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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나귀를 타신 왕(마21:1-11) 20230402 종려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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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3-04-04 10:58 조회 2,976 댓글 0
 

                         새끼 나귀를 타신 왕(마21:1-11)               2023. 4. 2 종려주일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들이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과 승천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을 기록하는 마태복음의 내용은 오늘 읽은 마태복음 21장 1절부터이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예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왕이신 것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사건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내용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께서는 그의 탄생과 성장과 생애와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부활 승천하시는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었다. 예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도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역사적인 일이었다. 

 

예수께서는 즉흥적으로 무슨 일을 하신 적이 없으시다. 예수께서는 철저히 그의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르고 순종하였다. 이번의 예루살렘 방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후에 세 번째 맞이하는 유월절이며 마지막 유월절이다. 예수께서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계셨다. 그 때에 감람산 벳바게라는 마을이 가까이 가셨을 때에 두 제자를 마을 안으로 보내셨다. 벳바게라는 마을의 이름은 ‘집’이란 뜻의 ‘벳’과 ‘무화과’라는 뜻의 ‘바게’가 합성된 이름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설익은 무화과는 가난한 자들의 몫으로 여겼다. 설 익은 무화과를 솎아내야 제 철에 잘 익은 무화과를 수확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설익고 철 이른 무화과는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의 몫이었다. 

 

벳바게는 그 마을의 이름이‘무화과의 집’인 것처럼 가난한 이웃들이 모여 사는 감람산 자락의 시골 마을이었다. 마을 안에 들어가서 매여 있는 나귀와 나귀 새끼를 보거든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라고 명하셨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라고 저들이 겪을 상황도 미리 설명해 주셨다. 

 

두 제자는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마을 안에 들어가서 나귀와 새끼 나귀를 풀어서 끌고 왔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의 잔등에 얹었다. 그리고 그 위에 예수께서 타셨다. 예수는 어미 나귀를 타신 것이 아니라 어린 새끼 나귀를 타셨다. 그 광경을 목격한 많은 무리가 겉옷을 벗어서 길에 깔았다.  어떤 이들은 종려 나무 가지를 베어다가 길에 펴서 깔았다.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의 앞뒤로 수 많은 무리가 모여 들었다. 저들은 큰 소리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쳐 대기 시작하였다. ‘호산나’는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며 고난 주간을 시작하며 이 말씀을 묵상한 후에 이어질 성찬에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바란다.

 

 

겸손한 왕.

세상의 왕은 겸손하지 않다. 교만하고 거만하고 권위적이다. 동서고금에 왕은 백마를 탔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코끼리를 타는 경우도 있었다. 삼대 세습을 이어가는 북한의 김정은도 백두산에서 백마를 타는 장면을 사진과 영상으로 공개하지 않나. 러시아의 푸틴은 여러 해 전에 군복 바지에 상체를 벗은 모습으로 말을 탄 사진을 언론에 공개한 적도 있다. 이처럼 왕이나 권력자들은 한결같이 말을 타고 나타나는 것을 본다. 백성들은 왕의 곁에 가까이 쉽게 접근조차 할 수조차 없다. 그뿐만 아니라 왕들은 다니는 길도 정해져 있었다. 넓고 좋은 길로 다녔다. 그런 길을 왕의 길(King’s way)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 넓고 좋고 화려한 길로 가신 것이 아니라 벳바게의 가난한 이웃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시골 마을 길을 거쳐서 예루살렘을 향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겸손한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라고 스스로 겸손함을 드러 내셨다. 예수는 속에는 탐욕과 시기와 교만이 가득하면서 겉으로만 겸손한 척하는 그런 왕이 아니셨다. 

 

본문 5절은 스가랴 9장 9절의 인용이다. 다 같이 스가랴 9장 9절을 읽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그렇다. 예수께서는 나귀의 작은 새끼를 타고 공의와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서 이 땅에 보냄을 받으신 겸손한 왕이시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겸손한 왕으로 보내셨다. 예수는 교만하고 거들먹거리며 백성 위에 군림하려고만 하고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악한 왕이 아니다. 예수는 공의를 사랑하며 그를 믿는 만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보냄을 받은 겸손한 왕이셨다. 

 

열왕기하 9장에 보면 선지자 엘리사는 제자 중의 하나를 불러서 “허리를 동이고 기름병을 손에 들고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라고 명령하였다. 그 마을에서  예후를 찾아 만나라고 하였다. 그를 만나면 데리고 골방에 들어가서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노라”라고 선포하라고 하였다. 엘리사의 제자는 그대로 행했다. 그리고 급하게 그 현장을 빠져나와 도망하였다. 그러나 이 비밀스러운 기름 부음의 현장은 소문이 퍼져 나갔다. 예후는 자신의 근황의 변화를 묻는 주변 사람들의 질문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선지자의 제자를 통해서 자신에게 왕이 될 자로 기름 부은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예후는 왕이다’라고 말했다.”(왕하9:13)

 

이 장면에 보면 하나님이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 삼으신 것을 알게 된 백성들이 자기의 옷을 벗어서 예후의 앉을 자리에 깔았다. 새끼 나귀의 잔등에 옷을 벗어서 깐 것은 이런 전통을 이어서 한 행동이었다. 맞다. 그렇다. 예수는 스스로 왕이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따라 겸손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산헤드린의 공회원들은 언제나 예수를 비난하고 조롱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이룩하실 겸손한 왕으로 준비하고 계셨다.

 

물론 예수께서는 때가 되면 이 세상에 백마를 타고 재림하실 것이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계19:11)라고 하였다. 

