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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부활하신 예수의 말씀(요20:19-23) 2019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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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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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9-04-23 22:22 조회 10,738 댓글 0
 
               부활하신 예수의 말씀(요20:19-23)          2019. 4. 21 부활주일


본문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 저녁 시간에 있었던 장면이다. 요한 복음은 예수께서 부활하시던 새벽의 빈 무덤과 부활 하신 예수를 만난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의 대화 내용을 본문의 앞부분에 싣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과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말씀을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였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시간에 예수께서는 문을 닫아걸고 제자들끼리 숨어 있는 곳을 찾아 가셨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시체를 안장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을 찾아 갔다. 무덤 문을 막고 있던 큰 돌이 나뒹굴어져 있었다. 무덤 안쪽의 예수 시체를 눕혔던 곳에는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하나는 예수의 시체가 놓였던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아 있었다. 

빈 무덤 입구에서 울고 서 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향하여 두 천사가 한 결 같이 말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막달라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누가 주님의 시체를 옮겨다가 어디 다른 곳에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예수의 시체를 장사지낸 무덤을 찾아 갔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께서 부활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다. 예수는 그 현장의 막달라 마리아 뒤편에 서 계셨다. 막달라 마리아가 뒤를 돌이켜 예수를 보았으나 그가 예수이신 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 순간에 예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하고 물으셨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 하신 예수를 동산지기로 착각하였다. 그래서는 두 천사들에게 한 말과 똑 같은 말을 하였다. “당신이 예수의 시체를 다른 곳에 옮겼다면 어디에다 옮겼는지 내게 알려 주세요. 내가 예수의 시체를 모셔 가겠어요.”하고 말하였다. 

이때까지 막달라 마리아의 관심은 돌아가신 예수의 시체였다. 그러나 이미 그 새벽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시간이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셨다. 할렐루야. 기독교가 부활의 종교라는 것은 설명이나 이론이나 주장이 아니다. 역사적인 사실이다. 

2019년의 겨울이 다 지나가고 봄이 온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듯이 2000년 전의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오늘 새벽에 모여서 부활 주일 새벽 예배를 드린 이들이 있다. 그것이 이미 역사적인 사실이다. 예배 후에 호수 맞은편 폭포 앞에 모여서 “살아 계신 주”를 찬양한 것이 이미 역사적인 사실인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부활 주일에 한 자리에 모여서 부활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도 역사적으로 사실이다. 이처럼 예수의 부활은 2000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새벽에 빈 무덤을 찾아 갔던 막달라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도 역사적인 사실이다. 

우리는 누가 창안하고 고안하고 생각을 정리해서 만든 그 어떤 종교 창시자의 이론이나 원리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요셉의 아내 될 나사렛의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 주님께서 부활 하신 이후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부활하신 예수이신 것을 알게 된 막달라 마리아가 너무나 반가워서 예수를 붙잡으려 했다. 그 때 예수께서는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20:17)고 말씀하셨다. 

여기 예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소중한 말씀이 담겨 있다.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

이란 표현이 그것이다. 맞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며 곧 주를 믿는 모든 성도들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대속하셔서 양자, 양녀 삼아 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본질 상 누구나 다 진노의 자식들이었다. 그런 우리를 죄와 악에서 건져 내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아버지가 곧 나의 아버지이시며 예수의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런 소중한 교훈을 강조하신 부활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날 저녁에 두려움 가운데 문을 닫아걸고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 가셔서 하신 말씀이 본문이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너희에게 평강(平康)이 있을지어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두 번이나 반복하셨다. 손과 옆구리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여 주시면서 이 말씀을 하시자 제자들이 모두 다 기뻐하였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신 이 인사는 ‘샬롬’이다. 이는 예수께서 평소에 늘 하시던 인사법이다. 유대인들은 의례 늘 이렇게 인사하고는 하였다. 우리가 ‘안녕’ 혹은 ‘안녕하세요.’, ‘안녕하시죠’라고 인사하는 것과 비슷하다. 두려워서 문을 닫아걸고 한 군데 모여 있던 저들에게 갑자기 예수께서 나타나셨으니 무척 당황해 하였을 것이다. 유령인가. 환상인가 하고 또 다시 새로운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후에 처음 저들을 찾아 가서 만나 주신 예수의 첫 인사는 ‘샬롬’이었다. 두려움 가운데 있던 제자들을 안심시키며 위로하는 인사로서 ‘샬롬’ 이렇게 인사하신 것이다.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신 것은 예수의 부활을 실증하신 장면이다.

누가복음 24장의 같은 본문에 보면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어느 제자가 생선 한 토막을 드리자 그걸 받아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잡수셨다. 

생각하여 보라. 예수께서는 사흘 전 유월절 저녁을 잡수시다 말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후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밤새 기도하시다 붙잡혀 죽으셨다. 그리고 안식 후 첫 날 새벽 부활 하신 예수께서 그 날 저녁 시간에 제자들 보는 앞에서 무슨 먹을거리가 있느냐고 물으셨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받아 잡수신 것이다. 

