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자의 자랑(갈6:11-18) 2019. 4. 14 종려주일
요한 일서 2장 16절에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부터 온 것이라 ” 는 말씀이 있다. ‘이생의 자랑’이란 것이 무엇인가. 세상의 것들은 대개가 다 ‘이생의 자랑’이다. 이러한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을 지나치게 사랑하다 보면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이생의 자랑에 묶여 살아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고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세상 것들을 자랑하다보면 결국 그것이 올무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옛날 지구상에는 `메가케로스'(megaceros)라는 거대한 뿔을 가진 사슴이 있었다. 이 사슴은 커다란 뿔을 최고의 자랑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 사슴은 얼마 자나지 않아 멸종되고 말았다. 메가케로스는 웅장하고 화려한 뿔로 인해 종족을 퍼뜨리지 못하고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자랑과 자부심으로 여겼던 커다란 뿔이 비극의 원인이 된 것이다.
아버지 다윗 왕의 왕권을 찬탈했던 셋째 아들 압살롬이 그런 인물이었다. 외모가 뛰어났다.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더라”(삼하14:25)고 했다.
압살롬의 외모는 온 나라의 백성들이 칭찬할 정도로 뛰어났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면 세상 사람들이 주목할 정도였다. 해마다 한번 씩 머리카락을 자르면 그 무게가 이백 세겔이 될 정도였다. 잘라 낸 머리카락의 무게가 2.3kg이 넘을 정도였다.
그렇게 외모가 화려하고 분별력과 판단력이 뛰어났던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 왕을 반역한 것이다. 왕궁을 비우고 피신했던 왕 다윗의 군대가 세월이 흐르자 그를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에브라임 수풀에서 죽은 자가 이미 2만 명을 넘어 섰다. 사무엘 상 18장에 보면 노새를 타고 피신하던 압살롬의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큰 상수리나무의 번성한 가지에 걸렸다. 압살롬을 태웠던 노새는 도망치고 압살롬만 상수리나무 가지에 머리카락이 뒤엉켜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다. 이 사실을 다윗의 장군인 요압 장군에게 부하가 전하였다. 요압 장군은 작은 창 셋을 손에 들고 현장으로 달려가서 압살롬의 심장을 찔렀다. 그 뒤를 따르던 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 죽였다. 압살롬은 평소에 자랑스러워하던 그 풍성한 머리카락이 상수리 나무에 걸려서 죽임 당하고 말았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 잘난 맛에 산다. 그래서 자랑이 많다. 별의 별 것을 다 자랑하며 산다. 집안 자랑, 학벌 자랑, 학교 자랑, 재산 자랑, 주식 많이 가진 것 자랑, 자식 자랑, 돈 자랑, 넓은 아파트 자랑, 좋은 차, 외제 차 자랑, 보석 자랑, 키 자랑, 피부 자랑, 쌍까풀 자랑, 큰 눈 자랑, 외모 자랑, 건강 자랑, 인기 자랑 등등 자랑이 끝이 없다. 여러분은 어떤가. 뭘 자랑하며 살아가나. 아니라고 말은 하면서 여전히 그 뭔가를 자랑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
할례파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할례 받아야 할 것을 주장하고 할례를 자랑하였다. 13절 끝에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는 말씀이 그런 내용이다. 그동안 갈라디아서를 대해 온대로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를 병들게 하고 성도들을 복음의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율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할례를 반드시 받아야 구원 받게 된다는 이들로 인한 훼방이었다. 그 여파와 후유증은 심각했고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사도 바울이 격앙된 어조로 이 편지를 써서 다른 복음이란 없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만 구원 받고 의로워지는 것이다.”라고 강조한 편지가 바로 갈라디아서이다.
