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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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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과 초대교회(행2:43-47) 2019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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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9-06-17 22:48 조회 11,674 댓글 0
 
                    성령강림과 초대교회(행2:43-47)          2019. 6. 16


이 땅의 모든 조직과 단체들은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 의하지 않고 위로부터 임한 능력에 의해서 탄생된 유일한 조직이 교회이다. 사도행전 2장 2절에 “홀연히 하늘로부터”임한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탄생된 것이 교회이다.

이 세상에는 3,000여개의 종교가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인도나 일본과 같은 나라는 신들의 숫자는 헤아리질 못할 정도로 많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 전도하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우상의 제단도 발견하였다. 이처럼 사람들은 별의 별 우상을 다 섬기고, 별의 별 신들을 다 만들어 섬기고 있다. 

종교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수행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계시종교이다. 수행종교(修行宗敎)는 사람이 만든 것이다. 불교가 그 대표이다. 수행 종교의 특징은 사람이 신적 대상에게 다가가 보려고 만들어진 종교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수행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계시종교(啓示宗敎)이다. 하늘에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임한 것이다.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권능이 땅에 임한 종교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 하여 인간을 만나 주신 종교가 기독교이다. 

가롯 유다를 제외한 예수의 제자들이 120여명의 성령 받던 이들 가운데 함께 있었다. 저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교회의 탄생이다. 

교회의 탄생과 부흥은 사람의 힘과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이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고 하였다. 

물론 인간의 노력과 열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성령의 임재가 아니라면 사람의 노력과 열심만으로는 교회가 교회될 수는 없다.

우리는 자주 건물이 교회인 것으로 착각할 때가 없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연합이 곧 교회이다. 예수를 나의 길과 진리와 생명 즉 영생의 원천으로 고백하는 이들의 공동체가 교회이다. 

예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은 이 땅에 교회를 탄생시킨 바탕이다. 예수는 교회 탄생의 전부이고 대답이다. 예수 없는 교회란 불가능하다. 예수를 자신의 생명의 구주로 고백하지 않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일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거듭나고, 죄 사함 받고, 영생의 언약 가운데 살면서 같은 신앙의 고백 가운데 있는 이들이 모여서 주를 섬기는 그 공동체가 교회이다. 

교회는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 즉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함을 입은 이들의 공동체이다.‘큐리아코스’(κυριακός)라고도 한다. 헬라어인 그 뜻은 ‘주님께 속한’이란 의미이다. 그러므로 교회란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 하셔서 머리로 계시며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다스리시며 하나님 아버지를 범사의 주인으로 섬기는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땅의 그 어떤 권세의 지배도 받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통치하시고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공동체가 교회이다. 

베드로의 성령 충만한 부활 복음 설교를 들은 무리들 가운데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고 성령 충만을 받은 이들의 수가 3,000명이나 더했다. 

저들은 날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서로 사귀고 교제하고 떡을 떼며 함께 성찬에 참여하고 함께 음식을 먹었다. 계속하여 기도하기를 힘썼다. 이처럼 예수를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신앙을 고백한 이들마다 세례를 받았다. 성령 충만을 받은 이들의 수가 예루살렘 안에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성령 강림의 열매였다. ‘성령 강림과 초대교회’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좀 더 자세히 묵상하도록 하자.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敬畏心).
성령 강림으로 인한 교회의 탄생은 이를 주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43절이 말씀하는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라는 말씀은 사람을 두려워했다는 말이 아니다. 이 땅에 교회 공동체를 탄생시키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가득해진 것이다. 

성령 강림으로 인하여 성령 충만해진 성도들을 목격한 이들의 첫 반응 중에는 “그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성령 받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의 일상생활을 주목하며 두려운 마음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는 성령 받은 이들의 삶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이어졌다.