예수께서 “여기 무슨 떡이 있느냐” 하고 물으시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받아 잡수신 것은 예수는 영으로 부활하셨거나 지금 제자들이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한다. 예수는 새로운 육으로 부활하셨고 고난을 당하신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 주시므로 예수 자신의 부활을 제자들 보는 앞에서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그 주님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라고 두 번 반복하여 인사하셨다. 이는 나중 인사는 앞으로 나의 부활 소식을 전파하는 중에 그 어떤 환난이나 시련이나 핍박이나 고난을 받게 될지라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라는 예언적인 평강을 말씀하신 것이다. 

늘 말씀드리지만 요즘 우리나라처럼 신앙생활하기 편한 때가 없었다. 한국 교회 134년 역사에 이런 때란 없었다. 구한말 선교 초기가 그러했고, 일제 36년이 그러했고, 6.25 전쟁 중에 신앙을 지키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요즘도 세계 처처에서는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고 죽기를 각오하고 믿음을 지켜 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프리카 이집트는 80%가 이슬람이다. 기독교인은 15%정도이다. 기독교인들은 이집트에서 사회적인 신분을 보장 받을 수 없는 불평등 취급을 받고 있다. 핍박이 심하다. 저들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외곽에서 쓰레기 마을을 형성하고 산다. 이집트 쓰레기의 80%를 저들의 손으로 처리한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상하수도조차 없었다. 학교 교육이 시작 된지도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굳굳하게 사회적, 신분적, 경제적 불평등과 억압을 견뎌 내면서 신앙을 지켜 오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1세기에 마가에 의해 복음이 전해졌다고 한다. 

콥틱교회라고 분류하는 기독교인들이 모여 쓰레기 분리수거로 생계를 유지한다. 그런 저들이 마카탐 바위산에 15,000명이 들어가는 마카탐동굴교회를 건설하고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린다. 손목에는 십자가 문신을 하고 다닌다. 쓰리기 분리수거로 생계를 유지하는 참담한 삶은 고달프고 열악하나 저들의 신앙생활에는 빼앗길 수 없는 ‘평강’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으로서 소망을 갖고 사는 이 땅에서의 증거가 무엇인가. 평강이다. 빼앗길 수 없는 평강이다. 이 평강, 이 평화는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주님께서 내 마음 속에 부어 주시는 것이다. 412장 찬송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의 가사 4절은 이렇다. 

“이 땅 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하나님은 평강의 근원이시다. 이 세상에 영원한 평강, 완전한 평강이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산성과 방패와 피할 바위와 피난처이신 것이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의 생명, 예수의 부활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자에게 영원한 평강, 영원한 평안, 영원한 평화가 임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이 땅의 인생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지는 메시야 즉 그리스도로 보냄을 받았고 그 사명을 완성하신 구세주이시다. 예수께서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말씀은 성도 각 사람을 향하신 부르심과 사명을 일깨우는 말씀이시다 .

성도 각 사람에게는 각양 은사가 있고 사명이 주어져 있다. 세례 문답, 입교 문답에 보면 “시간과 은사와 재물을 바쳐서 복음 전파에 충성하겠느냐”는 질문이 있다. 그 부르심과 사명을 깨달아 알고 그 사명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각 사람이 “내가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아 무슨 사명을 감당하며 충성되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분명하게 깨달아 아는 생을 살아가야만 한다. 

아파트 평수 늘리다가 죽고, 주식 늘리다가 죽고, 땅 늘리다가 죽고, 더 좋은 자동차, 더 비싼 자동차, 더 고급 자동차 몇 대 갈아 타다가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 인생이 아니다.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섬 한 귀퉁이에 있는 브루나이 왕국의 하사날 볼키아 (Hassanal Bolkiah, 1946-)왕의 개인 재산은 24조원이다. 1967년 술탄에 오른 이후 1984년에 영국에서 독립하자 정식 왕이 되었다. 52년째 왕이다. 7000대의 최고급 승용차를 사들여 어린이 장난감 자동차 모으듯 모아 들인다. 300억짜리 전용 비행기는 황금으로 치장되어 있다. 미국 대통령 전용기 보다 더 화려하다. 인구 43만 명의 브루나이 왕국은 원유 생산 부국이다. 2014년에는 직접 비행기를 조종하고 한국에 다녀 간 적도 있다. 그렇게 호화판 생활을 누려도 이 세상에서 나그네 인생길에 끝나고 만다면 끝일뿐이다. 복음을 모르고 죄 사함을 모르고 영생을 모르고 거듭 남을 모르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지 못하며 모든 것이 헛된 것이다. 

복음을 아는 것이 축복이다. 부활 복음을 깨닫고 사는 것이 영광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은혜요 감격이요 영광이요 복 중의 복이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따라 살고 사명을 따라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점자를 개발한 이들이 있다. 자랑스럽고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글점자 창안자는 송암(松庵) 박두현(朴斗鉉, 1888-1963)이다. 본명은 박두현인데 박두성(朴斗星)으로 더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에 앞을 못 보는 인구가 25만 명이 넘는다. 저들에게 있어서 송암 박두현의 한글 점자는 얼마나 크나큰 축복이며 혜택인지 모른다. 