육체의 모양을 자랑하고 외모를 자랑하고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하며 사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복음 신앙을 어지럽히던 때에 바울을 무엇을 자랑한다고 말하고 있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사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성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 체험하기 이전까지에는 자랑거리가 많던 바리새파 지도자였다. 고린도후서 11장 18절에 보면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고 하였다. 고린도후서 11장 22절 이하에 보면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며 살아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정신을 모르며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의 강한 것을 자랑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노라고 하였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30)
여러분은 어떤가. 무얼 자랑하며 살아가고 있나.
그러나 사도 바울의 자랑은 달랐다. 빌립보서 3장 3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한다.”고 하였다. 하도 주변에 육체적인 것, 세상적인 것을 자랑하니까 자기도 잠시 자랑해 보겠다고 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5-6)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고백하는 신앙의 고백이 이것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
사도 바울은 살아가면 갈수록 점점 예수 그리스도 만 자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달아 알게 된 것만 자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하나님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었다.
본문 14절을 보라. 거기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라는 말씀의 세상이란 ‘아름답고 질서와 조화가 있는 원 창조의 세계’가 아니라 정욕과 탐심으로 타락한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처럼 자기 자신도 날마다 매 순간마다 자신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아가노라”는 신앙의 고백인 것이다.
지난 2013년 8월 그 당시의 첫 예배자들은 이곳 새 예배당의 첫 주일 예배 때 나무 십자가에 나 자신을 못 박는 예식을 행하였다. 그 소나무 금강송 십자가가 지금도 예배당에 오르는 왼편 계단에 보관 되어 있다. 교회 설립 제 10주년의 해에 맞는 종려 주일인 오늘 사실은 그 소나무 십자가를 본당에 메어다 놓고 우리 다 같이 다시 한 번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못 박는 예식을 행하려고 하였었다. 오늘 그렇게 하지는 않지만 제발 원하는 것은 우리 각 사람이 “내 안에 나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 ”갈라디아서 2장 20절 신앙으로 든든하게 세워져서 십자가만 자랑하며 살아가는 십자가 정병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
우린 그동안 갈라디아서를 구구절절이 묵상하면서 할례냐 무할례냐에 대한 복음적인 분별력을 갖게 하는 사도 바울의 십자가 복음의 변증을 낱낱이 대하여 왔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다른 복음이란 없다. 할례를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가 십자가 복음을 깨달아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 사함 받고 거듭나고 구원 받는 것, 날마다 성령의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을 받는 것은 복음의 진리 안에서 새 사람으로 지으심을 받은 증거이다.
우리나라는 30-40년 쯤 지나면 아파트를 다 헐어 버리고 재 건축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미국에서 살 때 보면 100년씩 된 아파트나 건물들을 잘 리모델링해서 여전히 깨끗한 실내 환경을 유지하면서 사용하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예배당 건물도 100년 혹은 150년 그 이상 된 예배당을 얼마나 고치고 칠하고 쓸고 닦아서 벽면이든 창틀이든 마루바닥이든 빤짝 빤짝 윤기가 나고 기름기기 흐르도록 잘 관리하고 보존하나 모른다.
물론 건물의 겉은 벽돌의 색이 퇴색하고 오랜 세월이 지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그 건물의 계단이나 실내 구석구석을 얼마나 잘 관리하나 모른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였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4:16)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도 하였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5:1)
또한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도 하였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날마다 순간마다 예수 안에서 새로워지는 것이다. 옛 자아는 죽고 새 자아로 살아나는 것이다. 날마다 순간마다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어느 날 밤중에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유대인의 지도자인데 예수를 찾아 왔다. 예수를 찾아 온 그는 예수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하고 문안하였다.
다 옳은 말이 아닌가. 니고데모가 예수께 대하여 한 말이 모두 사실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런 말씀으로 첫 대화를 시작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나중에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도 하셨다.
육의 상태에서 그냥 이 교회도 조금 넘석, 저 교회도 조금 넘석 귀 동냥하다 말고 이 선교 단체에도 조금 넘석 저 선교 단체에도 조금 넘석, 이 기도원에도 조금 넘석 저 기도원에도 조금 넘석 이런 식으로 살아서는 신앙생활의 대답이 없다.