신명기 11장에 보면 그런 장면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건너 광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은 출애굽한지 삼일 만에 마실 물이 없어 죽어 갈 것 같던 백성들에게 반석에서 생수가 나게 하셔서 해갈의 기적을 체험하게 해 주셨다. 하나님은 40년을 그렇게 인도하셨다. 광야의 날마다의 삶은 만나로 먹이시고 메추라기로 배 불리시고 그 때 그 때마다 마실 물을 공급해 주시는 기적과 표적의 연속이었다. 하나님은 마라의 쓴 물을 단 물이 되게 해 주셨다. 

광야 생활 중에 기사와 표적을 날마다 체험하며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소문은 가나안의 원주민들에게까지 전해졌다. 마음과 뜻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면 가나안 사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리라고 하셨다.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신11:25)고 하셨다. 우리가 아는 대로 불평과 원망 가운데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같이 광야에서 죽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앞장 세우셔서 새 일을 행하셨다. 스스로 삼가고 우상 숭배를 버리고 여호와를 따르고 섬기면 저주가 떠나가고 복이 임하는 백성으로 자자손손 인도하시겠다고 언약해 주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주목하며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명령인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강성하게 해 주시고 새로운 땅을 차지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별하셔서 저들로 하여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의 삶을 장구하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셨다.(신11:9) 

성령 강림 후에 탄생된 초대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예수를 하나님 곁으로 불러올리신 이후에 계속하여 별의 별 기사와 표적을 행하셨다. 우리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다양한 기사와 표적들을 기억한다. 이는 그 당시나 오늘 날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주님은 성령 충만한 베드로를 통해서 성전 미문 앞에서 날마다 구걸하며 지내던 걷지 못하는 이를 걷고 뛰게 해 주셨다. 성령 충만을 받은 사도들은 가는 곳마다 별의 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통하여 그런 일들이 가능하도록 역사하신 것이다. 사도행전 5장 12절 이하에 보면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이면 고침을 받을까” 하고 바랄 정도로 베드로와 사도들의 권위를 존귀하게 사용하셨다. 초대 교회의 소문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그 부근에 점점 퍼져 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모두 다 고침을 받았다. 그리함으로 하나님은 초대교회의 권위를 세워 나가셨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사도와 성도들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게 하셨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도록 초대 교회를 이끌어 가셨다.

교회는 학교의 동기 모임이나 동창회가 아니다. 성씨와 파와 본을 따라서 모인 종친회도 아니다. 고향 따라 모인 향우회도 아니다. 취미와 관심사를 따라 모인 그 어떤 서클 활동도 아니다. 같은 직업 혹은 같은 직종끼리 모인 동료들의 모임도 아니다. ‘해병대 전우회’처럼 군대 생활 이야기 하는 곳도 아니다. 

교회는 남자, 여자, 어른, 아이 그 구성원의 구분이 없다. 누구나 다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 교회란 예수를 생명의 구주로 고백하고 죄 사함 받고 거듭난 체험을 갖는 모든 이들의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는 많이 배운 사람, 적게 배운 사람, 부자와 가난한 사람, 건강한 사람과 병약한 사람, 사회적으로 유능한 사람과 사회 적응에 늘 어려움을 겪는 사람, 재주와 역량과 실력이 뛰어난 사람과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이 누구나 다 서로 골고루 어울려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곳이다. 

성도들의 연합인 교회는 성격, 취미, 관심, 기호, 역량, 재주, 은사, 능력, 마음 씀씀이 등이 서로 다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고백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주 안에 한 소망을 품은 모든 이들의 공동체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천 년 전에 예루살렘에 탄생시키신 교회를 통해서 별의 별 기사와 표적을 다 보여 주셨다. 그러면 그럴수록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는 점점 더 세상 사람들로부터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만 갔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점점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이들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아가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로 부터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경외심이 절로 우러날 수 있는 공동체로 보존되고 지켜 져야만 한다. 