 

나귀 타신 겸손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는 며칠 후에 붙잡혔다.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옷을 벗기는 부끄러움을 당하셨다. 채찍으로 맞았다.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기도 하고 따귀를 때리는 이도 있었다. 이마에 가시 관을 씌웠다. 이마와 잔등이 피 범벅이 되었다. 못 박힐 십자가를 지고 빌라도의 법정으로부터 골고도 언덕까지 끌려가야 했다. 넘어지고 쓰러졌다. 수 없이 채찍에 맞아서 잔등이 피 범벅이 되고 살점이 다 문들어졌다.  더 이상 십자기를 지고 갈 기운이 없었다. 그 때 로마 병사가 구경하고 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불러내서 대신 십자가를 메고 가게 하였다. 

 

예수는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고 긍휼히 여기심으로 구원하실 겸손한 왕이셨다. 세상은 겸손한 왕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죽음으로 끝나는 왕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장사 지낸 예수를 죽은 자 사흘 만에 다시 살게 하셨다. 이것이 예수의 부활이다.

 

이것이 겸손의 신비이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 하나님은 겸손하고 나약하게 끌려가서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지극히 높이셨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모든 자의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다. 모든 입으로 예수를 주님으로 시인하게 하셨다.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빌2:11) 이것이 겸손한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이다. 세상 사람들 중에 믿음의 사람들은 억지로 마지못해서 예수 앞에 무릎을 꿇는 이가 없다. 누구나 다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겉옷을 벗어서 예수께서 타실 새끼 나귀의 잔등에 깐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가시는 길에 옷을 벗어서 깔고 종려 나무 가지를 베어서 깐다.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지 못해 하는 것이 아니다.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여 구원 받은 감격을 가지고 모든 것을 드리고 전부를 드리고 싶어 한다. 이런 은혜가 우리 가운데 넘쳐 나기를 축원한다. 

 

 

호산나 찬미를 받으신 왕.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는 그를 앞뒤에서 따르고 앞서는 수 많은 무리들로부터 찬송을 받으셨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찬송이 무엇인가. 그야말로 칭송하고 높이고 경배하는 노래가 찬송이다. 우리가 요즘 새벽마다 모여서 찬송으로 예배를 시작한다. 찬송은 그런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깊은 밤 중에 노래방에서 술마시며 술에 취해서 몽롱한 상태에서 춤추며 세상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른 새벽에 맑은 정신으로 에배당에 나와서 찬송하고 또 찬송한다. 이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다. 주님이 나를 예배자로 선택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나로하여금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찬송하도록 구별해 주신 것이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며 존귀한 것이다.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더 나가기 원합니다.”라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성도는 늘 날 구원하신 주님께 호산나 찬송을 부르고 또 부르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하늘과 땅과 바다의 모든 피조물들이 한 입으로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5:13)라고 찬송한다고 하였다. ‘구원하소서’라는 ‘호산나’의 찬송은 오직 성도들만이 부르는 노래이다. 평생 호산나 찬송이 끊임이 없는 찬송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선지자이신 왕.

호산나 호산나 하는 찬송 소리가 점점 켜지자 온 예루살렘 성민들이 소동하기 시작하였다. 5절의 ‘시온의 딸’이란 ‘예루살렘 주민’을 일컫는 표현이다. 10절에 보니까 “이는 누구냐”는 질문이 입에서 입으로 번져 나갔다. 저가 과연 누구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저를 따르며 ‘호산나 호산나’라고 찬송하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무리들은 서로 대답하기 시작하였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다”(마21:11)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 위에 평화를 전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선지자이다. 그는 선지자인 왕이시다. 다윗이 후손으로 오신 예수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으신 선지자였다. 

 

모세는 신명기 18장 15절의 말씀을 통해서 장차 이 세상을 구원할 선지자로 보냄을 받으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사도행전 3장 22절에 보면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는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며 지내고 평생토록 걸어 본 적이 없던 중중 장애인을 걷게 하였다. 성령께서 하신 일이다. 그 후에 솔로몬의 행각에 모여든 무리 앞에 설교하였다. 그 때 인용한 말씀 중의 한 구절이 신명기 18장 15절의 장차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선지자 예수에 대한 모세의 예언이다. 요한복음 5장 45-47절에 보면 예수 자신도 신명기 18장 15절의 모세의 예언을 자신을 향한 예언으로 인용하신 바가 있다. 사도행전 7장 37절에도 보면 스데반의 설교에도 예수가 선지자로 오시리라는 신명기의 모세의 예언을 인용한다. 

 

요한복음 4장 19절에 보면 수가성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를 처음 만났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를 향해서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그렇다. 예수는 이 땅에 공의와 평화의 구원을 이룩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선지자이신 왕이시다. 예수는 영원한 선지자, 영원한 왕이시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께서 변화산에 오르셨을때에 변형되셨다. 그 때 만난 구약의 두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모세이고 또 한 사람은 엘리야였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며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되 모세는 예수가 선지자 중의 선지자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예언한 율법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모세 또한 선지자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 시대마다 준비된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펼치셨다. 예수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 왕 중의 왕으로 보냄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선지자인 왕 예수는 새끼 나귀를 타시고 초라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겸손하게 예루살렘을 향하셨다. 그러는 그는 세상의 모든 왕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왕 중의 왕이셨다. 시편 2편의 말씀처럼 세상의 왕들은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그를 대적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낳았고 사람이 세운 왕이 아니었다. 시편 2편 7절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말씀처럼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탄생하신 겸손하신 왕, 선지자이신 왕이시다. 종려 주일과 고난 주간을 지내며 예수만이 나를 통치하고 다스리고 주관하시는 전능하시고 영원한 왕이심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은혜의 날, 은혜의 절기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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