오늘이 2019년 종려 주일이다. 예수께서 평화의 왕으로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어떤가. 오늘 자신에게 진지하게 솔직하게 질문해 보라. “나는 과연 거듭 난 믿음의 사람인가.” ,“나는 과연 물과 성령으로 거듭 났는가.”, “나는 과연 육으로 난 상태의 삶을 살아가면서 신앙생활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과연 나는 영으로 난 영의 사람인가.” 심각하게 질문하고 진지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모태에서부터 교회를 들며 났고 유아기 때에 세례를 받았다. 교회를 떠나 본 적이 없다. 목회하면서 35번의 종려 주일, 부활 주일을 맞았다. 나라 안과 밖에서 수많은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 보았다.
사역이 부흥해야 하고 교회가 부흥해야 하는 부담과 짐이 없지 않고 크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더 근본적인 질문은 항상 이것이다. “너 아무개야 너는 과연 거듭났느냐, 너는 과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맞냐, 네 지금 상태가 육에서 난 육의 상태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니냐, 네가 과연 영으로 난 영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느냐”는 질문 앞에 주님께 진솔한 고백을 드리며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시급하고 중차대한 신앙의 과제이다. 이것은 비록 나 자신만의 영적 고민은 아닐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의 고민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마태복음 7장 21절 이하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새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이런 내용이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마7:21-23)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께서 그 주간 목요일 밤에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하셨다. 잡수시다 말고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나가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허리에 두른 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12제자 모두의 발을 씻으셨다.
그리고 그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도로 기도하셨다. 그리고 가롯 유다의 배반을 받고 붙잡혀 끌려 가셨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을 거쳐서 본디오 빌라도 앞에 끌려 나가 사형 언도를 받으셨다. 제자 베드로는 여자 아이 앞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심지어는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가 버렸다. 그 상황을 보면 베드로는 영의 사람으로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하지 못했다. 그 날 그 자리에서 베드로의 모습은 철저히 육의 사람이었다. 비겁하기 그지 없고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명칭이 삼년 동안 예수의 부름을 받은 제자가 아니었나. 그런데 예수를 버릴 때 보니까 헌신짝 버리듯 하였다.
그런 형편없던 베드로인데 어떻게 사도행전에서 대하는 위대한 십자가 복음과 부활 신앙을 전파하는 성령 충만한 사도가 되었나. 육의 사람이던 베드로가 영의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성령 받은 것이다. 맞다. 성령 받아야 한다. 은혜 받아야 한다. 새로워 져야 한다. 본문 15절에 바울의 말대로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다.”
주일 예배 드리고 월화수목금토 세상에 나가 살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날마다 ‘돈돈돈... 성공성공... 출세출세...’하며 살지만 그 결과는 바닷물을 퍼 마시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해서는 갈증을 해결 할 길이 없다. 영혼이 먼저 잘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범사가 잘 되는 것이 순서이다. 그리고 영혼이 먼저 잘 된 상태에서 강건해야 타락하지 않고 세상에서 범죄하지 않고 빛의 자녀답게 살아 갈 수 있는 믿음을 얻게 되는 법이다. 그렇지 않나. 영혼이 잘되지 못한 상태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돈 엄청나게 벌고 명예 인기 권력 누리고 떵떵거리기 시작하면서 영원히 잘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린 주인공이 그 누가 있나 찾아보라. 열이면 열 다 잘못되고 만다. 영혼이 잘되지 않은 상태에서 잘되는 것은 당장은 몰라도 잘 되는 것이 잘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스라엘 초대 임금 사울을 보라. 그 외모가 이스라엘 남자들의 평균 키보다 얼굴 하나 높이만큼 더 크고 출중한 외모였다. 그런 잘 난 그를 하나님이 선택하여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삼으셨다. 그런데 그 사울 왕이 나중에 얼마나 교만해지고 얼마나 하나님과 선지자 사무엘을 실망시켰나. 오늘 날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마음에도 들어야 하지만 목회자가 보기에, 성도들이 서로 보기에도 괜찮아야 한다. 교만하면 하나님이 버리신다. 겸손해야 복 주시는 법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순간마다‘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다.’할렐루야
예수의 흔적을 지닌 것.