물건(物件)의 통용(通用)과 소유(所有)의 나눔.
성령 받고, 은혜 받고 나니 믿는 사람들이 서로 더불어 함께 교제하는 일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해 졌다. 그래서는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 서로 서로 집집마다 모여서 떡을 떼며 성령 충만함을 받은 은혜 생활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또 했다. 여기 사도행전 2장 42절과 46절의 ‘떡을 떼며’라는 말씀은 모일 때마다 성찬에 참여 하였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기쁘고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사도행전 4장 32절에도 보면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하였다.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공동 사용하였다.

성령 충만을 받은 초대 교회 성도들 간에 일어난 이와 같은 유무상통하는 일은 자발적으로 서로 간에 일어난 모습이었다. 오늘날로 하면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 보려고 하는 복지와 혜택이 이루어 진 것이다. 많이 가진 자가 적게 가진 자에게 자기의 풍부한 소유를 나누었다. 그 당시에는 오늘날보다 가난한 이들이 훨씬 많았다. 넉넉한 이가 필요 것을 찾고 있는 부족한 이의 필요를 채워 주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다. 가난한 이들의  가난이 해결되는 돌봄이 이루어졌다. 

심지어는 바나바처럼 밭을 팔거나 집을 팔아서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던 중에 일어났던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진실하지 못한 행동은 초대교회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 

베드로는 초대 교회의 권위와 은혜 생활을 해치는 저들 부부를 책망하였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그의 마음에 가득 찬 사탄에 대하여 책망하고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고 책망할 때에 아나니아는 베드로 앞에서 엎드러져서 혼이 떠났다. 이 사건의 소식을 전해들은 초대 교회 성도들은 다 크게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젊은이들이 동원되어 베드로 사도 앞에서 목숨이 떠난 아나니아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였다. 세 시간 후에 나타난 아나니아의 부인 삽비라에게 “어찌하여 너희 부부는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고 책망할 때에 부인 삽비라도 베드로 사도 앞에서 엎드러져서 혼이 떠나고 죽고 말았다. 남편 아나니아를 장례하고 돌아온 젊은이들이 아내 삽비라의 시신을 메어다가 그 남편의 곁에 장사하였다. 사도행전 5장 11절에 보면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고 하였다. 

맞다. 성령 받은 이들의 신앙 공동체 생활이란 탐심을 극복하는 생활이어야 한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내 것 네 것 주장하지 않고 서로 필요를 따라 나누어 쓰고 돌보며 섬기는 은혜 생활을 계속하던 중에 일어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망 사건은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과 그 소문을 전해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교회의 권위를 세워가고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더욱 겸허하게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재산이나 소유나 가진 물건을 갖고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느냐, 주님의 몸 된 교회 공동체를 어떻게 섬겨 나가느냐는 것은 끝없는 유혹이며 시험이 아닐 수 없다. 
신앙생활의 중심에는 이처럼 끝없는 봉헌 생활이 시험대에 오르게 한다. 이는 가인과 아벨에게서도 그랬고 에서와 야곱에게서도 그랬다. 출애굽기 5장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애굽의 임금 바로 앞에 보내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셔서 광야에서 하나님께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리는 민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내어 놓으라고 요구하셨다. 그러나 바로의 학대는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그런 가운데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출애굽을 감행하신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오늘 날 교회 공동체를 이룬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약 민족 삼으셔서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고 예배하는 말씀 민족 삼으시려고 출애굽하게 하신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은 천한 만국의 백성들 가운데서 우리 각 사람을 지명하여 택하여 내시고 역시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들의 필요를 돌보고 섬기며 살아가는 거룩한 공동체 되게 하시려고 불러내신 것이다. 

이 세상 그 어디에 교회와 같은 곳이 있나. 없다. 오직 교회만이, 성도들의 거룩한 연합만이 이처럼 천국을 체험하는 새로운 꿈의 공동체 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나의 한 주간의 일과 중에 주일 예배가 없고, 성도들 간의 사귐과 연합이 없는 세상살이를 상상하여 보라. 교회처럼 소중한 곳이 어디 또 있는가. 만약에 “나는 교회 말고, 성도들 간의 교제 말고 세상이 훨씬 좋아요”하는 이들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좀 더 진실하게 들여 다 보아야 한다. 교회 안에 한 발, 세상에 한 발 그렇게 양편에 한 발씩 들여 놓고는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없다. 

