에게는 그런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37:4)

존 파이퍼 목사의 책 중에 <여호와를 기뻐하라>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1. 하나님의 행복 : 기독교 희락주의를 위한 기초 

2. 회심 : 기독교 희락주의자의 창조 

3. 예배 : 기독교 희락주의의 잔치 

4. 사랑 : 기독교 희락주의의 수고 

5. 성경 : 기독교 희락주의를 위한 불씨

6. 기도 : 기독교 희락주의의 능력 

7. 돈 : 기독교 희락주의의 통화

8. 결혼 : 기독교 희락주의의 모체 

9. 선교 : 기독교 희락주의의 승리의 함성 

10. 고난 : 기독교 희락주의의 희생

 

이라고 하였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다. 희락 즉 기쁨은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중의 하나다. 누구나 고난과 슬픔과 역경과 환란과 실패와 두려움과 우울이 엄습해 오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기쁨으로 이기며 살기를 원하신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라고 가르쳐 주었다. 기쁨으로 슬픔을 이기자. 기쁨으로 우울을 이기자. 기쁨으로 걱정과 근심을 이기자. 기쁨으로 모든 상황을 덮자. 이렇게 사는 것이 주님의 기대하심이다. 나의 시간, 나의 건강, 나의 은사, 나의 재물, 나의 그 모든 것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집중하며 살자. 이것이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태도이고 열매이고 증거가 되는 삶을 살아 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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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것 같은 날..최고관리자
"내 주 예수 주신 ..최고관리자
"내 주 예수 주신 ..최고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