갈라디에 지역에 복음이 들어가고 성도가 탄생하고 교회가 생겨난 것은 사도 바울의 제 1차 전도 여행의 열매였다.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느라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사도행전 13장 50절에 보면 그 지역의 유대인들의 경건한 귀부인들과 시내의 유력자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기도 하였다. 유대인들이 무리를 충동해서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 바깥으로 끌어다가 내쳐 버린 적도 있었다. 사도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바울을 존경하는 제자들이 둘러서서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죽은 줄 알았던 바울이 살아 일어났다. 돌로 쳤으니 바울은 피 범벅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다시 살아 일어난 바울은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 지역을 골고루 다니며 부활 복음을 전파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 곳에서 만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면서“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하였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오히려 그 곳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 하였다. 각 교회에 장로들을 택하여 세웠다. 저들과 더불어 금식 기도하면서 저들을 주님께 위탁하였다. 비시디아, 밤빌리아, 버가, 앗달리아 지역을 골고루 거쳐서 배를 타고 안디옥에 도착하였다. 이 모든 지명은 오늘 날의 터어키 지역이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그 동안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일들을 간증하고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설명해 주었다.
본문 17절에서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는 고백을 하고 권면하게 된 배경이 이것이다. 이고니온에서 돌에 맞아 죽은 자처럼 되어 시외로 끌어내 쳐 버림을 받았던 바울이다. 바울은 몸 이곳 저곳에 예수의 흔적을 갖고 살았다. 예수의 흔적이란 예수의 부활 복음을 전파하다가 당한 고난과 핍박의 흔적을 말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후서 11장에서 말하지 않았나.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4-27)
우리 주님 예수께서 나귀 타고 예루살렘 입성 하신 후에 죽인 당하신 십자가의 처형을 생각하여 보라. 로마의 병정들은 예수의 옷을 벗겨 제비 뽑았다. 예수는 발가 벗겨 지는 부끄러움을 당하셨다. 온갖 조롱을 다 당하셨다. 얼굴에 침을 뱉었다. 주먹으로 쳤다. 따귀를 때렸다. 이마에 가시관을 씌웠다. 짐승 끌고 다니듯 끌고 다녔다. 잔등에 맞으신 채찍으로 피 범벅이 되었다. 십자가를 메고 가며 기진맥진 쓰러지고 넘어졌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나무 십자가를 대신 메어다 골고다 언덕에까지 전해주었다.
양손과 양발에 못 박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오전 9시 경에 십자가에 갈리셨다. 오후 3시경에 운명하셨다. 그리고 몇 시간 후에 시작될 안식일 이전에 장사되었다. 그 주님이 죽임당하시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장사 지낸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
예수께서 당하신 수모와 고난과 죽으심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으랴. 그런데 바울은 말한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의 사도였다. 수 없이 죽음의 위기를 겪었고 나중에는 목 베임을 당하는 순교자의 길을 갔다.
오늘 날 나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왜 내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인가. 예수를 믿으며 살아가는 증거는 무엇인가. 사순절, 종려주일, 고난 주간, 부활절 이런 절기로 교훈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말씀과 그 모든 것들이 과연 나에게 있어서는 믿음의 그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바울이 고백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에게 있어서는 어떤 고백인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 생활을 요구하는 믿음인가. 시작되는 고난 주간 한 주간 동안 주님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의 하루하루를 성경에서 묵상하며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금식하며 주를 따르는 순간순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아멘