초대교회는 달랐다. 42절,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고 했다. 

44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가 무엇인가. 믿는 사람들은, 성령 충만 받은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그 삶이 달라야 한다.
 
46-47절,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라고 하였다. 이것이 교회다. 이것이 은혜 생활이다. 이것이 성령 충만을 받은 성도들의 일상이다. 그런 신앙생활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자. 그런 성도들의 공동체를 이루도록 서로를 섬겨 가자. 


날마다 더해가는 구원(救援) 받는 사람들.
구원 받는 사람들의 수를 날마다 더해가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교회가 어디에 있겠나. 그런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사람에게 있지 않다. 성경을 자세히 보라. “주께서”라고 하였다. 맞다. 교회 안에 믿는 자의 수를 더하고 구원 받는 사람들의 수를 더해 가는 일은 사람의 몫이 아니다. 주께서 그렇게 되도록 해 주셔야 할 몫이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날마다 믿는 자의 수를 더하고 구원 받는 사람의 수를 더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42절,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이것이 비밀이다. 이것이 방법이다. 이것이 대답이다. 올해도 벌써 6월 중순이다. 올해의 절반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기도하는 개인, 기도하는 가정, 기도하는 속회, 기도하는 교사, 기도하는 성가대, 기도하는 찬양단, 기도하는 음악 사역자, 기도하는 직분자, 기도하는 직임자, 기도하는 임원, 기도하는 성도, 기도하는 어른 아이 젊은이 노인이 되어야만 한다. 기도가 답이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여야만 한다. 사무엘 상 12장 23절에 나오는 사무엘의 고백처럼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면 안 된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의로운 길이 무엇인지를 서로에게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신 큰일들을 생각하여야 한다. 기도생활을 강조한 사무엘은“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12:24)고 하였다. 

오늘 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프로그램이나 행사나 아니다. 기도해야 한다. 기도의 부족을 통감해야 한다. 나 자신이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 조상들의 대화를 빌리면 “감 놔라 배 놔라”가 아니라 “내가 제사상의 감이 되어야 하고 내가 제사상에 올려지는 배가 되어야 한다.” 내가 제물이 되어야 한다. 

내가 번제물이 되어야 하고 내가 가죽이 벗겨지고 내가 내장을 발라내고 내가 온전히 불태워 지는 제물 인생이 되어야만 한다. 내가 곱게 빻아지고 물로 드려지는 소제물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명령과 부르심을 거역하고 도망가고 숨던 요나였다. 그런 요나가 배 밑창에서 잠을 자다가 선장에게 발견되었다. 파도는 점점 더 흉용해져 가고 있었다. 그 순간에 요나가 고백하였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욘1:12) 

요나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그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동안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다. 내가 문제다. 내가 숨고 내가 피하고 내가 도망 다니는 내가 문제다. 내게 회개가 일어나야 한다. 나 자신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진실하게 고백하고 응답하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날 나를 통해서 행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져 가는 순종의 삶을 살아가야 만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요나 한 사람만 귀한 것이 아니다. 그가 다시스로 가는 배 안에 탔던 모든 사람들이 다 귀하다. 뿐만 아니라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만도 12만 명이 넘는다고 하였다. 하나님께 있어서는 회개하고 멸망을 피하기를 원하시는 저들 큰 이방 도시의 모든 백성들도 하나 하나 모두 다 귀한 것이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은 저들 가운데 구원 받는 백성들의 수가 점점 더 많아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가족과 일가 친척과 주변의 수 많은 영혼들 중에서 주님을 통해서 구원 받는 사람들의 수를 날마다 더해가는 교회, 그런 공동체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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