1888년인 고종 25년에 강화군 부속 섬인 교동면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배우다가 이동휘 선생이 세운 보창학교에서 신학문을 접했다. 이동휘 선생의 추천으로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한성사범학교에 다녔다. 효제 초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1913년 제생원 맹아부(濟生院盲啞部, 서울맹아학교 전신)설립에 관여하면서 교사로 부임하였고 맹인교육에 전념하였다. 6년간의 연구 끝에 일제의 핍박을 이겨내고 1926년에 한글 점자를 완성하여 ‘훈맹정음’이라고 이름 붙여서 반포하였다. 인천의 감리교 학교인 영화학교 교장 시절에는 내리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서울 정동감리교회를 오가며 감리교인으로 신앙생활을 계속한 저는 맹인들을 위해서 1931년에 한글 마태복음 원판 출간에 앞장섰다. 이후 해방 4년 전인 1941년에 신약성서 점자원판을 완성하였다. 1935년에는 한글 점자투표(點字投票)를 인정받았고 1936년 말에는 점자찬송가도 완성했다. 해방 후에는 제헌국회를 통해서 맹인들의 점자 투표권을 승인 받았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지나오며 점자로 성경을 출판하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로 밤에 아연판과 흰 종이에 점을 찍는 고단한 작업을 10여 년 동안 밤을 새워가며 새벽 4-5시까지 무리하게 일하다가 자신의 시력도 형편없이 약해지고 말았다. 

이후 6.25전쟁을 겪는 동안에 신약 점자 아연판이 모두 불타서 없어지고 말았다. 그는 또다시 제작에 몰두하여 휴전 된 지 4년 후인 1957년에 신구약성경의 점자번역(點字飜譯)을 완성했다. 

때로는 재정의 곤란을 겪어 사재를 털어 가면서까지 점자서적 출판에 힘을 쏟았다. 성경을 비롯하여 천자문, 명심보감, 이솝 우화, 속담집, 3.1운동사 등 76종의 맹인용 교육 자료를 점자 번역하여 출간하는 대 역사를 이루었다. 

그는 시각장애교육이 교육이나 자선사업에 그쳐서는 안 되며 직업교육과 더불어 시각장애인계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양성하고 민족정신을 싹 틔워야 한다는 분명한 신념이 있었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직간접적으로 시각장애자 지도자를 양성하여 교육계ㆍ종교계ㆍ의약계ㆍ예술계 등의 전문 인력을 비롯한 수많은 인재들을 나라 안과 밖에 배출하게 하였다.  그는 진정 ‘맹인들의 세종대왕’이라는 칭호를 받기에 손색이 없는 부르심과 사명의 길을 끝까지 다 달려간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오늘 날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가. 나를 향하여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자각하고 부르심에 합당하고 사명감에 불타는 헌신적인 부활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아멘


성령을 받으라.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 쉰 장면은 마치도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는 창세기 2장 7절의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또한 하나님이 에스겔로 하여금 환상을 보게 하셨고 마른 뼈에게 명하여 군대를 만드시는 장면을 상상하게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아는 대로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사도행전 2장인데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 날 저녁에 만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맞다. 이날 하신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은 장차 임할 성령을 보증으로 하신 말씀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비겁하게 도망가서 숨던 제자들이 어떻게 순교자의 길을 걷는 복음 전파자들이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성령의 힘이다. 성령 받았기 때문이다. 성령 받아야 한다. “성령 받으라 성령 받으라” 찬양만 부르지 말고 성령 받아야 한다. 이것이 대답이다. 성령 받지 못하고는 하나님의 일에 단 한발자국도 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하셨다. 그 약속을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한 곳에 모여 기도하던 120여 성도들이 한 결 같이 성령을 받았다. 성령이 임한 것이다. 

성령 받고 예수의 부활을 믿고 담대하게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사순절을 뒤로 하고 부활주일을 맞았다. 간절히 소원한다. 모든 성도들이 일일이 성령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살기등등하던 핍박자 사울도 다메섹을 향해 가던 길에서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눈이 삼일 동안 가려져서 보지 못하고 금식하며 지내다가 아나니아로부터 안수 기도를 받고 다시 보게 되고 성령 충만한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 성령 받고 나니까 핍박자 사울이 일순간에 변해서 복음 전도자 사도 바울이 되었다. 변화는 순간이다. 은혜가 임해야 한다.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대답이다. 설명이 필요 없다.  성령 받고 나면 인생이 변한다. 사람이 달라진다. 사람이 바뀐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의 약속이 믿어지게 된다. 온갖 의심이 사라지고 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믿어진다.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믿고 따르던 그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모세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 이사야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신 하나님이 오늘 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 성령 충만한 부활 복음 전도자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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